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2명 뿐이던 남성 육아휴직자는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2002년에도 78명에 그쳤다. 이후 2003년 104명, 2004년 181명, 2005년 208명, 2006년 230명, 2007년 310명, 2008년 355명 등으로 서서히 증가하던 남성 육아휴직자는 2009년 502명, 지난해 819명으로 큰 폭 증가한데 이어 올해는 1000명을 돌파했다.
- 펌.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11215111423§ion=03
저 위의 기사는 언제적 이야기일까? 조금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이미 추론이 가능할 거다. 그렇다, 2011년 12월 어느날의 신문 기사 가운데 한 부분이다. 놀랍지 않은가? 2001년, 21세기, 뉴 밀레니엄이라고 엄청난 엄살을 떨었던 그 해에도 남성 육아 휴직자는 단 둘이었다. 그리고 10년 만에 1000명을 돌파했다는 기사다.
나는 이 기사를 읽고 내가 단위를 잘못 헤아렸나 좀 헷갈려서 다시 확인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천 단위. 그것도 앞 자리가 2도 아니고 1인 천 단위. 그걸 확인하고도 많이 의아했다. `아니, 이것 밖에 안 돼?` 남녀 공동의 육아 태도에 관한 글이나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는데, 고작 이거야?
스스로 `에이, 고작 이거야?`하는 물음 뒤에는 이 세상 남자에 대한 탓 보다 남성의 육아 휴직을 은연중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 구조에 대한 차가운 시선이 깔려 있다. 내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해보면, 육아 휴직을 하고픈 마음이 커도 현실적으로 그게 전혀 가당치 않은 이야기라는 걸 느끼곤 한다. 그게 경제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고, 직장의 고용 문제와 직결되는 거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서 굳이 남녀의 육아 태도의 문제, 남녀 성 역할의 문제까지 끌고 들어와서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법적으로 남성의 육아 휴직이 보장되어 있지만, 기업 프렌들리한 이 사회에서는 참으로 쉽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이다.(기업의 문제에서 법과 현실의 괴리는 이미 확인된 바가 아닌가? 하지만 4월과 12월 이후, 새로운 고용 문화, 기업 문화가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를 하는 건 나만의 일은 아닐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오늘 육아 휴직서를 제출했다. 휴직인 가운데도 이러 저러하게 공무원으로서의 품위를 훼손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약서와 휴직의 기간을 담은 휴직서가 전부였다. 내가 그간 10년 동안 해온 일자리를 잠깐 쉬는 것이 달랑 두 장의 종이로 결정된다는 것이 싱거웠지만, 한편으로는 휴직의 절차가 까다롭지 않아서 좋구나, 하는 양면적인 반응들이 내 안에서 일었다.
나는 3월2일부터 8월 19일까지, 한 학기 동안 육아 휴직에 들어간다. 주위 동료들은 `아니, 샘 왜 육아 휴직 들어가요?`, `샘, 정말 대단해요. 남자가 애를 보겠다는 게`, `샘, 애 봐 줄 사람이 없어요?` 등 좀은 다양한 반응들이 있었는데, 대강 정리하면 그렇다. `애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 휴직을 하는가?` `육아 휴직 하는 남자, 참 대단해요.`
꽤 전부터 우리 집 서가에 꽂혀 있던 책을 뽑아 들었다. 제목은 `젖병을 든 아빠, 아이와 함께 크는 이야기`(이강옥, 돌베개) 내가 갖고 있는 책이2000년에 출판된 책이니, 아마 2002년인가 그 무렵에 구입한 걸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내 나이, 스물여섯 그 무렵. 결혼이니 육아니 별 생각이 많지 않을 무렵, 나는 왜 이 책을 샀던 걸까?
아쉽게도(이렇게 말하지만 그 무게는 온전히 전달될 것 같지 않다.) 나는 나의 아버지와의 기억이 거의 없다. 어느 가을 무인도에 동네 사람들이 해치(추수 후에 동네 주민들이 다함께 한 판 노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곤 했다.)를 가서 찍은 아빠와의 사진이 있지. 아마도 그게 내 6살 무렵이지 싶다. 다른 사진도 있긴 하지만, 앞에서 말한 기억 말고는 정말이지 함께 한 순간의 기억이 내게는 전혀 없다.(새벽 뱃일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김치 국밥을 가마솥에 끓여 나만을 깨워 함께 먹었다는 이야기 어디선가 전해 들었지만, 그 따뜻한, 기억하고픈 그 순간이 내게는 남아 있지 않다.)
이것이 내가 지금껏 살아온 과정에서 경험한 가장 깊은 상실감이었다. 어린 나이에 이 상실감을 표현할 길을 찾지 못했고, 그렇다고 남들처럼 엇나가는 길을 걸을 수도 없었다. 아버지가 없는 집안의 장남이라는 것은 어린 나이에서도 충분히 자각이 가능한 위치였으며, 그러한 자각은 나의 위치와 역할을 강제하는 측면이 강했으니까.
그래, 나는 나의 큰 상실감을 무엇으로 보상받고 싶었다. 그 첫째는 내가 누리지 못한 아버지와의 경험과 사랑이었지. 그래서 나는 총각 시절에도 `남성의 육아 휴직`을 꿈꾸었고, 앞에서 말한 책을 구입하는 것으로까지 이어졌다. 이제서야 저 책이 내 현실의 무게에 맞게 이어졌고, 펼쳐들었다. 10년만의 일이다. 내 꿈을 이루게 한 나의 아내나 슬뫼에게 무척 고마운 일이다.
한 학기의 휴직으로 뭐 자식과의 관계에서 큰 걸 경험하겠다고 너무 호들갑 떠는 것은 아닐까, 그런 경계가 생긴다. 하지만 자식과의 관계에서 소중하지 않은 그 순간이 존재했던가? 특히 아내가 8일 가까이 캄보디아로 여행을 떠난 사이, 나와 슬뫼가 오롯이 느낀 관계를 생각한다면, 그 6개월의 육아 휴직은 나와 슬뫼의 사이에 엄청난 잔 물결을 남길 것이며, 그것으로 각자의 생에 추억이거나 기억을 안겨줄 것 같다. 나는 지금 그런 생각만으로 가슴이 벅차며, 만나게 될 경제적 어려움 정도는 아이와 함께 느끼고 누리게 될 행복한 시간에 비하면 그리 무겁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 또 나에게 새로운 생이 펼쳐진는 셈이다. 긴장되고 설레고 약간은 걱정되지만, 그것보다 우리의 사랑, 그 순간이 충만하게 채워질 수 있길, 간절함이 더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