스님은 사춘기 - 명진 스님의 수행이야기
명진 스님 지음 / 이솔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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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닌 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조차 무서운 세상. 민주주의의 시계가 계속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이 시절에, 그나마 명진 스님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위안인가. 불의를 행하는 위정자에겐 거침없이 죽비를 내리치고, 하루아침에 공권력에 의해 삶의 터전과 핏줄을 잃고, 또, 감옥 보내고 우는 억울한 사람들을 찾아서는 스님도 그들과 함께 울었다.

눈물 닦는 사진과 동영상을 유독 많이 찍힌 스님을 보노라면 혹자는 속세를 떠난 구도자가 왜 저리 눈물이 많은가 오해 할 수도 있겠으나 알고 보면 스님의 눈물은 다 지극한 사랑이자 위로임에랴. 이 눈물 많은 스님이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한권의 책을 세상에 내 놓았다.

<스님은 사춘기>(이솔). 덕분에 목적 없이 속절없이 흘러가는 삶속에서 잠시 쉼표를 찍고 스님이 던지는 삶의 의미, 존재에 대한 화두에 물음표하나 던지며 쉬어 갈수 있게 되었다. 스님은 어이하여 출가를 하였던가.

모든 스님, 신부, 수녀님들에겐 식상한 질문이겠으나 중생은 그것이 또 가장 궁금한 질문임에랴. 명진 스님은 6살 어린나이에 ‘죽음’이라는 화두를 만났다,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를 통해.

<누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죽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죽음은 내가 삶을 투철하게 성찰하도록 했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너무도 이른 나이에 죽음과 맞닥뜨렸다. 내가 처음 마주친 죽음의 대상은 불행하게도 어머니였다.>-본문 11쪽

뿐인가. 스님에게 죽음은 어머니만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친척집을 전전하며 서로 의지했던 동생이 해군에 입대한지 불과 몇 달 만에 군함 전복사고로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연이어 쉰이라는 이른 나이에 아버지마저 병고로 세상을 떠났다. 스물 언저리 푸른 청춘에 피붙이 모두 떠나고 세상엔 스님 혼자만 달랑 남게 되었다.

‘죽음’이라는 화두를, 예기치 않은 시기라면 하나만 던져도 암흑이거늘 스님은 젊은 날에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세 개 씩이나 받았다. 그러니까 익히 보이던 스님의 눈물은 수행의 미진함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 중생의 아픔을 가슴으로 알기에 흐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구나. 흐르되 걸림은 없는. 마음이란 무엇인가. 마음은 허공이다? 스님의 변을 들어보자.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은 본래 허공과 같이 텅 비어서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다. 묘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 한 물건을 마음이라고 하지만 마음이라는 게 어디 실체가 있는가. 내 마음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슬픔이나 기쁨, 욕심이나 자비심 같은 모든 감정은 허공같이 텅 비어 있는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작용이다....... 

냉철하게 자기 자신을 살펴서 내 마음이 허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내 마음이 허공같이 텅 비어 공적한 것임을 알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용들이 하나의 작용일 뿐 실체가 없는 것임을 투철하게 깨달으면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대 자유를 얻게 된다. 내 마음이 바로 허공인 그 자리는 능히 모든 것이 자유자재한 자리이다.>-본문 256쪽

노스님들은 명진 행자가 무서워~

스님의 걸음하면 법정스님의 빠르고 거침없는 걸음걸이가 생각나는데 명진 스님은 의외였다. 지난해 봉은사에서 뵌 스님의 걸음걸이는 평소 말씀이 거침없는 것에 비해 사뿐사뿐 한발 한발 새색시같이 내 딛으셨다. 그것이 참 인상적이어서 봉은사 신도인 친구에게 말했더니 절은 더 하다고 하였다.

“절은 또 얼마나 정성스럽게 하시는 줄 아냐? 천천히 한배, 두 배... 시종여일하게 하신단다.”
“그렇게 해서 언제 하루에 천배를 다하신다니?”
“한 꺼 번이 아닌 아침 점심 저녁 중간 중간 나누어서 하시는 거지.”

아무튼 스님의 걸음걸이와 절하는 모습으로 유추해 볼 때는 스님의 행자생활도 지극히 새색시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했는데 웬걸. 스님은 행자세계의 문제아였다.(웃음) 스님의 파란만장한 수행담은 읽는 내내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

다른 스님들은 스스로 점잖아서도 못하고 무서워서도 못하는 질문을 명진 스님은 노스님들에게 거침없이 해댔다. 해인사 백련암 행자시절엔 일본어 배우라는 성철 스님의 말에 교학보다는 참선에 관심이 많던 스님은 일본어를 배워야 할 이유를 납득 못하였기에, 그냥 말도 없이 내뺐다.

‘남쪽에는 성철, 북쪽에는 전강’하던 그 시절에 성철 스님 눈에 단번에 들어 행자자리 꿰찼으면 일본어 아니라 더 한 것도 배우려 노력했으련만 스님은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그 후로도 쭉 운수납자로 떠돌았다. 물론 가는 곳 마다 사건(?)도 일으켰다.

안동 봉정사에서의 일화 한 토막. 간염과 영양실조에 걸린 지인스님에게 소머리를 삶아 먹이려다 주지스님과 신도회장이 항의하자 스님 왈,

“그럼 스님 머리를 삶을 까요?”

주지스님과 신도회장이 아연실색했음은 물론이고 말리지도 못하였다. 결과는, 지인스님이 기력을 회복했다고.

그런가 하면 용맹정진기간에 졸음을 깨우기 위해 당번이 될 경우 보통 노스님이 졸면 모른척하는 게 관례하면 스님은 반대로 하였다. 젊은 스님이 졸면 모른 척 눈감아 주고 대신 노스님이 졸면 죽비가 부러지게 내리 쳤단다.

행자시절하면 보통 행자의 설움이 말도 못하게 큰 것으로 전해지는데 명진 스님의 경우는 행자인 명진 스님 보다 은사스님들이 더 힘들어 보였다.(^^) 아무튼 이 한권의 책에는 어느새 환갑이 된 지난 60년 스님의 인생이 시시콜콜 다 있다. 군부독재에 맞서고 불교개혁에 앞장섰던 것에서부터 스님을 짝사랑한 어느 여인의 이야기까지.

타협하지 않고 언제든 자유인으로 당당히 돌아서는 스님의 당당함은 하루아침에 얻어진 것이 아니라 행자시절부터 쭈욱 견지하고 있던 초지일관의 한 단면이었다. 후후~ 우좌간 스님은 그 순수한 야성을 잃지 마시길.

<불교는 무조건적인 ‘믿음’이 아니라 끝없는 ‘물음’을 통해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종교이다. 냉철한 이성으로 자신을 살펴서 자신의 내면에 있는 탐욕과 어리석음이 허망한 것임을 깨달아 무한한 자유와 지혜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본문 262쪽

정말 그런 것 같다. 불교는 끝없는 물음을 통해 스스로를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종교라기보다 ‘사상’이다. ‘자유’에 이르게 하는 사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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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시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3
이디스 워튼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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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영화에 대한 기억이 좋아서 읽게 되었는데  

영화는 책을 충실하게 따랐고나. 

(책의, 100여년 전 풍경에 대한 세세한 묘사를 탁월하게 재현해 낸 

영화의 미술, 의상 담당자들의 노고에 다시금 경의를~~~ )

 

영화가 있었기에 책을 읽는 내내 영상이 떠올라 읽고 봄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그런 충만을 느꼈다. 

 

특히,  

영화에서는 마지막 한 장면일 뿐이었지만(영화의 마지막도 물론 뇌리에 오래 남는...) 

책의 마지막 34장은 아처 뉴랜드에 대한 심리묘사가 탁월하고도 탁월하였다.

.... 그 저린 마음의 허허로움은 내 모세혈관에도 전이되어 꺼이꺼이...... 

10여장이 넘도록 세세히, 담담히 아처의 마음을 설명해 주어서  

그나마 이 책과 이별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그가 놓친것이 있다면 인생의 꽃이었다.  

그러나 이제와서 생각하면 너무나 얻기 어렵고 가망없는 것이어서,  

복권에서 1등을 뽑지 못한 것처럼 놓쳤다고 절망스럽지도 않았다.  

....... 

그녀는 그가 놓친 것 전부를 한데 뭉뚱그린 환상이 되었다. 희미하고 미약했으나,  

그 환상 때문에 다른 여자를 마음에 품어 본 적이 없었다. ... 

결혼에서의 일탈은 추악한 욕정과의 투쟁이 될 뿐이었다.  

그는 주변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과거를 자랑스러이 여기는 한편으로 슬퍼했다.  

어쨌거나 흘러간 옛날이 좋았다." 

 

영화에서 '메이'가 위노나 인것이 별로 였는데 책을 보니 저자와 닮아서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키 차이가 너무 나서  영화 찍는 내내 힘들었다던데 

보는 나도 힘들었음^^ 올렌스 부인도 미쉘 파이퍼가 아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물론  

연기는 잘 하였음) 

원작이 워낙 좋으니 최근의 <제인 에어>처럼  내 평생에 이 책이 한번더  영화로 되는것을

보고싶다. ^^  생각만 해도 체온 급상승~ 

 

이디스 워튼, 저자의 이름을 나의 해마에 저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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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가을 사진이다. 초록이 형형해서 봄이라해도 속아넘어 가지 않을까 싶은데....ㅎㅎ
세상에 수많은 좋은 집들이 있지만 난 저 토굴이 가장 멋있었다.
수행자가 살기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느낌이 든다. 함께한 지인과 저 토굴을 한참 올려다 보면서
한동에 한분씩 사시는 걸까, 아니면 두분씩? 하며 궁금해 했다.





(성모상 느낌의  부처님 상이 생각보다 작았다. 꽃공양은 공양후 되 가져가도 된다고 함이 인상적이었다.)

스님이 적멸하시고 벌써 1년이 되었고나. 스님 돌아간 그 날짜에 이웃나라는 지진해일로
초토화 되고 ..... 세상은 정말이지 자꾸만 뭔가 큰 것들이 일어날듯한 기세이다.
며칠전 현기영의 <누란>을 정독해야 할 일이 있어 찬찬히 읽다가 '원자력'얘기에 뜨끔했다.

예전 읽었을때는 기억도 나지 않는 그냥 스치는 문장들 중의 한부분일  뿐이었는데
작금의 시절이 이렇고 보니 소설가의 혜안이 묵시록처럼, 계시록처럼 다가왔다.
정말이지 이런식으로 천재는 천재대로  인재는 인재대로 끊임없이 사고를 친다면
인류의 인구 3분의 1이 줄어드는 날이 올수도 있을 것이다.

그쯤돼야 인류는 겨우 정신을 차릴수도....
지진해일이야 참혹해도 지나고 나면 그걸로 끝이고 힘을 합쳐 재건을 하면 되는 거지만.
방사능이 왠말이냐.
피폭의 아픔을 가진 나라가 자의에 의해 또 피폭의 위기를 맞았으니
그 심정이 어떨까.

일본은 그래도 우리는 안전합네 어쩌네, 하는 전문가연하는 사람들이
떠드는 것을 보면 숨이 막힌다. '원전 수거물 센터' 어쩌고 하던 핵쓰레기장 광고도
새삼 끔찍하다.

원시로 돌아갈수야 없지만 일본의 경우를 타산지석으로하여 우리도 독일처럼 원자력 없는
세상을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방사능에 화들짝 놀라, 그러면 이런 세상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까.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생각하노라니 그래도 인간성을 회복하고 이 위기를 극복하는 데는 '자연'과 '예술'이
최고의 위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붓다의 말씀도.

본래무일물. 생성 소멸, 생성 소멸.... 그 무한 반복이여.

다만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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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렐리의 만돌린
루이스 드 베르니에 지음, 임경아 옮김 / 루비박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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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무리 좋은 영화라도 서너번 보기가 쉽지 않은데  <코렐리의 만돌린>은  

그렇지 않았다.

아마 케팔로니아 섬의 자연이 한목했던것 같다. 

소설은 어떨까.......무척 궁금했는데 소설 역시 따뜻하다.  유머가 있고 잔잔하다. 

그리고 접경지역을 사는 사람들의 신산이, 

흔들리는 땅(지진)위에서도 뿌리내리고 살아야 하는 이들의 삶의 역사가 눈물겹다.  

 

하여 의사선생이 케팔로니아의 역사를 쓰려한다는 소설의 설정이 참으로 지당하게 

다가온다. 이 땅의 역사를 어떻게 쓸것인가. 의사는 종이를 구기고 또 구긴다. 

그런데 그 구김이 절망이 아니라  넘 웃긴다.ㅋㅋ 그속에는 낭만과 여유,그리고 그럴수 없이 써내겠다는 '돌팔의'의 야심이 있다.^^ 의사도 '짜가'로 하는데 역사가는 몬할소냐. 

짜가를 면하고 싶어도 그시대에 어디서 뭘 배우나. 독학한것만으로도 그동네 제일가는  

선생일세~~ 

 

아무튼, 영화와 소설, 거의 같은 분위기이다. 그러나 소설을 읽고 영화를 다시보니 

한장면 한장면이 다 새롭다.  

펠라기아와 안토니오의 해후가 조금 다를뿐. ㅋㅋ  

영화가 펠라기아의 아름다움을 그대로한 채 끝났다면 소설은 좀 코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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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식목일을 맞아 소나무 묘목이나 하나 심어 볼까하고 꽃집에 갔었다. 텔레비전에서 어린 소나무 묘목을 심는 것을 보았기에 저렇게 어린 소나무 묘목도 심는구나 하며 신기해 했었다. 그런데 인근 꽃집에는 소나무 묘목이 없었다. 하여 오랜만에 간 김에 이 꽃, 저 나무 눈요기나 하자며 넓은 화원을 천천히 돌며 감상했다.

그런데 요즘 시절이 하 수상하고 내가 마신 미량의 방사성 세슘인가 요오드인가가 내 마음에 변화(?)를 준건지 뜬금없이 다육식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들어 온 것도 아니고 ‘확’ 들어왔다. 아니, 이 아름다운 것이 왜 이제야 보이는 거지?

그전에는 다육식물을 보긴 해도 전혀 땡기지 않았다. ‘아니 이것들은 꽃도 아니고 잎도 아니고, 색깔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죄다 희뿌여스름하니 니 멋도 내 멋도 없건마는 종류는 참 많구나.’하며 지나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파리 울울하고 풋풋한, 광합성을 많이 하는 키 큰 화초들에 빠져있던 나로서는 그런 바닥을 기는 기럭지와 무색무취한 듯 보이는 다육이 눈에 들 리 없었다. 작아도 여린 야생화들은 예쁘기나 하지. 그리고 꽃이라면 볕만 좋다면 겨울 내내 피는 제라늄처럼 강인한 것이 좋았다.

그런데 그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던 다육식물이 이봄에 꽂힌 것이다. 자그맣게 생긴 것들이 이름은 다들 얼마나 거창하고 기똥찬지 솔직히 처음엔 다육자체보다 이름 때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저 조그만 군상들이 이름은 다들 어마어마하네 그랴. 청성미인은 뭐고, 까라솔은 뭐고 홍옥은 또 뭐람? 프리티, 춘망, 녹비단, 클라라, 라즈베리아이스, 롱구 아폴리아, 미니벨, 꽃땟목, 금황성, 청솔, 흑괴리, 부영, 정야...... 다육의 이름은 끝도 없었다.

생긴 것은 비슷비슷한데 다 나름의 이름을 갖고 있어서 그 이름 다 기억하고 불러주자면 다육식물에 관한 책을 하나 사야 해결되지 싶었다. 아무튼 저마다 작고 앙증맞음에 신통하다 싶었는데 출신지도 이역만리라니 매력 한 자락 더 얹어졌다. 나는 꽃집 사장님께 이들의 원산지를 물었다.

“중국, 시베리아, 러시아 등 주로 추운지방이나 건조한 사막에서 자라는 것들입니다.”

그렇구나. 추위를 견디기 위해 몸집은 자그마하게 잎은 두껍게 하였구나. 그 추운 북쪽지방에서 곰도, 호랑이도, 원시림도 아닌 식물로 살아내자면 정말이지 얼마나 많은 살을 에는 아픔을 견뎠을까. 혹은 얼마나 목이 말랐으면 물 없이도 오래 견딜 수 있게 자기 수양을 했을까.^^  



얼마 전 영화 <웨이 백>을 보니 시베리아 추위 말도 마소. 눈은 무릎까지 푹푹 쌓이는데 눈바람은 또 어찌 그리 불던지. 죄인 아닌 죄인들을 시베리아에 부려놓고 교도관은 일성을 내질렀다.

“여기는 따로 지키는 사람이 없다. 시베리아가 너희를 감시할거다. 시베리아 자체가 감옥이다. 탈출 생각 있거든 어디 함 해 봐라.”

내가 산 다육들은 다행히 이름에 한자 냄새가 나는 것으로 보아 중국이 원산지인 것 같아 덜 안쓰러웠다. 하도 종류가 많아서 어느 것을 선택할까 수 십 번 왔다 갔다 하다 이러다간 하루 종일 걸리겠다 싶어 눈감고 딱 고른 게 사진 속 인물들이다.

집에 와서 줄 맞춰 화분에 심고 보니, 꽃집에서 플라스틱 화분에 있을 때도 예뻤지만 도자화분으로 갈아입으니 더 예뻐 보였다. 한참을 들여다봐도 지루하지 않았다. 급기야 자랑을 아니 할 수 없어 야생화 잘 기르는 친구에게 사진 찍어 보내니 그녀도 다육의 아름다움에 동조해 주었다.

“니가 드디어 화초의 진경을 알았구나. 고수들이 다육식물을 좋아하는데....^^”

요즘은 디지털 기술의 발달도 기기에 의존하다 보니 너나 나나 전화번호 10개도 못 외우는 세상인데 다육식물 이름 한 100개 외우면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될까나. 후후~. 수많은 다육식물들을 다 사지는 못해도 그들만의 책이 있다면 사서 이름을 외우고 싶다. 하여 그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다. 불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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