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 상 Mr. Know 세계문학 12
알렉스 헤일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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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책들
영화 <인사이드 맨>을 보면 주인공 형사인 덴젤 워싱턴이 워낙 당당하고 능수능란해서 백인형사인 윌리엄 데포는 초라하다 못해 조금은 그 허여멀건 피부와 함께 측은해 보이기까지 하였다.

선입견을 갖고 보자면 측은함은 흑인의 피부 빛깔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지 백인의 피부 빛깔에서 느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인사이드 맨>을 보면 백색이 우월하다는 것은 우리의 집단착각일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덴젤 워싱턴의 검은 피부는 그 하나만으로도 호연지기는 물론 신뢰의 원천으로 느껴졌었다. 그러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우리들 마음속에는 아직도 검은색 피부는 여전히 밀어도 밀어도 벗겨지지 않는 저주받은 피부쯤으로 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

어렸을 적 TV에서 본 <뿌리>는 흑인 노예의 참상을 다룬 드라마라는 것과 너무도 선명하게 ‘쿤타킨테’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데 그 <뿌리>를 최근 책으로 만나게 되었다. <뿌리>(열린책들)의 지은이인 알렉스 헤일리는 실지 외가 쪽으로 쿤타킨테의 7대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외할머니를 통해 먼 조상인 쿤타킨테 할아버지의 사연을 어제 일처럼 듣고 자랐다.

지은이는 "역사란 승자들 쪽으로 심하게 치우친 시각에서 쓰였다는 과거의 유산을 보완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가지고 이 책을 썼다고 고백하였다. 이 책은 한 흑인 노예와 그 후손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루지만,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끌려간 수많은 노예들의 비참상을 유추해 볼 수 있기에 한 가계의 얘기를 뛰어넘는다.

열일곱 쿤타킨테, 숲에서 잡히다

쿤타킨테는 ‘1750년 이른 봄, 서아프리카 감비아 해안에서 나흘정도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나타나는 주푸레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오모로와 어머니 빈타 킨테의 첫 아들로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며 씩씩한 소년으로 자라났다.

엄격하고 혹독한 성인식을 무사히 치른 다음에는 이제 자신 또한 자신의 아버지처럼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낳고 하면서 살아갈 꿈을 꾸며 동생들에게도 너그러운 형이었다. 그러나 그의 나이 열일곱, 동생의 장난감 북을 만들어주고자 괜찮은 나무를 찾아 숲을 헤매다 어이없게도 노예 사냥꾼에게 잡히고 말았다.

발가벗은 채로, 쇠사슬에 묶이고, 발이 채워져서, 그는 찌는 듯한 더위와 구역질나는 악취, 그리고 비명을 지르고, 흐느껴 울고, 기도를 드리고, 구토를 하는 악몽 같은 광란으로 가득 찼으며, 칠 흙 같은 어둠 속에서, 다른 두 남자 사이에서 누운 채로 정신이 들었다. 그는 가슴과 배에서 자신의 토사물 냄새를 맡고는 손으로 만져 보았다. 그는 붙잡히고 난 다음 나흘 동안 매를 맞아서, 온몸이 고통으로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나 가장 아픈 곳은 양쪽 어깨 사이의 한가운데 인두로 지진 자리였다. -상권 178쪽

7대 후손인 알렉스 헤일리가 찾은 문서에 의하면 그는 1767년 ‘로드 리고니어호’를 타고 아나폴리스 항구에 도착한 140명 노예중 42명이 죽고 살아남은 98명중의 한사람으로 미국 땅을 밟았다. 그는 ‘최고급 젊은 검둥개’로서 존 월러라는 사람에게 팔렸다.

그러나 그는 노예로서의 삶을 거부하고 생면부지의 땅임에도 불구하고 탈출을 감행하였다. 탈출이 실패로 돌아가 붙잡히면 죽도록 얻어맞아야 했지만 그는 두 번, 세 번 탈출을 멈추지 않았다. 뛰어 봤자 노예 사냥꾼들의 손바닥 안이고 더 이상 어찌 해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네 번째 탈출의 실패로 오른발이 잘리고 난 후였다.

네 번째 탈출에서 붙잡혔을 때 그는 노예 사냥꾼을 향해 돌멩이를 던져 상해를 입혔는데 이해 격분한 노예 사냥꾼은 발을 자를까, 성기를 자를까하며 쿤타를 위협하였다. 쿤타는 진정한 남자는 아들을 두어야 한다는 내면의 울림에 자신의 성기를 가렸고 노예 사냥꾼은 쿤타의 발을 겨냥했다.

쿤타가 비명을 지르고 몸부림을 치는 사이에, 도끼는 번쩍 올라갔다가, 순식간에 내려쳐서, (살갗과, 근육과, 뼈가 절단되었고) 쿤타는 도끼가 쿵 나무토막에 찍히는 소리를 실제로 듣고는, 충격과 고통이 머릿속 깊숙이 되울렸다. 폭발하는 듯한 고통이 온몸에 충격을 주자, 쿤타의 상반신은 발작적으로 고꾸라졌고, 시뻘건 피가 잘린 발의 토막에서 뿜어져 나오자, 그는 떨어져 나간 발의 앞쪽 반 토막을 찾으려는 듯 두 손으로 정신없이 더듬거렸으며, 그리고 그의 주위는 온통 암흑이었다. -상권 282쪽

노예의 삶을 살며 스스로 '그리오'가 되다

발이 잘린 후로는 일꾼으로도 별 쓸모가 없는 존재였고 쿤타 자신 또한 탈출의 의욕을 상실했는데 다행이랄까. 존 월러 주인의 형인 의사 윌리엄 월러가 쿤타의 발을 자른 것에 격분하며 동생으로부터 쿤타를 샀다.

쿤타는 발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 새 주인이 된 의사 윌리엄 월러의 간호를 받았고 다 나은 다음에는 얼마간 정원사로 소일하다 윌리엄 주인의 마차를 끌게 되었다. 그리고 씨가 마르기 전에 어서 자손을 보라던 어느 늙은 노예의 말을 상기하며 윌리엄 주인의 오랜 요리사이자 자신의 발 상처를 정성껏 보살펴줬던 벨과 결혼하여 딸 키지를 낳았다.

그는 어린 딸 키지가 말을 배울 무렵부터 자신의 고향인 서아프리카 감비아 땅의 작은 마을 주푸레의 언어를 기억시켜주려 애썼다. 기타를 보고는 ‘코’, 강을 보고는 ‘캄비 볼롱고’로 가르치는 등 어린 딸에게 수없이 자신의 고향과 고향 말을 얘기했다.

열여섯 나이에 어이없이 부모를 떠나 다른 주인에게 팔려간 키지는 그의 아들 치킨조지에게 아버지 쿤타의 고향 아프리카를 뇌리에 심어주었다. 치킨조지 또한 그의 자식들이 태어날 때마다 쿤타 할아버지의 얘기를 되풀이 했고 그것은 몇 세대를 거처 알렉스 헤일리에게 까지 생생하게 전해졌다.

문자가 없던 시절, 쿤타의 고향 사람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말로 기억하는 구전역사가인 ‘그리오’를 두었었는데 그 그리오들은 수 백 년 역사를 한점 어긋남 없이 기억하는 존재들이었다. 때문에 한사람 그리오의 죽음은 오늘날로 치자면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알렉스 헤일리는 마치 그 사실을 증명 해 받듯 자신의 6대조 외할아버지인 쿤타킨테와 그의 부모 형제 얘기를 그로부터 200년이나 지난 시대를 살고 있는 현재의 그리오에게서 정확하게 들었다.

쿤타킨테는 도서관 한 채와 맞먹는 ‘프로’ 그리오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뿌리만큼은 후세연연 그의 자손들에 각인시켜 ‘작은’ 그리오 역할을 하였다. 그것은 나아가 자신의 개인사를 넘어 아메리카로 잡혀온 흑인노예들의 총체적 삶을 되돌려 보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내 아이에게 <뿌리>를 얘기 해줌으로써 간만에 얘기다운 얘기를 해준 뿌듯함(?)을 느꼈다. 인간이 인간을 사고 팔다니, 이 부끄러운 역사의 부채를 백인들은 갚을 생각을 제대로 하고 있나 모르겠다. 흑인들이 말로만 평등이 아닌 진정한 평등을 맛보며 살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람이 <뿌리>를 읽고 나니 더 한층 강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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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물꼬물 과학 이야기 - 생각의 꼬리를 따라 배우는 꼬물꼬물 시리즈 1
손영운 지음, 권윤주 그림 / 뜨인돌어린이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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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어떻게 만들어 졌을까? 도대체 저 많은 물이 어떻게 생겨났을까? 아무리 골짜기 물이 흐르고 흘러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지만 그래도 바다는 물이 너무 많다. 이에 대한 궁금증은 늘 갖고 있었으며 사람들에게 초등학생처럼 묻기도 하였는데 가르쳐주는 성인들이 없었다.

그런다고 멈출 것인가. 어쩌다 만나게 되는 초등생들에게도 물어보곤 하였다. 바다는 어떻게 해서 생겼지? 그러면 그들은 빙하가 녹아서 그렇게 된 게 아닐까요? 하는 정도였다. 나 또한 머리 굴리기를 예전에 지구는 빙하기를 거쳤다는데 그 빙하기가 해제 되면서 바닷물이 된 게 아닐까.

그러나 빙하가 답이 못됨은 그 빙하는 어디서 왔나 하는 것이다. 그 빙하는 다만 얼어있었다 뿐이지 만약 녹는다면 바닷물과 사촌이 아닌가 말이다. 아무튼 바다야 너는 누가 탄생시켜주었니? 내게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친구가 내 아이를 위해 선물한 책에서 너무도 쉽게 그 답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바다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느냐고요?

<꼬물꼬물 과학이야기>(뜨인돌 어린이)는 바다의 생성을 아주 쉽고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즉, 바다는 '화산폭발'로 생겨났다는 것이었다. 화산폭발? 지구가 처음 만들어지던 '원시지구' 시절 지구는 날이면 날마다 우주로부터 '작은 행성'들이 충돌해 와 지표면은 늘 뜨거운 지옥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행성들의 충돌이 줄어들자 이번에는 지구 내부에서 마그마가 터져 나오면서 곳곳에서 화산 폭발이 지금보다 훨씬 규모도 크고 자주 있어났다고 한다. 여기서도 뻥, 저기서도 뻥. 날이면 날마다 뻥뻥뻥. 그 폭발은 '수억 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계속 되었는데, '이때 지구 내부와 암석에 들어 있던 엄청난 양의 수증기가 지구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고 한다.

그것이 '시간이 지나 지구가 점점 식으면서 수증기들은 비가 되어 내려' 흐르고 모여 강물이 되고 호수가 되고 바다가 되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 아주 쉽게 해결

이 책은 어린이들이 궁금해 할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아주 쉽게 설명 해 줌은 물론 한 단계 더 나아가는 질문을 유도하고 그에 대한 답 또한 명쾌하게 얘기해 준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는 어렸을 적 어떤 하나에 의문을 가지면 그것의 의문이 풀렸다고 해서 의문이 끝나는 게 아니고 또 다른 의문이 고개를 들어 궁금하고도 궁금했던 기억들을 다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의문의 확대를 자연스럽게 유도하고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것에서 필연적 연관성을 이끌어 낸다.

예를 들면, 몇 년 전 동남아시아에 '지진해일(쓰나미)'이 발생했을 때 어떤 전문가들은 미래의 언젠가는 인도양의 아름다운 섬 '몰디브'가 바다에 잠기고 말지도 모른다는 충격적인 가능성을 내 비친 적이 있었다.

이 책은 말 한다. 몰디브는 왜 바닷 속으로 잠길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물어보나 마나 해수면 상승 때문이다.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계속 녹고 있기 때문에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다는 것쯤은 누구에게나 상식이다.

그러면 그 빙하들은 왜 녹나? 그것 또한 당연 지구가 더워지기 때문으로 누구에게나 상식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지구 온난화의 여러 주범들 가운데서 엉뚱하게도 가축인 '소의 트림과 방귀'를 예로 들면서 어린이들의 호기심을 유발한다.

지구 온난화는 '이산화탄소나 메탄 등 온실기체의 양이 지나치게 늘어나, 지구 전체가 점점 더워지는 현상'으로 이 온실기체 중 '메탄'을 가장 많이 내뿜는 것이 '소의 트림과 방귀'라는 것이다.

'메탄'은 같은 양이라도 온실효과를 일으키는 능력이 이산화탄소보다 '21배'나 크다고 한다. 농촌 진흥청이 소 한 마리가 일년 동안 내 뿜는 메탄의 양을 조사하니 40~50kg이었다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가 배출한 온실 기체의 약 0.4%라고 한다. 0.4%면 결코 적은 수치가 아니다.

때문에 목축업이 발달한 뉴질랜드에서는 소의 트림과 방귀에도 세금을 매기려 하다가 농민들의 반발로 무산된 웃지 못 할 희극이 연출되기도 하였다고.

이 밖에도 이 책에는 지구 사막화의 원인을 햄버거와 연결해서 설명하기도 하고, 된장찌개 맛은 무역풍이 결정하고, 자외선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은 러시아 마피아 때문이고, 내장산 단풍은 수소 폭탄이 만들었다는 둥 엉뚱해 보이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책을 읽어가다 보면 자연스레 '아하!'하는 감탄사와 함께 그 연관성을 알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은 지구는 '살아있는 생명체'이므로 우리가 상하게 하는 만큼 아파하는데, 우리가 그 사실을 간과하고 있음을 다시금 인지 시켜준다. 지구는 '온난화', '엘니뇨', '오존층 파괴' 등 '나 아무래도 암 걸린 것 같아'라며 줄곧 호소하지만 우리는 여전하게 그가 무던하게 다 받아 주리라 생각하고 마구 군림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 책은 어린이들에게 과학적 상식과 함께 지구라는 생명체를 소중하게 생각하게 하는 마음을 자연스레 심어준다. 더불어, 과학적 현상이 궁금한 어른들도 한 번 '쓰윽' 읽어볼 만하다. 쓰윽 읽어보다가 국토의 70%가 열대우림이었던 필리핀에 이제는 4%로의 숲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만나게 되면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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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 평전 - 그 정치적 미스터리와 영적 카리스마의 비밀
질 반 그라스도르프 지음, 백선희 옮김 / 아침이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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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쿤둔(Kundun·감독 마틴 스콜시즈·1997)>은 14대 달라이라마의 탄생부터 달라이 라마가 중국의 모택동 정권을 피해 그의 나이 18세 때 말을 타고 인도 국경을 넘을 때까지의 과정을 다룬 영화이다.

티베트라고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오체투지'의 순례이다. 언젠가 TV에서 보니 어떤 부부가 오체투지로 산을 오르는데 화면에 나이가 40대로 나왔으나 우리나라 사람의 외양에 견주자니 60은 족히 되어 보였다. 앞니가 빠진 상태에서 지칠 대로 지친 표정이라 더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그들을 본 나의 '속물근성'으로는 저렇게 힘들게 의미를 찾을 필요가 있을까 했으나, 그들의 그러한 변치 않는 신심이야말로 티베트 망명정부가 꿋꿋하게 유지될 수 있는 이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로 돌아가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 않았던 아이 '라모'는 섭정 '레팅'에 의해 발견되었고 13대 달라이 라마의 환생인가를 테스트하는 관문을 모두 통과하였다. 그리하여 '라모' 소년은 불과 5세의 나이에 '고귀한 존재'라는 뜻을 가진 티베트의 14대 달라이 라마 '쿤둔'이 되었다.

그는 아이 특유의 호기심 많은 개구쟁이였으나 점점 스승들의 가르침을 받아 의젓한 쿤둔이 되었다. 그러나, 2차 대전 후라는 세계정세 속에서 중국과 인접해 있던 티베트는 위태위태했으며 우려는 1957년 모택동의 침공으로 현실이 되었다.

그들이 처음에는 평화적으로 나왔기에 쿤둔 또한 최대한 협조해 중국과의 평화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점령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들은 마각을 드러냈고 쿤둔의 고뇌는 깊어갔다.

선하기 이를 데 없는 티베트인들은 무참히 살해되고, 감옥에 갇히거나 행방불명이 되었다. 나아가 쿤둔의 생명까지 위협받기에 이르렀고 급기야 참모들은 그에게 국외로의 망명을 진언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티베트사람들을 위험 속에 두고 저 혼자 갈 수 없다며 거부하였다. 그러나 쿤둔이라는 구심점이 살아있어야 독립도 하고 평화도 되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거듭되는 참모들의 간청에 1959년 18세 나이에 말을 타고 천신만고 끝에 무사히 인도 국경에 닿았다.

험난한 여정에 몰골이 말이 아니게 된 그를 보고 인도 국경 병사는 '당신 누구요?'하며 무뚝뚝하게 물었다.

"아무 존재도 아닙니다."

실의와 자괴와 비통에 젖은 그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고, 그로부터 이 사춘기 소년은 당시 자신의 나이를 몇 곱 절 뛰어넘는 세월이 흐른 후인 아직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마침 이웃 아짐 집엘 갔다가 우연히 달라이 라마에 관한 책이 있어 펼쳐 보게 되었는데, 달라이 라마가 인도국경에 닿은 사진을 보게 되었다. 영화에서도 본 장면이었다. 그 빛 바랜 사진 한 장은 그 자체로 많은 것을 설명해주고 있었는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사실적이면서도 찡하게 그 사진에 담겨진 아픔을 고스란히 재연 해 준 것이었다.

<쿤둔>은 유희의 차원으로서의 영화가 아닌 그 어떤 평화운동보다도 더 평화를 갈구하는 소망이 담긴 영화였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부끄럽게도 뒤늦게나마 티베트라는 나라와 달라이 라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평화의 메시지가 전염병처럼 번져서 티베트의 해방은 물론 곳곳이 화약고인 이 세계에 평화의 바람을 일으켜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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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 - 지적 열정을 추구한 나의 삶, 나의 길
박이문 지음 / 미다스북스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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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인간답게 살다 죽는 것일까. 어떻게 살다가는 것이 가장 후회 없는 삶이 되는 것일까. 이는 삶의 중간 중간 누구나 한번씩 품어보는 의문이다. 인생이란 무대는 누구에게나 단 한번 뿐이고, 단 한번 뿐이기에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의 의미를 찾으려 애를 쓰기도 한다.

인간은 ‘빵’만으로도 살수 없지만 ‘정신’만으로도 살지 못한다. 게다가 오늘날은 어찌된 게 ‘정신’보다 ‘빵’에 더 비중을 두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솔직한 현실이기도 하다. 마음의 양식의 부족에는 눈 하나 깜짝 안할 수 있지만 물질적 부족에는 견딜 수 없이 불안해 한다.

그런데 박이문 선생은 불문학 교수라는 안정된 직장에서 ‘정신’을 논하고 살아도 뭐라 말할 사람이 없겠건만, 서른이 넘어 그 ‘안정’을 박차고 과감히 철학을 공부하고자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나는 영원히 해답이 없는 삶의, 그리고 모든 존재의 궁극적 의미에 목말라 있었다. 나의 근본적 문제는 지적인 것을 넘어서 아니 그 이전에 종교적인 것이었다. 만약 앎 자체, 앎의 투명성 자체만이 나의 실존적 문제였다면 나는 문학 대신에 수학에, 철학 대신에 자연과학에 관심을 쏟았을 것이다. 물론 지적인 문제와 실존적인 문제는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깊이 따지고 보면 구체적인 한 인간에게 있어서 지적 가치와 실존적 의미는 서로 뗄 수 없는 역동적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지적이고 실존적이라는 양면성을 띤 본능적 욕구’ 때문에 문학과 철학 그중 어느 하나도 소홀할 수 없었다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미다스북스)은 이와 같은 박이문 선생의 시와 철학 사이를 헤맨 여정의 넋두리를 철학적 산문으로 기록한 책이다. 솔직히 나는 ‘철학’이라는 주제는 너무 어렵게 느껴져서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어야 확실히 관심이 가 질 것 같은데 30대의 그는 철학을 위해 현실의 달콤한 안정을 버렸다.

내게 있어선 시 또한 소설이나 아름다운 산문에 비해 매력이 덜한 분야인데 박이문 선생은 70여 평생 그 ‘두 화두’에서 지칠 줄을 모르니 나의 무지가 쑥스럽다. 시인을 꿈꾼다는 넋두리를 그의 산문에서 많이 접했지만 5권씩이나 되는 시집의 존재는 정말 몰랐다. 때문에 철학자가 꿈꾼 시의 세계는 어떠한 것인지 조만간 그 궁금증을 풀어볼 생각이다.

'내가 택한 길은 지적 삶이다. 시인, 작가로서 인간의 영혼을 흔들 수 있는 예술작품을 열정적으로 창조하는 강렬한 삶을 살고 싶었고, 사상가, 철학자로서 여태까지 아무도 보지 못한 세계와 인간에 대한 궁극적 진리를 밝힘으로써 투명한 지적 삶을 살고 싶었다. 나는 넓은 의미에서 사상가인 동시에 시인, 철학자인 동시에 문필가를 줄곧 꿈꾸어 왔다.'

그는 지적, 감성적 삶과 더불어 ‘도덕적으로 선한 삶’에의 추구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진리가 중요하지만,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지적으로 뛰어나다 해도 도덕적으로 선하지 않은 인간의 삶은 보람과는 거리가 멀리라. 그는 이 ‘지적 투명성’과 ‘감성적 열정’ 그리고 ‘도덕적 진실성’이라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알맹이 셋을 평생 화두로 삼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의 20대를 일러 ‘우울한 허무주의자’로 30~40대는 ‘철학적 허무주의자’로 오늘의 그는 ‘행복한 허무주의자’라 부를 수 있을 것이라 했는데 끝까지 따라붙는 ‘허무’의 정체는?

그것을 그는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생각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삶의 궁극이 허무이긴 하지만 ‘살아 있어 느끼고, 생각하고, 활동’하는 과정의 ‘행복’또한 부정할 수 없기에 마지막엔 ‘행복한 허무주의자’가 되었으리라.

'꽃이 진다고 해서 그 꽃이 아름답지 않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조만간 죽어 흙이 되고 벌레의 밥이 되게 마련이라고 해도 삶 일반, 특히 인간의 삶은 아름답고 귀하다. 아니 우리가 머지않아 사라지기 때문에 그만큼 더 우리들의 삶은 보람을 갖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삶의 존엄성, 절대적 가치를 의식하고 삶에 대한 경외, 삶의 성스러움을 새삼 깨달을 필요가 있다.'

인간의 삶은 해마다 재생되는 봄의 속삭임과는 대조되기에 이 계절에 느끼는 박이문 선생의 삶에 대한 고찰은 한결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 이보다 더 달콤쌉싸름한 삶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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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크백 마운틴
애니 프루 지음, 조동섭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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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크백 마운틴'을 책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읽어보는 소설이었습니다. 그것도 외국소설이었습니다.

한때 소설을 즐겨 읽던 젊은 시절,좋은 문장 혹은 매력적인 표현을

줄쳐가며 읽은 적도 있었지만 어느순간 소설과 작별을 하였더랬습니다.

 

그러다 실로 이 얼마만인지. 우선 '브로크백 마운틴'부분을 연거푸 두번 줄쳐가며 읽었습니다.^^

문자가 주는 맛이 이런 것이었구나 하는것을 새삼 느끼게 된 순간 이었습니다.

 

이미 영화를 먼저보아서 그런지 책 내용의 토시하나, 쉼표하나까지 의미롭게 다가왔습니다만

이책을 영화없이 읽었다면 어땠을까 상상이 안갑니다.

아마 이토록 진한 느낌으로는 다가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읽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저자 소개에 보니 '에니프루'이분은 영화 '쉬핑뉴스' 의 원작자이기도 하더군요.

쉬핑뉴스는 케빈 스페이시가 신문사 윤전공으로 어리버리하게 살다가

얼떨결에 막가파여자와 결혼했다가 딸하나와 함께 버림받고서 고향으로 돌아가

역시 얼떨결에 바닷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쓰는 기자가 되어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고 자신의 뿌리에 숨겨진 비밀도 찾아내고  뭐 그런내용인데

 

여운이 좋은 영화였습니다.

 

아무튼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책은 어떻게 표현 하였나, 인용해 보겠습니다.

 

4년만에 잭이 엽서를 보내고 에니스를 찾아와서 상봉하며 둘은 뜨거운 포옹과 키스를 나누는데...

 

<...에니스는 잭이 몇 시에 올지 몰라 아예 하루 휴가를 내고서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며 먼지로 뿌옇게 된 거리를 내다 봤다........천둥이 으르렁 대던 늦은 오후, 예전과 다름없는 낡은 녹색 픽업이 굴러왔다...

 

뜨거운 동요가 일어 에니스는 등 뒤로 문을 당겨 닫으며 계단으로 나갔다. 잭은 계단을 두칸씩 두번 올라섰다. 두사람은 어깨를 움켜 잡았다. 서로의 숨을 쥐어짰다. 힘껏 껴안으며 개자식, 개자식, 읆조렸다. 꼭 맞는 열쇠가 자물쇠를 풀듯 쉽게, 그것도 세게, 둘의 입이 하나로 맞닿았다....

 

알마가 비틀린 에니스의 어깨를 잠시 바라보다가 문을 닫았다.....그래도 두 사람은 꽉 부둥켜안고 있었다. 가슴과 사타구니와 허벅지와 다리를 맞붙이고 서로의 발끝을 밟은 채 숨이 막혀서야 비로소 몸을 뗐다. 그리고 애정표현을 좋아하지 않는 에니스가 자기 말과 딸들에게나 하던 말을 했다. 내사랑.> 

 

음, 쬐끔 낯 간지럽기도 하군요.ㅋㅋ

 

브로크백 산에서 내려와 서로 해어져 각자의 길을 갈때 에니스는 무슨 창고 건물 같은 데서 헛구역질을 했는데, 그때의 심정에 대한 에니스의 고백은 이렇군요.

 

<그해 여름, 우리가 돈을 받고 헤어질때 복통이 너무 심해서 길옆으로 가 토하려고 했어.

뒤부아에서 먹은 게 잘 못된 줄 알았거든. 일년 뒤에야 깨달았지. 널 볼수 없게 됐기 때문이었다는 걸. 그걸 알았을때는 한참, 아주 한참 지난 뒤였어. 너무 늦어 버린거지.>

 

에니스가 잭의 부모님 집에 가서 피묻은 셔츠를 발견하는 장면은,

 

<셔츠가 어쩐지 묵직했다.그때 에니스는 잭의 셔츠 안에 셔츠가 하나 더 있음을 알았다. 잭의 소매 안에 조심스레 끼워져 있던 또 다른 소매는 에니스의 체크무늬 셔츠였다.

 

오래전에 빌어먹을 어느세탁소에서 잃어버렸겠거니 생각했던. 주머니는 뜯겨 나가고 단추는 떨어진 더러운 셔츠. 잭의 셔츠와 그가 몰래 가져가 여기 그 셔츠안에 숨겨둔 에니스의 셔츠가 두겹의 피부처럼 한쌍으로, 한 셔츠가 다른 셔츠에 안긴 채 둘이 하나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옷에 얼굴을 누르고 입과 코로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연기와 산 깨꽃과 잭의 땀 냄새를 기대했으나, 잔존하는 냄새는 더이상 없었다. 남은 것은 오로지 그 기억, 이제 손에 들고 있는것 말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마음속의 브로크백 산뿐이었다.> 

 

구스타프 산타올라야 음악 감독이 잭의 노래로 인용한 부분은 아마  다음대목에서

힌트를 얻은듯,

영화에서 에니스가 잭에게 멕시코의 게이바같은데 다시한번 더 가면 쥑이뿔 끼이다,라고 말하는장면이 있는데 그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고..

 

<이십년 동안 우리가 같이 있었던 게 몇번이나 되나 한번 세어봐. 니가 나한테 매 놓은 그 빌어먹을 짧은 끈을 재보고, 그런 다음에 멕시코에 대해서 물어봐, 그러고 나서 말해, 날 죽이겠다고.

 

내가 그 짓을 절실히 원했다는 이유로, 그런데 그 짓을 거의 할수 없었다는 이유로 날 죽이겠다고 말이야. 그게 얼마나 끔찍한지 넌 개뿔도 몰라. 난 니가 아냐, 일년에 한번 두번, 산위에서 두번하는 걸론 살수 없어, 에니스, 이 개자식아, 넌 나한테 너무 버거워, 널 끊을 방법을 알면 좋겠어.>

 

.....

 

책도 보고,영화도 보고,음악도 듣고....브로크백 마운틴에 대한 저의 사랑이 이쯤되면

부족하지는 않겠지 싶었는데 저의 권유로 브로크백을 보게된 친구가 저는 비교도 안될

사람의 얘기를 하나 전해 주었습니다.^^

 

즉, 친구는 씨네큐브에서 브로크백의 마지막 상영을 보고 그 다음날 아직도 그 여운이 꺼지지 않는 흥분된 상태에서 어떤 분을 만나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셨는지 하면서 말을 꺼내니

 

그분 왈,

 

" 친구중 한명은 그 영화가 너무 좋은 나머지 극장에서 무려 여섯번이나 봤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좋은 영화였어요?"

 

"물론 입니다! 저도 한번 더 보고 싶은 영화였어요."

 

저는 한번더 극장에서 보고 싶다는 생각을 극장간판 내려가고서야 하고서 땅을 쳤는데 여섯번씩이나 보았다니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분이 부럽더군요.^^ 해서 다음부터는 만약 브로크백 처럼좋은 영화가 있으면 보고난 다음 바로 표끊어서 다시 봐야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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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6-05-02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도 정말....마음 깊이 남아 있는 영화랍니다. 에니스에게 감정 이입이 되서 힘들었어요.영화를 보는 내내...... 이 영화 다시 한번 보고 싶네요.^^

폭설 2006-05-03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군요.^^ 브로크백 좋아하는 사람들은 시공간을 떠나 다 친구가 될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디브디는 왜 이렇게 안 나오죠? 기다림에 지쳐 목이 기린 처럼 길어지겠어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