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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 신영복의 언약, 개정신판
신영복 글.그림 / 돌베개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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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 내가 읽은 신영복 선생님의 <처음처럼>은 개정신판이다. 2007년에 초판으로 출판된 걸 읽었었는데, 올해 독서토론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읽기 위해 개정신판을 구입해서 다시 읽었다. 초판보다 분량이 늘었고, 시대의 아픔-세월호-에 관한 글이 새롭게 실렸다. 이 대목에서 신영복 선생님의 꾸준한 성찰적 자세를 엿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회 현상을 통해 스스로를 포함한 우리 인간의 꾸준한 성찰을 해야 한다는 자세, 매 순간이 언제나 처음이어야 한다는 결기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선생님께서는 매 순간을 성실하게 사셨다는 반증 아닐까 한다.

 이십대 중반 무렵 나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시작으로 신영복 선생님의 글을 만났다.(후로 두 번 정도 선생님의 강연을 직접 들을 수도 있었다.) 그 후로 <더불어 숲> <나무야 나무야> <담론> <강의> <변방을 찾아서>을 읽었다. 또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을 읽었는데, 그건 뒤에 신영복 선생님께서 뒤친(번역한) 글이란 걸 알게 되었다. 전반부의 책들은 짧은 에세이를 묶어 놓아 읽기가 쉬울 것 같지만, 내용이 진중할 뿐만 아니라 글에 힘 있이서 곱씹게 되는 내용이 많았다. 그러니 한 편의 에세이를 읽고서, 그것이 아무리 짧다 하더라도 다시 읽어보고 되새기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책 <처음처럼>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의 글이 이처럼 진중하고 도저한 뜻을 품고 있는 것은 고전에 대한 깊은 공부에서 길어온 것이어서도 그렇겠고, 감옥에서 보낸 시간, 그러니까 사람이나 본인, 그리고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빚어진 정수같은 것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이 책의 앞 부분은 이렇게 시작한다.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길게 보면서,

먼 길을 함께 걸었으면 합니다.

저도 그 길에 동행할 것을 약속드리지요.

 이 말씀은 생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독자들에게 남긴 말이다. 선생님께서는 `길게`와 `함께` , `동행`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셨고, 실천하셨다. 그리고 영면에 드셨어도 우리들과 함께 길게 동행하겠다는 약속을 하신다. 삶 전체, 아니 죽음 이후에까지 이렇게 치열하게 실천하시는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책 본문은 책 제목이 된 짧은 걸로 시작한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 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책 21쪽) 

 

 이 글은 책의 초판에서도 제일 처음 실린 것으로, 그만큼 선생님의 삶을 대하는 자세를 담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매 순간을 처음처럼 대하는 선생님의 성실함은, 긴 영어의 생활도 꿋꿋하게 이겨낼 수 있었던 배경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그 후로도 흔들림없이 깊은 사상적 성찰을 설파해오실 수 있도록 한 원천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선생님의 글은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버릴 것 없이 마음에 꾹꾹 새겨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 모든 걸 여기다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무리이고, 특히 마음에 남는 구절 몇 개 정리해 두어야겠다.

 

물은 빈 곳을 채운 다음 나아갑니다.

결코 건너뛰는 법이 없습니다.

차곡차곡 채운 다음 나아갑니다.  (책 124쪽)

 

 `盈科後進`의 제목이 달린 글의 전부이다.

 소위 지금의 시대를 속도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빠른 일처리에 능숙한 사람이 능력있다 평가받는 경우가 많고, 기계의 성능도 빠른 일처리로 평가되고 값이 매겨진다. 생활의 속도는 우리 부모 세대보다 더 빨라졌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빨라졌기 때문에 좋아진 것도 있을 것이다. 일의 효율이 높아졌다는 것이 대표적이겠지. 그런데 삶의 질이 높아졌다는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바빠 죽겠다는, 사람이 주위에 많다. 아니, 기계의 일처리 속도도 전보다 빨라졌고, 많은 일들을 자동화했는데, 왜 우리는 바빠 죽는 걸까?

 어떤 일을 하면서 그 일에 집중하기 보다, `이 일을 끝내고 나면 저 일을 해야지.`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 일`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현재에 충실한 삶보다 오지 않은 순간을 걱정하며 준비하며 각오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현재에 만족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현재에 충실한 경우도 많지 않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빈 곳을 채우고서야 다음이 있다, 말씀하신다. 일에는 과정이 있다는 말씀같기도 하고, 현재에 충실한 것이 미래를 기약하는 것이라는 의미로도 읽힌다. 내가 다시 이 서재에 글을 남기기로 마음 먹은 것은, 실은 선생님의 이 글이 남긴 여운 때문이다. 거기다 독하지 못한 독서는 진정한 책 읽기가 아니라는 선생님의 말씀과 함께!

 

세상에 완성이란 없습니다.

실패가 있는 미완이 삶의 참모습입니다.

그러기에 삶은 반성이며 가능성이며 항상 새로운 시작입니다. (책 153쪽)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누구나 갖고 있다. 나 역시 그래서 조마조마한 마음을 갖는 경우가 많고, 때로는 아예 실패가 두려워 도전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실패가 참 삶이라 말씀하신다. 그 속에 반성이 있으며 가능성이 있다고, 그래서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씀하신다. 마음에 눌어담아 두어야겠다. 완전히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진 못하더라도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되면 좋겠다.

 

바깥에서만 열 수 있는 문은 문이라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열어 주는 문도 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손으로 열고 나가는 문이라야 합니다.

자기 발로 걸어 나가는 문이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책 172쪽)

 

 

 `감방문 안쪽`이라는 제목이 달린 글이다. 선생님의 체험에서 길어올린 글임은 분명하다. 답답한 감방을 스스로 걸어나오고야 말겠다는 결의같은 것이 무겁게 느껴진다. 누군가의 힘을 빌어 자유를 얻겠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의 결기로 자유를 쟁취하고야 할겠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나는 언제라도 한 번 이런 주체적인 의지를 세워보겠다 다짐했던 적이 있었나. 부끄럽다.

 

세월호의 참사는 하부의 평형수를 제거했기 때문입니다.

과적 증축 정원 초과 등 상부의 과도한 무게에 비하여

하부의 중심이 허약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교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부를 증축하는

감시권력의 강화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부의 중심이 든든해야 합니다.

하부는 서민들의 삶이며 그것을 지키려는 민중운동입니다.

이러한 서민들의 의지를 억압하고 상층권력을 강화하는 것은

평형수를 제거하고 또다른 세월호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책 272쪽)

 

 `세월호`라는 제목의 따끔한 글이다. 새로운 대통령을 뽑기 위한 선거 운동이 한창인 요즘, 우리들의 표심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인지, 이대로 괜찮은지 걱정스러울 때가 있다. 과도한 상층 권력의 무게를 빼내고 삶과 민중을 지키려는 민중운동의 흐름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인지, 아니면 새로운 상층권력을 뽑아 또다른 세월호를 만드는 우를 범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그래도 선생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은 잊지 않으셨다. 강연이나 글에서 여러 차례 밝히신 `碩果不食` 씨 있는 과일은 먹지 않는다는 의미다. 언제고 씨앗을 틔워 새로운 열매를 맺을 가능성 때문이다. 지금 우리 현실이 암울하고 참담하다 해도, 희망의 언어를 놓아서는 안 된다. 함께 손잡고 같이 비를 맞는 자세로 앞으로 올 희망을 노래하길, 선생님께서는 당부하고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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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렝게티 법칙 - 생명에 관한 대담하고 우아한 통찰
션 B. 캐럴 지음, 조은영 옮김 / 곰출판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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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몇 년사이 날씨가 더워질 무렵이면, 금강과 낙동강의 녹조 심화와 관련한 기사가 난다. 강물에서 유독성 물질이 검출되었다거나 물고기의 집단 폐사 소식도 끊이지 않는다. 우리의 강 생태 환경은 이미 그 균형이 망가졌으며, 그 속에서 심각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명박 정권의 4대강 개발 사업 이후, 이런 경향은 보다 심화된 것 같다. 이렇게 된 데에는 물의 자연스런 흐름을 방해한 강의 직강하 작업과 보를 가장한 댐의 건설이 주원인이라는 진단이 많다. 그래서 환경단체나 시민들은 보를 해체할 것을 요구한다.

 세렝게티는 탄자니아와 케냐에 걸쳐 있는 지구상에 남은 몇 안 되는, 다양한 생태가 군집을 이뤄 야생하는 생태 발물관이다. 이 책은 세렝게티에서 야생 코끼리를 조우한 저자의 경험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황금 사자 무리와 줄무늬 물결이 바다를 이룬 듯한 20만 마리의 얼룩소, 100만 마리의 검은꼬리 누의 장관이 펼쳐진다. 어떻게 세렝게티는 이렇게 많은 동물들이 각기 생존할 수 있는 것일까? 이 많은 동물들이 같은 공간에 서식하면서 그곳에 존재하는 먹잇감을 모조리 먹어치우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의 인체도 수많은 종류의 분자와 세포가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고 조절하는 자가 조절 시스템으로 유지가 되는 것처럼, 자연 생태계 또한 서식하는 동식물의 균형을 유지하는 생태적 법칙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저자는 세렝게티 법칙이라 부른다. 이 책은 인체의 몸에서 부터 시작해, 이러한 동식물의 자가 조절 능력을 다양한 사례로 보인다. 또한 생태 균형이 무너진 사례와 그 원인,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던 모습들을 안내하면서, 앞으로 생태 환경 보존을 위한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생리학자 월터 캐넌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병사들의 쇼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에 몰두한다. 캐넌은 쇼크를 경험하는 군사의 혈액을 검사했더니 탄산수소이온의 농도가 현격히 낮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 농도를 높이기 위해 탄산수소나트륨을 환자에게 주사하게 되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로써 캐넌은 인체의 `항상성` 개념을 도입한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우리의 신체는 신체 환경을 특정한 범위 내에서 유지하도록 제어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사는 사람의 자가 조절 메커니즘이 무너졌을 때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동물의 수는 어떻게 조절되는가?``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찰스 밀턴은 극지 탐사를 통해 이에 대한 답을 찾게 된다. 그는 극지 경험에서 동물성 플랑크돈과 어류는 바닷새의 먹이가, 바닷새는 북극여우, 북극여우는 바다표범, 바다표범은 북극곰의 먹이가 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른바 `먹이사슬`의 개념이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이다. 모든 동물을 움직이게 하는 1차적 원동력은 먹이에 있으며, 군집 전체도 먹이 공급에 따라 그 규모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레지스탕스 사령관으로 복무했던 모노는 보편적 조절의 법칙을 발견한다. A가 B를 양성적으로 조절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때 A가 B에 대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A가 B를 억제하는 C를 억제함으로써 B에게 간접적으로 양성적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음을 상상할 수도 있지 않겠나. 실제 모노는 효소 합성 연구에서 이와 같은 현상-억제자의 존재-을 발견하고, 이를 `이중부정의 논리`라고 부른다. 효소 합성 실험에서 유도 물질을 넣었더니 효소 합성이 활성화되는 현상을 발견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유도 물질이 직접적으로 효소 합성을 활성화한 것이 아니라, 효소 합성을 저해하는 인자를 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를 억제함으로써 양성적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차원의 발견이었다. 이러한 이중부정의 논리는 생태계에서도 작동한다. 그런데 만약 여기서 A의 개체수가 없거나 확연히 준다면 C의 창궐로 인해 B또한 절멸할 가능성이 있다. 해조류 켈프는 성게의 먹이, 성게는 해달의 먹이다. 해달이 사라진 곳에서는 성게만 무한 증식하고 해조류 켈프는 거의 없어져 버렸다. 

 인체에 발생하는 암또한 마찬가지 현상이다. 암세포는 정상적인 세포 분열이 일어나지 않고 특정 세포가 무한 증식할 경우 발생한다. 우리의 몸은 무한 세포 분열을 억제하는 억제자가 있다. 그런데 그 억제자가 파괴되었거나, 억제자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도록 하는 외부적 요인이 있을 때, 세포 분열은 억제되지 못하고 무한 분열하게 되고, 그것은 곧 암으로 이어진다.

 세렝게티 법칙은 항상성에서 출발해서, 먹이사슬, 이중부정의 논리를 통해 완성된다. 그런데 어느 개체 한 군데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그곳 생태계엔 암이 발생한다. 문제는 그 것을 유발하는 존재가 최대 포식자 우리 인간이라는 점이다. 금강 낙동강 녹조류의 발생 원인도 결국엔 인간에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미국 이리호수의 녹조, 동남아시아의 벼멸구 이상 증가, 대서양의 소코가오리의 이상 증식 또한 인간이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이었다. 벼멸구 이상 증가와 인간이 관련있다는 것이 쉽게 납득되지 않았는데, 이런 논리였다. 벼멸구의 유충과 성충을 잡아머근 천적은 거미이다. 그런데 인간이 벼멸구를 처치하겠다고 농약을 쳤더니, 천적인 거미를 모조리 없애버린 결과를 초래했고, 그것이 벼멸구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소코가오리의 천적은 상어인데, 인간이 상어 남획을 한 결과 소코가오리가 이상 증식하는 결과가 빚어졌다. 그런데 그나마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우리 인간의 노력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인간의 노력으로 생태계가 안정적으로 스스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준 사례가 많다.

 고롱고사는 모잠비크의 국립공원이다. 원래 여기도 세렝게티처럼 다양한 생태종이 서식하는 거대한 생태 박물관이었다. 그런데 1975년 모잠비크 내전으로 인해 이 낙원은 사라져버렸다. 2002년 미국의 한 자선 사업가 그레그 카는 고롱고사를 방문하고서 그곳의 생태계를 회복하겠다는 큰 꿈을 꾸게 된다. 공원은 동물이 절멸해버려서 숲이 넓어졌고, 초원은 높아져만 갔다. 먹이사슬의 아래로부터 회복할 필요가 있었고, 카는 다른 공원으로부터 초식동물인 아프리카물소부터 도입하는 노력을 했다. 그후로 얼룩말, 검은꼬리 누, 코끼리, 하마, 영양 등을 차례 차례 도입했다. 그 후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2000년에는 모든 종을 다 합해도 1000마리가 못 되었던 것이 2013년 무렵에는 총 개세수가 무려 7만 1,086마리로 집계되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했다. 1970년 무렵으로 생태계가 회복된 것이다.

 저자는 `우리를 기다리는 미래는 어떤 모습이고, 더 나아가 우리의 미래가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일까?`라고 묻는다. 그러면서 `인간은 확실히 생태계를 독점하는 핵심종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생태계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생태계에 해를 가한다면 결국에는 최후의 패배자가 될 것이다.`라고 경고한다. 또한 20세기가 `의술을 통한 더 나은 삶`이 우리 삶의 모토였다면, 21세기에는 `생태학을 통한 더 나은 삶`이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생태계 조절의 법칙은 이미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하지만 생태 환경의 유지는 지식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노력, 그리고 파괴된 생태계를 복원하겠다는 인간의 실천만이 길이다.

 부탄이라는 작은 나라의 국정 운영 목표는 경제 성장률 몇 프로가 아니라 국민의 행복도 증진이라고 한다. 그것을 위한 구체적인 정책으로 무분별한 개발을 막고 생태계를 보존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 사정은 어떤가. 경제 활성화를 목적으로 무분별한 토목 사업이 진행되고 있지 않나. 훗날 우리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증거가 곳곳에서 넘쳐나는 데에도 무한반복, 무한질주하고 있으니,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지, 깜깜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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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길 - 도법스님 생명평화 순례기
김택근 지음 / 들녘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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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사는 일이 무척 신비롭게 느껴진다. 행과 불행 사이를 외줄타기하듯 하는 게 삶이라고 말했던 한 지인의 말도 떠오르고,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무척 고심스런 밤을 보냈다가도 그러고도 삶이 이어지는 우리네 삶이 그렇다. 그래, 사는 것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지어냈든, 혹은 그것과 상관없이 나에게로 오는 그 무엇이든, 그런 것들을 받아 안으며, 때로는 힘에 부쳐 고민하며. 하여, 삶은 살아진다는 말보다 살아낸다는 말보다, 살아간다는 말이 더 적실한 시간이다.

 

 아내는 법륜 스님을 좋아한다. 법륜 스님의 말씀을 나누는 가정법회도 성실히 다녔으니, 그 정성은 기특하다. 나도 안다. 아내가 법륜 스님을 찾아가고 법문을 듣고 즉문즉설을 경청하게 된 계기가 어쩌면 나에게서 비롯한 것일 수도 있다는 걸.(근데 이렇게 말하면서도 결국엔 본인의 문제일 것이다, 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걸로 동네 아주머니들은 나에게 은근히 타박을 준다. 왜 아내 고생시키냐는 뉘앙스다.

 

 나는 도법 스님을 좋아한다. 도법 스님에 대해 좀 알게 된 게 아주 최근의 일이지만, 내가 도법 스님의 스타일을 좋아한 것은 오래전부터 분명했다. 앉아서 말하는 것보다 몸으로 밀고 나가는 게 좋다.(그렇다고 법륜 스님을 폄훼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법륜이든 도법이든 결국 진리는 하나다. 법은 하나다. 다만 내 스타일이 그렇다는 것일 뿐이다.)

 

 서른 중반까지 살아오면서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겁니까?`하는 물음 꽤 오래 담고 살았다. 질문이 너무 포괄적이라 답도 없기 쉽지만, 어째튼 나는 내 삶이 헛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삶이 충실했으면 좋겠다, 내가 자유로웠으면 좋겠다, 는 헛된 바람같은 걸 늘 품고 살았던 것 같다. 그래서 여기 저기 기웃대며 지냈다. 공부를 해보겠다고 나선 적도 있고, 현장 실천에서 길을 찾겠다고 나선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길의 끝까지는 가본 적이 없다. 가다가 실망하고 되돌아섰다. 끝까지 가보지 못했다는 것은, 내 끈기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이게 길이 맞나?`하는 회의도 없지 않았음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강길을 걷는 운을 얻었다. 그 시작이 금강 걷기였다. 노00, 황00, 김00, 그리고 내가 함께 걸었다. 물뿌랭이 마을에서 시작한 금강의 시작에서부터 군산 앞바다까지 천리길을 걸었다. 나는 그 길에서 많은 걸 얻었다. 함께 한 사람에게서 오는 절대적 인간애. 자연이 가져다주는 자연 치유의 능력. 걷는 게 곧 자유일 수 있다는 깨달음. 반대로 잃어가는 것에 대한 아픔도 많았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길이 사람의 길이 아닐 수 있다는 막연한 깨달음 같은 것이었다.

 

 걸어보면 안다. 사람의 길은 갈 수록 좁아진다는 걸. 속도에 밀리고 편의에 밀리고 욕심에 밀린다. 그럼에도 사람의 길은 계속해서 탐색되어야 한다. 속도에 치여 죽어가는 뭇생명들에 대한 연민, 도심지 소비를 지탱해주는 농촌의 무한한(언젠가는 그렇지도 않겠지만) 희생, 경쟁보다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지혜, 자신의 실상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슬기, 연민에 바탕은 자비심의 실행.

 

 이 책을 읽고는 우리 사는 현실에 절망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스님은 절망을 말하지 않는다. 그 절망을 이겨낼 수 있는 길은, 우리가 모두 사람의 길을 찾아나서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아.. 사람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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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부처
도법 지음 / 호미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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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종교에 관한 관심이 많이 생겼다. 몇해 전에도 종교에 대한 관심으로 성당에서 세례까지 받았었다. 그런데 그때와 지금은 좀 다르다. 그때는 어딘가에 의지할 의지처를 찾았다면, 지금은 진리에 대한 궁구가 크다. 그게 그거일 수 있지만, 이제는 어느 특정 종교에 대한 믿음을 찾지 않는다고 하는 게 정확하겠다.

 

 하느님은 예수 이전에도 싯다르타 이전에도 존재했었다. 우리 선조들이 돌을 던지며 복을 기원하던 서낭당에도, 당산 나무에도, 장독대 정한수에도 하느님은 존재했다. 예수와 싯다르타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러 온 전령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예수를 믿니, 싯다르타를 믿니 하는 것은 어쩌면 헛것일 가능성이 크겠다. 하여 나는 하느님, 곧 진리를 믿기로 했다. 다만, 그게 뭔지 몰라 헤매고 있긴 하지만...

 

 이 책은 도법 스님이 출가 수행자에게 들려주는 부처님의 생애를 담고 있다. 탄생- 출가 - 고행 - 수행 - 열반의 과정을 쉽게 설명했는데, 부처님의 깨달음, 곧 진리의 내용을 접할 때마다 탄복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는 느끼는, 바로 지금 여기, 견문각지 見聞覺知하는 그 순간순간 상황상황을 온전하게 살아가라.`는 가르침이나,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말라.`는 말은 무지몽매에 가까운 나에게 감로수와 같았다.

 

 부처님은 `삼계개고 아당안지 三界皆苦 我當安之`라고 했다. `인생의 세상 살이가 고통이니 내가 그것을 마땅히 편안하게 하겠다`는 의미다. 이것은 부처님의 상구보리 하화중생과 비슷한 의미로 개인의 수행에만 머물지 않겠다, 세상을 사람 살 수 있는 곳으로 변화시켜 보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그것은 신비로운 행적이나 고행주의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진리로 가능한 것이다. 예수님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진리가 그대의 삶을 자유롭게 한다. 진리의 정신대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다. 그 삶이 평화롭게 자유롭고 행복하다.`` 붓다도 마찬가지다. ``진리에 귀의하고 자신에 귀의하여 진리의 정신에 따라 주체적으로 동체대비의 삶을 살라. 그대의 삶이 평화롭다.``

 

 부처님이 모든 생명은 고통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 고통의 뿌리는 자아의식이다. 자아가 없는 것도 이상하지만, `나`가 고정불변의 실체라고 믿을 때 생겨나는 자기중심성은 평생 달고 다녀야 하는 그림자 같은 존재이기도 하지만 또한 극복해야할 망상같은 것이기도 하다. 어째튼 부처님은 이 자아의식의 욕망을 정확히 겨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게 곧 수행의 대비원력이고 마음가짐이라고 했다.

 

 대체로 알고 있었던 내용이 많았지만, 실천의 문제는 또 다른 거였다. 앎과 삶의 간극이 너무 선명해서 부끄럽기도 했지만, 다시금 기둥 하나 세울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성찰하고 참회하며 수행하라는 가르침을 마음에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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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코 인생, 그물코 사랑 - 도법 스님의 생명평화 이야기
도법 지음 / 불광출판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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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시인과 스님, 삶을 말하다>를 읽었다. 김용택 시인과 도법 스님의 문학적, 사상적 자서전의 성격을 지닌 책이었다. 김용택의 삶의 내력에 대해서는 그의 시나 산문, 인터뷰 등을 통해 대강 알고 있었지만, 도법 스님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최근의 조계종 사태로 `화쟁위원회`가 언론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도법이라는 법명을 본 게 기억이 났다. 그런데 <시인과 스님, 삶을 말하다>를 읽으면서 도법 스님의 삶의 내력을 조금이나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새만금, 생명평화 순례와 도법 스님이 연결이 됐다. 그 뒤로 자연스럽게 도법 스님에게 관심이 갔다. 맨발동무 도서관에서 스님과 관련된 책 3권을 빌렸다.

 

 <그물코 인생 그물코 사랑>은 도법 스님이 그간의 수행과 실천을 통해 정리한 종교적, 사상적 결정체를 쉽게 풀어쓴 책이다. 그것은 다음 아닌 생명평화였다. 스님은 종교의 존재 이유를 생명평화에서 찾는 듯 보였다. 아니, 인간의 존재 이유가 생명평화에 있는 것이었다.

 

 스님은 현재 종교의 역할이나 실상에 대해 꽤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다. 주로 불교의 폐단에 대한 지적을 많이 하시지만,(교회 종지기를 하셨던 권정생 선생님은 기독교, 아니 왜곡된 종교에 대한 비판을 많이 하셨지) 실상은 진리는 간데 없고 우상만 남은 종교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 읽혔다. 스님의 말씀은 불교(진리)를 제대로 믿고 따르면 세상이 이렇게 혼탁하지 않을 텐데, 하는 거였다.

 

 스님은 수행자의 삶을 살면서 청정도량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쉼없이 해왔다. 그것은 진리 실험의 길이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선우도량과 화엄학림이었다. 선우(善友)는 좋은 친구라는 의미로, 부처님도 좋은 친구를 굉장히 중시했다고 한다. 깨달음을 향한 수행가의 전부라고 말할 정도였다니, 스님 또한 좋은 도반과 함께 진리를 찾아나서고자 했던 것이다. 화엄학림은 불교 경전의 본류라 할 수 있는 `화엄경`을 학문적으로 공부하고자 만든 학회 정도다. 스님이 보기에 불교는 참선 중심으로 흘러 경전에 대한 연구는 뒷전이었다. 부처의 말씀, 곧 진리는 경전에 담겼는데, 그걸 공부하지 않는 참선은 헛것에 가까웠을 것이다. 하여, 스님은 화엄경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고, 후에 스님의 생명평화 사상의 근본으로 삼았던 것이다.

 

 스님은 개인의 완성과 사회의 완성이 별개가 아니라고 말했다. 경전에 상구보리 하화중생 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는 말이 있는데, 위로는 법(진리)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한다는 의미다. 그만큼 불교에서는 세상을 바로 세우는 일에도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큰 스님 중심의 신비주의나 참선 중심의 상구보리만 부각되는 것 같아 스님은 그게 안타까웠을 것 같다.

 

 스님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통일적 관점으로 생명평화경을 썼다. 아니, 썼다, 라고 하기 보다, 들은 것을 옮겨 적었다고 하는 게 옳겠다. 그간의 공부와 실천으로 진리의 길을 탐색한 결정체이니, 그것은 만들어졌다기보다 진리가 그렇게 말했다고 보는 게 맞겠기 때문이다.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 믿고 기도하고 보시를 한다. 하지만 행복해지기보다-행복하다고 느낀다면 그건 착각에 가까울 가능성이 크다.- 세상은 폭력과 부패와 분열과 대립의 도가니다.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를 믿는 신자 수가 얼마나 되길래 세상은 갈 수록 진리와 멀어지는가? 문제는 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님은 `구체적 사실과 진실인 실상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 삶을 살아왔다.`고 말한다. 그게 불행의 씨앗이라는 것이다. 지식과 언어를 전도몽상,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만 다룰 뿐, 실상에 대한 성찰이나 참회가 없었다고 지적한다.

 

 실상은 뭔가? 우리 존재의 실상은? 스님은 명쾌하게 말한다. 상호의존성과 상호변화성이라고. 인드라망 세계관을 말씀하시며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물과 그물코의 관계에서 보듯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관계란다. 그러니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불일불이 不一不二가 존재의 실상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상호의존성에 입각한 존재의 실상을 믿기보다 자기중심적 세계관에 빠져 있다. 그러니 대화보다 일방적 견해 표현에 익숙하며, 자기를 내세우는 일에 보다 적극적이다.(그런 점에서 소위 진보적 운동을 하는 이들에 대한 문제 지적 또한 잊지 않고 있다. 깊이 반성할 일이다.) 상호변화성은 머물러 있는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다. 과거는 존재하지 않고, 미래도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존재하지 않으며, 지금 당장의 현재만이 의미있는 순간이다. 그래서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며, 지금 만나는 사람이 가장 소중한 사람이며, 그 사람에게 지극한 정성을 다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일인 것이다. 또한 세상 만물은 흘러 변화하는 것이므로 집착할 일도 없어진다. 소유욕, 명예욕도 실상의 진리에 비추어 보면 크게 무게를 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런 진리의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너보다 나가, 달관보다는 집착이 강화된다. 여기서 반생명적 폭력이 일상화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스님은 생명평화경을 통한 백배서원을 통해 생명평화의 길을 열어가고자 한다.

 

 내가 이 생명평화경에 이끌린 것은 마음이 부대끼는 날이 많은 나를 보면서부터였다. 답답하고 화가 나고, 하지만 이런 날이 많아서는 숨을 쉴 수 없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던 것이다.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너무 쉽게 받는 내 모습이 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로 바라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지금 스님의 생명평화경을 통한 백배서원을 날마다 올린다. 생명평화경에는 불교, 기독교, 천도교의 사상을 모두 담고 있으니 어느 종교 하나에 편향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모든 선지자가 `진리가 그대의 삶을 자유롭게 한다.`고 했다. 이 생명평화경은 삶을 자유롭게 할 진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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