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키우는 입장에서, 아기한테 정말 중요한 게 잘 놀아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놀아준다라, 놀아주는 차원이나 범위나 방식의 면에서 적확하게 떨어지는 것이 없이 그저 감이거나 소문이거나 문장의 수준에 머무는 것들이 많다. 그러니 결국엔 내가 생각하는 차원에서 놀아주는 것이 전부다. (이럴 때, 감과 소문과 문장-책-에서 거리가 먼 나는 다소 자유로운 편이다. 그러니 내 주관으로 놀면 된다.)

 

 소득공제 때문에 아내와 슬뫼와 내가 학교로 총출동했다. 아내는 이것저것 소득공제 관련 업무를 내 자리에서 보고, 나는 슬뫼와 학교 운동장이며, 잔디밭이며, 복도며, 도서관을 오가며 잘 놀았다. 아기가 노는 장면을 잘 관찰해보면, 아기의 놀이는 인형이나 로봇, 자동차 같은 장난감에 지배당하지 않는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공간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아기 스스로 공간을 재창조하고, 재배열하며, 지배할 수 있을 때, 놀이는 다양하게 변주되고 창의적이며 몰입하는 경향이 있다. 이건 아파트 거실에서의 놀이와 산이나 운동장에서의 놀이를 잘 비교해보면 관찰이 쉽게 된다.

 

 슬뫼와 집 안에서 놀아보면, 공간의 창조는 별로 없다. 거실에 배치된 그 공간이 슬뫼가 자각하는 공간의 수준이며, 결국 그 공간 안에 배치되거나 나열된 놀이감을 중심으로 아기의 놀이는 배치된다. 그러니 엄마는 자꾸만 아기의 장난감을 늘려가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곧 한계에 부닥치게 되며 그럴 수록 하나둘 장난감만 늘어갈 뿐이다.

 

 그런데 슬뫼를 데리고 운동장이에 놀러 나가보면, 공간 모두가 놀잇감이 됨을 알 수 있었다. 흙, 거기에 파묻혀 있는 막대기, 돌, 그저 굴러다니는 바람빠진 농구공, 그냥 뛸 수 있는 공간. 그것들을 이래저래 엮고 얽어서 놀잇감으로 만들 줄 알았다. 내가 이걸 처음 발견한 것은 교대 앞에 있는 `책과 아이들`이라는 도서관겸 서점 마당에서였는데, 슬뫼는 어리숙한 걸음으로 숲길-이라고 해봐야, 내 걸음으로 6,7걸음이면 통과하는 곳이다-을 걷고 거기서 놀잇감을 만들며, 그 놀이에 집중하고, 또 시큰둥했다가 다른 놀이를 금세 만들었다. 바위에서 뛰어내리기, 흙만지기, 나무 만지기, 엎어졌다 일어나기, 나무 뒤에 숨기, 나무가지고 장난치기 등, 공간에 그냐 있는 것들로 온갖 놀이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보며 나는 좀 놀랐다.

 

 꽤 전에 `아이들은 왜 자연에서 자라야 하는가`라는 책을 읽었다. 결국 거기서 하는 이야기도 자연은 아이의 상상력, 창조력을 길러낸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오늘 저녁을 오롯이 슬뫼와 단 둘이 보내며 먹거리를 챙겨서 먹이고 놀고, 씻기고, 이야기를 하며 잘 놀았다. 특히 슬뫼가 기차 놀이를 좋아해서 차를 여러대 붙여 놓고 노는데, 슬뫼가 `칙칙폭폭`하며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게 신기하고 놀라워서,

슬뫼야, 3월 봄이 오면 아빠랑 기차 타고 놀러갈까?

어디로 가지? 삼랑진 시장에도 들르고, 원동 매화도 보러 가자.

거기 갈 땐 슬뫼 좋아하는 도시락 싸가서 놀고 오면 좋겠다, 그치?

 

 

하니까, 슬뫼가 활짝 웃으면서 박수를 치는 게 아닌가.

하나둘, 슬뫼와 보낼 봄과 여름이 내겐 그려지고 있다.

이 순간을 무작정 사랑하리. 이 길 외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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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2 17: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햇귀 2012-01-31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쿠, 샘이 댓글 확인이 늦었네.
슬뫼 보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랬어.
설은 벌써 지났지만, 아직 보름이 지나지 않았지?
옛날엔 설 분위기가 보름까지 이어졌대.
그러니 지금 설 인사 해도 늦이 않은 거야~ㅋ

꿀이도, 올 한 해 행복하고 거창한 일들이 많길 바라.
물론 지내다 보면 힘든 굽이도 만날 테지만,
꿀이는 잘 이겨낼 거야~
 

 산악회에 발을 디디고도 산을 몇번 오르지 않은 것 같다. 내 생활의 리듬에 맞춰, 혹은 산에 가기 귀찮다는 까닭에 (6시 30분까지 범내골에 가려면, 5시 30분에는 일어나야 한다 )수정하며-가지 않아도 되는 어딘가를 가는 걸 만드는 것 같은- 어영부영, 대충대충, 내 마음이 생겨나는 때에 따라, `저 산에 갑니다.` 이렇게 글 올리고 따라나섰지. 대장님이나 외생 아저씨, 원종이 형, 승진이, 보현 선배님(언젠가 꼭 `형님` 이렇게 불러 보고 싶은... 특히, 이번 집시 여행에서 `공동체` 이야기는 나에게 공감이 큰 내용이었으니까)은 늘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가끔, 생각날 때, 산을 찾는 것 같아, 마음이 미안하기도 하고, `이렇게 따라나서도 되는가?`하는 의구심같은 게 자꾸 일었다. 그래도 외생 아저씨의 `언제든 우리는 늘 이 자리를 지킨다.`는 말이 위안이 되어 그냥 따라나서지만...

 

 벌써 지난 해가 되어 버렸지만, 지난 집시 여행을 하면서도 나는 마음 속에서 산행을 기다리고 기대했던 것 같다. 이유같은 것은 묻지 마시라. 그침과 거침이 없는 발걸음. 살면서 당연한 그것들을 놓치고 사는 순간들이 무척 많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지 않나. 이런 저런 조직과, 이런 저런 삶 속에 툭 하고 나를 놓치고 있다는 자각. 그 툭 하는 소리의 질감이 느껴질 때, 내 자리는 대체 어디지? 하는 막연함, 외로움, 쓸쓸함, 고독감 같은 것. 그래, 나는 지난 한 해, 그 외로움이 내게 큰 과제였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속에서의 일어나는 그 엄청난 힘들을 상실한 난, 무척 외로웠으니까. 학교에 있으니까, 학생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그 쓸쓸함과 나의 무력감은 참 괴로웠으니까.

 

 그래도 다행스러웠던 것은 사람 - 이렇게 말하기에는 좀 가벼운 느낌이 든다. `분`이라도 쓰기도 그렇고.- 이 있었다는 것. 슬뫼와 아내와 같은 학년을 담당했던 국어과 선생님들, 그리고 전교조 선생님들. 결국, 삶의 틀에서 온 문제를 역시나 삶의 틀에서 위로받고 있었던 거다. 더 나가면, 결국, 사람이 문제라는 거겠지. 그러니 나는 내 주변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두고 싶다는 욕심이 이는 것이고.(나는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욕심 같은 건 부려본 적 없는데, 좋은 사람을 많이 알아두고 싶은 욕심은 있다. 참 이기적이다.) 그래서 파르티잔 산악회 사람들과 보다 더 가까이 지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일 수도...(그런데, 여기서 확인되는 나의 성격 문제. 나는 결코 사람을 편하게 대하지 못하는 것 같다. 형이면 형, 동생이면 야, 동갑이면 누구야, 이렇게 부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직 나는 그게 힘들다. 이제 겨우, 원종이 형, 대현아, 승진아... 이러고 있다. - 이렇게까지 쓰고 보니, 나는 호칭에 꽤 신경을 쓰는 사람이군 )

 

 이야기가 좀 딴 데로 샜다. 처음 쓰는 글이니까 다들 용서하시라!!

 

 결국, 사람이 좋아서, 내가 위로받고 싶어서 산을 찾는다는 이야기인 셈인데. 또 누구는 나에게 보태길, `수행하는 사람은 원래 산을 오릅니더. 노무현 전 대통령도 부엉이 바위로 올랐지예.`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 말뜻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지만, 산행을 하는 사람들은 수행하는 사람들과 비슷하다는 뉘앙스로 읽혔다. 그래, 오르면서 무언가 곱씹고 되돌아보고 - 혹은 지금 순간, 왜 이리 힘드노 하는 그 모든 것들이 - 하는 것들이 수행의 자세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면, 나는 산을 오르면서, 파르티잔을 통해서 삶을 수행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감사하게)

 

 첫 산행으로 신불산이 떴다. 집에서도 가깝고, 장인 어르신의 고향 근처라 몇번 그 언저리까지는 갔던 기억이 났다. 신불산 자연휴양림에서도 1박을 했었지. 장인 어르신은 소싯적 슬리퍼를 신고 간월산을 올랐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이야기 듣고, `산이 좀 쉬운가.`이런 생각했었고. 간월산 옆에 신불산이니, `뭐, 어렵지는 않겠네.`하는 생각을 했다.(사실, 내가 좀 엄살을 떨어도, 어렵다고 느껴진 산은 없었다. 물론 순간 순간 힘든 시간이 있었던 적은 있었지만, 오르지 못할 산이 어데 있을까 싶다. `외생 아저씨 미안요~~ 킬리만자로 킬리만자로`)

 

 이른 시각, 등억 온천지구에서부터 오르기 시작했다. 좀 많이 가파르고(대장님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 주목 선배님은 완전 공감하실 듯~) 돌이 많아서 불편하고, 숨이 가빠오기 했지만, 확 땅겨오는 허벅지 근육의 탱탱함과 긴장감을 느끼는 것은 통쾌했다.(내 몸이 그걸 견디는 걸 확인하는 순간의 희열같은 것) 그리고 내다 보이는 풍경의 시원함은 겨울의 찬바람 물럿거라 그거 아닌가.

 

 2시간쯤 올랐나, 신불산 정상에 섰다. 저기 간월산이 보이고, 반대쪽에 영축산이 보인다.(사실, 나는 통도사에 여러번 가면서, 저 뒷산-영축산- 참 좋네, 오르면 좋겠다. 이런 생각 많이 했다.) 저 영축산에 오르는 꿈을 몇 번 꿨지. 그런데, 아쉽게도 이번엔 여기서 하산이란다. 하지만 신불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산 능선의 이어짐은 한이 없다. 멀어질 수록 점점 옅어지는 게 한 폭의 수묵화 같다.(이쯤에서 우리 나라에서는 수묵화가 우리 풍경을 나타내기에 적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능선을 영남의 알프스라지. 산악회에서 5월 중에 알프스 종주를 계획한다는데, 마음이 확 쏠린다.(그런데 또 이쯤에서 충돌. 난 제주도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어쩌지?)

 

 신불산 정상과 간월재 중간 어디쯤에서 점심을 먹고 하산했다. 하산길은 오르는 길에 비하면, 지루했고, 근육의 땡김이 전혀 없었으며, 솔직히 말하면 `무척 좋았다` 특히나 대현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내려온 게 배운 게 많았다.(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산을 오르는 순간은 수행의 순간이 맞는 것 같다. 내려오면서는 이런 저런 반성도 하게 되니까.)

 

 파르티잔을 안 지도 4년째 접어드는 것 같다. 1,2년 때에는 잘 느끼지 못했는데, 4년째 되면서도 정식 기수가 되지 못한 건, 좀 그렇다. 부끄럽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고. 올 한 해, 또 삶이 어떤 굽이를 만날 지 장담은 못하지만, 산에 자주 오를 수 있길, 하는 바람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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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의 직무 연수가 끝났다. 방학 동안 무언가를 해야 할 것은 같았고, 그렇다고 딱히 하고 싶은 것도 떠오르지 않던 차에 `사마타 위빠사나 명상` 연수가 올랐다. 명상이라니,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세계, 또는 영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 같다는 기대와 희망으로 연수 신청을 했다. 자꾸만 피폐해져가는 것만 같은 내 삶을 정돈하고 북돋아야 할 필요 또한 있었기에 그런 용기가 가능했으리라.

30시간의 연수를 받았지만, 아직 사마타 위빠사나 명상은 내게서 멀다. 부처님의 수행법 가운데 하나라는데, 이걸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은 모르겠다. 그저 그 잠오는 듯한 고요와 적은 파동으로 쉬어지는 숨길이 내겐 평화같은 거였다. 그 적막과 고요가, 번다한 일상에서의 탈출이 내겐 큰 쉼이었다. 40분을 앉아서 명상을 해도 몸에 크게 무리가 없는 걸 보고, 마음의 평화가 몸의 평화로까지 이어지는 건가 신기해 하면서, 명상의 효험(?)을 알아갔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 사춘기 시절 엄청 올라왔다. 딱히 답을 찾지 못해 방황했던 시절이 아득하다. 그때 혹시 이 길을 알았다면, 지금도 잘은 모르지만 무언가 있을 것 같은, 이대로 가면 희미한 빛 하나쯤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으로 이 길을 알았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아내가 말하는 그 무거운 짐을 벗어던질 수 있었을까? 그 방황의 시절, 헤르만 헷세의 <싯타르타>를 읽으며 강의 소리가 궁금했기도 했다.(얼마 전에 그 책을 다시 읽었다. 시간이, 아니 마음의 여유가 나면 리뷰를 써야지 마음 먹고 있다.)

 

명상에 대해 달리 더 이상 뭐라 말할 수는 없겠다. 아직은 나에게 미궁이고 더 나가봐야 할 길이다. 미궁은 결국 진리에 가닿기 위한 길이라지. 그렇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에서 선생님들과 주기적으로 명상을 할 수 있는 자리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방학이니까 몸과 시간이 자유로운데 개학 이후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다만 좋은 판이 꾸려지길.

 

연수가 끝나고 주강원, 양윤복, 이선동, 명상 선생님과 간단히 막걸리 한잔 했다. 그냥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갔는데, 특히 주 선생님이 나에게 농사를 권하셨다. 주 선생님 댁 근처에서 약 300평의 농사를 짓고 계시다는데, 함께 주말 농장 겸 해보는 것은 어떻겠느냐 제안하신 거다.

농사라. 어제 리뷰로 올린 <검사 그만뒀습니다>에서도 농사 이야기를 적었지. 인연이란 이렇게 느닷없이 이어지는 것인가 보다. 처음부터 끝까지를 온전히 다가갈 수 있는 것, 몸의 움직임이 주는 묘한 느낌을 말씀하셨다.

 

명상이 농사로 이어지는 모양새다. 이 인연대로 또 흘러가야 할까보다. 어디에 닿을까는 생각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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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그만뒀습니다 - 국민참여재판 1호 검사 오원근의 버릴수록 행복한 삶
오원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작년 연말에 사두었다가 새해에 곧장 읽었다.

몇 년 전에 일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혹은 그들이 말하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법조계의 비리나 문제점들을 밝힌 <불멸의 신성가족>을 읽었다. 그 책을 읽으면서는 `우와~ 얘네들 TV나 신문에서는 억수로 무게잡고 있는 척 하더니, 겉과 속은 다르네.`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을 주문하면서도 <불멸의 신성가족>처럼 법조계의 문제를 다루지 않았을까, 앞선 책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더 내밀한 부분, 예를 들면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의 문제점을 검사의 입으로 들려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제목이 <검사, 그만뒀습니다>이니 충분히 그럴만 했다. 특히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검사를 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고 하는 저자가 아닌가!

그러나 읽어가면서 내 기대가 무참히 무너졌다. 좀더 신랄한 검찰청 내부의 이야기를 기대했던 내가 어리석었다. 삼성의 문제를 거론했던 김용철 변호사가 당한 아픔과 상처만 봐도 자신이 속한 조직의 이야기를 자신의 입으로 거론한다는 게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자신의 생을 거는 일은 아닐까. 실망 이전에 기대를 접는 게 어쩌면 현명했겠다.

 

대한민국에서 검사는 무소불위의 권력이다. 전직 대통령도 죽이지 않았는가. 맘에 들지 않는 정치인을 감옥에 가둘 수도 있지 않는가. 그렇지만 이들은 그 누구로부터 감시와 견제를 받지 않는다. 한쪽에는 봐주기, 부실, 축소 수사를 하고 반대쪽에는 과잉, 표적, 보복 수사를 하면서 국민의 원성을 사도 그들은 염치를 모른다. 아, 염치를 모르는 검찰 지도부가 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검사를 `그만 둔` 저자 오원근 때문이다. 검사는 대한문 앞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빈소에 조문을 하면서 검사직을 떠날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그는 부당한 검사 권력에 대한 소극적 저항으로 사표를 썼지만,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다른 데 있어 보인다. 버릴수록 행복해지는 삶의 진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릴 적 몹시 가난하게 자랐다. 아버지는 경제적 능력이 없었고, 어머니는 행상으로 생계를 이었다. 아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상처도 입고 나름의 의지도 세웠다. 각고의 노력 끝에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법조인이 되었다. 성인이 되고 높은 지위에 올랐음에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는 여전히 좌판을 깔아놓고 장사를 하고 있다.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이 인연이란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어머니, 아버지의 삶은 자식인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그분들의 팔자라는 깨달음.

이런 깨달음은 그저 주어진 게 아닐 것이다. 살아온 연륜에서 온 것도 있겠고, 정토회의 깨달음의 장이나 100일 출가를 통한 영적인 성숙도 한몫했겠지.

저자는 정토회 100일 출가에 나선다. 100일 출가라... 곱씹을수록 그 시간의 끝없음에 놀랍다. 하나에서 백까지 헤아리기는 쉽지만, 100일은 어쩌면 삶을 많이 변화시킬 수 있는 시간일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3일 동안 만배를 하고 100일 출가에 들어간다. 그 100일 동안은 다른 스님과 같은 생활을 했겠지. 그 사이 어떤 깨달음 같은 게 있었는지(100일이라고 어떤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꼭 아니지만) 드러나 있지 않지만, 그런 영적인 삶을 살겠다는 자세를 보이는 것만으로도 대단해 보였다.

 

농사를 짓지 않고서야 한 생을 살았다고 말하지 말라는 문장을 어디선가 봤다. 농사는 그저 하는 육체적 노동은 아니다. 생명의 씨앗을 뿌리고 키우고 기르고 수확하는, 생의 처음부터 종결까지를 다스리고 몸으로 다가가는 일이다. 그런 일을 하지 않고 삶을 살았다고 말하지 말라는 언설은 좀 과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분명 살아간다는 일과 농사의 전 과정은 통하는 면이 있어 보인다.

저자는 농사에 대한 애정이 대단히 강하다. 그래서 변산공동체에 가서 생활도 해보고 간단한 농사 정도는 짓고 있다. 이러면서 땅이나 자연이 주는 영험한 힘을 몸소 깨닫는 거겠지. 이 책에서도 농사를 향한 저자의 마음이 간절히 읽힌다.

그리고 저자는 자연을 사랑한다.(이것은 자연보호 할 때의 사랑과는 다르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 아이들을 자연과 가까운 곳에 두려고 노력했다. 캠핑이 그 노력의 첫째인데, 호텔방처럼 모든 게 갖추어져서 편안함같은 것은 없지만, 자연의 그 거침 가운데 새로운 에너지가 생성되고 움직이고 있음을 깨치고 있었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자연이 우리 인간에게 제공하는 건강한 기운을, 자식들로 하여금 마음껏 누리게 하지 못하는 것은 커다란 죄악이다. 아이들은 그 기운을 흠뻑 받으며 자라야만 건강하고 원만한 인격체로 자랄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 192쪽

 

 저자는 누구나 마다않을 검사를 버렸다. 그리고 행복을 얻었다. 그의 행복의 근원은 자연, 농사, 불교(100일 출가)였다, 이것은 모두 자연스러움과 관련되는 일이다. 누군가 `정의란 무엇입니까?`라고 저자에게 물은 일이 있는데, 저자는 `자연스러움`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렇다. 저자는 검사직을 떠나면서도 정의를 추구했고, 그것은 자연스러움에 있었다.

 

 요즘 아이들은 우리보다 더 넓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 집에 다녀와서는 ``우리도 30평 넘는 집으로 이사를 가자``라고 한다. 아내와 나는 아이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조용히 무시한다. 우리는 행복의 척도는 결코 돈의 많고 적음이나 집의 크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 행복은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소박한 삶에 있다. - 202쪽

 

 어깨에 힘을 빼면서 보다 자연스러워진 오원근. 그것으로 보다 행복해진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꽤 전에 봤던 정호승님의 시 한편이 떠올랐다.

 

 산사로 가는 길

                                  정호승

 

산사에 오르다가

흘러가는 물에 손을 씻는다

물을 가득 움켜쥐고

더러운 내 손이 떠내려간다

동자승이 씻다 흘린 상추잎처럼

푸른 피를 흘리며 계곡 아래로

나는 내 손을 건지려고 급히 뛰어가다가

소나무 뿌리에 걸려 나동그라진다

떠내려가면서도 기어이 물을 가득 움켜쥔

저놈의 손을 잡아라

어느 낙엽이 떨어지면서 나뭇가지를 움켜쥐고

어느 바위가 굴러가면서 땅을 움켜쥐고

어느 밤하늘이 별들을 움켜쥐고 찬란하더냐

산사의 종소리가 들린다

관 밖으로 툭 튀어나온 부처님의 발을

다시 관 속으로 고요히 밀어넣는

저 저녁 종소리를 들으며

움켜쥔 것은 모두 놓아버리고

손이여

물속에서도 풍경소리 울리는

한마리 물고기가 되어 바다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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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지에 실을 글을 이제야 다 썼다.

한 며칠 머리에 둥둥둥 떠다니던 말들을

끄집어 내려 글을 쓴다는 것은

참 쉽지 않다.

 

---

 

  

아기는 무엇으로 크나


김은규



 슬뫼가 21개월을 살았다. 나이로는 세 살. 처음엔 잘 몰랐는데, 최근 들어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엄마`만 할 줄 알던 아기가 `엄마, 이거 이거`를 하고, 이제는 `아빠`를 한다. 알고 싶은 게 있으면, `이거 이거`를 외치며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도 한다. 난 별달리 한 게 없는데, 슬뫼가 이렇게나 커서 놀랍기도 하고, 아내한테는 미안하기도 하다.


품안의 열 달, 가슴 졸인 시간들


 아내의 임신을 2009년 5월 해인사 여행 후에 알게 됐다. 무척 긴장한 얼굴(인 걸로 기억하는데)로 아내가 `나, 임신인 것 같아.`말했을 때, 나는 사실 실감이 전혀 나지 않았다. 결혼을 해서 사는 것도 좀 벅찼던 때라 새로운 생명의 생성은 감이 좀 멀었다. 그 뒤로 산부인과에 가고 확인을 하고, 몇 번 더 병원에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의사 선생님의 `다운증후군 고위험군이예요. 보다 정밀한 검사를 받으셔야 합니다.`하는 말은 임신 소식보다 훨씬 큰 무게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게 임신 5,6개월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날로 아내는 눈물바람이 되었다. 계획한 육아와 그 이후의 생활이 모두 무너지는 일이었으니 그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달짱을 낳을 거예요?`고 묻는데, 그 참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물음이었다. 몇 개월 품고 있던 생명도 자식이라고 `지우자.`는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우리한테 내려온 생명인데, 우리가 키워야지.������하는 말로 아내를 다독였다.(그러면서도 솔직히 내 마음은 좀 복잡한 구석이 있었다. 아내와 나의 삶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 솔직히 두려웠던 거다.) 그리고 아내와 나는 결단을 했다. 보다 정밀한 검사를 거부하고(검사 결과와 상관없이 우리는 출산을 결심했으니까, 정밀 검사는 필요하지 않았다.) 태교에 더 마음을 썼다. 그리고 병원을 바꿨다. 새로 찾은 병원에서는 입체 검사를 통해 ������다운증후군은 아닌 것 같은데요.������라고 말해줬다. 그 말이 지금껏 내가 들어본 말 가운데 가장 고마운 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뒤로 마음은 많이 가벼워졌지만,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때 아내의 태교는 좀 특별한 구석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불교 경전의 하나인 <반야심경>을 한자로 공책 몇 권이 되도록 베껴 적었다. 몇 번 하다 보니 그게 저절로 외워져서 슥슥슥 적어 내려가는 게 나는 신기했다. 남편이 별 도움이 되지 않고 마음이 심란할 때 주로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정토회 법회나 요가, 명상을 꾸준히 했고, 풍욕을 꾸준히 하면서 달짱을 둘러싼 우주인 양수를 깨끗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원래 육식은 거의 하지 않았지만, 임신 기간 동안엔 보다 철저히 채식 위주의 식단을 짰다. 아내의 모든 관심은 달짱에게로 집중되어 있었고, 남편인 나는 또 다른 세상에서 혼자 지냈던 것 같다.(아, 돌아보면 부끄러운 순간이 많다. 지극정성이었던 아내에 비하면, 난 한 게 아무 것도 없다. 아내 애만 채웠다.)

 출산의 방식도 자연주의에 따르기로 했다. 우리 혼례 길눈이 말씀을 해주신 선생님께서 미셸 오당의 <농부와 산과의사>를 꼭 읽어보라고 권하셨는데, 아내는 그걸 읽고 보다 용기를 낸듯했다. 어쨌든 우리는 의학의 도움을 받지 않고 조산원에서 3.8킬로의 달짱을 만날 수 있었다.(사실 나는 나의 고향집 안방에서 태어났다. 소가 제 살던 마구간에서 새끼를 낳듯, 우리 엄마는 안방에서 세 자식을 모두 별 탈 없이 낳으셨다. 병원에서 인류를 낳기 시작한 역사가 이제 갓 100년 될까?)


나의 로망, 육아 휴직하는 아빠


 아내에게는 출산, 육아와 관련해서 강고한 원칙같은 게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36개월 부모 품에서 키우기`다. 육아 전문가나 법륜스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데, 아내도 이런 원칙을 삶에서 실현하고 싶어하는 눈치다. 양가 어르신들께서 걱정시지만, 육아에서 절대 강자는 엄마가 아닌가.

 아내는 이런 원칙하에 2년째 육아 휴직을 하고 있다. 슬뫼와의 모든 순간이 소중하고 경이로운 시간이란다. 물론 때때로 힘든 순간이 없지 않지만, 품안의 자식이 자식이라고, 이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것임을 아내는 아는 눈치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한 아이로 길러 제 힘으로 세상을 헤쳐나가길 바라는 마음이 읽힌다.(참고로 아내는 슬뫼에게 다짐하듯 곧잘 이런 말을 한다. ������딱 36개월까지야.������그때까지 이 열정적인 육아를 이어가겠다는 거다. 그 다음은 아기의 몫이라고) 그러니 저렇게 열정적으로 육아에 임하지. 지난 2년 동안 천기저귀(태어나고 한동안 천기저귀를 사용했다. 지금은 팬티 기저귀를 사용한다.) 모유수유, 건강한 먹거리, 엄마 교육, 온갖 감각 놀이 등 아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냈다고 인정한다.

 그런데, 돌아보면 나의 자리는 뭐였나? 싶을 때가 많다. 아빠는 아빠이긴 한데, 내가 한 역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딱히 보이지 않는다. 표현은 쉽지 않지만, 그래서 아내한테 특히 슬뫼한테 미안하다.(근데, 그럴 수도 있다. 나도 평균만큼은 했지 싶은데, 아내가 저리 열정적이니 내가 상대적으로 초라할 수도 있다는 말씀~)

 그런 것 다 제쳐 놓고, 나에게도 육아 원칙이 있다. 이건 총각 시절부터 꼭 마음에 품었던 건데, `아빠도 육아휴직하기`다. 이것을 선택한 것은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일곱 살 때 아버지를 여읜, 내 최대의 상실에서 비롯한 것일 수도 있겠다.

 얼마 전에 우리 나라 육아 휴직하는 남성의 수가 1,000명을 넘었다는 기사를 봤다. 나는 그 기사가 믿기지 않았다. `에개, 고작 1,000명이야?` 내가 0을 하나 빼먹지 않았나 싶어 다시 봤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내가 육아 휴직을 맘 편히 선택할 수 있었던 만큼 다른 사람도 그리 할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사실, 육아 휴직을 한 그 천명의 남성도 아마 나같은 공무원이거나 공기업의 직원일 가능성이 높겠다. 아직 육아하면 `엄마의 몫`이라고 여기는 가부장적 사회가 아닌가. 법으로 남성의 육아 휴직을 보장하고 있지만, 직장에서는 묘한 눈치주기의 분위기는 엄존하는 모양이기도 하다. 이런 환경에서 육아 휴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나에게 복이자 기회다. 무척 고마운 일이다.

 

 

 

 

 

 얼마 전 한 권의 책을 읽었다. 문은희 선생님의 <엄마가 아이를 아프게 한다>는 꽤 자극적인 제목의 책이었다. 나는 그 책을 엄마의 육아 태도뿐만 아니라, 부모 모두의 육아 태도가 무척 중요하다고 읽었다. 특히, 부모의 어릴 적 상처나 감정이 그릇된 육아의 시작일 수 있다는 지적은 내게 제법 묵직하게 다가왔다.

 아내는 명상과 요가에 일가견이 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지도할 수 있는 실력 정도는 된다. 아내의 명상과 요가는 신체를 유연하게 하고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정신적 삶을 살 수 있는 통로 정도라고 보는 게 맞겠다. 이런 점에서도 아내는 나보다 한 수 위, 맞다. 아내의 정신 수양은 사실 육아에 무척 도움이 되고 있다. 명상과 수련 활동을 통해 어릴 적 상처를 직면하는 용기를 아내는 지녔다.

 나도 저 책을 읽으면서 나의 어릴 적 상처를 제대로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1주일간 명상을 하는 연수에 등록을 했다. 이것은 육아뿐만 아니라 내 삶을 온전히 살고 싶은 욕구가 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학기의 짧은 육아 휴직이지만, 슬뫼와의 교감을 보다 깊고 넓게 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 싶었다. 당장 3월부터 휴직에 들어간다. 지금은 방학이니까 실질적인 육아는 시작된 셈이다.

 막상 육아 휴직을 하고 슬뫼와 하루를 보내다 보면, 기대와 달리 실망하고 힘든 순간도 많을 것 같다. 하지만, 순간에 집중하고, 슬뫼와 함께 하는 이 찰나를 사랑해야지.(이런 결심도 무너질 수 있음을 잘 알지만, 이렇게라도 다짐해둬야 오래 끌고 갈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으로 지금까지는 무너졌던 한 축, 아빠의 자리를 온전히 지켜주고 싶다. 아기는 엄마, 아빠 모두의 사랑을 먹고 자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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