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큰애는 부쩍 엄마는 직장 안 다니냐며 수시로 나를 약 올린다.

 

"엄마가 그랬잖아.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되면 회사에 다니겠다고. 정 갈 데 없으면 햄버거 집 시간제 일이라도 해라."

"야, 그런데서 이렇게 늙은 아줌마를 써 주간?"

"그게 안 되면, 공장에라도 가라. 하다못해 밤을 깎던가."

"야, 주부의 노동가치가 얼마인 줄 아니? 백만 원이 넘어야."

 

"체, 엄마가 무슨 노동을 한다고 그래. 빨래는 세탁기가 해주지. 밥은 밥솥이 해주지. 그깟 설거지 조금 하는 것 가지고. 우리 핑계대지 말고 빨리 돈 벌러 가라."

"하여간 그 애비에 그 아들 아니랄까봐. 내 오기로 일 안할 거야. 흠!"

 

그러나, 내 '적'은 이 아들만이 아니다. 다들 나를 못 잡아먹어서 난리다. 지난 10년까지는 육아문제가 있으니 다들 봐주었는데, 10년을 지나니 아군이라 생각했던 사람들도 다들 한소리씩 한다.

 

= 큰언니: 니도 인자 좀 벌어야 되는 것 아니가? ㅇㅇ이(언니 큰딸)는 10여년 주부생활 접고 요새 병원(간호사) 다시 나간다.

 

= 친정엄마: 앞집 아무개는 지 차 하나 따로 몰고 다니며 가스검침 하는 일 한다더라. 주말 쉬고, 사람 부딪힐 일 없어 편하다 카던데.

 

= 조카1: 우리 학원 옆 반 선생님도 아들이 초등학교 들어가자 바로 학원 강사 다시 시작했대. 

 

= 조카2: 돈은 안 벌어도 좋으니 뭔가 '뽀대나는' 일을 장기적 안목을 갖고 시작 해봐.

 

= 올케언니: 내가 고모라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겠다. 왜 노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사실 결혼 초엔 나도 육아를 얼추 벗어나는 10년쯤 지나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생각했었다. 또,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남들처럼은 못 벌어도 남들의 반만이라도 벌면 나로서도 성공 아닌가.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10년 지나면 그 때 봐서 뭐든 시작해야지 했다.

 

그런데 막상 10년이 지나고 보니 10년 전에 생각했던 것들이 다 하기 싫어졌다. 낭창한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직장생활보다 새로운 어떤 것들을 해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그 새로운 것들이 내가 생각해도 철딱서니가 없기는 없다 싶다.

 

예를 들면 귀농한 한 친구는 이 봄 차 밭에서 열흘 일해 30만원을 벌었다고 하였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얼마나 부러운지. 그처럼 나도 내 인생의 한 달 쯤은 차를 따서 돈을 벌고 싶은 것이다.

 

"차 따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아냐? 그래도 할매들은 얼마나 잘 따는지. 다른 젊은 사람들은 한나절 따고 다 나가떨어지는데 그래도 나는 열흘을 버티니 기특하다 카더라."

"부럽다야. 나도 언젠가는…."

 

뿐인가. 이제 바야흐로 계절이 여름으로 접어드니 생각나는데 '고디(올갱이)'를 잡아서도 한수익 올리고 싶다. 그런가 하면, 일당 받고 시골에 가서 양파나 마늘, 파, 부추 등을 수확하는 일을 하고 싶기도 하다.

 

젊을 때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노후를 준비해야 마땅할 텐데 이렇듯 한가한 생각들만 하니 이러다 나중에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되는 건 아닌가 가끔씩 살 떨리기도 한다. 그러나, 노후준비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현재'라는 이 순간순간을 자족하며 사는 게 곧 노후 준비가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그리고, 주변을 보면 열심히 번 만큼 또 그 만큼 소비하기도 하던데 나는 말하자면 안 버는 대신 덜 쓰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둘 다 공무원인 이웃 모씨들을 볼 때면 부럽다. 그러나 가만 보면 혼자 버는 우리보다 돈타령은 그네들이 더 한다. 즉, 버는 만큼 또 이래저래 소비를 하다 보니 씀씀이가 커져서 오히려 더 쪼들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내 꿈이 이렇듯 소박 찬란해도 눈치 주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몇 년 더 못 버티고 직장 나가는 시늉을 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우선은 둘째를 핑계 대며 이 위기를 모면해 보지만 말이다.

 

어쨌든,

 

"아들아, 니 동생이 초등 3년이 되면 그땐 정말 엄마도 일을 할 거니까. 더 이상 엄마 인생 간섭마라. 알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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