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대학 수학능력 시험이 끝났다. 말이 말의 값을 다하지 못하는 시절. 그러니 `대학 수학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이지만, 과연 그 값을 하는지는 자신있게 말하기가 쉽지 않다. 이것도 허위라면 허위일까. 여튼, 말값을 온전히 하지 못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나는 어젯밤 잠을 좀 설쳤다. 내가 수능을 앞둔 밤처럼, 꼭 그랬다. 깊이 잠들지 못하고 사소한 것에 잠을 깨는. 아무래도 내가 좀 긴장해 있었나 보다. 나는 고 3 언어 영역 전담 수업을 했고, 게다 이번 수험생들이 고 1, 2학년일 때, 나는 국어와 문학 수업 등을 맡아 해왔다. 그러니 내 수업이 이 수험생들의 시험 점수로 변환되어 나타내질 판이었으니 마음이 그리 썩 편하지는 않았을 게다.

 언어영역 감독을 하면서 시험 문제를 세심히는 아니지만 대강은 살펴봤다. 그리고 수험생들의 얼굴을 봤다. 나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와, 이런 문제로 수학능력을 과연 평가할 수 있나? 객관식 선다형으로 몇 점 더 받았다고 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갈 힘이 더 있다는 건가?` 몰라, 나는 거기에 썩 긍정적 대답을 내놓을 수 없다. 어차피 지금 대한민국의 시험이란 것은 수학능력을 평가한다기보다 등수와 등급을 정하는 것이니 엄밀히 말해서 `수학능력`을 평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이쯤에서 고3 선생으로 지낸 내 삶을 되돌아 볼 수밖에 없는 것. 문제풀이 문제풀이 문제풀이. 여기서 한치도 더 나아간 게 없다. 이래놓고 선생이라... 뭐 이걸 원한 학생과 학부모가 있을 거라 위안할 수 있지만, 선생의 노릇으로는 도저히 용납이 쉽지 않다. 순간 순간 화가 나고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이 거대한 벽에 어떻게 맞서야 할지 내 스스로의 길을 찾지 못했으니, 나 스스로에게 채찍을 돌려야 할 일인 것같다.

 이런 생각 끝에 이 시가 떠올랐다. 
 

책을 퍼다 버리다
 
수능 끝난 다음날
학교 운동장에 커다란 트럭이 왔다
3학년 교실은 쓰레기장이다
아이들은 책을 질질 끌고 나온다
두엄더미 거름 삽으로 퍼내듯이
아이들은 책을 폭폭 상자째 퍼다 버린다
일 년 아니 삼 년 내내 생을 걸고
풀고 또 풀던 교과서 문제집들
끼고 다니고 베고 자며 눈물 콧물 묻어 있는
책들을 하루아침에 미련 없이 던져버린다
그동안 금과옥조 성전처럼 받들었으나
저 책들은 사실 시시한 군소리였다
산더미 같은 책더미 트럭은 금방 넘친다
내 한숨과 꿈이 서린 소중한 책들
까맣게 밑줄 긋고 베껴 쓰며 청춘을 바쳤던
가보처럼 물려주고 싶은 책에 대한 얘기는
까마득한 신화 또는 썰렁한 개그다
시험 끝나면 책은 보물은커녕 오물이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않으냐고?
공자님은 모른다
배우고 매일 문제 풀면 정말 신물이 난다는 걸
강 건넌 뒤 저리도 미련 없이 뗏목을 던져버리니
장자가 보면 좋아하시겠다
그런데 웬 뗏목이 저토록 많단 말인가
저 뗏목들을 밤낮으로 꾸역꾸역 삼키고 있었다니
아이들이 왝왝 토해내고 싶기도 하겠다
갈수록 숲이 성글고 공기 가빠지는 이유도
수능 끝난 다음날 고3 교실에 와보면 알 것이다

                            - 책을 퍼다 버리다, 조향미, <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 실천문학사, 2006년

  

  사람의 인생 한 살이를 생각하면, 고등학교 선생으로서의 내 한 마디는 정말이지 시시한 군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아이들이 성전처럼 떠받들던 교과서도 군소리에 지나지 않겠지. 하나의 역사적 사실에 대해 바라보는 시각이 얼마나 다양한데, 그것을 한 가지 잣대로 서술한다? 가르친다? 에고고 불쌍한 일이다. 이 불쌍한 일을 아이들은 성전으로 받들었다니, 이거 이거 선생 노릇 부끄럽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이 없는 세상 싸움이 없는 세상
그곳은 어디에 있을까?
욕심이 없는 세상 아픔이 없는 세상
그곳은 어디에 있을까?
난 살고 싶어
너와 나 손을 잡고 사랑을 노래하는 세상  

난 살고 싶어
모두가 하나 되어 행복을 노래하는 세상
살고 싶어 

경쟁이 없는 세상 차별이 없는 세상
그곳은 어디에 있을까?
승리가 없는 세상 패배도 없는 세상
그곳은 어디에 있을까? 

                                                                 - `그곳은 어디에`,  한태주 노래,  첫 창작집 <첫비행>

 

그래, 승리도 패배도 없는 세상,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세상.
점수 몇 점으로 삶이 결정되지 않는 세상.
과연 불가능할까?

근데,
중요한 것은,
이렇게 시험치고 점수매기고 등급매기고 대학 정해진다고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거!

자, 이제 새로운 꿈을 꾸며 노래해보는 것은 어떨까?
 나만 이런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 거다. 이미 조향미 선생님은 시로써 이 안타까움을 노래하셨고, 최근에 한태주라는 젊은 음악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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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 동녘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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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반성
   

  어줍잖은 선생 노릇 10년이 되어 간다. 대학 4년의 배움이 얕아서 가르침 또한 깊지 못하다. 대학 4년을 돌아보면, 한 번의 연애와 소략한 독서, 그리고 잠깐의 분노로 대강 정리될 듯하다. 80년대 학번처럼 사회 운동론이나 마르크스주의, 사회 구성체론 등 붉은(?)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잠깐 잠깐의 찌라시(!)로 별 내용없는 분노만 일었다 잠겼다 그랬다.

 교사가 되고 소위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발령받았다. 학생은 학생대로 피곤한 삶이었고, 교사는 교사대로 힘든 곳이었다. 하지만 사람 사는 곳이니 인정이란 게 없지 않아서 조금만 마음을 열고 다가가면 눈물 쏟는 녀석이 있기도 했다. 그것으로 교사의 보람을 찾아 갔다. 그러면서 그 녀석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보게 되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 대학 때 밀물처럼 밀려왔다 때맞춰 빠져나가기만 했던 분노와 안타까움이 바로 내 곁에 와 있었다. 세상이 사람을 변두리로 몰아내는 것 같았다. 어쩌면 사람이 사람을 변두리로 내모는 세상을 만든 것인지도 몰랐다. 가난한 사람도 사람답게 사는 모습이 좀 멀어 보였다.

 그리고 어느 단체에 가입을 했다. 가난하고 힘든 아이들에게 웃음짓고 같이 아파하던 선생님들이 그 단체에 많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런 교사가 되고 싶어서였다. 가난이나 그 어떤 차별과 편견에서 벗어나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힘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애시당초 그 힘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힘은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 가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뭔가 될 것 같기도 하다.`는 희망이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지리멸렬했다. 최근엔 후자에 가까워 나 스스로 좀 낭패감을 느낄 때가 많다. 

  이 낭패감에서 어째 벗어날까 싶어 도서실에서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빌렸다. 백절불굴(百折不屈)의 혁명가, 불꽃은 같은 삶을 살다 간 김산. 그를 통해 이 어처구니없는 세상을 비춰보고 이 낭패감에서 벗어날 정도만 바랐지, 세상을 바꿀 혁명적 힘같은 것은 아예 꿈꾸지 않았다. 이미 김산은 사람을 넘어선 사람이 아닌가. 어찌 그처럼 간난고초를 이겨내며 자신의 신념을 현실화하기 위해 스스로를 단련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저 나는 적당히 분노하고 적당히 행동하며 언제고 좋은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딱 그 정도에 지나지 않는 필부일 뿐.

 그런데 김산의 삶을 따라가면서 내가 부끄러워졌다.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보겠다는 희망으로 교사 소모임을 하고, 투쟁 현장에도 참가하지만, 정작 나에게는 신심같은 게 있기는 했을까. 신심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간절함같은 게 있었나.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안타까워서 분노했고, 적당히 둘러치며 이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김산의 삶이 가닿기 어려운 삶이란 걸 인정하면서, 적어도 무언가를 하겠다고 일을 잡았으면 치열한 의지같은 것은 있어야 하지 않나.

백절불굴의 삶

 김산은 1919년 3.1 운동에 동참하면서 조선의 독립 가능성을 희망했다가 곧 좌절하고 만다. 비폭력 운동만으로는 일본의 압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김산은 곧바로 일본을 거쳐 만주로 떠난다. 거기서 안창호 선생을 만나 약간의 도움을 받는다. 김산은 안창호 선생의 영향으로 민족주의의 세례를 받게 된다. 하지만 곧이어 상하이 임시정부 주변(1920년대 임시 정부는 보수적 성향의 민족주의와 급진주의로 양분되어 있었던 듯하다.)에서 활동하던 젊은 항일 `급진주의자`들과도 접촉한다. 그러면서 무정부주의로 기울어져 무정부주의자가 되겠다는 서약을 했다. 드디어 1921~1922년에 확고한 신념을 가진 마르크스 레닌주의자가 되었고, 중국 공산당원으로서 활약하게 된다.

 김산은 중국공산당원으로서 1927년 광둥 코뮌과 하이루펑 소비에트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사실 광둥 코뮌과 하이루펑 소비에트에 관한 자료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아리랑>은 김산의 삶을 통해 그것의 실패를 생생하게 묘사해주고 있다. 김산은 이것의 실패로 인해 죽을 고비를 넘기고 홍콩을 거쳐 어렵사리 되살아오게 된다. 하지만 김산은 코뮌과 소비에트의 실패로 건강은 파괴되었지만, 정신은 더욱 튼튼해졌다고 술회한다. 그러니 그 후에 반동세력의 요새였던 베이징에서 지하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30년에 베이징 경찰에 체포, 일본으로 넘겨진다. 그렇지만 그가 중국공산당원이라는 증거가 불분명해서 석방된다. 1933년에 다시 체포, 6번의 물고문 끝에 석방되기도 한다. 석방 후 곧바로 중국으로 건너와 다시 공산당 활동을 하게 되고, 1937년 무렵 헬렌 스노우를 만나 자신의 삶을 술회하게 된 거였다. 그 뒤에 김산의 소식을 스노우는 접하지 못했고, 1938년에 부당하게 처형되었다는 소식에 몹시 충격을 받는다. 죄명은 `트로츠키주의자`, `일본 스파이`라는 것이었다. 1983년 중국 공산당은 김산의 당원 자격을 회복하면서 그의 죽음이 억울했음을 인정한다.

 
김산의 혁명가적 사상

 김산의 삶을 몇 문장으로 정리했지만, 그의 사상과 의지는 이것을 훨씬 뛰어넘고도 남는다. 일제의 폭압에 헐벗고 떠도는 조선 백성을 위해, 조국의 독립과 혁명을 위해 불꽃처럼 살다간 사람이 김산이다. 일본 순사의 6번에 걸친 물고문과 폭행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중국땅으로 다시 건너가 혁명을 위해 몸바쳤던, 사람을 넘어선 사람이 김산이었다. 실패에서 좌절을 읽지 않고, 거기서 스스로를 단련하는 초인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김산은 스스로, 이렇게 술회하기도 했다. 

`다년간에 걸친 힘든 혁명적 경험으로 무장되고 장차 올바른 지도자가 될 자격을 갖춘 하나의 성숙한 인간이었다. 나 자신의 문제들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이해하게 되었다. 내 판단은 균형이 잡히고 건전하게 되었다. 감정에 흐르거나 이론에 치우치지 않고 정신으로 육체적으로나 투쟁의 확고한 배경을 갖는 실제적이고 현명한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중략) 일단 내 지도방식이 올바르다고 느낄 때에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결정을 내리고, 다른 사람들한테 따르라고 명령을 내린다. 확신을 갖게 될 때까지는 마음 속에서 결정하기를 거부한다.` - 402쪽

 이 인식이 거짓되거나 허언이 아님은 이미 김산의 삶이 다 말해주고 있다. 시련과 고난을 통한 자기 단련을 통해 형성된 자기 신뢰, 엄정한 상황 인식 능력, 단호함, 신중함, 주도면밀함 등이 읽힌다. 혁명가로서,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생각을 가진 이라면 곰곰이 되새겨보아야 할 덕목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 김산의 혁명가적 자질로서 도드라져 보이는 부분은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월한 권력에 대항하여 개인적으로 싸우는 것은 쓸데없는 비극에 지나지 않는다. 힘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대등한 힘을 조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힘을 동원할 수 없다면 행동을 늦추어야 한다. 모험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중략) 다수의 추종자를 얻기 전에는 지도할 권리가 전혀 없다. 자기 시대를 앞서 있다는 것은 선전 작업과 비판을 할 수 있는 자격에 불과할 뿐 지도할 자격은 되지 못한다. 우리 시대 최고의 위대한 민주주의적 대중지도자는 대중을 쫓아가서 앞으로 밀 뿐 대중을 밧줄로 잡아끌지는 않는다.` - 466쪽


제목 아리랑
   

 이 책의 제목이 <아리랑>인 것은 우리 민족 고유의 노래여서이기도 하지만, 김산을 김산이게 한 힘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민족의 삶을 아파하고, 혁명가적 삶을 살게 한 그 아픈 힘이 여기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결국 민족과 사람을 사랑한 그 웅숭깊은 인간애가 김산의 혁명가적 면모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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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학기 개학을 하고 지금까지 어떤 정신으로 지냈는지 모르겠다. 정신없이 지냈다는 말. 근데 돌아보면 딱히 한 일이 떠오르지 않아 난감하다. 살면서 완성된 무언가를 내놓아야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뭐 했지?` 물음에 멍해질 때, 허망해지려한다. 수업을 하긴 했는데, 대체 내가 무얼 가르쳤는지 모르겠다. 아이들은 또 무얼 배웠는지 의심스럽다. 그저 기계적으로 문제만 푼 것 같다. `3학년이니까`하는 스스로의 위로 혹은 변명같은 것으로 면죄가 될 것 같지 않다. 거기다 더해 지금 3학년 아이들의 언어 성적이 해가 갈수록 곤두박칠쳤으니, 그 많은 국어 수업 시간이 아이들에게 무슨 의미였을까, 의미가 있긴 했나 모르겠다.

 몇 번 얼굴을 봐서 눈인사 정도 하고 지내던 한 선생님이 우울증으로 병휴직을 내셨다는 소식 들었다. 나보다 젊고 학생들과 잘 지내던 유쾌 발랄한 선생님이라 좀 충격이었다. 그런데 그간에 항우울증 약을 복용하며 어째 어째 학교 생활을 버텨오셨다니. 어디선가 그 선생님 글을 읽었다. 10년 가까운 교직 생활동안 학교가 한 치도 나아진 게 없었다, 오히려 더욱 사람을 못 살게 굴었다, 는 내용이었다. 그래, 어쩌면 학교가 교사나 학생을 병들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부산대 유아교육과 어느 교수님은 전에 이렇게 물으셨다. `선생님, 선생님들 하시는 일이 선업(善業)이라고 생각하시죠? 착각하지 마세요. 애들 죽이는 악업(惡業)이예요.` 그 말씀이 좀 과하다 생각했는데, 그래도 학교에서 성장하고 행복해하는 학생들도 있다는 생각에 좀 억울하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는데, 어쩌면 본질적 문제를 짚으셨는지 모른다.

 매주 금요일 저녁, 초량에 있는 민주시민교육원에서 연수 하나를 받고 있다. `포스트 후쿠시마와 교육` 언론에서는 후쿠시마가 사라졌지만, 그 문제는 지금도(어쩌면 영원히..ㅠㅠ)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일본에서는 도심 집회가 열리고 진보적 일간지에 연일 글이 실리지만, 우리 나라 진보 언론은 인력의 부족 탓인지, 자금력의 문제인지 일절 보도를 하지 않고 있다. 녹색평론 편집인인 김종철 교수님이 원자력 문제를 지적하는 글을 한겨레에 보내도 보도되지 않는다고 지적하시며, 우리 나라 언론도 원전 마피아에 포위되어 있다고 주장하셨다. 일례로 원전의 안전성을 입증한다는 책을 1면 광고로 큼지막하게 실어준다는 것.

 독일은 원전 제로를 실현하기로 국민적, 정치적 합의를 본 상태란다. 핀란드도 건설하던 원전을 포기했다. 애초 올라온 예산보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건설 비용에 정치권도 손을 든 모양이다. 일본도 원전 제로가 예상된다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 나라만은 원전 확대 정책을 고수하고 있으니, 미래가 불안하다.

 <체르빌의 목소리>라는 책을 읽고 있다. 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녹취 기록했다. 특히 충격적인 건, 한 여인의 이야기. 이 여인은 소방관의 아내. 이 둘은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혼부부였고. 남편이 원자력 사고로 인한 화재 진압에 투입된다. 작전 수행 후 곧바로 모스크바 원자력 병원으로 후송되고 아내가 의사들에게 사정사정 해서 남편 병간호하게 된다. 의사들은 ``저건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방사능 덩어리일 뿐입니다.`` 하고 만류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남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관은 완전 밀폐되고, 거기다 1.5M 두께의 콘크리트 공간 안에 매장된다.(지금도 이 묘지 안에는 아무도 출입하지 못 한단다.) 그리고, 이 여인은 얼마 후 딸 아이를 출산하는데, 이 아이는 몇 시간 만에 죽는다. 갓난 애기가 간경화와 백혈병이라니... 얼마 못 가 죽을 것이라 예상됐던 여인은 아직도 살아 있다. 왜 그럴까? 방사능 물질이 태아에게 다 간 것이다. 이 이야기는 꽤 충격적이다. 원자력, 방사능의 성질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거란 생각 때문이다. `현재를 살기 위해 미래를 죽이는` 원자력 시대가 아닌가.

 많은 전문가들이 원자력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나라로 프랑스와 우리 나라를 꼽고 있다. 그런데 김종철 교수의 생각은 단연코 우리 나라. 그것도 우리와 가까운 고리를 꼽았다. 이유는 두 가지. 고리 원자력 발전소의 시설이 후쿠시마 거랑 똑같은 거란다. 이미 가동 연한을 넘겼고, 거기다 재가동에 들어갔으니 위험이 높아진 거다. 그리고 프랑스는 원자력 안전 기술자가 무척 많은데, 우리 나라는 원자력 안전을 전공한 전공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 짓기만 지었지 그것의 안전을 관리할 전문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원자력을 좋은 에너지라고 홍보하고 있으니, 미래가 두렵다.

 대안이 무엇일까? 그렇다면 교육은 어떤 방향으로 이뤄져야 할까?

 모든 게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문제라 하나의 처방, 혹은 여러 가지의 처방이 내려진다 해도 어쩌면 해결 불가능한 문제가 아닐까 싶다. 이미 신의 저주에 발목이 잡힌 것은 아닌지도 모른다.(1986년에 `지옥의 문이 열렸다`고 말한 사람도 있다.) 그렇다 해도 계속해서 이 속도로, 이 삶의 방식대로 살아서 되는 일일까? 우리 사회가 이 모습대로 100년이 지속된다면(앞으로 꾸준히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 거기서 삶의 희망을 말하거나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을까? 우리야 길게 50년 정도 살다 가면 그만이지만, 그 뒤에 남겨질 우리의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뭐, 인류의 문제가 지금만 존재한 것도 아니고, 예전에도 다 있어왔고, 그래도 어째 여기까지 버티고 온 걸 보면, 이 문제도 해결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도 해보지만,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에서 벌어진 지옥의 모습을 보면, 이 걱정 잠재우기가 쉽지 않다.

* 에휴, 어쩌다보니 이 일기장을 2주 가까이 손에 쥐고 있었다.
  일기는 이미 쓴지 오래. 이제 백혜원 샘한테로 달려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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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월 23일 진동에 갔다가 슬뫼와 태호를 데리고 진동초등학교 운동장에 놀러갔다. 그곳은 내가 20년도 더 전에 졸업한 학교다. 내가 75회 졸업이니 지금은 100년이 훨씬 넘은 역사를 지닌 곳이다. 넓은 운동장, 잘 다듬어진 정원에서 한가한 한때를 보냈다. 

 

 슬뫼는 겁이 좀 많다. 공작새와 거위 등을 키우는 동물원이 있는데, 슬뫼는 절대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 이렇게 약간 먼 발치에서 호기심어린 눈빛만 보낼 뿐! 

 병설유치원 건물 바로 옆에 예쁜 정원이 있었다. 수생 식물을 키우는 공간도 있고 정자도 있었지만 관리가 잘 되지 않는 듯보였다. 여튼 아이들 곁에 이런 생태적 공간이 있다는 것은 좋아 보였다. 

 

 운동장 모래밭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모래를 한 움큼 집었다 던지는 놀이를 하기도 했고, 그냥 이렇게 앉아 있기만도 했다. 이 둘은 한 10일 차이 나는 터울인데, 슬뫼가 좀 더 작다. (원래 예정대로였다면 슬뫼가 형이 되는 거였는데...ㅋ) 

 저 뒤가 학교 본 건물. 내가 다닐 때는 학년당 2학급이 있었다. 근데 눈에 거슬리는 것 하나. 담쟁이 덩굴. 고속도로 방음벽 같은 데에도 담쟁이 덩굴을 올리고 있지만, 저거 큰 문제다. 저 덩굴의 힘이 엄청나서 금속이나 콘크리트 벽을 망가뜨리는 주범이라는 거다. 서양 대학이나 서양의 것을 보고 흉내를 낸 셈인데, 저런 걸 치장한다고 없던 내실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아빠와 아들
  

 누구는 나를 닮았다 그러고 또 누구는 엄마를 닮았다고 한다. 하긴 우리 둘이 만든 작품인데..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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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하면서 정리가 필요한 순간이 간혹 있다. 나는 주로 마음이 부대끼면서 무언가 일을 마쳤을 때가 그 순간이다. 1학기 때에는 한창훈 선생님 초청 강연회를 마쳤을 때가 그랬고, 오늘은 아이들의 본격적인 수업이 끝나서 그랬다. 거의 1년 동안 문제 풀이만을 한 나의 수업이 무척 아쉽고, 이 상황을 나 스스로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만약 다시 나에게 똑같은 상황이 주어진다 해도 별다른 수를 쓰기가 쉽지 않겠지만, 내 마음에 찌꺼기같은 걸로 가라앉는 이 정체불명의 것을 떨어내야할 것만 같았다. 

 나는 탑을 보면 정리가 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감은사지탑, 무장사지탑, 창림사지탑, 그리고 내가 무척 좋아하는 용장사지 3층 석탑이 그렇다. 그래서였다. 이번 정리는 남산에 우뚝 솟은 용장사지 석탑으로 하리라. 실제로 정리가 되든 아니든, 그 느낌이 내게는 필요한 거였다. 

 1,2학년은 소풍을 떠나고, 3학년은 사설모의고사를 치르는 날. 나는 그냥 연가를 냈다. 그리고 오후 늦게 경주로 출발. 후훗~ㅋ

  

  늦은 점심을 삼릉 입구에서 먹고 도열하듯 늘어선 소나무 숲을 지나면 위의 사진을 만나게 된다. <냉골 여래 좌상>다. 부근에 묻혔던 것을 우연히 발굴한 거란다. 왼쪽 어깨의 가사끈과 허리에 맨 군삼끈이 매듭지어진 모습인데, 어떻게 돌에다 저런 곡선을 만들어낼 수 있었는지 놀랍다. 정말이지 매듭의 한 끝을 잡고 스스륵 잡아당기면 매듭이 부드럽게 풀릴 것만 같다. 

 잠깐 쉬었다 금오산 정상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아래의 부처님을 만나뵐 수 있다.  

 

 <선각 아미타불>이다. 지금은 <선각육존불>이라고 이름붙여져 있는데, 저 옆으로 삼존불이 더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선각 아미타 삼존불>이 두 세트있다고 보면 된다. 원래 석가삼존은 여래가 앉으시고 협시보살이 서 계신 데 비해 이곳에서는 여래가 서계시고 협시보살이 앉아 계신다. 협시보살이 여래에게 연꽃을 바치는 모양인데, 그 새김이 아주 섬세하다.  

 부처를 보는 것도 좋지만, 부처가 바라보는 것을 보는 것도 좋다. 그래서 저 삼존불 위에 올라봤다. 저 아래로 펼쳐진 경주 들판은 늦가을답게 노랗게 익어 있었다. 부처님도 보시기에 참 좋으시겠다. 

 여기서 잠깐 숨을 돌리고 조금 가파른 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아주 독특한 부처님을 뵙기 위해서였다. 독특하단 것은 지극히 평범하다는 말씀. 너무 평범한 얼굴이어서 아주 독특한 부처님이 되어 버린 역설. <냉골 마애 석가여래상>이다. 

 

 몸은 선각으로 되어 있는 반면, 얼굴은 돋을새김을 해두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생긴 암벽의 금을 대좌로 삼고 앉으신 모습이 무척 위엄 있어 보인다. 역시나 이 부처님 위에 올라가서 사바세계를 내려보면 경관이 아주 멋지다. 땀을 잠시 식히고 곧바로 가파른 길을 치고 올랐다. 한 20여분 오르면 능선을 만나게 되고 바둑바위위에 설 수 있다. 거기서는 경주 시내가 굽어보이고 맞은 편에 선도산, 무열왕릉, 오른편으로 계림, 반월성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거기서부터 금오산 정상까지는 능선이다. 오르락 내리락 하는 길이 지겹지가 않다. 능선 오른편으로 트인 시원한 벌판은 보는 재미가 있다. 그 능선길에서 해지는 장관을 찍었다. 

 

 이쯤되면 약간 가파르게 오른 길도 다 용서된다. 

 금오산 정상을 찍고 짧은 임도를 내려가다 오른쪽으로 꺾어들면, 내가 경주에서 최고의 장소로 치는 용장사지 3층 석탑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 이르기 10분 전부터 내 가슴은 무척 설렌다.  

 

 <용장사지 3층 석탑>이다. 기단이 둘인 형식인데, 하층 기단부는 금오산 전체가 해당된다. 그러니까 탑 높이만 해도 무려 400m가 넘는 셈이다. 무엇보다 이 탑이 앉은 자리가 무척 좋다는 거다. 조금만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경주 벌이 훠~~~언하게 펼쳐진다. 

 마침 해가 지고 있어서 아래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이쯤되면 정리가 뭐고 없다. 생각이 있을 수가 없다. 그저 고요하고 평안하다. 

 용장사는 김시습이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그분이 지으신 책 이름이 <금오신화>라고. 이 탑 아래 조금만 더 내려가면 용장사지 금당터가 남아 있지만, 그 형색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알아 볼 수가 없다. 

 이 탑만이 용장골에서 이름난 게 아니다. 조금 더 내려가면 <용장사 마애 석가여래 좌상>이 남아 있다. 이거 이거 보통 아름다운 게 아니다. 유연하게 흘러내리는 어깨선은 매끄럽기만 하다. 두 볼은 아주 복스러운 얼굴이라 보는 이 역시 복받을 것만 같다.  

 

  이 부처님을 끝으로 용장골로 내려왔다. 4시간여의 산행. 혼자였지만 그래서 더더욱 좋았던 것 같다.  

 석탑, 석불을 보면서 생각하는 것이지만, `오래된 것은 아프다.` 하지만 이건 싫지 않은 아픔이다. 마음을 더욱 호젓하게 하는 야릇함이 있다. 꼭 문태준의 시처럼... 

  이쯤되면 문태준의 시 한편으로 마무리. 

 빈집 1  

              문태준 

  흙더버기 빗길 떠나간 당신의 자리 같았습니다 둘 데 없는 내 마음이 헌 신발들처럼 남아 바람도 들이고 비도 맞았습니다 다시 지필 수 없을까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으면 방고래 무너져내려 피지 못하는 불씨들 

  종이로 바른 창 위로 바람이 손가락을 세워 구멍을 냅니다 우리가 한때 부리로 지푸라기를 물어다 지은 그 기억의 집 장대바람에 허물어집니다 하지만 오랜 후의 당신이 돌아와서 나란히 앉아 있는 장독들을 보신다면, 그 안에 고여 곰팡이 슨 내 기다림을 보신다면 그래, 그래 닳고 닳은 싸리비를 들고 험한 마당 후련하게 쓸어줄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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