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학교에서 여는 시창작 교실에서 수업을 듣고 있다. 1주일에 2시간, 시인 박윤규 선생님이 오셔서 시쓰는 것에 대한 강의를 해주신다. 사실 그 공고를 접하고부터 좀 갈등했다. 시 읽기에는 그런대로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시 쓰기라... 내가 잘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 그럼에도 아이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소스 정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그런 고민과 기대는 한 순간에 무너졌다. 마을 학교 교장 선생님의 전화 한통 탓이었다. 사람이 별로 없어 나에게까지 전화를 하셨다니... 측은했다. 마을에서 이 좋은 강좌를 여는데, 그것도 무료인 셈인데, 사람이 없다니... 나는 괜히 이런 순간에 오기같은 게 발동한다. 쪽수라도 채워서 이런 강좌가 다음 번에도 지속될 수 있는 힘이 생기길, 하는 것. 하여 나는 두번째 강좌부터 참여했다. 수식과 행구분과 연구분 등을 구체적 시를 통해 조금 맛봤다.

 

 다음 시간에는 우리 각자가 시를 써내라셨다. 어이쿠... 이 강좌를 듣겠다 마음 먹으면서 영화 <시>를 떠올렸다. 그 영화의 주인공도 시 창작 수업에 참여하고 자신의 이야기와 손자의 이야기를 엮어 시를 써내려간다. 나는 시 쓰기 과제가 제일 두려웠던 거다.

 

 하지만... 언젠가 살아오면서 열렬히 뜨거웠거나, 가슴 무너지는 안타까움을 표현했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표현했다면, 지금 역시 표현할 수 있겠거니, 막연히 자신감을 가졌다. 어쩌면 `뭐든 다 된다.`는 근거없는 자신감도 한몫했겠다.

 

 근데, 나는 시를 쓰지 못했다.

 2,3년 전 어느날 끄적인 걸 시랍시고 냈다.

 

 아래와 같다.

 

 

미황사

 

            

미황사에는 누런 소가 병풍처럼 누워 있다는 것이었다.

아득히 그리운 시간과 그 그리운 시간을 그리워하는 한 사내를 위해

천년을 오도카니 추억처럼 지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보길도 핏빛 서러움을 꽃으로 피워낸 동백숲 이야기도 품고 있을 게고

아무렴 깻돌의 자갈자갈자갈 소리도 품고 있겠지.

배를 타고 넘어온 황소처럼

해풍을 닮은 늙은 어부의 낯빛도 품었겠다.

한 밤중 반딧불이가 신비롭던 밤,

시 노래를 흥삼아 오른 아득한 산 오솔길

땅 디딘 다리만큼이나 청초한 청춘들 옆에도 누워있을 게다.

바다를 건너왔다던 황소 이야기 들려주던 목소리를 품은 길은

아직도 휘랑휘랑 돌아

그이에게로 이어질까.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으니

 

 박윤규 시인이 하나하나 총평을 해주셨다. 2행의 그립다는 말이 반복된다는 것, 4행의 보길도 핏빛 서러움의 연결이 어색하다는 것. 나는 그런 지적에 충분히 공감한다.

 

 사실, 나는 이게 시라고 쓰진 않았다. 편지글 한 부분에 생각난 게 있어 끄적였다.

 

 시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의미있는 시간을 보낸 것보다,

 나는 다시 보길도와 미황사와 걸으면서 보낸 그 남도의 길에 대해 다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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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24 22: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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