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 두 글자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대개는 이 여행을 직접 행하기보다 꿈만 꾸다 세월 다 까먹는다. 왜냐하면 떠남에는 적지 않은 '용기'와 '버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 지인이 "애들 데리고 네팔 등지를 한번 돌까보다"라고 하니 한 선배가 "애들 학교는 우짜고?" 하면서 제동을 걸었다.

 

"학교가 뭐 대순가요. 한 일 년 쉬면되지요."

"그렇기는 하지만…."

"인생 공부도 공부죠. 학교에서만 배우란 법 있나요? 또, 한 일 년 쉰다고 그렇게 처질까요? 남들 보다 1년 늦게 졸업하면 되지요."

 

사실, 우리가 여행을 꿈꾸면서도 화끈하게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버려야 될지도 모르는 어떤 것들에 대한 욕망 때문이다. 장기 여행을 떠나자면 직장문제도 그렇고, 또 벌지도 못하면서 쓰기만 해야 됨이 부담스럽다. 그런가 하면, 단기여행이라도 좀 멀리 가자면 삼사백은 순식간에 날라 간다. 삼사백? 서민들에게는 일 년 저축액이다.

 

때문에 돈 쓰기는 쉽지만 모으기는 어렵다는 것을 아는 소심자들은 '나도 언젠가는…'이란 다짐아래 떠남을 접게 된다. 나 또한 그렇다.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하나라면 여행을 떠나지 못할 이유들은 왜 그렇게 많은지. 선진국은 물가가 비싸서 못 가겠고 후진국이나 분쟁국들은 불편함과 치안공포 때문에 못 가겠는 등 여행에 대한 갈망과 현실 사이에는 늘 건너지 못할 강이 있다.

 

예습 삼아 여행에 관한 방송에 빠져들다

 

그렇다고 그냥 무의미하게 살기엔 또 너무 허무하고…. 아무튼, 이런저런 사정을 감안하여 내가 꿩 대신 닭으로 택한 것은 다름 아닌, 남의 여행을 구경하거나 지구촌 이모저모를 엿 볼 수 있는 정성이 들어간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이었다. 소득 2만 달러시대에 걸맞게 요 몇 년 텔레비전을 켜면 각종 다큐멘터리나 여행 프로들 중에는 수준급들이 많았다.

 

그러한 가운데 이즈음 진주와도 같은 여행 프로를 하나 발견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교육방송의 <세계테마기행>이다. 월~목 저녁 8시 50분부터 40분간 방송되는 이 프로는 여행의 진수를 보여준다.

 

소설가 성석제씨의 '칠레 종단'과 영화감독 김태용의 '베트남 종단', 그리고 영화배우 최종원의 '아프리카 말리 기행'과 여행생활자 유성용의 '멕시코' 등 저마다 우열을 가릴 수 없게 나를 끌어당겼다.

 

시청자로서 이들과 함께 보낸 지난 한 달은 정말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순간들이었다. 이들의 여행기를 보는 동안은 나 자신도 투명인간으로 이들의 여행에 동참한 듯한 착각에 빠졌다.

 

소설가 성석제씨는 청춘시절 파블로 네루다의 시에 빠졌다는데, 세월이 흘러, 닳도록 애독한 그 시집을 들고 네루다의 흔적과 네루다의 조국을 남에서 북으로 종단하였다.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네루다의 편지를 배달하던 우체부 '마리오'의 목소리를 닮은 듯한, 역시 마리오처럼 1초쯤 쉬고 들어가는 그의 해설은 소설가 성석제만이 담을 수 있는 언어들로 가득 찼고, 그가 뱉는 한 문장 한 문장이 다 시처럼 느껴졌다.

 

그런가 하면 김태용 감독이 만난 베트남의 인민들은 어찌 그리 짠하게들 사는지. 새벽 네 시부터 해가 질 때가지 소금밭(염전)에서 쉬지 않고 일해도 입에 풀칠하기가 어렵다는데, 짠 소금물에 살 갖은 터지는데 그 작은 체구로 12시간을 훌쩍 넘는 노동을 하루 종일 어떻게 감당 하는지…. 또 어떤 이들은 육지에서는 먹고 살 수 없어 메콩 강가에 수상가옥을 올리고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세 번째로 보게 된 <세계테마기행>은 연극배우 최종원이 안내하였다. 연극배우 최종원과 아프리카 '말리'는 아무런 연관성이 느껴지지 않는데 나름 사연이 있었다. 즉, 뜻밖으로 그는 5대양 6대주 발자국 안 찍어본 데가 없다는데 유일하게 '말리'를 빼먹었나 보았다.

 

해서 이번 교육방송의 프로를 통해 말리를 가게 되었던 바 검은 머리보다 흰머리가 많아 보이는 저 연세에 아프리카가 감당이 될까 싶었는데 우려완 달리 뜨거운 태양아래서도 충실한 안내를 해 주었다. 말리는 이 반백의 여행자에게 에누리 없는 풍경과 사람들을 소개해주였다.

 

멕시코를 여행한 자칭 '여행생활자' 유성용은 정말 여행이 생활에 벤 듯 현지인들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었다. 스페인 침략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어 아직껏 그 옛날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는 ‘따라우마라’ 부족의 일상은 쓸쓸하고 고단하였다. 은광도시였던 ‘과나후아또’는 18세기 무렵 세계 은의 20%를 생산하기도 했다는데 세계 20%의 은을 생산하자면 광부들의 땀방울도 그만큼 흘리지 않았을까.

 

배경음악도 한 몫

 

<세계테마기행>의 눈부심에는 배경음악도 한 몫 한다. 이제 까지 내가 본 것은 앞에 열거한 네 편과 그리고 이번 주 가수 이상은의 스페인기행이 전부인데 매 편 다 배경음악도 영상 못지 않게 훌륭하였다.

 

영상을 보면서 동시에 음악을 향한 귀 또한 열어두면, 어쩌면 영상과 음악이 저리도 잘 어울릴까 감탄이 절로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덤은, 여행자들의 ‘소박한’ 영어이다. ‘오우! 저렇게 간단하게 한마디씩 던지며 스며들면 되는 군.’ 하며 자신감을 팍팍(?) 얻을 수 있다. 경험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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