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큰애는 부쩍 엄마는 직장 안 다니냐며 수시로 나를 약 올린다.

 

"엄마가 그랬잖아.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되면 회사에 다니겠다고. 정 갈 데 없으면 햄버거 집 시간제 일이라도 해라."

"야, 그런데서 이렇게 늙은 아줌마를 써 주간?"

"그게 안 되면, 공장에라도 가라. 하다못해 밤을 깎던가."

"야, 주부의 노동가치가 얼마인 줄 아니? 백만 원이 넘어야."

 

"체, 엄마가 무슨 노동을 한다고 그래. 빨래는 세탁기가 해주지. 밥은 밥솥이 해주지. 그깟 설거지 조금 하는 것 가지고. 우리 핑계대지 말고 빨리 돈 벌러 가라."

"하여간 그 애비에 그 아들 아니랄까봐. 내 오기로 일 안할 거야. 흠!"

 

그러나, 내 '적'은 이 아들만이 아니다. 다들 나를 못 잡아먹어서 난리다. 지난 10년까지는 육아문제가 있으니 다들 봐주었는데, 10년을 지나니 아군이라 생각했던 사람들도 다들 한소리씩 한다.

 

= 큰언니: 니도 인자 좀 벌어야 되는 것 아니가? ㅇㅇ이(언니 큰딸)는 10여년 주부생활 접고 요새 병원(간호사) 다시 나간다.

 

= 친정엄마: 앞집 아무개는 지 차 하나 따로 몰고 다니며 가스검침 하는 일 한다더라. 주말 쉬고, 사람 부딪힐 일 없어 편하다 카던데.

 

= 조카1: 우리 학원 옆 반 선생님도 아들이 초등학교 들어가자 바로 학원 강사 다시 시작했대. 

 

= 조카2: 돈은 안 벌어도 좋으니 뭔가 '뽀대나는' 일을 장기적 안목을 갖고 시작 해봐.

 

= 올케언니: 내가 고모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겠다. 왜 노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사실 결혼 초엔 나도 육아를 얼추 벗어나는 10년쯤 지나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생각했었다. 또,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남들처럼은 못 벌어도 남들의 반만이라도 벌면 나로서도 성공 아닌가.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10년 지나면 그 때 봐서 뭐든 시작해야지 했다.

 

그런데 막상 10년이 지나고 보니 10년 전에 생각했던 것들이 다 하기 싫어졌다. 낭창한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직장생활보다 새로운 어떤 것들을 해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그 새로운 것들이 내가 생각해도 철딱서니가 없기는 없다 싶다.

 

예를 들면 귀농한 한 친구는 이 봄 차 밭에서 열흘 일해 30만원을 벌었다고 하였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얼마나 부러운지. 그처럼 나도 내 인생의 한 달 쯤은 차를 따서 돈을 벌고 싶은 것이다.

 

"차 따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아냐? 그래도 할매들은 얼마나 잘 따는지. 다른 젊은 사람들은 한나절 따고 다 나가떨어지는데 그래도 나는 열흘을 버티니 기특하다 카더라."

"부럽다야. 나도 언젠가는…."

 

뿐인가. 이제 바야흐로 계절이 여름으로 접어드니 생각나는데 '고디(올갱이)'를 잡아서도 한수익 올리고 싶다. 그런가 하면, 일당 받고 시골에 가서 양파나 마늘, 파, 부추 등을 수확하는 일을 하고 싶기도 하다.

 

젊을 때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노후를 준비해야 마땅할 텐데 이렇듯 한가한 생각들만 하니 이러다 나중에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 건 아닌가 가끔씩 살 떨리기도 한다. 그러나, 노후준비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현재'라는 이 순간순간을 자족하며 사는 게 곧 노후 준비가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그리고, 주변을 보면 열심히 번 만큼 또 그 만큼 소비하기도 하던데 나는 말하자면 안 버는 대신 덜 쓰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둘 다 공무원인 이웃 모씨들을 볼 때면 부럽다. 그러나 가만 보면 혼자 버는 우리보다 돈타령은 그네들이 더 한다. 즉, 버는 만큼 또 이래저래 소비를 하다 보니 씀씀이가 커져서 오히려 더 쪼들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내 꿈이 이렇듯 소박 찬란해도 눈치 주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몇 년 더 못 버티고 직장 나가는 시늉을 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우선은 둘째를 핑계 대며 이 위기를 모면해 보지만 말이다.

 

어쨌든,

 

"아들아, 니 동생이 초등 3년이 되면 그땐 정말 엄마도 일을 할 거니까. 더 이상 엄마 인생 간섭마라. 알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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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월급. 기본급 상여금이 각각 32만5000원이고 의료보험 국민연금이 각각 9000원 등 총지급액이 93만5000원에 제할 것 제하니 84만5040원. 상여금 없는 달엔 50여만원을 받았던 기억이. 옛날엔 이렇게 살았구나.
 
월급명세서

 
우연히 책꽂이에서 옛날 책을 펼쳤다가 반가운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빛바랜 친구의 편지와 함께 끼워져 있던 그것은 다름 아닌 10여 년 전 월급명세서였다.

 

'아니 이게 언제 적 것인가?'

 
연도를 보니 1995년 3월의 월급이었다. 월급명세서는 매월 월급이 나오기 하루 전쯤 우리들에게 나뉘어 졌던 것 같다. 당시 나는 그 월급명세서를 받으면 한 번 쓰윽 훑어 본 다음 아무데나 던져뒀다가 폐지정리 할 때 그냥 대중없이 버렸던 것 같다.

 

그랬는데, 오늘 발견한 것은 책 사이에 끼워져 있던 것이라 용케 살아 남았나보았다. 지금의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그땐 왜 그렇게 성의 없이 살았는지. 하긴 그때는 나름 실용주의자(?)라 '일단 통장에 돈이 들어왔으면 되는 거지, 눈 여겨 본 다고 만원 한 장 더 붙는 것도 아니고'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버렸던 것 같다.

 

때문에 뜻하지 않게 살아남은 이 한 장이 너무 소중해, 신문기사 오려서 정리하는 공책에 특별히 모셨다.(웃음) 아들 녀석이 한 번만 더 약 올리면 "봐라! 엄마도 월급 타던 시절이 있었다"하면서 당당하게 말해야지.

 

10년 동안 모은 남편의 월급명세서

 








  
남편의 월급 명세서. 앞으로도 매달 빼먹지 말아야 겠다.
 
월급명세서

 

내 월급 명세서는 그렇게 천대를 했으면서도 남편의 월급 명세서는 지난 10년 동안 한 장도 버리지 않고 꼬박꼬박 모아 두었다. 참으로 나 답지 않은 꼼꼼함을 보인 것인데 아마 계속 그렇게 벌어 오라는 주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농담이고. 계속 모은 이유는 이다음에 자식들에게 교육 삼아 한번 써먹을 일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그 명세서 속에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기고 하고….

 

물론 꼬박꼬박 모으기는 해도 구체적 숫자를 들여다보지 않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데 남편은 달랐다. 한 번씩 꺼내 볼 때마다 "아이 고오, 내 피 같은 돈, 도대체 세금을 왜 이리 많이 떼 가는 것이야. 의료 보험료는 왜 자꾸 오르는 것이야"하면서 열받아 했다.

 

"기부는 못해도 세금은 내야지 그렇게 아깝나?"

"니도 나가 돈 벌어봐라. 안 아까운강? 월급쟁이는 이래 뜯기고 저래 뜯기고…."

"그래도 선진국들에 비하면 우리나라 세금은 세발의 피야."

"선진국은 많이 거둬도 공평하게 거둘 것 아냐. 우리나라는 불공평하니 짜증난다는 거지."

 

'그래도 요즘은 많이 공평해 지고 있잖아'하려다 슬그머니 말꼬리를 닫는다. 왜냐하면, 이 '왕소금'씨는 세금만 들먹이면 월급쟁이인 자신에 대해 한없는 연민을 드러내기에.(웃음) 아무튼, 우연히 발견한 옛날 월급명세서는 과거의 나에 대한 '존재증명서'이자 그 시절을 추억해 주기에 무척 반가웠다.

 

"지금 매달 월급 타시는 분들, 월급명세서 버리지 마시고 소중히 모으세요. 그러면 나중에 추억이 될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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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 두 글자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대개는 이 여행을 직접 행하기보다 꿈만 꾸다 세월 다 까먹는다. 왜냐하면 떠남에는 적지 않은 '용기'와 '버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 지인이 "애들 데리고 네팔 등지를 한번 돌까보다"라고 하니 한 선배가 "애들 학교는 우짜고?" 하면서 제동을 걸었다.

 

"학교가 뭐 대순가요. 한 일 년 쉬면되지요."

"그렇기는 하지만…."

"인생 공부도 공부죠. 학교에서만 배우란 법 있나요? 또, 한 일 년 쉰다고 그렇게 처질까요? 남들 보다 1년 늦게 졸업하면 되지요."

 

사실, 우리가 여행을 꿈꾸면서도 화끈하게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버려야 될지도 모르는 어떤 것들에 대한 욕망 때문이다. 장기 여행을 떠나자면 직장문제도 그렇고, 또 벌지도 못하면서 쓰기만 해야 됨이 부담스럽다. 그런가 하면, 단기여행이라도 좀 멀리 가자면 삼사백은 순식간에 날라 간다. 삼사백? 서민들에게는 일 년 저축액이다.

 

때문에 돈 쓰기는 쉽지만 모으기는 어렵다는 것을 아는 소심자들은 '나도 언젠가는…'이란 다짐아래 떠남을 접게 된다. 나 또한 그렇다.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하나라면 여행을 떠나지 못할 이유들은 왜 그렇게 많은지. 선진국은 물가가 비싸서 못 가겠고 후진국이나 분쟁국들은 불편함과 치안공포 때문에 못 가겠는 등 여행에 대한 갈망과 현실 사이에는 늘 건너지 못할 강이 있다.

 

예습 삼아 여행에 관한 방송에 빠져들다

 

그렇다고 그냥 무의미하게 살기엔 또 너무 허무하고…. 아무튼, 이런저런 사정을 감안하여 내가 꿩 대신 닭으로 택한 것은 다름 아닌, 남의 여행을 구경하거나 지구촌 이모저모를 엿 볼 수 있는 정성이 들어간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이었다. 소득 2만 달러시대에 걸맞게 요 몇 년 텔레비전을 켜면 각종 다큐멘터리나 여행 프로들 중에는 수준급들이 많았다.

 

그러한 가운데 이즈음 진주와도 같은 여행 프로를 하나 발견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교육방송의 <세계테마기행>이다. 월~목 저녁 8시 50분부터 40분간 방송되는 이 프로는 여행의 진수를 보여준다.

 

소설가 성석제씨의 '칠레 종단'과 영화감독 김태용의 '베트남 종단', 그리고 영화배우 최종원의 '아프리카 말리 기행'과 여행생활자 유성용의 '멕시코' 등 저마다 우열을 가릴 수 없게 나를 끌어당겼다.

 

시청자로서 이들과 함께 보낸 지난 한 달은 정말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순간들이었다. 이들의 여행기를 보는 동안은 나 자신도 투명인간으로 이들의 여행에 동참한 듯한 착각에 빠졌다.

 

소설가 성석제씨는 청춘시절 파블로 네루다의 시에 빠졌다는데, 세월이 흘러, 닳도록 애독한 그 시집을 들고 네루다의 흔적과 네루다의 조국을 남에서 북으로 종단하였다.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네루다의 편지를 배달하던 우체부 '마리오'의 목소리를 닮은 듯한, 역시 마리오처럼 1초쯤 쉬고 들어가는 그의 해설은 소설가 성석제만이 담을 수 있는 언어들로 가득 찼고, 그가 뱉는 한 문장 한 문장이 다 시처럼 느껴졌다.

 

그런가 하면 김태용 감독이 만난 베트남의 인민들은 어찌 그리 짠하게들 사는지. 새벽 네 시부터 해가 질 때가지 소금밭(염전)에서 쉬지 않고 일해도 입에 풀칠하기가 어렵다는데, 짠 소금물에 살 갖은 터지는데 그 작은 체구로 12시간을 훌쩍 넘는 노동을 하루 종일 어떻게 감당 하는지…. 또 어떤 이들은 육지에서는 먹고 살 수 없어 메콩 강가에 수상가옥을 올리고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세 번째로 보게 된 <세계테마기행>은 연극배우 최종원이 안내하였다. 연극배우 최종원과 아프리카 '말리'는 아무런 연관성이 느껴지지 않는데 나름 사연이 있었다. 즉, 뜻밖으로 그는 5대양 6대주 발자국 안 찍어본 데가 없다는데 유일하게 '말리'를 빼먹었나 보았다.

 

해서 이번 교육방송의 프로를 통해 말리를 가게 되었던 바 검은 머리보다 흰머리가 많아 보이는 저 연세에 아프리카가 감당이 될까 싶었는데 우려완 달리 뜨거운 태양아래서도 충실한 안내를 해 주었다. 말리는 이 반백의 여행자에게 에누리 없는 풍경과 사람들을 소개해주였다.

 

멕시코를 여행한 자칭 '여행생활자' 유성용은 정말 여행이 생활에 벤 듯 현지인들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었다. 스페인 침략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어 아직껏 그 옛날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는 ‘따라우마라’ 부족의 일상은 쓸쓸하고 고단하였다. 은광도시였던 ‘과나후아또’는 18세기 무렵 세계 은의 20%를 생산하기도 했다는데 세계 20%의 은을 생산하자면 광부들의 땀방울도 그만큼 흘리지 않았을까.

 

배경음악도 한 몫

 

<세계테마기행>의 눈부심에는 배경음악도 한 몫 한다. 이제 까지 내가 본 것은 앞에 열거한 네 편과 그리고 이번 주 가수 이상은의 스페인기행이 전부인데 매 편 다 배경음악도 영상 못지 않게 훌륭하였다.

 

영상을 보면서 동시에 음악을 향한 귀 또한 열어두면, 어쩌면 영상과 음악이 저리도 잘 어울릴까 감탄이 절로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덤은, 여행자들의 ‘소박한’ 영어이다. ‘오우! 저렇게 간단하게 한마디씩 던지며 스며들면 되는 군.’ 하며 자신감을 팍팍(?) 얻을 수 있다. 경험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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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비타민

 
16일 한국방송 제2텔레비전에서 방송하는 <비타민> 243회 분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성형! 오해와 진실'이란 알림문구와 함께 '가슴성형'에 관한 모든 것을 <비타민>의 고문 의사인 권오중 박사가 일목요연하고 재미있게 설명해주었다.

너무도 명쾌하게 설명을 잘하기에 저분 전공이 뭔가 궁금하여 <비타민> 누리집에 들어가 보니 그는 가슴성형전문가이며 '대한유방클리닉 협회' 회장이었다. 그분의 가슴성형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족집게 설명에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을 가슴 성형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하는 공개강좌가 아닌 공중파에서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문가 중에서도 협회의 '짱'인 사람이 그러한 설명을 하니, 평소 가슴성형에 대해 관심이 있는 여성들이 보았더라면 혹하고 넘어가기 딱 좋은 방송이었다.

또, 가슴성형 하고 싶다 생각은 해도 성형외과 문지방 넘기가 무서운 여성들에게도 속 시원한 예비교육이었을 것이다. 나같이 성형천국을 싫어하는 사람도 그 프로를 보다보니, 가슴성형을 너무 나쁘게만 보는 내가 좀 모자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성형을 부정적으로만 본 나도 그랬는데 외모에 한창 민감한 젊은 여성들이 보았다면 오죽할까 싶었다.

실태를 알려주는 <VJ 특공대>도 아니고, 국민의 건강을 책임지겠다는 간판 건강프로그램인데, 이렇게 가슴성형에 대해서 상세히 알려주는 것은 아무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주에는 '치아성형'에 대해 방송을 해서 '<비타민>이 시간대를 옮기면서 색깔을 바꿨나' 고개를 갸웃 하기도 했다.

그러다 이번 '가슴성형 편'을 보고, 이건 진짜 문제다, 라는 생각이 들어 누리집에 가보니 '치아성형 편' 전에는 '지방흡입 편'이 방송됐다. 물론 '스페셜, 성형 오해와 진실'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지만, 그래도 도가 지나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다면 16일 방영된 <비타민> '가슴성형 편'을 보고 제일 쾌재를 부른 사람들은 누구일까. 물어보나마나 성형외과 의사들일 것이다. 내원하는 환자(?)들에게 일일이 설명하기 귀찮았는데, 최고의 유방성형전문가가 1부터 100까지 상세히 설명해줬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제는 사람들이 안심하고 가슴성형을 하지 않겠는가.

재건성형이라면 몰라도...

몇 년 전 시어머니가 맹장염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의 일이다. 수술 후 6인 침실에서 회복 중이었는데 어머님 맞은편 침대에 젊은 여성 두 명이 누워 있었다. 아무리 봐도 어디 아픈 사람 같지 않아서 어머님께 물었더니

"세상에, 앞의 두 처자들은 아직 미혼이고 나이도 서른 초반들이라는데 유방암에 걸려서 한쪽 유방들을 잘라냈다는구나."
"네?"
"우야노. 아까 의사가 와서 우선 퇴원하면 가슴에 끼우라면서 볼록한 것 하나 주고 가던데 안 할라카데."

현대 여성들에게 유방암 발생 빈도수가 높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애 다 낳고 살만큼 살은 중년의 아줌마들에게나 찾아오는 것인 줄 알았는데, 실상은 나이와 상관없음을 그때 처음 알았다. 비혼인 그네들이 충격을 딛고 다시 일어서기까지 얼마간의 시간이 더 필요할 것을 생각하니 보는 내가 짠했다.

그러나 '뽕브라'로 견딜 수 없을 경우 차선책으로 가슴성형을 하면 되니 그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게다가 가슴성형 같은 경우는 어려운 수술 축에도 들지 않으니, 병으로 어쩔 수 없이 가슴을 절제한 사람에게 '가슴 재건 성형'은 심장이식, 간이식처럼 고귀한 수술이다.

즉, 가슴성형도 '재건성형'의 경우라면 얼마든지 환영할만 하다.  그러나 미용 성형이라면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자기 육체에 대한 '주눅'은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증폭되었다가 자기 정체성이 확립되면서 자연스레 사라지는데 요새는 전문가네 하는 사람들이 그런 자연스러운 소멸을 방해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더구나 <비타민> 16일 방송에서는, 재건성형에 대해서는 한줄 나올 뿐이고 오로지 미용성형에 대해 궁금한 '모든 것'을 들려주었다. 그냥 일개 성형외과 의사가 아닌, 공중파 인기 건강프로 '고문 의사'로 명성을 얻은 사람이라면 종합적인 측면에서 이야기를 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성형수술이 너무 일반화 되어있는데 이거 바꿔야 합니다. 처음에는 눈, 코가 주류였다면 요샌 가슴, 엉덩이, 턱 등 칼 안대는 곳이 없는데 도대체 누구를 위하여 그렇게 하는지 한번쯤 자문해 보십시오. 그리고 젊은 여성들이여, 가슴성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먼저 따뜻한 가슴을 가지는 것이고 나아가 당당한 자아를 확립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한 기대일까?  

<비타민> 제작진이 시청자의 궁금증만 풀어주고 시청률만 높이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업방송도 아니고 국민 시청료로 운영되는 방송이라면 적어도 시청자가 보기에 성형외과 홍보를 해준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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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날이 끼인 3박 4일의 연휴,
남편이 그 기간 만큼 '가'를 '출'할 일이 생겨 얼씨구나 친구들을 불러 들였다.
아이들이 여럿 모이니 시끌 벅쩍해서 정신없기는 했으나

스물에 만난 사람들을 마흔줄에도 여전히 보게됨이 새삼 불역락호아!

9,10,일은 내집에서 자고 11일 저녁은 팔공산 자락 조그만 절에서 잤다.
12일이 부처님 오신날이라 찾게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간게 2년전이라  생각했는데 스님은 3년전이라 했다.
"벌써 3년씩이나 흘렀단 말인가요? 엊그제 같은데..."

스님은 머리가 훤하니 그새 더 늙으셨나 우쨌나 감이 안 잡히고 .... 피부는 잡티하나 없이 오히려 더 좋아지신듯..
그러나 또 자세히 뵈니 3년전 그때보다 우째 좀더 외로워 지신듯...

손전화엔 카톨릭 성인 얼굴이 있는 매듭달고,
평상시엔 무신자
절에서는 불신자도 아니면서 연등달고.....

사실 뭐니뭐니해도, 부처님 오신날은 핑계고 내 속셈은 절밥에 있다.

'아, 이 얼마만인가. 3년동안 못 먹은 것 까지 왕창 보충해야쥐~~'





먹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절에서 주는 밥은 정말 맛있다.
마늘 한조각 고춧가루 한숫가락 넣지 않는데 어찌 그리 맛있는지.
맛이 온화하고 담담하고 순하면서도 먹고난 뒤의 여운은 벅차고 진하다.

특히나 이번에는 절임 고추에 뻑 갔다.
액젖에 절인 그 풋고추들은 어찌나 맛있는지 밥을 두번 세번 추가로  
먹게 만들었다.

맛있는 반찬 하나에 꽂히면 다른 반찬은 안중에도 없이 오로지 한우물만 파는데...
만땅 기름을 채우듯 가득 채우고서야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은 김치찌개에
푹 빠졌나 보았다.

호기심에 한 젓가락 집어먹었다가 워매, 절임고추랑 막상막하 용호쌍박이네~~~ 허나 배가 불러
더는 못 먹고 스님에게 조리법을 물었다.

"들기름이 비법이여. 김치를 넣고 푹 끓인다음 마지막에 들기름을 한숫가락 진하게 두르고
설탕 조금 흩뿌려서 한소끔 더 끓이면 이렇게 되요."

11일 저녁엔 절임고추에 홀렸는데
12일 아침엔  애호박이 내눈을  꼬셨다.

"아니 어쩌면 애호박이 이렇게 더도덜도 아니게 딱 알맞게 익은데다 물기도 없이 깔끔하네요."
애호박을 직접 볶으신 보살님 왈,

"애호박을 반달로 썰어서 살짝 데친다음 들기름과 소금을 넣고 간을 하면 요렇게 되요."
"단지 그렇게만 했는데도 이렇게 맛있어요? 세상에~~~"

집에서 애호박 볶아보신 분들은 알리라. 어떤 것은 너무 익어 부서지고 어떤것은 덜익어 간이 안 베고
...

아침에도 애호박을 비롯하여 여러 맛있는 반찬이 있었지만 저녁에 하도 먹어
배가 전혀 꺼지지 않아 많이 못 먹었다. 물론 그래도 한공기 기본은 하였다.

이제 남은 한끼는 점심으로 먹을 비빔밥.

비빔밥을 최대한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소화를 시켜야 하는 법.
서울에서 온 지인과 민들레와 뽕잎을 뜯으러 근처 받뚝을 돌았다.
눈을 들어 산을 보니 앞도 뒤도 옆도 산산산.... 산너머에도 산 그 너머에도 산산산....

연초록이 절정이다 보니 산들의 자태도 풍성하면서도 풋풋한 청춘의 향기가 물씬물씬~~

하늘도 어찌 그리 맑고 푸른지....
공기는 어떻고... 도시에서 병든 사람들 그곳에 와서 1년만 살면 왠만한 병은 다 고치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글쎄... 단 하나 외롬병은 못 고치려나...
.




......................



(혹시나 날아갈까 중간에 저장하고 마저 썼는데 어찌된 샘통인지 뒤의 것들이 죄다 날아가 버려

의욕상실)








결론은, 3년만에 다시 찾은 절에서 절밥 배부르게 먹으며 부처님 오신날을 오로지 ‘식욕’으로

축하하고 현실로 돌아왔다. 그러한데, 눈을 감아도 떠도 팔공산 자락이 펄럭이며 당췌 나를 놓아주지 않으니 이일을 어이할꼬... 어이 할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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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8 0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