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 상 Mr. Know 세계문학 12
알렉스 헤일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 열린책들
영화 <인사이드 맨>을 보면 주인공 형사인 덴젤 워싱턴이 워낙 당당하고 능수능란해서 백인형사인 윌리엄 데포는 초라하다 못해 조금은 그 허여멀건 피부와 함께 측은해 보이기까지 하였다.

선입견을 갖고 보자면 측은함은 흑인의 피부 빛깔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지 백인의 피부 빛깔에서 느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인사이드 맨>을 보면 백색이 우월하다는 것은 우리의 집단착각일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덴젤 워싱턴의 검은 피부는 그 하나만으로도 호연지기는 물론 신뢰의 원천으로 느껴졌었다. 그러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우리들 마음속에는 아직도 검은색 피부는 여전히 밀어도 밀어도 벗겨지지 않는 저주받은 피부쯤으로 각인되어 있는 것 같다.

어렸을 적 TV에서 본 <뿌리>는 흑인 노예의 참상을 다룬 드라마라는 것과 너무도 선명하게 ‘쿤타킨테’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데 그 <뿌리>를 최근 책으로 만나게 되었다. <뿌리>(열린책들)의 지은이인 알렉스 헤일리는 실지 외가 쪽으로 쿤타킨테의 7대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외할머니를 통해 먼 조상인 쿤타킨테 할아버지의 사연을 어제 일처럼 듣고 자랐다.

지은이는 "역사란 승자들 쪽으로 심하게 치우친 시각에서 쓰였다는 과거의 유산을 보완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소망"을 가지고 이 책을 썼다고 고백하였다. 이 책은 한 흑인 노예와 그 후손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루지만,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끌려간 수많은 노예들의 비참상을 유추해 볼 수 있기에 한 가계의 얘기를 뛰어넘는다.

열일곱 쿤타킨테, 숲에서 잡히다

쿤타킨테는 ‘1750년 이른 봄, 서아프리카 감비아 해안에서 나흘정도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나타나는 주푸레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오모로와 어머니 빈타 킨테의 첫 아들로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며 씩씩한 소년으로 자라났다.

엄격하고 혹독한 성인식을 무사히 치른 다음에는 이제 자신 또한 자신의 아버지처럼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낳고 하면서 살아갈 꿈을 꾸며 동생들에게도 너그러운 형이었다. 그러나 그의 나이 열일곱, 동생의 장난감 북을 만들어주고자 괜찮은 나무를 찾아 숲을 헤매다 어이없게도 노예 사냥꾼에게 잡히고 말았다.

발가벗은 채로, 쇠사슬에 묶이고, 발이 채워져서, 그는 찌는 듯한 더위와 구역질나는 악취, 그리고 비명을 지르고, 흐느껴 울고, 기도를 드리고, 구토를 하는 악몽 같은 광란으로 가득 찼으며, 칠 흙 같은 어둠 속에서, 다른 두 남자 사이에서 누운 채로 정신이 들었다. 그는 가슴과 배에서 자신의 토사물 냄새를 맡고는 손으로 만져 보았다. 그는 붙잡히고 난 다음 나흘 동안 매를 맞아서, 온몸이 고통으로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나 가장 아픈 곳은 양쪽 어깨 사이의 한가운데 인두로 지진 자리였다. -상권 178쪽

7대 후손인 알렉스 헤일리가 찾은 문서에 의하면 그는 1767년 ‘로드 리고니어호’를 타고 아나폴리스 항구에 도착한 140명 노예중 42명이 죽고 살아남은 98명중의 한사람으로 미국 땅을 밟았다. 그는 ‘최고급 젊은 검둥개’로서 존 월러라는 사람에게 팔렸다.

그러나 그는 노예로서의 삶을 거부하고 생면부지의 땅임에도 불구하고 탈출을 감행하였다. 탈출이 실패로 돌아가 붙잡히면 죽도록 얻어맞아야 했지만 그는 두 번, 세 번 탈출을 멈추지 않았다. 뛰어 봤자 노예 사냥꾼들의 손바닥 안이고 더 이상 어찌 해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네 번째 탈출의 실패로 오른발이 잘리고 난 후였다.

네 번째 탈출에서 붙잡혔을 때 그는 노예 사냥꾼을 향해 돌멩이를 던져 상해를 입혔는데 이해 격분한 노예 사냥꾼은 발을 자를까, 성기를 자를까하며 쿤타를 위협하였다. 쿤타는 진정한 남자는 아들을 두어야 한다는 내면의 울림에 자신의 성기를 가렸고 노예 사냥꾼은 쿤타의 발을 겨냥했다.

쿤타가 비명을 지르고 몸부림을 치는 사이에, 도끼는 번쩍 올라갔다가, 순식간에 내려쳐서, (살갗과, 근육과, 뼈가 절단되었고) 쿤타는 도끼가 쿵 나무토막에 찍히는 소리를 실제로 듣고는, 충격과 고통이 머릿속 깊숙이 되울렸다. 폭발하는 듯한 고통이 온몸에 충격을 주자, 쿤타의 상반신은 발작적으로 고꾸라졌고, 시뻘건 피가 잘린 발의 토막에서 뿜어져 나오자, 그는 떨어져 나간 발의 앞쪽 반 토막을 찾으려는 듯 두 손으로 정신없이 더듬거렸으며, 그리고 그의 주위는 온통 암흑이었다. -상권 282쪽

노예의 삶을 살며 스스로 '그리오'가 되다

발이 잘린 후로는 일꾼으로도 별 쓸모가 없는 존재였고 쿤타 자신 또한 탈출의 의욕을 상실했는데 다행이랄까. 존 월러 주인의 형인 의사 윌리엄 월러가 쿤타의 발을 자른 것에 격분하며 동생으로부터 쿤타를 샀다.

쿤타는 발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 새 주인이 된 의사 윌리엄 월러의 간호를 받았고 다 나은 다음에는 얼마간 정원사로 소일하다 윌리엄 주인의 마차를 끌게 되었다. 그리고 씨가 마르기 전에 어서 자손을 보라던 어느 늙은 노예의 말을 상기하며 윌리엄 주인의 오랜 요리사이자 자신의 발 상처를 정성껏 보살펴줬던 벨과 결혼하여 딸 키지를 낳았다.

그는 어린 딸 키지가 말을 배울 무렵부터 자신의 고향인 서아프리카 감비아 땅의 작은 마을 주푸레의 언어를 기억시켜주려 애썼다. 기타를 보고는 ‘코’, 강을 보고는 ‘캄비 볼롱고’로 가르치는 등 어린 딸에게 수없이 자신의 고향과 고향 말을 얘기했다.

열여섯 나이에 어이없이 부모를 떠나 다른 주인에게 팔려간 키지는 그의 아들 치킨조지에게 아버지 쿤타의 고향 아프리카를 뇌리에 심어주었다. 치킨조지 또한 그의 자식들이 태어날 때마다 쿤타 할아버지의 얘기를 되풀이 했고 그것은 몇 세대를 거처 알렉스 헤일리에게 까지 생생하게 전해졌다.

문자가 없던 시절, 쿤타의 고향 사람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말로 기억하는 구전역사가인 ‘그리오’를 두었었는데 그 그리오들은 수 백 년 역사를 한점 어긋남 없이 기억하는 존재들이었다. 때문에 한사람 그리오의 죽음은 오늘날로 치자면 도서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알렉스 헤일리는 마치 그 사실을 증명 해 받듯 자신의 6대조 외할아버지인 쿤타킨테와 그의 부모 형제 얘기를 그로부터 200년이나 지난 시대를 살고 있는 현재의 그리오에게서 정확하게 들었다.

쿤타킨테는 도서관 한 채와 맞먹는 ‘프로’ 그리오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뿌리만큼은 후세연연 그의 자손들에 각인시켜 ‘작은’ 그리오 역할을 하였다. 그것은 나아가 자신의 개인사를 넘어 아메리카로 잡혀온 흑인노예들의 총체적 삶을 되돌려 보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내 아이에게 <뿌리>를 얘기 해줌으로써 간만에 얘기다운 얘기를 해준 뿌듯함(?)을 느꼈다. 인간이 인간을 사고 팔다니, 이 부끄러운 역사의 부채를 백인들은 갚을 생각을 제대로 하고 있나 모르겠다. 흑인들이 말로만 평등이 아닌 진정한 평등을 맛보며 살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람이 <뿌리>를 읽고 나니 더 한층 강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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