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1.


별이 된 엄마

 

97이라는 숫자를 마지막으로 세며 나의 엄마는 2년 전 4월의 마지막 날, 멀고먼 또 다른 세계의 별이 되었다. 아버지 돌아가신지 어언 19년 만의 일이었다. 200480세의 나이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 자식들의 소원은, 혹은, 농담은 엄마가 아버지 없이 1년이라도 자유롭게 살아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려 19년을 엄마는 더 살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영혼의 세계 따윈 있다 해도 믿고 싶지 않고 오로지 내 오관으로 생각하고 보며 이 세계를 인식하고 싶었다.

 

그런데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엄마가 돌아가니 뜬금없이 영혼의 세계 같은 보이지 것들에 관심이 가졌다. 더 이상 저작이 안 되어 밥을 끊고 21일 정도 두유와 미음과 물로 서서히 양을 줄여가다, 티 없이 맑고 따뜻하고 고요하던 4월의 마지막 날 오후, 엄마는 다른 차원으로 떠났다. 따뜻한 오후의 봄날 그 말할 수 없이 평화롭던 오후의 분위기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축복이 엄마를 위해 마련한 깜짝 선물 같았다.

 

엄마는 아픈 신음소리 한마디 없이 조용히 눈을 감았다. 돌아가기 마지막 일주일전까지도 엄마는 좌로 취침, 우로 취침을 스스로 했다. 그리고 복기해보니 돌아가기 며칠 전에는 크게 하품을 여러 번 했는데 그 모습이 어린아이처럼 맑고 세상걱정 없어 보였다. 친척 어르신은 엄마가 자리보전하며 시간을 오래 끌 것 같다며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였다.

 

저렇게 세상 걱정 없어 보이고 아프다 신음소리도 없는데 어떻게 빨리 가시겠나. 오래 시들 것 같다...”

 

그 말을 들으며 엄마와의 이별을 지금 당장은 안 해도 될 것 같은 안도와 함께 한편으로는 엄마가 고생을 하며 가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 우리엄마는 다를 것이다.’라는 이상한 믿음이 있었다.

 

엄마가 생의 마지막을 햇살 좋은 봄날의 거실에 고요히 누워서 자신의 인생 파노라마를 다 돌려보고 멋지게 갈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나의 엄마는 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바람이고 내 상상이고 현실은 엄마의 상태가 장기화 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큰오빠와 큰방에서 상의하였다. 평생 효자로서 지극했던 큰오빠를 생각해서라도 엄마의 마지막만이라도 손을 보태야 함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런 저런 경우의 수를 얘기하다 엄마기저귀도 갈고 물과 미음도 드리려고 거실의 엄마에게로 나왔다. 그런데 엄마를 안았는데 뭔가 살짝 이상했다.

 

엄마! 엄마! 물이라도 좀 듭시다.”

 

엄마의 목을 감싼 손으로 고개를 바로 해보는데 저항이 느껴지지 않았다. 입을 벌려보았다. 한 번도 경험이 없지만 책에서 읽은 것에 의하면 돌아가기 전에 혀가 말려들어간다고 하던데 바로 이러한 것을 말하는가 싶었다. 엄마의 혀는 검붉게 굳어있었다. 서둘러 큰방의 큰오빠를 불렀고 엄마의 아픈 손가락이자 평생 엄마 옆의 또 다른 효자였던 청각장애인 둘째 오빠도 엄마 곁으로 다가왔다.

 

엄마의 귀밑이며 턱밑, 그리고 코끝에서 엄마의 숨결을 느껴 보려 해도 이미 우리 자식들의 감각이 혼미해져 엄마가 아직 이승을 헤매고 있는지 이미 저승을 떠났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불과 몇 분 사이에 우리는 가슴이 덜컥하는 기분을 느끼며 119를 불렀다. 119는 두서없는 우리의 얘기를 듣더니 자신들이 갈 때까지 심장 마사지를 하라고 하였다.

 

땀을 뻘뻘 흘리며 큰오빠와 번갈아가며 심장마사지를 하는 가운데 119 구급대가 왔다. 그들은 산소포화도 등을 말하며 엄마가 삶의 끈을 놓았음을 확인해 주었고 심장이 멈춘 경우는 자기들 소관이 아니라며 올 때처럼 갈 때도 서둘러 떠났다. 이어서 경찰에 신고를 하니 경찰차가 도착하였고 경찰차가 떠나자 다음 순서의 장례식장 차가 경적을 울렸다.

 

산골동네에 한 시간 여 만에 서로 다른 마크의 차량이 세대나 도착하고 동네사람들의 묵묵한 시선 받으며 엄마는 그렇게 또 다른 차원으로의 단장을 떠났다. 장례식 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삶과 죽음의 존재방식은 그렇게 칼로 무 자르 듯 명쾌하게 3일 만에 엄마를 고향선산 아버지 옆에 푸른 잔디로 감싸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무너지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야 모두들 싫어했기에 오히려 해방감을 느꼈다면 엄마는 다르지 않는가. 엄마가 돌아갔다는 것은 온 우주가 무너지는 것 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엄마의 자식들인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엄마가 돌아가도 세상은 이변 없이 돌아갔다. 그리고 어차피 한번은 가야 하는 길 엄마가 아프다는 신음 한마디 없이 돌아가서 너무 감사했다. 큰언니는 말하였다.

 

어쩌면 얼굴한번 찡그리지 않고, 아야!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을 수 있는공?”

언니 나도 그게 너무 신기하다. 엄마에게 아름다운 마지막 보여 달라, 엄마는 할 수 있다, 흔들릴 때마다 관세음보살 알겠제? 하면서 염주도 사주고 했지만 그리고 살짝 기대도 했지만 엄마가 이렇게 고요하게 갈 줄이야.”

 

그러게 말이다. 엄마 정말 여문 사람이었데이. 마지막 까지 정신 줄 안 놓고 고고하게 갔네.”

나도 엄마의 마지막을 보고 새삼 희망을 가져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엄마처럼. 삶의 마지막을 엄마처럼 맞이할 수 있다면... 맞이할 수 있을까.”

 

살아서하는 작별인사

 

무엇보다 엄마가 돌아가고 나서도 자식들 모두 의연할 수 있었던 것은 엄마가 돌아가기 보름 전에 그 말로만 듣던 생전장례식비슷한 것을 했기 때문이었다. 아들, , 사위, 며느리, 조카, 손자, 손녀, 친척 등 모두 엄마를 보러왔다. 엄마가 거실에 누워서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들은 유쾌하게 떠들며 점심을 먹었다. 엄마의 자손들이 그렇게 한꺼번에 모여 유쾌하게 식사를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엄마를 소파에 앉히고 저마다 엄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며 용돈도 드리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엄마와 사진을 찍었다. 역시 이름난 효자였던 사촌 오빠는 엄마 옆에 오래 앉아 엄마의 손을 쓰다듬으며 농담도 하고 그랬다. 정말 유쾌한 시간이었다. 생전 장례식을 영화에서만 보는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니 우리가족에겐 그날이 생전 장례식이었다.

 

진짜 장례식에서, 23녀 자식들은 살짝 눈물만 비칠 뿐 슬피 울지 않았다. 유독 올케언니만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장례식장 도착하자마자 버선발로 엎어지듯 엎드려 슬피 울었는데 진심이 느껴졌기에 고마웠다. 그리고 뒤늦게 쉰 넘어 생의 어느 질곡에서 중국 어느 높은 산에서 신비체험을 하고 돌아와 스님이 된 올케언니의 동생 D스님이 법성게와 천수경, 반야심경 등을 구성지게 읊으며 불교식 추모를 해주어 무척 감사했다. 엄마는 살아생전 절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절에 가깝다고 하였다. 스님은 알고 있었다고 말하였다.

 

며칠 전부터 돌아가신 사장어른(나의 아버지)과 엄마의 조상님들이 엄마를 모셔가려고 정성스런 모습으로 거실에 빙 둘러 앉아있는 모습이 보여서 며칠 있으면 기별이 올 줄 알았어요.”

 

아아, 아버지를 비롯하여 조상님들이 엄마를 모셔간다는 말이 너무도 위로가 되었다. 몇 년 전의 나라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코웃음을 흘렸을 것이다. 그런데 문득 엄마가 아버지 돌아가시고 1년만 더 살았으면 하던 소원이 19년이나 연장된 것은 다 아버지의 배려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 수 없지만 내 마음에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엄마가 돌아가자 아버지를 미워했던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엄마가 불쌍해서 아버지를 미워했는데 엄마가 돌아가니 아버지를 미워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내가 평생 외면함으로서 슬펐을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래서 아버지 돌아가고 19년이 지나서야 진정한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결론은 엄마가 돌아감으로서 나는 진실로 고아가 되었고 그리고 또 자유인이 되었다. 엄마가 살아계실 때 어디 일주일쯤 해외여행을 가려고 하면 혹시 내 없는 사이 엄마가 돌아가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었다. 엄마의 임종을 못 보면 너무 슬플 것 같았다. 때문에 친정에 가면 늘 마지막인 듯 고마움의 말을 했지만 진짜 마지막과 마지막일지 모르는 것과는 다르지 않은가.

 

그리고 늘 마음속으로 준비했던, 엄마가 돌아가시는 순간, 큰오빠에게 할 말을 잊지 않고 할 수 있어서 또한 감사했다. 마당에서 장례식장 차가 경적을 울리는 순간 아차! 깜빡할 뻔 했던 말을 오빠에게 하였다.

 

오라버니, 오랫동안 엄마를 효심으로 모시느라 정말 고생 많았어요. 고맙고 감사합니다. 이제

오라버니는 대 자유를 얻었으니 이 세상 모든 행복 다 누리며 사시길 빕니다. 엄마가 원하는 것 또한 오라버니의 행복과 기쁨일 것입니다.”

 

여행도 독립이 필요해

 

그렇게 큰오빠의 삶이 좀 더 신나고 행복하게 달라지길 바라며 나의 삶 또한 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니 달라지고 싶었다. 마음으로 품었던 것들도 한번 실행해 보고 싶었다. 말로만 읊조렸던 세계 자유여행, 정말 큰 마음먹고 한번 실행해 보고 싶었다. 산티아고 순례, 시베리아 횡단열차, 바이칼 호수, 몽골 내륙, 차마고도, 실크로드, 네팔, 이집트, 사하라사막, 우유니 소금호수, 파타고니아 그리고 패키지가 아닌 단독으로 서유럽 동유럽 도시들을 일주일씩 체류 해 보기 등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미국, 캐나다, 남미와 아프리카, 호주, 터키, 그리스, 북유럽, 동남아... 아 세계는 어찌 이리 넓은가. 이 유쾌한 숙제들을 나는 과연 다 할 수 있을까. 그동안 1년에 2~35~10일 사이의 짧은 패키지여행은 그 나름대로 충분히 괜찮았으나 여행도 독립이 필요했다. 어린아이가 첫 걸음마를 뗄 때 스스로 해야 하듯이 나도 여행 독립이 필요 했다.

 

그런데 일본이나 대만이라면 모를까, 나의 간담으로는 단독으로 비행기타고 멀리 날아가는 것은 엄두가 안 났다. 시절친구를 만나 같이 가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타협을 하였다. ‘지금은 아직 60세 전이니 패키지에 의지하고 60세 넘으면 그땐 정말 용기를 내어보자.’

 

60이 지나면 한두 달 집을 비운다한들 남편도 뭐라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스스로 용기 없어 못하는 여행 독립을 가족들 눈치 때문에 못한다고 핑계를 대었다. 60전에도 못내는 용기, 60 지난다고 낼 수 있을까. 살짝 의문스러웠지만 어쨌든 그렇게 미루며 시간을 벌어 우선 마음 편히 살고 싶었다. 앞으로 4~5년 남았으니 그동안 용기를 장착할 수 있으리라. , 나는 할 수 있다. 여행 독립의 그 첫 발걸음은 그 어디 보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떼고 싶었다. 가고는 싶으나 아직 엄두가 안 나는 그 길을 나는 과연 60세가 되면 떠날 수 있을까. 그런데 세상일이란 때론 뜻하지 않게 급물살을 타기도 하는바 그 엄두가 안나 던 산티아고 순례를 60세 전에 하게 되었다.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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