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나의 생활은 무척 평탄했다. 학교에서나 가정적으로 별 어려움없이 흘러왔다. 학교에서는 비담임에 3학년 전담이었으니, 수업만 하면 그만이었다. 학교에서는 담임의 업무가 훨씬 큰데, 그게 없으니 여유가 많았다. 가정적으로는 슬뫼가 큰 탈없이 자라주니 보는 눈이 흐뭇하기만 했다. 이렇게 생겨난 여유 덕에 가족들과 좋은 곳으로 가서 며칠을 쉬고 오는 호사도 여러번 누렸다. 누가 봐도 `음, 즐겁게 잘 지내시네요.`라고 할 만했다.(실제로, 인문부장샘은 `샘은 시간을 참 꽉 채워 잘 사는 것 같아요.`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나는 가끔 외로움을 느꼈다. 학교에서 유독 그랬다. 교직 10년 쯤 되니까, 학교 안에서의 권력 관계나 그것의 움직임이 보였다. 그 전까지 나는 공식화된 기구나 공식적 절차를 믿었다. 물론 그것들을 통해서 학교 운영이 이뤄지긴 하지만, 자주는 그 이전에 이미 틀이 잡혀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결정된 틀이나 내용들이 `정말 교육을 위해서인가?`하는 의문이 자꾸만 생겨났다. 이계삼 선생님의 눈으로 학교를 보니, 학교는 정말 절망적이었다. 내가 지금껏 경험해온 순간들이 교육의 불가능성을 입증할 수 있는 것들이라, 더욱 절망했고 외로웠다.(그 외로움은 동료 교사들과의 관계에서 해소되긴 했지만, 교육의 문제는 여전히 남았다.) 물론 때때로 학생들과의 행복한 순간, 뭔가 배움이 일어난다는 순간도 없지 않았지만, 교육 제도의 큰 틀은 무겁기만 했다. 이런 괴리의 순간은 교사에게 고통스럽다. 나는, 올 한 해 이런 괴리와 모순을 자주 느꼈고, 그럴 때마다 좀 벗어나고 싶어했다.

 

 조금 더 깊이 파고들면, 나의 교직 생활에서 2011년은 그냥 지우고 싶은 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껏 교직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상처와 자괴감으로 시작한 학년이었다. 교사로서의 자질, 인간으로서의 성품, 동료로서의 관계 등을 되묻고 물러서며 다시 반발했다가 잠잠해지는, 결국엔 또 자괴감으로 빠져드는, 잊고만 싶은 해였다. 나는 교사로서의 실존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던 거였다.

 

 이젠 다 정리하고 싶어졌다. 잊혀지든 지나가든, 2011년은 나의 해가 아닌 것. 다시 말끔하게 출발하고픈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리산이 생각났다. 올 해가 가기 전에 다 툴툴 털겠다, 위로받겠다, 한 바탕 울겠다. 그리하여 지라산으로 떠난 거였다.

 

 

 12월 23일, 처남과 나는 지리산으로 출발했다. 사상터미널에서 7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탔더니 10시 무렵 구례 터미널에 내릴 수 있었다. 전화로 예약해둔 택시를 타고 성삼재로 올랐다. 구례군은 군수 주민소환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공공의 영역을 중시하는 지자체장은 정말 많지 않은 모양이다.(그 점에서 박원순 서울 시장의 도전은 기대가 되는 지점이다.)

 성삼재에서 노고단 대피소까지 40분 정도 걸렸다. 여기서 라면 두 개 끓여 먹고 연하천까지 가야 한다.

 

노고단 고갯마루에 올라 마고할미에게 무사 산행을 빌고, 출발했다.

 

 

 제일 앞에 뭉툭한 봉우리가 노을이 아름다운 반야봉, 저 뒤에 멀리 뾰족 솟은 봉우리가 천왕봉이다.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는 25.5km. 2박 3일 동안 걸어가야 할 길이다.

 

  삼도봉에 섰다. 삼도봉은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남도의 세 도의 경계가 만나는 지점이다.

 

 

뒤에 펼쳐 보이는 능선. 나는 겨울 산의 능선을 볼 때마다 건강한 남자의 몸이 떠오른다.

 

 

 삼도봉에서 화개쪽으로 바라본 능선

 

산 능선에 올라선 순간, 처남과 나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래, 이 맛으로 산에 오는 거야.

잊어야 할 것도 없고, 기억할 것도 없는 것.

훌훌 헤쳐져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

이것이 산이 가져다 주는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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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원 2011-12-29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매형 어서 짐꾸리세요! 이번에는 태백산 6박7일 종주를 떠납시다요^^ 매형덕에 아주 즐겁고 멋진 경험을했습니다 ㅎㅎ 수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