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메일을 확인하다가 10년 전의 상황이 고스란히 떠오르는 사진 몇 장을 찾았다. 그 상황이 고스란히 떠오른다는 것은, 또 헤매어야 할 감정과 맞닿는 것이고, 아니, 이젠 좀 거리를 두고 객관화가 되어야 할 것이지만, 미안함이 지배하는 이 감정은 내가 해결해야 할 묵은 숙제같은 것이기도 하다.

 

 

 

 어느 가을 산행.

 제대와 복학 후, 나는 심한 정신적 방황기를 경험해야 했다. 겉으로 드러난 사춘기를 경험하지 못한 나로서는 그제서야 성장통을 경험한 셈이다. 그 성장통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이 사진은 현상이 되어 어머니 집 장식장에 들어 있다.

 

 

 범어사 뒤편이었다. 대성암 표지판을 보고 한 선배에게 전화를 했었지.

 이 사소한 기억까지 한다는 것은...

 

 

 

 대학 4학년. 이때는 취업이 내게 주어진 가장 큰 숙제였다?

 교육과정해설서, 문학, 문법, 교육학... 지하철이고 카페고 도서관이고

 짬만 나면 펼쳐들었다.

 

 

 

 임용을 치고 발표가 나기 전에 부석사로 여행을 떠났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의 부석사. 바람이 몹시도 불었던 풍기 영주, 기차.

 

 

 발령을 받고 또 긴 시간을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살은 쭉쭉 빠졌고, 주름은 얼굴을 덮었다.

 불면의 밤을 긴 시간 보내야 했다.

 

  사상에 있는 어느 해물탕집 건물의 호프집.

 삶은 슬픈 것이라고

 이젠 더 이상 꿈꿀 것도, 애쓸 것도 없이,

 그저 흘러가는 대로 두어보자는 마음이,

 지금도 읽힌다.

 

 우린 모두 그동안 너무나 힘든 시간을 보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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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1 12: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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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 서약

강이 되어 만나리.
언젠가부터 흐를수록 깊어지고 넓어지는 강물처럼
귀한 사람 만나고팠습니다.
이곳 저곳을 에돌고 에돌아 모든 것을 품고
조용히 흘러가는 강물처럼,
귀한 인연 만나 풍성한 삶을 살길 바랐습니다.
서른 두해, 서른 해를 돌았습니다.
그 끝에 세상의 절반인 생의 반려자를 만났습니다.
아직 익지 않은 생이라 많이 어설프고 서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 계신 여러 하객과 친지분들게 정중히 올립니다.

신랑 김은규는 이현주 양을 신부로 맞아
따뜻하게 보듬어 안고 존중하면서 살겠습니다.
신부 이현주는 김은규 군을 신랑으로 맞아
따로 또 같이 서로의 삶을 존중하며
매순간을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2008년 - 이것도 손가락을 꼽아봐야 했습니다. - 11월, 저는 지금의 아내를 맞아 위의 혼인 서약을 하며 한 가정을 꾸렸습니다. 돌아보면, 저때는 서약의 내용대로 살겠다, 그 각오 바위처럼 단단했던 것 같은데, 삶은 또 그와는 달리 흘러온 듯합니다. 그러니 때때로 부대끼고 엎어지며 고단했지요. 그래도 삶은 살아지는 법! 용케도 이만큼 흘러왔습니다. 

                                                                               

 모시는 글

                                                                                 내가 삶에서 발견한 최대 모순은 
                                                                                    상처 입을 각오로 사랑을 하면 
                                                                       상처는 없고 사랑만 깊어진다는 것이다
                                                                                                              -마더테레사

 강이 되어 만나리, 바랐습니다. 세상 곳곳을 에돌고 에돌아 귀한 사람 만나고 싶었습니다. 때로는 덜커덕거려 급해지기도 할 것이지만, 흐를수록 깊어지고 넓어지는 강물처럼 온전히 품고 흘러가겠습니다. 저희 둘의 시작을 지켜봐주시고 축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때 : 2008년 11월 22일 (토) 낮 12시  

                       곳 : 민주공원 야외극장
                                                                                             김은규❤이현주 드림

 위의 글은 내가 초안을 잡고 아내가 결재를 한 우리의 청첩장입니다.  별스럽게 준비했지요. 특히 11월 말, 야외극장에서라니, 대체 이 사람들이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요? 

 
신부 입장

 저런 그림이었습니다. 전통 혼례였죠. 그런데 우리의 혼례는 좀 달랐습니다. 백기완 선생님께서 만드신 민중 혼례의 형태에 가까웠지요. 거기다 노래와 시 낭송, 악기 연주 등 다양한 예술 활동 등이 포함되어서 시간이 두 시간 가까이 걸렸습니다. 하객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소식은, 신혼여행 다녀와서 들었지요.  

 

 위의 사진은 고천문을 올리는 모습입니다. 내가 존경(?) 사랑(!!)하는 두 선생님께서 해주셨죠. 저 두분 부부의 연이신데, 참 닮고 싶은 삶입니다. 여튼 저희 혼례에 이렇게 마음과 몸을 내주신 분들이시죠. 조만간 식사 한끼 해야겠습니다. 


길눈이 말씀
  

 주례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또 제가 존경하는 노영민 선생님이 맡아 해주셨죠. 늘 고맙고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신부 이현주 선생과 신랑 김은규 선생의 결혼을 온 우주의 기운을 모아 축하드립니다.  

신부와 신랑의 양가 부모님께 감사의 인사 먼저 올립니다.

부족한 저가 앞 자리에 섰습니다.

훌륭하게 신부와 신랑 키우신다고 애 많이 쓰셨습니다.

  추운 날 별나게 야외에서 전통 혼례 치른다 하는데 안 와 볼 수도 없고, 와서 추위에 벌벌 떨고 계시는 화객 여러분께도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아마 결혼식 끝나고 나면 떡도 있고 술도 있을 겁니다. 즐겁고 기쁘게 많이 자시고 몸 녹이면서 축하 많이 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결혼 축하하러 먼 길 달려온 학생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짜장면, 피자 먹고 싶으면 두 분 선생님께 언제라도 사달라고 하십시오.


저보고 신부와 신랑에게 덕담을 해달라는 부탁인데

저가 별 덕 있는 인간이 아니라 자신이 없습니다.

예전 우리 멋있고 늠름한 신랑과 강 따라 물 따라 같이 길 위에서 보냈던 얘기, 덕담이 될지 다부 신랑 흉보는 얘기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할까 합니다.

우리 김은규 선생과는 <강강걸을래> 라고, 강을 따라 일주일씩 열흘씩 방학 때마다 걷는 모임에서 만났습니다. 금강 열흘을 걸었고 올 여름에는 낙동강 여드레 걸었습니다. 영산강도 닷세 함께 걸었습니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무릎이 아파 쩔뚝거리면서도 끝까지 걸었습니다. 체력이 대단하고 신심이 굉장합니다. 김은규 선생 몸집은 작아보여도 정말 차돌입니다. 버스 정류장 하나 길도 안 걷고 타고 가려고 버스, 택시 같은 기계에 의지하는 허약한 사나이들이 많은 시대에 강건한 체력은 살아가는 데 엄청난 밑천이지요. 운전 면허증 없고 그 흔한 컴퓨터 자격증 하나 없다는 말도 예사로 안 들립니다.  김은규 선생은 참으로 희귀종이고 이 시대의 특별한 존재, 별종입니다. 그만큼 귀하고 가치 높은 존재라는 말이지요. 절대로 가족 굶길 사람, 아내 돈 빌리러 길에 내세울 사람, 골골 아파서 장인 장모님 걱정  끼칠 사람 아닙니다. “밥만 먹고 사나?” 요즈음 아내들의 볼멘소리 있다지요? 신랑은 절대 그런 말 안 나오도록 할 겁니다. 설거지든, 빨래든 아니면 밤 잠자리든 하여튼 몸 보시만은 확실히 할 거니 신부는 기대해도 될 겁니다.

체력 좋지요, 마음 따뜻하지요, 인물 좋고, 글 잘 쓰고 또 목소리는 얼마나 좋은지요, 그 좋은 목소리로 글 읽을 때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가 글 읽는 소리라는 걸 실감합니다.

한마디로 신랑은 신언서판 100점의 참사람, 정말 진국인 사나이입니다.

사실 저는 신랑이 탐이 나서 중매하려고 몇 번 애를 썼습니다.

“김은규 선생, 우리 학교에 좋은 처녀 선생 있던데” 소리 몇 번 했습니다.

껏떡도 안 합디다.

언젠가는 제 4촌 매제를 삼을려고도 했습니다. 아주 참한 제 4촌 여동생이 있거든요.

또 물 먹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현숙한 신부를 숨겨놓은 줄도 모르고 제가 김은규 선생 꼬실려고 많이 껄덕거렸습니다.

신부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대단한 사람 만났습니다.


신부님을 사실 저는 잘 모릅니다. 열 번 정도는 만난 것 같은데, 저가 워낙 요즘에 여자에게 목석이고, 무엇보다 신부가 워낙 빛이 나 눈이 부셔 감히 마주 보지 못해 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두세 번째 만났을 때는 얼굴도 몰라봤어요. 그러나 자주 만나봐야 그 사람을 꼭 아는 것 아니잖습니까? 김은규 선생 같은 단단한 사람을 고르는 것 보면 이현주 선생님을 다 알 것 같아요. 신부가 얼마나 높은 안목, 고결한 눈높이를 갖고 있는지 말입니다. 자신이 정말 멋있고 속이 꽉 찬 사람이 아니고는 상대방의 그런 것 알아내지 못하거든요. 그래서겠지요. 이현주 선생님은 교사가 되면서 시중에서 그렇게 말 많고 욕 많이 먹는 조직 전교조에 당당하게 가입해서 열심히 참교육 활동하고 있고, 입시 교육에 찌든 현실, 학교의 문제점을 느끼면서 대안 교육 열심히 공부하고 고민하고, 자기를 가꾸는데 도움이 된다 싶으면 시간 돈 아끼지 않고 먼 길 마다않고 배우려 다니는 열정 말입니다. 참하고 예쁘다, 곱다 그런 말을 늙은 저가 자꾸 하면 검은 속셈 다 들통 날 터이니 더 이상 말 안 하겠습니다.


슬기로운 결혼 생활의 덕목들 많고도 많겠지요. 준비 안 된 신랑으로서, 아버지로서 온갖 시행착오를 겪으며 근근이 오늘에 이른 저로서는 한 점 부끄럼 없이 신랑 신부에게 드릴 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제대로 한 게 없는 결혼 생활, 부끄럼 가득한 결혼 생활이었습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지 않느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아이 낳아 키우고 살아왔지 않나, 뭔가 하나는 안 있겠나, 신랑 신부에게 도움이 되도록 빨리 털어놓으시오 하는 뜻으로 제게 덕담을 부탁했겠지요.

저는 아내에게 고개 많이 숙이고, 손 많이 비비고 그랬습니다. 눈물 글썽글썽 울기도 했고요. 아내에게 저지른 제 잘못은 알았다는 건대요, 그래서일까요, 우리 집사람이 아직 절 밖으로 안 내쫒고 지금까지 함께 살아주는 것은 말입니다. 요즈음 반성, 자기성찰 이런 말 유행하던데요,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내와 남편으로서의 끊임없는 성찰, 좋은 아버지 어머니 되기 위한 공부, 꼭 내 자식만의 어머니 아버지가 아니라 세상의 훌륭한 어머니 아버지가 되는 자기성찰과 공부 말입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두 분이 피붙이 부모님의 아들과 딸로서 잘 성장해 살아온 것을 넘어, 이제는 처가 장인 장모님의 아들, 시갓댁의 훌륭한 딸로서, 더 나아가 세상의 아들과 딸로서, 부모로서 잘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살다보면 웃음이 늘 가득하고 행복하게 사랑을 나누는 때만이 있지는 않을 겁니다. 때로는 싸우고 그 뒤끝을 잘 풀지 못해 며칠 서로를 미워할 때도 있을 겁니다. 그럴 때 필요한 일이 바로 고개 숙여 잘못을 빌고 눈물을 흘리는 일입니다. 고개 숙여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하는 용기, 눈물을 흘리고 깊은  자기 성찰을 하는 진심, 끊임없이 몸과 마음을 닦는 공부, 그게 바로 행복한 결혼 생활의 든든한 받침돌이 될 것을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결혼은 힘이 셉니다. 결혼은 단순히 남자 하나에 여자 하나를 태기 하는 일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인 아내로서의 온 생명과 또 세상의 전부인 남편으로서의 온 생명이 만나 더 훌륭한 세상, 더 온전한 생명을 이루는 일입니다. 결혼은 참으로 힘이 셉니다. 사랑으로 이루는 결혼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온 우주를 들어 움직일 만큼의 힘입니다. 이현주와 김은규의 결혼으로 세상은 좀 더 살만해졌다, 더 평화로워지고 정의로워졌다, 자비로워졌다, 그런 말 나오고 그런 일 벌어지도록 두 분 결혼의 위대한 힘 제대로 쓰면서 살아라, 두 분에게만이 아니라 이 말을 하고 있는 저 자신에게 다짐하면서 이만 결혼 축하의 말씀 줄입니다.   

 민주공원 야외 무대에서의 혼례식을 마치고  저희는 라오스로 신혼 여행을 떠났습니다. 비행기 티켓만 예약하고 나머지는 닿으면 닿는대로 움직이겠다는 용기를 부렸지요. 비옌티엔, 방비엥, 루앙프라방. 6박 7일의 여행이 참 고요했고 넉넉했습니다. 


라오스 탁밧
  

 신혼 여행 사진이 무척 많지만, 저는 루앙프라방의 탁밧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새벽 메콩강의 물안개와 붉은 장삼. 숙연하죠. 잘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절로 일었습니다. 


슬뫼 낳아 기르다
  

 혼인 6개월 정도가 지나고 슬뫼를 품었습니다. 10달. 아내로서는 참 힘겹고 고통스런 시간이었지요. 마음을 많이 졸였습니다. 남편이 내편이 되어 주지 않았으니 그 고통 더했겠지요. 그래도 이렇게 튼실한 슬뫼가 태어났습니다.   

 아기의 이름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의 다양한 반응이 있었지요.  제가 쓴 글은 아니지만, 저는 이런 마음입니다.  

슬뫼 
 
                      이청산
 

  우리가 너를 부를 때
  네가 웃음으로 대답하는
  이름 중 한 글자 `슬`은
  책 속에 있는 글들이 아니라
  흐르는 강에게서 배우고
  거침없이 부는 바람에게서 느끼고
  아무런 바람없이 피는 들꽃에서 배우고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는 별들에게서 배우며
  너와 함께하는 뭇생명들과
  같은 가치를 가지고 어울려 사는
  삶의 지혜를 말하는 거란다.

  내가 너를 부를 때
  네가 웃음으로 대답하는
  이름 중 한 글자 `뫼`는
  우리가 땀흘려 오르는 산만이 아니라  

  오름으로 내림을 이야기하는
  슬픔 그 이상으로 기쁨을 알게 하고
  기쁨을 넘어선 슬픔을 넘어선
  천년의 호흡
  긴 바위의 호흡을 알게 하는
  긴 호흡의 끝자리에 자리하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끝없이 사랑하고 사랑하여
  함께 하여야 할 사람을 말하는 거란다.
  우리가 너를 부를 때
  네가 대답하는 웃음
  우리가 산을 오를 때
  우리가 산에 보내는 웃음
  우리가 산을 내려올 때
  산이 우리에게 보내는 웃음
  그 웃음은
  생명을 사랑하는 게 슬기로움이라는
  산을 닮아가는
  천년의 웃음

 이런 슬뫼를 아내는 살뜰이 잘 길렀습니다. 저야... 


슬뫼 돌
 

 1년이 지나 이렇게 첫 생일을 보냈네요. 이모 가게에서 어르신들만 모시고 소박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녀석이 얼른 자라서 아빠랑 제주도 하이킹 가는 날, 곧 오겠죠? 


지리산 여행
 

 혼인 3주년 기념으로 지리산으로 여행을 갔다 왔습니다. 지리산 흙집 세상이라는 곳에서 묵고, 쌍계사 등을 둘러봤지요. 녀석, 그새 이렇게 자랐습니다. 


곡성 - 기차마을
 

지리산을 거쳐 곡성까지 갔어요. 슬뫼가 기차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이것도 부모 마음 아닐까요?) 


남포동
 

 11월 22일. 딱 그날. 우리는 기념하기 위하여 남포동으로 갔습니다. 맛있는 저녁도 먹고, 구경도 했지요. 

 3년,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습니다. 모시는 글에서 말했듯이 덜커덕 거린 시간도 많았지요. 그래도 깊고 넓어질 것이라는 희망, 잊지 않고 있습니다. 우린 부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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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하면서 정리가 필요한 순간이 간혹 있다. 나는 주로 마음이 부대끼면서 무언가 일을 마쳤을 때가 그 순간이다. 1학기 때에는 한창훈 선생님 초청 강연회를 마쳤을 때가 그랬고, 오늘은 아이들의 본격적인 수업이 끝나서 그랬다. 거의 1년 동안 문제 풀이만을 한 나의 수업이 무척 아쉽고, 이 상황을 나 스스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만약 다시 나에게 똑같은 상황이 주어진다 해도 별다른 수를 쓰기가 쉽지 않겠지만, 내 마음에 찌꺼기같은 걸로 가라앉는 이 정체불명의 것을 떨어내야할 것만 같았다. 

 나는 탑을 보면 정리가 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감은사지탑, 무장사지탑, 창림사지탑, 그리고 내가 무척 좋아하는 용장사지 3층 석탑이 그렇다. 그래서였다. 이번 정리는 남산에 우뚝 솟은 용장사지 석탑으로 하리라. 실제로 정리가 되든 아니든, 그 느낌이 내게는 필요한 거였다. 

 1,2학년은 소풍을 떠나고, 3학년은 사설모의고사를 치르는 날. 나는 그냥 연가를 냈다. 그리고 오후 늦게 경주로 출발. 후훗~ㅋ

  

  늦은 점심을 삼릉 입구에서 먹고 도열하듯 늘어선 소나무 숲을 지나면 위의 사진을 만나게 된다. <냉골 여래 좌상>다. 부근에 묻혔던 것을 우연히 발굴한 거란다. 왼쪽 어깨의 가사끈과 허리에 맨 군삼끈이 매듭지어진 모습인데, 어떻게 돌에다 저런 곡선을 만들어낼 수 있었는지 놀랍다. 정말이지 매듭의 한 끝을 잡고 스스륵 잡아당기면 매듭이 부드럽게 풀릴 것만 같다. 

 잠깐 쉬었다 금오산 정상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아래의 부처님을 만나뵐 수 있다.  

 

 <선각 아미타불>이다. 지금은 <선각육존불>이라고 이름붙여져 있는데, 저 옆으로 삼존불이 더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선각 아미타 삼존불>이 두 세트있다고 보면 된다. 원래 석가삼존은 여래가 앉으시고 협시보살이 서 계신 데 비해 이곳에서는 여래가 서계시고 협시보살이 앉아 계신다. 협시보살이 여래에게 연꽃을 바치는 모양인데, 그 새김이 아주 섬세하다.  

 부처를 보는 것도 좋지만, 부처가 바라보는 것을 보는 것도 좋다. 그래서 저 삼존불 위에 올라봤다. 저 아래로 펼쳐진 경주 들판은 늦가을답게 노랗게 익어 있었다. 부처님도 보시기에 참 좋으시겠다. 

 여기서 잠깐 숨을 돌리고 조금 가파른 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아주 독특한 부처님을 뵙기 위해서였다. 독특하단 것은 지극히 평범하다는 말씀. 너무 평범한 얼굴이어서 아주 독특한 부처님이 되어 버린 역설. <냉골 마애 석가여래상>이다. 

 

 몸은 선각으로 되어 있는 반면, 얼굴은 돋을새김을 해두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생긴 암벽의 금을 대좌로 삼고 앉으신 모습이 무척 위엄 있어 보인다. 역시나 이 부처님 위에 올라가서 사바세계를 내려보면 경관이 아주 멋지다. 땀을 잠시 식히고 곧바로 가파른 길을 치고 올랐다. 한 20여분 오르면 능선을 만나게 되고 바둑바위위에 설 수 있다. 거기서는 경주 시내가 굽어보이고 맞은 편에 선도산, 무열왕릉, 오른편으로 계림, 반월성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거기서부터 금오산 정상까지는 능선이다. 오르락 내리락 하는 길이 지겹지가 않다. 능선 오른편으로 트인 시원한 벌판은 보는 재미가 있다. 그 능선길에서 해지는 장관을 찍었다. 

 

 이쯤되면 약간 가파르게 오른 길도 다 용서된다. 

 금오산 정상을 찍고 짧은 임도를 내려가다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내가 경주에서 최고의 장소로 치는 용장사지 3층 석탑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 이르기 10분 전부터 내 가슴은 무척 설렌다.  

 

 <용장사지 3층 석탑>이다. 기단이 둘인 형식인데, 하층 기단부는 금오산 전체가 해당된다. 그러니까 탑 높이만 해도 무려 400m가 넘는 셈이다. 무엇보다 이 탑이 앉은 자리가 무척 좋다는 거다. 조금만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경주 벌이 훠~~~언하게 펼쳐진다. 

 마침 해가 지고 있어서 아래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이쯤되면 정리가 뭐고 없다. 생각이 있을 수가 없다. 그저 고요하고 평안하다. 

 용장사는 김시습이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그분이 지으신 책 이름이 <금오신화>라고. 이 탑 아래 조금만 더 내려가면 용장사지 금당터가 남아 있지만, 그 형색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알아 볼 수가 없다. 

 이 탑만이 용장골에서 이름난 게 아니다. 조금 더 내려가면 <용장사 마애 석가여래 좌상>이 남아 있다. 이거 이거 보통 아름다운 게 아니다. 유연하게 흘러내리는 어깨선은 매끄럽기만 하다. 두 볼은 아주 복스러운 얼굴이라 보는 이 역시 복받을 것만 같다.  

 

  이 부처님을 끝으로 용장골로 내려왔다. 4시간여의 산행. 혼자였지만 그래서 더더욱 좋았던 것 같다.  

 석탑, 석불을 보면서 생각하는 것이지만, `오래된 것은 아프다.` 하지만 이건 싫지 않은 아픔이다. 마음을 더욱 호젓하게 하는 야릇함이 있다. 꼭 문태준의 시처럼... 

  이쯤되면 문태준의 시 한편으로 마무리. 

 빈집 1  

              문태준 

  흙더버기 빗길 떠나간 당신의 자리 같았습니다 둘 데 없는 내 마음이 헌 신발들처럼 남아 바람도 들이고 비도 맞았습니다 다시 지필 수 없을까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으면 방고래 무너져내려 피지 못하는 불씨들 

  종이로 바른 창 위로 바람이 손가락을 세워 구멍을 냅니다 우리가 한때 부리로 지푸라기를 물어다 지은 그 기억의 집 장대바람에 허물어집니다 하지만 오랜 후의 당신이 돌아와서 나란히 앉아 있는 장독들을 보신다면, 그 안에 고여 곰팡이 슨 내 기다림을 보신다면 그래, 그래 닳고 닳은 싸리비를 들고 험한 마당 후련하게 쓸어줄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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