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강지처클럽>이 단 2회 밖에 남지 않았다(총 104회). 참으로 긴 여정이었다. 이렇게 하나의 드라마를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도 매번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며 보게 된 것은 아마 <파리의 연인> 이후 처음인 것 같다.

 

돌아보면, <조강지처 클럽>을 일러 욕하면서도 보는 드라마의 전형인 듯 써내려간 글들을 많이 접했는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난 종종 그렇게 쓴 글들을 볼 때면 뭔가 진하게 안타까웠다. 이 드라마에 관해 내 주변 아짐들에게 물어보면 진한 현실반영에 공감할지언정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는 전혀 아니었다.

 

오십 중반 나의 언니도 재미있게 본다고 하였다. 특히 한원수(안내상분)의 촐싹댐이 재미있다고 하였다. 언니가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것은 나이가 나이이니 만큼 드라마 속 불륜의 면면들을 다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또, 그 나이 때가 되면 드라마 보다 몇 배는 더 한 사연을 두루 접했을 것이기에 드라마 진행상황을 '여유롭게' 관조하며 볼 수 있는 것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마흔 줄을 넘은 나이이다 보니 드라마 속 사연들의 작은 감정의 편린까지 이해되었다. 때문에 자기배역에 완벽하게 빠져들어 열연하는 주인공들이 대단하게 보였다. 아마 내가 20대였다면 이 드라마, 결코 이해 못했을 것이다. 뭐 저런 저질스런 드라마가 있나 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이가 나이이고 보니 다 이해가 되었다. 이 드라마를 씹는 많은 사람들이 억지 설정이라 하는데, 천만에. <조강지처클럽>의 주인공들은 억지가 아닌 나름 다 현실을 반영한 인물들이다. 다만, 이드라마가 현실과 다른 점은 유머로서 가슴 아픈 부분들을 희화 시키며 표현한다는 것이다.

 

만약, 유머 없이 심각하게 현실 그대로 그려냈다면 이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들이 때론 지난날의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웃으면서 이야기 하듯이 <조강지처클럽> 또한 웃긴 행동과 대사로 진실을 전달할 뿐이다. 주인공 면면들 다 나름의 사정이 있고 작가는 모든 사람의 입장을 다 살려준다.

 

다만 내가 이해 할 수 없었던 한 사람은 방실장(윤주희분)이다. 젊은 여자가 뭐가 아쉬워서 시종일관 한 남자에만 목을 맬까. 아무리 설정상 그랬다 해도 좀 더 일찍 그녀를 해방시켜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일었다. 요즘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젊은 여자가 있을까. 그렇게 똑똑하고 재력있고 예쁘게 생긴 여자가 말이다.

 

아무튼 이 드라마는 올해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본 유일한 주말 드라마다. 처음엔 오현경(나화신역)씨가 오랜만에 나온다기에 보기 시작했으나, 한원수의 '물 막춤'에 속이 후련하다가, 한선수(이준혁분)의 가슴 아픈 사연에 짠하다가, 길억(손현주분)의 한강다리 풍덩에 깜짝 놀라는 등 지난 1년 이 드라마에 많은 부분 공감했다.

 

그중 뭐니 뭐니 해도 이 드라마의 최대 백미는 모지란(김희정분)이 아닐까. 나는 그녀가 나쁜 아이들과 어울리며 딸 진주가 방황할 때 진주를 찾아가 설득하는 대목에서부터 꽂혔다. 엄마 때문에 니 인생 포기하는 일일랑 제발 하지 말고 학교로 돌아가라고 간절히 통사정하는데 진주는 독설을 퍼부으며 매몰차게 돌아섰다.

 

자신의 호소가 전혀 먹히지 않자 모지란은 안타까움에 어쩔 줄 몰라 하다 땅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오열했는데, 애 버리고 떠났다가 자식 잘못 되는 꼴 보는 어미의 심정을 그 보다 더 애절하게 표현할 수는 없으렸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도록 간절한 어미의 마음이랄까 염원이랄까가 연기가 아닌 실재처럼 느껴졌다. 아마, 그 부분은 애 낳고 키우는 엄마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했을 것이다. 아무튼 작가의 이전 드라마들 중 몇 작품은 다소 욕(?)을 하면서 볼 드라마였는지 모르겠지만 이 드라마만큼은 욕하면서 볼 드라마가 아니라 생각한다.

 

문영남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드라마, 두 번 다시는 쓸 수 없을 것'이라 말했는데 암만, 두 번은 못 쓸 것이다. 왜냐면 '불륜'에 있어서만큼은 작가의 모든 역량을 이 드라마에 쏟아 부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조강지처클럽>은 불륜종합세트로서 불륜의 <발단-전개-절정-결말>을 다 보여주고 있다. 하여간, 일 년에 걸쳐 104회라는 긴 대장정을 완주한 <조강지처클럽>에 시청자의 한사람으로서 관계자 모두와 종합세트로 대신 바람나준 주인공들에게 박수를 주고 싶다. 짝짝짝.

 

그리고 마지막 남은 2회분이 어떤 결말을 줄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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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한겨레에서 노무현대통령의 '민주주의 2.0'에 대한 시비를 읽고

'참 할일도 되게 없군' 하고 혀를 찾던 기억이 있는데 달마거사께서 한말씀 하셨네요.

그럼 즐감하시길~~~

한겨레의 노무현 죽이기
 - 먹물들의 노무현 악몽은 끝나지 않는다

(달마강원 / 김동렬 / 2008-9-24)




한겨레가 사설을 통해 노무현의 '민주주의 2.0' 출범을 비난했다고 한다. 오마이뉴스도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슬픈 일이다. 진보진영의 태생적 한계를 명확하게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다.

 

사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작업은 위험하다. 확실히 그들에게 스트레스를 준다. 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노무현 세력을 통제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 한 그들은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진보진영의 생명은 공론의 존중에 있다. 공론을 이끌어가는 세력은 시민단체와 한겨레와 오마이뉴스들이다. 그러나 노무현 그룹은 어떤가? 이들은 새로 떠오른 집단이다. 거기에 촛불 에너지가 가세했다.

 

노무현 그룹은 그야말로 막가는 집단이다. 진보진영의 공론과 동떨어진 주장을 하기 일쑤다. 하기사 노무현이 언제 진보인사들에게 물어보고 정책을 추진했던가 말이다. 견제구 날아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본질은 따로 있다. 그들은 노무현 1인의 일탈을 시비하고 있지만 그들이 진짜로 두려워하는 것은 노무현이 아니라 인터넷이다. 인터넷과 종이신문의 각개약진이 한겨레의 늙은 진보들에게는 두려운 것이다.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류의 두려움은 또 다르다. 그들 입장에서 노무현은 당장 페이지뷰를 뺏어가는 경쟁자다. 그들에게 골칫거리는 노무현이 아니라 다음 아고라 등으로 대표되는 신흥세력의 출현이다.

 

노무현 세력과 오마이뉴스는 지난 5년간 적당한 긴장과 협력의 관계를 잘 유지해 왔지만 촛불의 등장으로 달라졌다. 촛불은 젊고 행동지향적이다. 그들은 복잡한 오마이뉴스보다 단순한 노무현을 선택한다.

 

왜 촛불은 노무현을 원하는가? 노무현은 개입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마이뉴스는 촛불을 이용하면서 동시에 통제하려고 하지만 노무현은 촛불을 이용하지 않는다. 촛불은 노무현이 상징적인 구심점 역할만 해주기 바란다.

 

무엇인가? 오마이뉴스는 단일한 지도부 아래 잘 조직되어 있다. 촛불은? 실체가 불분명하다. 그들은 유령처럼 떠돈다. 그들은 파도처럼 몰아친다. 그들은 흩어졌다가 다시 모인다. 그들은 리더를 원하지만 지도부의 간섭을 거부한다.

 

촛불은 세력이다. 자체의 욕망을 감추고 있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통제가 안되므로 무서운 것이다. 촛불을 이용하려는 욕망을 가진 자에게는 촛불이 무서운 것이다. 촛불을 불러모으는 노무현이 싫은 것이다.

 

촛불과 노무현의 이심전심에 따른 환상적인 궁합이 무섭다. 배후에서 조종하지도 않은데도 너무나 잘 맞는 궁합이 두렵다. 촛불이 노무현을 이용해 역으로 오마이뉴스를 통제하려 드는 것이 더 무섭다.

 

왜 노무현이 무서운가? 과학이 있고, 철학이 있고, 사상이 있고, 이념이 있고, 미학이 있다. 그 중에서 어떤 포지션을 취하느냐다. 과학자의 포지션을 취하는 자는 편하다. 단지 진실만 규명하면 된다.

 

강단의 지식인들이 취하는 포지션이다. 그들은 현실의 문제해결을 위한 대안제시에 관심이 없다. 단지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며 사실을 논할 뿐이다. 그 다음엔? 각자 알아서 하라는 식이다. 나몰라라다.

 

그래서 잘못되면 타락한 정치인을 탓하고 우매한 민중을 탓한다. 그 뿐이다. 철학자들은 조금 더 현실에 개입한다. 철학은 총체적인 인식을 요하기 때문이다. 사상가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사상가들은? 결단한다. 왜 노무현이 문제인가? 무려 사상가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사상은 이념을 낳고 이념은 행동으로 옮겨지며 그 과정에서 세력을 형성한다. 그 세력은 물리적 힘을 가지며 지식의 통제권 밖을 벗어난다.

 

그래서 사상이 무서운 것이다. 동서고금에 탄압받지 않았던 사상가가 있었던가?

 

과학은 밝히고, 철학은 종합하고, 사상은 결정하고, 이념은 행동한다. 그 이념의 행동은 집단화 된다. 왜냐하면 행동으로 옮길 때 물리적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념은 힘을 가진다.

 

그 힘이 통제가 안 된다. 힘은 지식의 법칙에 복종하지 않고 물리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 물리의 법칙이 강단의 지식인들을 좌절하게 한다. 입 밖에 없는 지식인 입장에서 이념적 세력의 출현은 참으로 두려운 것이다. 

 

● 과학-이것은 막걸리다.(막걸리 하나만 안다)
● 철학-막걸리도 있고 소주도 있다(과학의 성과를 종합한다)
● 사상-막걸리와 소주 중에서 막걸리를 선택한다.(하나를 선택하여 짝짓는다.)
● 이념-막걸리를 마신다.(행동은 집단적인 세력화 경향으로 나타난다)
● 미학-막걸리 안주로는 김치가 제격이다.(양식을 완성한다)

 

강단의 지식인들은 거침없이 진보적 발언을 하지만 안전하다. 왜?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과격하게 마르크스를 팔지만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제재받지 않는다. 그들은 안전한 동굴 속에 숨어서 입으로만 진보한다.

 

행동하려면? 결정해야 한다. 막걸리와 소주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때 반드시 적이 생긴다. 막걸리를 선택하면 소주가 울고 소주를 선택하면 막걸리가 운다. 그러므로 사상가에게는 반드시 적이 있다.

 

과학자는 아는 척만 하고, 철학자는 입으로만 떠들고, 사상가는 외롭게 결단한다. 이는 구체화 하는 과정이다. 사상이 구체적으로 실천될 때 이념을 형성하며 집단화 된다. 이때부터 통제불능의 괴물로 발전할 수 있다.

 

한 사람의 가슴 속에서 싹튼 사상이 만인의 이념으로 실천된다. 무리가 모이고 과격해진다. 누군가가 희생된다. 진보이념이든 수구이념이든 마찬가지다. 이념이 정당화 되는 것은 더 나쁜 이념과 싸울 때 뿐이다.

 

###

 

노무현이 현실정치에서 손을 떼고 봉하마을로 내려간 것은 최선의 선택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노무현이 봉하 오리쌀로 대박을 일구어 피폐해진 농촌을 구원할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노무현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지?

 

‘에잇! 다 정리하고 고향에 내려가야지!’ 이런 말은 누구나 한다. 그런데 실천하는 사람은 적다. 노무현이 무서운 이유는 우리에게 ‘각자 제 자리에서 실천하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간디의 물레질과 같다. 간디가 물레를 돌려서 영국의 자본주의 공세를 물리치고 인도식 자급자족 경제를 번영시켰을까? 천만에! 간디가 그 자리에서 물레를 돌렸기 때문에 비로소 모든 인도인들이 각자 제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기업가는 돈으로 인도의 독립을 도왔고, 지식인은 웅변으로 도왔고, 몸뚱이 밖에 없는 사람은 몸빵으로 지원하는 식이다. 그것이 세력을 키우는 사상가의 방식이기 때문에 그들이 두려워 하는 것이다.

 

덧글..

이 글은 필자의 글 "노무현이 그렇게도 무섭나?"와 관계 있습니다.


※ 출처 - http://www.drkimz.com/bbs/view.php?id=notice&no=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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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언제 부터인가 .. 하늘색이 좋아졌다. 하늘색은 하늘색이기도 하지만

바다색이기도 하다.

작가 유용주씨는 '마린을 찾아서'라는 책 제목에서도 보이듯 바다색을 참

좋아한다고 하였던바, 마린중에서도 울트라 마린(가장 아름다운 푸른바다색)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는데

나도 어느새 그 색을 좋아하게 되었다.

 



 

 

최근, <맘마미아>란 영화에서도 울트라 마린이라 할수 있을 아름다운 바다색을 보았는데,

육지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하늘빛으로 그 바다색을 추억할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바다색은 진품이고 하늘색은 짝퉁이라는 것은 아니다.

둘다 용호쌍박.

 

아무튼, 하늘은,

하늘은 누구를 닮아 저렇게 넓고 또, 저 빛깔은 어디서 오고, 도대체 어떤 조합을 했기에 저리 아름다울수 있는지...

가을은 곡식이 익고, 울긋불긋 단풍이 지는 계절이기도 하지만

하늘이 가장 멋진 옷을 입고 우리들을 내려다 보는 계절이기도 하다.

 

 

가을 하늘 만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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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계차, 화개차 말은 있어도 하동차라는 말이 없어 나는 하동을 떠올리면 아랫마을 하동사람 윗마을 구례사람만 떠오르고 차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화개도 상계도 다 하동땅에 있는 것이었네. ㅎㅎ..
벗이 있어 이번 여름엔 하동을 가게 되었다. 예전 지리산을 가면서 두어번 하동땅을 밟은것 같은데
그때는 왜 차나무가 눈에 보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 때완 달리 이번엔 차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듣고 가서인지 눈에 띄는 것이란 온통 차밭 뿐이었다.
이밭저밭, 이산저산 땅떼기라고 보이는 곳에는 모두 벼아니면 차였다.
보성녹차, 한라녹차만이 아닌 하동녹차도 한몫함을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되었다.

 

 






친구집에 놀러갔는데 친구네가 급한 볼일이 생겨 먼저 가버리는 바람에 나와 두아이는 주인없는 집에 하루를 더 묵고 이튿날 화개면으로 나오는 시내버스를 타야 되는데 버스시간도 모르고 또 기다렸다가 타기도 싫어서 마냥 이길을 걸었다. 봄이면 이 벚꽃길을 걷고자 남도 사방에서 몰려와 야단 법석이라는데 우리들이 걸을때는
한여름이라서 그런지 간간히 자전거타는 남자들이 전부였다.

벚나무 그늘이 시원하여 별로 덥지는 않았는데 둘째가 힘들어 못 걷겠다며 난리를 쳐 '더위사냥'으로
에너지 충전을 해주고 걸었다. 다 걷고 보니 한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흘렀었다.
'이때 아니면 언제 걸어보나 싶어 걸었는데 녀석들 마음에도 이 벚나무길이 오래 남아있었으면...'


 


 

벗이 사는 마을 초입, 날은 덥고 갈길이 막역하여 사진도 귀찮았지만 억지로 찍었는데
여름 햇빛의 열기가 느껴지삼?

 



 

 

 통영에서 배타고 시간반(?)거리에 있는 추도라는 섬에서 일박을 하였다.
워매, 바다는 어찌그리 넓은지... 떠날땐 이 바닷물이 너무 무서워 여행이 성사되지 않기를 바랬는데..
막상 가니 바다가 좋았다. 아, 물론 풍랑이 거세었으면 파도가 치기전에 심장이 오그라 들었을 것이다..

 



 

 난 바다에서 제일 신기한것이 간조와 만조이다. 매일 한번씩 물이 빠지고 찬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다.
처얼썩, 처얼썩 썰물 밀물이 교차하면서 간조가 되기도 만조가 되기도 한다니 좀 쉬고 싶은 날은 없을까이?
이 간만의 차는 달의 인력 때문이랬나. 아무튼, 그 왔다리 갔다리의 흐름이 끊기지 않고 수년천 철썩였고 앞으로도 철썩일 것이라는게 너무 신기했다. 만약 혹, 달에 불상사가 생기면 어떻게 될까. 외계인이 달을 폭파해 버리면 어떻게 되는거지? 길 잃은 바다는 육지로 마구 급습해 올라나?




 

여름이라 그런지, 원래 섬날씨가 그런지, 습도가 무척 높았다. 햇볕은 눈이 부셔도 빨래는 잘 마르지 않았다.
언덕에 서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노라니.... 바다 만큼 인간에게 무한 상상력을 일깨워주는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상상으로 저 바라다 보이는 바닷물을 거대한 빨대로 몽땅 빨아서 육지로 보내버렸다.

물이 몽땅 빠진 바닷속이 궁금하지 않은가...ㅋㅋ 바다 맨  밑바닥의 땅을 파고 끝까지 들어가면 반대편 바다 밑이 나오는 걸까. 아니 맨틀과 지구핵이 막아서 뚫고 지나갈수 없는 것일까..ㅎㅎ


 

섬의 동백나무는 광안리 동백 못지않게 수령이 오래되어 보였다. 동백나무엔 석류같은 열매가 열려서
처음엔 석류나무인가 했는데 동백이었다. 열매가 하도 실해서 따서 술같은 것을 담가 먹을수 없나 의문이
들었는데 물어보지 못했다.


 



 

 

지인의 지인이 섬에 사둔 집. 섬에 집이 있다길래 어떤 집인가 궁금했는데 작고 아담하고 주인의 정성이 느껴졌다.
마당에 부어진 자갈, 동백, 담쟁이, 텃밭....등등은 일일이 주인장이 보수한 것이라고.

낛시를 좋아하는 분이라 섬에다 집을 샀고 은퇴후 일년을 머물면서 집을 꾸몄는데 고독이 밀물처럼 밀려와 다시 육지로 돌아왔다고..ㅋㅋ 대구에서 떠난 우리 일행(8명)에다 지인네 가족 4명등 대식구가 출동했는데, 너무도 친절하게 베풀어 주어서 무척 감사했다.


 



바닷가 집들은 다들 작고 소박하였다. 두엇 별장같은 집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옛집을 조금 고친 선에서 살고들 있었다. 1박 2일 짧은 일정이었지만 섬에서의 하룻밤은 10박 11일 처럼 긴 추억이 되었다.
글쎄 다시 한번 더 이 섬을 찾을 수 있을지... 다시 한번 더 가게 된다면 섬 구석구석을 한번 걸어보고 싶다.
이번엔 짧은 일정이라 그냥 바닷가에서 게 잡고 낛시하고 삼겹살 굽고 문어 삶아 먹고등 원초적
욕구들만 채우면서 보냈다.^^

결론은, 내마음에 섬은 몇년전에 가 본 '거제도'와 그리고 이번 여름에 본 '추도' 둘 뿐이다.^^
그중 '추도'가 더 짠하다. 거제도는 잘먹고 잘 살아서 그리고 커서 걱정이 안되나 '추도'는 왠지 외롭고 슬프다.
ㅠㅠ..


 



바닷가에 이런 집 하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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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일 차 우체국에 갔다가 손님이 많아 의자에 앉아 잠시 기다리던 중 모 여성지를 훑게 되었다. 이런 저런 화제 거리들을 넘기다가 류승완 감독이 큰딸을 대안학교에 보낸 ‘이유’에 시선이 멎었다.

 

‘성적비관으로 자살한 학생수가 8000명인데, 그 숫자는 베트남전쟁에서 사망한 한국인 군인 수(5000명)보다 많다는 것에 충격을 먹었어요.’

 

나도 얼마 전 신문에서 성적비관으로 자살하는 학생 수의 연도별 통계를 보고 무척 충격을 받았기에 그 심정 충분히 이해되었다.

 

아래는 얼마 전 신문에서 본 성적비관으로 자살한 10대들의 각기 연도별 사망자 수이다.



2000년.................. 264명

2003년.................. 297명

2005년.................. 279명

2006년.................. 233명

 

너무 많다. 통계의 기간을 몇 십 년 길게 통산하면 8000명이 충분히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어마어마한 통계완 달리, 한해에 우리가 현실적으로 알게 되는 성적비관 자살자수는 서너 명에 지나지 않는다. 해마다 입시철 언저리에 접하는 성적비관 청소년 자살은 언제 부터인가 명절 언저리의 명절증후군 기사만큼이나 의례 나오는 기사의 하나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런 기사가 뜨면 한 며칠은 안타까워하며 입시 제도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는 듯 하나 며칠 못가고 스리슬쩍 새로운 뉴스에 묻혀 유야무야  되고 만다. 마치 명절 증후군에 대한 기사가 명절 지나면 사라지듯이 성적비관자살 청소년에 대한 기사도 그렇게 사라진다. 괜히 자꾸 떠들다가 가만있는 청소년들 자극할라 나름 속으로 핑계도 대면서.

 

그러나 우리가 저마다 침묵하고, 그저 내 아이가 아니라 다행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이,  아이들은 소리 소문 없이 죽어갔던 것이다. 통계에 비추자면 매달 20여명의 아이들이 성적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일진대, 성적이 얼마나 압박하기에 하나 밖에 없는 자기 목숨을 내 놓는 것일까.

 

모의고사, 중간고사, 기말고사, 쪽지시험. 시험, 시험, 시험.... 기사들을 보면, 수능성적을 비관하여 목숨을 버리기도 하지만 중간고사, 모의고사 잘 못 본 것을 비관하여 아직 새파란, 입시와는 한참 거리가 있는 중학생마저 또는, 고3도 아닌 고1 마저 아파트 창문을 뛰어내렸다.

 

뿐인가. 매번 일등 하던 학생이 어쩌다 한번 미끄러진 일을 가지고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기도 하였다. 도대체 성적이 무엇이 관대 목숨보다 중요하게끔 느끼도록 우리 기성세대들은 아이들을 닦달한단 말인가.

 

막말로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 먹어봐야 맛을 아나. 아이들이 자기목숨으로 배수진치고 공부하고 있음을 통계가 확인시켜주면 우리사회, 우리 부모들도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할 텐데  왜 우리부모들은 ‘그래도 내 아이는 아니야’ 생 까고 있는 것일까.

 

내 아이가 아니면 단가. 내 아이가 아니고 남의 아이라도 해마다 2,3백 명의 학생들이 목숨을 버린다면 내 돈으로 내 아이 사교육 하는 일도 자제해야 마땅한 것이다. 교과부 장관, 시도교육감들은 이런 생목숨이 날아가는 데도 잠이 오는가 모르겠다.

 

아이들이 이토록 압박감을 느껴도 갈수록 사교육은 더 극성이 되어가고 있다. 국제 중은 거기다 기름을 부었다. 며칠 전에 보니 우리 국민들이 올 상반기에 쏟아 부은 사교육비가 15조랬나. 너무 어마어마해서 얼마나 큰돈인지 가늠이 안 간다.

 

게다가 그것은 전 년에 비해 10%인가 는 것이라는데, 결론적으로, 그렇게 사교육에 돈을 쏟아 붙는 만큼 그에 비례해 학생들이 느끼는 정신적 공황감은 더 세어질 것이다.

 

사이비 종교에만 ‘집단 최면’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학부모야 말로 ‘사교육교’의 맹신자들이다. 도대체 이 집단 최면엔 무슨 충격을 주어야 제 정신이 번쩍 들까. 학생들이 좀 더 뛰어내려 줘야 하니? 그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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