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래카메라' 하면 개그맨 이경규가 떠오릅니다. 1990년대 연예인 한 명이 TV에 나와서 아는지 모르는지 슬쩍 속아 넘어가는 장면을 일요일 저녁 온 식구가 모여 함께 보고는 했죠. 그걸 보면서 참 불편했는데 이상한 점은 불편해 하면서도 꼭 끝까지 봤다는 겁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 프로그램이 너무 재미있어서 불편했던 것인지, 불편해서 재미있었던 것인지 헷갈립니다. 하여튼 사람들의 엿보기 심리, 관음증에 대한 대중의 욕망과 쾌락을 연예인의 사생활과 잘 버무려 상업적으로는 크게 성공한 오락프로그램이었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최근에 검찰이 '몰래카메라'를 수사한다고 합니다. MBC 시사 프로그램인 <불만제로>에서 어떤 유치원이 아이들에게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제공한다고 고발한 적이 있었는데 그 취재과정에서 <불만제로> 제작진 한 명이 유치원 보조교사로 위장취업하여 몰래 촬영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유치원에서는 "제작진이 인터뷰 거절 의사를 묵살하고 퇴거 요구에 불응한 채 유치원 곳곳을 몰래카메라로 촬영했다"며 지난 4월 경찰에 <불만제로>를 고소했지만 경찰은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검찰은 "고소인이 제작진의 처벌을 강하게 원하고 있고 언론 자유와 개인 사생활의 범위 등을 판단해 볼 여지가 있어 몰래카메라와 관련된 국내외 취재사례와 판례 등을 검토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몰래카메라>만큼은 아니지만 한때 <불만제로>라는 프로그램도 즐겨보았고 또 거기서도 왠지 모를 불안함과 위태로움을 느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미 언론, 그 중에서도 방송이 대단한 권력이라 할 수 있는데 때로는 몰래, 때로는 공공연하게 카메라를 들이밀며 경찰과 검찰처럼 수사를 하고 취조를 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이었다고나 할까요. 처음에는 오리발을 내밀다가 찍어놓은 영상을 들이밀면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겠다고 읍소를 하는 업자들을 보며 한편 통쾌하기도 했지만 방송의 위력을 실감하며 어떤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던 것이죠.


어떻게 보면 몰래카메라의 원조 격은 1990년대 MBC의 <몰래카메라>가 아니라 1980년대 보안사(현재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이 아닐까 싶습니다. 1990년 말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보안사가 정치계, 노동계, 종교계 등 각계 주요 인사와 민간인 1천3백여 명을 상대로 정치 사찰을 벌였다는 것으로 이 일로 해서 보안사는 기무사로 이름까지 바꿔야 했습니다. 그리고 근 20년 가까운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 다시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이 기무사가 민주노동당 당원을 비롯해서 문화예술단체까지 미행하며 일거수일투족을 동영상에 담았다고 밝힌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와는 달리 기무사는 물론 거대 신문사와 방송사, 그리고 검찰에서는 별다른 말이 없습니다. 엿보기와 엿듣기, 사찰 분야의 대한민국 일인지라 할 수 있는 국정원(전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의 민간인 사찰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중들의 엿보기 심리를 이용한 상업방송의 문제는 물론 심각합니다. 흥행성공-시청률 상승-광고수입 극대화라는 고리에서 움직이는 상업방송의 선정성에는 분명히 브레이크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공익적 성격을 띠고 있는 시사 프로그램에서의 몰래카메라를 또 다른, 그리고 더 큰 권력인 국가기관이 검찰수사로 통제하려 한다면 거기에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정보수집-고발과 폭로-단죄와 처벌이라는 수순을 갖고 있는 국가권력기구의 몰래카메라가 가져다주는 공포가 더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몰래카메라와는 다르지만 우리는 도청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몰래 녹음하거나 청취하는 것은 불법이고 그 불법도청으로 알게 된 것을 공개하면 처벌받는다는 통신비밀보호법은 1992년 14대 대선을 앞두고 일어난 '초원복집 사건'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전 법무부장관과 지역 검사장, 경찰청장 등이 한 음식점에서 모여 여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김영삼 후보를 지원하기로 모의한 것을 국민당 정주영 후보 쪽에서 도청하여 세상에 알린 것이지요. 그런데 이 사건은 엉뚱하게도 '관권선거 모의'에서 도청 문제로 이동했고 김영삼 후보는 영남표 결집이라는 효과를 톡톡히 보았습니다.

2004년에는 MBC 이상호 기자가 1997년 대선 당시 삼성그룹 고위 임원과 중앙일보 회장이 만나 특정 후보에게 대선자금을 불법적으로 지원하기로 공모한 내용이 담긴 안기부의 도청 테이프를 공개한 '안기부 X파일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 사건도 역시 삼성과 중앙일보라는 재벌과 거대 언론사의 불법 대선자금 논의보다는 불법으로 얻은 것을 증거자료나 수사의 대상으로 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독수독과 이론(독이 있는 나무에서 열린 열매는 독이 있다)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설왕설래하다 이후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이 뒤따랐음에도 결국 흐지부지 되고 맙니다.


독수독과 이론은 1937년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유래된 말로 수사기관이 술 밀매꾼의 전화를 도청하여 기소한 사건에서 법원은 "불법으로 수집된 증거는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이 발단입니다. 2년 뒤 수사기관이 문제의 도청 내용을 단서로 수사를 벌인 뒤 새로운 증거를 제시했지만 연방대법원은 이 증거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원칙은 독일에서도 적용되었습니다. 1980년의 어느 날 독일 잡지 슈피겔에는 정부 기밀과 관련된 글이 실렸는데 수사기관은 한 언론인을 기밀 유출자로 지목하고 용의선상에 올렸고, 법원의 영장을 받아 도청에 나선 수사기관은 이 언론인이 자신의 누나 집에 기밀 문건을 숨긴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이를 근거로 법원에 기소를 하였지만 독일 재판부는 독수독과 이론을 근거로 증거능력을 부정하였습니다. 이때 독일 법원은 한발 더 나아가서 불법 도청한 대화에서 얻은 증거, 영장 없이 체포한 피의자의 자백에 의한 증거,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압수한 서류를 통해 수집한 증거 등이 대표적인 독수에 해당한다고 하여 그 독수의 개념을 넓히기도 합니다.


이처럼 독수독과 이론은 국가권력기구인 검찰과 경찰, 국정원 등이 고문이나 도청 등 절차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수사하는데 경종을 울린 것이지만 한국사회에서는 오히려 거대한 권력의 잘못을 은폐하고 유야무야 하는데 편리하게 이용되고 있습니다. 수사기관들은 법원의 영장을 받았다는 이유로 이메일을 뒤지고, 도청을 하고, 또는 법원의 영장도 없이 몰래카메라를 찍고 제 맘대로 사찰을 하면서 말이죠.


흥행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언론이 그 속성을 자제하지 못하면 3류 찌라시로 전락하듯 공권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국가권력은 조폭이나 양아치와 다를 바 없게 됩니다. 그래서 “취재과정에서 윤리강령 및 내부규정을 엄격히 준수해서 촬영했고 공익을 목적으로 취재활동을 벌인 점에 비춰볼 때 문제될 것이 없다”는 <불만제로>의 윤리강령과 내부규정이 궁금한 만큼이나 이를 수사하겠다는 국가권력기구의 윤리강령과 내부규정 또한 궁금합니다. 한 법률가는 “언론기관이 사회비리를 밝히기 위해 몰래카메라를 사용해 취재한 행위는 업무방해죄로 처벌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합니다. 국가기관이 국가안전을 위해 몰리카메라를 사용해 사찰한 행위는 처벌되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백번 양보하여 <불만제로>를 공권력을 동원하여 수사해야겠다고 하듯 마찬가지로 민간인 사찰을 일삼은 기무사와 국정원에게도 대충 비슷한 잣대를 대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겠지요. 

 

- <미디어스>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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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09-09-21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방금 미디어 오늘에서 기사를 봤는데. 언론의 자유와 공익성, 방법의 문제가 엮인 것이지만, 졸속으로 진행시키고 있는 수사란 점에선 이견이 없을 것 같아요.

나무처럼 2009-09-21 14:41   좋아요 0 | URL
독수독과 이론을 검찰에 적용시키면 나쁜 정권 아래의 나쁜 검찰이 수사한 결과는 역시 나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

뷰리풀말미잘 2009-09-21 14:42   좋아요 0 | URL
아치님은 모르는 것도 없으셔.
 

어제오늘 온통 신임 총리 내정자 이야기로 뉴스들이 채워지는 거 같다.  

어찌보면 이 정부 들어 제일 잘(?) 한 일, 성공적인 일이 이번 개각이 아닐까 싶을 정도이고, 신임 총리 내정자인 정운찬이 이렇게 여러 진영의 기대주였나 싶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의미로든 가장 좋은 국립대학교 총장이나 되는 사람이 한국정치에서 그야말로 얼굴마담 격인 국무총리로 가면서 마치 대단한 출세인듯 본인이나 사회가 반응하는 게 쫌 그렇다. 그야말로 교육이나 사회적 문화, 품격의 수준을 보는 거 같아서....  

사람일은 모르는 것이라서.. 총리 후보로 이야기되었던 심모씨나 김모씨보다 더 일을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한편에서는 해보게 된다. 또 한편으로는 이 사람이 대선후보 영입 일순위 운운하던 시절 지역 향우회를 열심히 돌았고 그 동네 인지도 조사까지 했던 사람이라니 별볼일 없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하여튼 아래 칼럼은 개각 발표 이전에 쓰인 글이다. 가끔 이 사람이 쓴 칼럼을 보면 정신이 번쩍 들고는 한다. 현실 진단도 그렇지만, 민주당만이 아니라 이 시대가 불편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민주당에게 말하고 있는데, 과연 우리는 부처를 만났나? 우리의 부처를 어떻게 죽일 것인가? 그런데 '우리'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부처는 또 누구인가? 하는 물음들 말이다.   

문제는 정운찬이 아니라 이명박이고, 이명박이 아니라 결국'우리'인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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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근칼럼]변하는 이명박, 변함없는 민주당

일을 크게 그르쳐 놓고서는 변명하며 자기방어에 급급해 하는, 소심한 이명박의 모습이 요즘 잘 보이지 않는다. 편향적인 보수주의 이념을 이 사회에 주입한다고 갈등과 분열을 조장해 놓고는 수습할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던 장면도 보기 어렵다. 노무현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김대중의 죽음에 대처하는 방식이 다를 만큼 변화의 속도감도 느껴진다. 드디어 자기 실수를 바로잡는 학습 능력이 생긴 것일까. 등록금 후불제와 같은 민생 대책을 보면, 그가 정말 실용적이 되려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개각 논의에서 알 수 있듯 사람을 쓰는 솜씨도 전보다는 조금 나아진 듯하다. 최근 변화가 중도·실용이라는 개념에 딱 들어맞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로 인해 이명박 지지율은 상승 국면이다. 일부 여론 조사는 꿈의 40% 벽을 넘었다. 물론 그 변화의 실체는 있는지, 그가 뭘 잘했다는 건지 따질 것은 많다. 그는 아직 용산참사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있다. 비정규직 문제, 4대강 살리기, 방송 장악, 인터넷 통제, 국가인권위원회 축소, 공안 기능 강화 문제도 있다. 부자감세에 일자리는 줄고, 빈부 격차는 커지고 서민들은 살기가 어려워졌다.

‘중도·실용·친서민’ 행보의 MB

그러나 중도·실용 행보의 정치적 효과 때문인지 이명박 반대와 비판의 목소리에는 예전처럼 힘이 실리지 않는다. 친서민 행보가 부자와 기득권에게 알짜를 다 넘겨주고 나서 서민에게 부스러기를 나눠주는 허구라고 하는 비판조차 이명박의 이미지를 높여 준다. 강부자 정권 시비 때와 비교해 보라. 친서민 정권이냐 아니냐의 논쟁은 이명박이 엎드려 바라는 바일 것이다. 그의 본질은 난폭한 시장주의자이자 국가주의자이며 개발독재시대 낡은 경제노선의 추종자라고 공격해도 사람들의 귀를 자극하지 못한다. ‘중도·실용 논란’이 그의 본질을 은폐하는 가림막 혹은 외부충격을 흡수하는 완충지대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데 완충지대를 무력화하고 이명박 정권의 근본을 공격하는 일은 당분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제 소리나는 인형이다. 아무리 때려도 아파하기는커녕 중도·실용·친서민이란 말만 반복할 것이다. 무조건 때리면 손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성능 좋아진 이명박과 맞서게 된 민주당이라면 긴장해야 할 텐데 지금 무얼하고 있느냐 하면, 바야흐로 과거로 내달리는 중이다. 이명박은 과거를 지워 자기 앞 길을 열고 있는데, 반대세력은 과거를 되살려 내느라 애쓰고 있다. 김대중·노무현 생존시에는 그들의 한계를 어떻게 뛰어넘을 것인지 조금이나마 고민하던 민주당이 그들 사후에는 유지·계승을 주장하며 다시 울타리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스스로 기회주의자였음을 고백함으로써 또 한번 기회주의적 처신을 하고야만다. 울타리 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예상대로 갖가지 퇴행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 누굴 중심으로 뭉치라 했다느니하는 북한식 유훈통치, 동교동계니 친노니 하는 타임머신 정치, 노병은 죽지 않았다흘러간 물로 물레방아 돌리는 노병정치, 가장 현실적이어야 할 정치의 이 초현실성이 놀랍다. 지난 10년 정권에 대해 비판과 견제를 제대로 못했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재야 원로들도 이명박과는 싸우겠다며 민주통합 시민행동이란 걸 만들기로 했다고 한다. 이제야 행동을 하겠다니! 너무 늦었다. 그들이 빚어내는 80년대적인 고색창연한 흑백의 풍경이 쓸쓸하다. 반대세력은 통제되지 않는 과거 회귀 본능이 있는가. 왜 과거로만 달릴까.

권력과 명예를 나눠 가졌던 이들은 10년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겠지만, 그때 역시 영광만 있었던 게 아니라, 부패와 무능, 배신이 있었으며 시장의 폭력이 있었고, 많은 서민들의 고통이 있었다. 10년은 ‘지금 우리’의 길이 아니다. 미래라는 수레를 끌고 갈 동력이 떨어진 민주당으로서는 민주화 운동의 추억을 자극해서라도 힘을 보충받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그건 말라빠진 어미의 젖을 빠는 가련한 새끼의 모습이다. 젖을 떼야 한다. 민주대연합 운운하며 무조건 뭉치자는 것 역시 젖을 보채는 철부지의 울음일 뿐이다. 야당이 뭉치지 못해서 이러고 있다면, 그것은 해결책이 된다. 그러나 민주당은 지금 뭉치지 못해서가 아니라 똑바로 서 있지 않아서 문제이다. 그 치명적 약점은 이명박 반대를 열심히 한다고 메워지지 않는다.

똑바로 서있지도 못하는 민주당

민주당이 당사에 두 대통령의 사진을 내걸었다. 자신들을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부적 같아 보인다. 그런 민주당에 이 한마디를 해주고 싶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이대근 정치·국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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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난생 처음 해봤다.  
 
마눌님이 직장을 옮기는 바람에 갑자기 또 이사를 가야 하는데 마침 전세대란(!)이다. 전세집을 구하다보니 정말 대란임을 실감한다. 서울에 그렇게 많고 많은 아파트 중에 들어갈만한 집 한 칸이 없다니.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수천만원이 뛰고, 그래도 나온 집이 거의 없다는 거다. 아이도 있어 이것저것 따지다보니 선택의 폭은 더 좁을 수밖에 없었다. 
 
2004년에 결혼을 하고 벌써 네 번째 하는 이사. 평균 1년 약간 넘게 살고 이사를 한 셈이다. 이런 저런 일들이 많아서였지만, 네 차례 이사하면서 깨진 돈도 돈이지만... 태어나서부터 치면, 아니 내가 기억나는 것만 치자면 몇 번 이사를 다녔나 싶다.  

가장 어릴 적 기억은 종로2가인가 3가에 있는 낙원동이다. 거기서 방학동으로, 다시 성북동으로.(성북동에서 방학동으로였는지도 모르겠다.) 상계동으로, 반포로, 돈암동으로, 다시 반포로, 안성으로, 수원으로, 화정으로, 동백으로, 죽전으로, 이제 정릉으로.    

그래도 우리집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안 해봤으니, 그리 고생스럽게 산 건 아니었나보다. 사실 어릴 때는 이사하는 게 무지 좋았다. 뭐 이사짐을 싸거나 나르는 것은 괴로웠지만 뭔가 환경이 바뀐다는 게 즐거웠던 거 같다. 이삿날이면 먹게 되는 짜장면이나 찰밥도 좋았다.

하지만 이제 이사할 집을 보러 다니고, 이사짐을 줄이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을 색출하고(버릴 책을 고르는 건 거의 숙청 수준이다), 가구 배치를 고민하고 등등등...그리고 계약기간이 끝나갈 때 쯤 집주인 눈치를 보다가 오른 전세값에 다시 이삿짐을 꾸리는 일. 이래서 사람들이 집집집 하며 대출을 받아 집을 사는 걸까. 

우리집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해보지는 않았지만 한 2,30년 한 집에서 사는 이들이 무지 부러웠던 건 사실이다. 개인사가 고스란히 남는 공간을 가지고 있다는 것. 대한민국 서울에서, 수도권에서 사는 도시인에게는 누릴 수 없는 로망일까.

부동산 거품이 꺼지고 집값이 껌값이 되도 좋으니 그렇게 한 세월 아이를 키우며, 아아와 함께 나이먹을, 나와 함께 늙어갈 공간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다, 내가 나이를 먹나 싶어 화들짝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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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08-29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동네로 이사오시는 군요! 저도 어릴 때 한 집에서 오래 사는 아이들 보면 지겹겠다 싶으면서도 무척 부러웠어요.

BRINY 2009-08-29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 뉴스 보니까 서울 전세가 평균이 무려 2억!이나 하더라구요. 휴...

마늘빵 2009-08-29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수록 점점 외곽으로 밀려나는 사람들 뿐입니다. 도대체 서울에 집 하나 소유하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지방에 가보면 한 10년 열심히 벌면 살 수 있는 집도 많던데. 모든 집값을 절반으로 툭 잘라버리면 좋겠어요.

나무처럼 2009-08-29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값아파트는 정주영의 대선공약이었다는데^^ 지역에 있는 소도시로 마음이 가기도 하는데 직장도 그렇고 삶의 터전을 옮기는 일이 쉽지 않죠. 그런 날이 오려나...
 

잡지마감이라 정신이 없다. 글도 두 편이나 써야 하는데 어제 한 편을 겨우 완성했다.  
촛불시민과 용산에 대해 인터뷰한 내용이다.  

"용산은 늘 2순위여서 미안하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한편 무기력과 패배감과 싸우면서도 열정적으로 촛불을 들고 있는 그 앞에서 많이 부끄러웠다.  

오늘 서울시청에서 용산 집중 집회가 열린다. 잠시라도 거기 다녀와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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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촛불과 만나다

“내 아이가 살아가야 할 세상…. 예전에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다들 힘든 시절이었지만, 나이 드신 분들이 참 많은 노력을 하셨겠지만 조금만 더 민주적인 나라를 만들어주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우리나라는 왜 이럴까. 지난 10년간 그래도 내 자식한테 민주주의 국가를 물려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 같아요. 근데 지금 되어가는 꼴을 보니까 아닌 거죠. 이럴 줄은 진짜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보다 두어 시간 먼저 용산에 도착했다. 8월 15일, 집회도 문화제도 없는 날이다. 천주교 자체 행사가 많아 매일 열리던 미사도 오늘은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부동자세로 서있는 경찰들 뒤로 참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남일당 건물을 한참 쳐다보고 있자니 이 한가로움이 왠지 낯설기까지 하다.

이대로 가면 낙원은 없다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나라는 민주주의 나라,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나라, 자유의지로 살아갈 수 있는 나라, 내가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을 수 있는 나라였으면 좋겠는데 이대로 가면 아무 생각 없이 돈 생기면 외국 여행이나 다니고 하는 이웃나라처럼 되지 않을까, 배부른 돼지들이 사는 나라가 되지 않을까, 아니 배고픈 돼지들의 나라가 되고 말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용산과 관련된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여 촛불을 들고 있는 ‘플라워겐’(닉네임, 김혜경, 44)을 만나 근처 호프집에 마주 앉았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이 상태로 가서는 낙원은 없다.”는 작가 조세희의 말이 떠오른다. 용산참사 다음날 현장을 찾은 조세희는 “30년 전 난쏘공을 쓸 때 미래에는 이런 슬픔, 불공평, 이런 분배의 어리석음이 없기를 소망”했으나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고 토로했다.

"촛불들은 대부분 아프리카(인터넷 개인방송)를 많이 보는데 새벽부터 놀란 가슴에 바로 현장으로 달려가기도 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날 뉴스는 못 봤어요. 현장에 갔던 분이 카페에 올린 글을 보고나서야 알았죠. 그리고 다른 누가 올려놓은 동영상을 봤는데 그 비명소리들…. 미쳤나봐, 미쳤나봐 그랬죠. 너무 가슴 아프고. 그래서 일 끝나고 같이 모여서 여기(용산)로 왔던 거 같아요. 와보니 또 너무 기막히잖아요. 그날도 아마 (경찰이) 여기 앞을 다 막았어요. 그래서 전경버스에 욕도 쓰고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솔직히 말해 저는 철거 이런 거 잘 몰랐고 별로 관심도 없었어요. 철거민들이 억울하고 그렇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왜 그런 일이 생기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별로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죠. 그리고 철거민들은 과격하다, 전철연이 어떻다, 이런 소문들도 많았잖아요. 촛불들 안에서도 그래서 용산과 함께 하기 싫다는 사람도 많았어요.”

플라워겐은 스스로를 그리고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가리켜 촛불이라 한다. 촛불, 촛불시민은 지난 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 이후 여러 사회의제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목소리를 내고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 인칭대명사가 된 듯하다. 촛불들은 연령대만 해도 60대에서부터 열네 살 청소년까지 다양하고 정치적 성향도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싫다는 사람에게 강요는 할 수 없지만 그는 용산에 와서 촛불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촛불은 힘든 사람, 마음 아픈 사람들과 같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게 촛불의 할 일이라는 생각을 했죠. 여기는 이래서 안 오고, 저기는 저래서 안 가고, 이런 건 아니다. 내가 비정규직이건 아니건, 철거민이건 아니건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느냐 하면서 말다툼도 했었어요. 누구든지 도움이 필요하고 촛불을 들어야 될 일이 생기면 가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금도 가지고 있죠. 또 사회적 약자들도 우리 같은 시민들이고, 누구나 언제든지 비정규직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언제든지 철거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이번에 갖게 된 거 같아요. 내가 사는 동네에 뭘 짓겠다고 하면 바로 나도 철거민이구나. 그렇다고 제가 여기 와서 뭐 한 일은 없어요. 그냥 머릿수 하나 보태려고 앉아있는 거죠.”

그가 처음 촛불을 든 까닭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집회에서 “애들이 나서는데 어른인 자신이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1980년대 후반 부산에서 대학을 다녔던 그는 87년 6월 항쟁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거리에 섰고 그 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학습지 교사로 다시 직장생활을 하다 꼬박 21년 만에, 8년차 학습지 교사로 살아가는 사회인으로, 열 살 아이를 둔 엄마로 다시 거리에 선 것이다.

21년 만에 다시 거리에 서다

“그냥 제 삶만 열심히 살았죠. 사실 사람이 자기 일 아니면 무관심하고 그렇잖아요. 정치에 별로 관심도 없었고 노무현 대통령 때 이라크 파병하는 거 보면서 화가 나기도 했지만 김대중, 노무현 때는 그래도 그럭저럭 사회가 잘 돌아간다고 생각했어요. 남들이 김대중, 노무현 욕을 할 때도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이해를 하고 넘어가는 사람 중에 한 명이었죠. 그런데 이명박 들어서면서부터 뭔가 이상하다 싶었죠. 내 안전이 위협받는다고나 할까. 이번에 기무사에서 사찰한 것도 그렇잖아요. 또 노무현 때 세금이 많이 올랐거든요. 그래도 세금 내는 게 아깝지 않았어요. 내가 이만큼 내면 누군가 혜택을 보겠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세금 내는 게 너무 아까워요.

드라마 즐겨보는 사람들이 모이는 카페 회원이었어요. 솔직히 거기서 저 혼자였으면 촛불을 못 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서너 명 있더라고요. 그 사람들이랑 같이 나왔죠. 그러다가 ‘촛불집회 같이 가기’라는 카페에 가입하게 됐어요. 작년에 촛불집회에서 시민 한 명이 죽었다는 사망설이 있던 전후였는데 막 물대포 쏘고 강경진압을 했잖아요. 그때 생겨난 카페예요. 먼저 집 방향이 같은 사람들이 연락처를 교환하고 촛불집회가 끝나면 살아있냐, 어디냐, 전화를 해서 만나서 집에 같이 가는 거죠. 그리고 지금은 거기 말고도 ‘안티 뉴라이트’ 카페랑 ‘1인 시위’ 카페에서 활동 중이고요.
‘안티 뉴라이트’ 카페는 작년 8월 쯤 만들어졌는데 주로 온라인에서 활동하고 정기적으로 하지는 못하지만 가끔 뉴라이트 바로 알기라는 내용으로 판넬전 같은 전시회를 하죠. 서울에서는 모일 장소도 마땅치 않고 집회신고도 잘 안받아주니까 분당이나 동탄 같은데, 관악산 입구 주차장에서도 했고요. 전시를 하고 있으면 시비 거는 사람도 많아요. 의외로 젊은 사람들이. 무관심한 사람이 80%, 관심 있는 사람이 20%, 그 중에 시비 거는 사람이 한 5% 정도라고 보면 돼요. 그래도 전단지 나눠주면 받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안 받아 가면 속상하죠. 사실 몰랐으면 저도 그 사람들처럼 싫다고 하고 안 받아갔을 텐데. 아는 게 죄인 거 같아요. 모르는 게 약인데. (웃음)”

냉정하게 말하면 촛불을 들게 되면서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많다고 한다. 그래서 올 6월까지만 촛불을 들자, 6월이 가기 전에 꼭 이명박을 끌어내리자고 다짐을 했고 아이와도 6월까지만 이해해달라고 약속도 했다. 그런데 이제 곧 가을이고 그의 활동은 더 늘어났다. 다음 아고라에서 뉴라이트에 대해 알게 되면서, 촛불을 드는 일 말고 더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끝에 전단지라도 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카페에 가입해 활동하다 ‘얼떨결에’ 카페지기까지 맡게 되었고 ‘1인 시위’ 카페(1인 시위로 보여주는 행동하는 양심)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주로 을지로 입구에서 1인 시위를 하죠. 사람이 많으면 명동으로 가거나 종각으로 가기도 하고. 아는 동생이 카페에 사진을 올려놓아서 알게 됐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워낙 많다보니까 같이 하자고 해서 그러자 그랬죠. 저는 수요일이나 토요일에 1인 시위를 하는데 두 시간 정도 서있으면 몸이 좀 힘들어서 그렇지 참 좋아요. 1인 시위를 하면 모래요정이라고 한 두 분이 나와 주시거든요. <바람돌이>라는 만화 있었잖아요. 모래요정은 거기서 따온 거래요. ‘3의 법칙’이라고 세 명이 한 곳을 바라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다고 하잖아요. 그런 역할도 하고 시비 거는 사람들로부터 1인 시위 서는 사람들 보호해주기도 하고. 주로 이십대 후반, 삼십대 초반 사람들인데 직장 마치고 퇴근하면서 같이 한두 시간 있다가 가는 거죠. 그런 사람들 만나면 너무 흐뭇하죠. 작년에는 촛불집회에서 ‘닥봉’이라고 있었잖아요. 닥치고 봉사하자는 모임. 촛불을 들게 되면서 정말 따뜻한 사람들,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 거 같아요.
저는 요새 미디어법으로 1인 시위를 했고, 4대강 죽이기로도 했고, 그러고 보니 용산 문제로는 한 번도 1인 시위를 못해봤어요. 솔직히 말하면, 죄송하게도 용산은 늘 2순위였던 거 같아요. 미안해하는 사람은 점점 많아지는 거 같지만 용산문제에 집중하기가 어려운 거 같아요. 노무현 대통령 죽음 때문에 그랬고, 미디어법 터지면서 또 그랬고, 이번에 평택에 쌍용자동차 때문에 또 그렇고.”

평택 쌍용자동차의 파업과 진압과정을 지켜보며 용산에서 만약 그렇게 일찍 경찰특공대가 투입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남일당 옥상의 망루는 며칠이나 견뎠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용산으로 모였을까. 또는 얼마나 많은 비난의 화살을 용산으로 퍼부었을까. 부질없는 생각이다.

용산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켜진 촛불

“빨리 끝장을 보고 저도 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쌍용자동차 보면서 참 나쁜 생각이지만 뭔가 큰 일이 터져서 이명박이 내려왔으면 하는 생각도 했어요. 참 나쁘죠. 평택 가면서도 그랬어요. 사고 터지면 안 되는데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뭔가 촉발할 게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가서 가족들 보니까 절대 용산 같은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더 이상 사람들이 안 다쳤으면 좋겠다, 또 그래서 너무 다행이고요.
쌍용자동차 보면서, 용산도 그렇고, 왜 이렇게 사람들을 막바지로 내몰까. 2순위지만 어떤 다른 문제보다도 용산이 빨리 해결됐으면 좋겠어요. 조금이라도 유족 분들이 마음에 위로를 받고 해결이 되었으면…. 그런데 이명박이 절대 사과는 안 할 거 같고, 지금도 많이 힘드실 텐데, 앞으로도 더 힘드실 거 같고. 철거민 문제, 전철연과 같이 하기 싫다는 촛불도 있었지만 또 좀 다른 이유로 여기 오기 싫다는 사람도 있었어요. 여기 오면 항상 꽉 막혀있고 갇힌 듯이 답답하잖아요.
사실 저희도 기운이 빠지죠. 학부모들 만나면 정말 많은 분들이 이명박 싫어하고, 제가 촛불집회 다니고 그런 거 많이들 아시니까 격려해주고 그런 분들 많거든요. 한나라당 지지하면서도 이명박은 마음에 안 들어서 다음 선거에서 투표 안 하겠다는 분도 계시고. 그래도 결국 보면 이명박이 하고 싶은 데로 다 하잖아요. 쌍용도 그렇고 미디어법도 그렇고.”

희망을 찾기가 만만치 않은 시절의 답답함 또는 막막함. 용산만이 아니라 돌아가신 다섯 분의 시신이 모셔진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에 들어 설 때마다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건 딱히 공간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용산에서 촛불을 밝히고 있다.

“오체투지가 있었잖아요, 올봄에. 저는 무릎이 안 좋아서 같이 오체투지를 하지는 못했지만 남태령에서 사당까지 두어 시간 동안 뒤에서 함께 걸었어요. 그날 날씨가 참 궂었어요. 비가 무지 많이 왔죠. 사실 오체투지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방으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맞지를 않아서 못 가고 있다가 서울로 들어온다고 해서 갔죠. 갔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였더라고요. 촛불들도 많이 모였어요. 비가 주룩주룩 오는데 그걸 다 맞으시면서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는 걸 보면서, 그때 저도 그렇고 촛불들도 많이 느꼈을 거예요.
사실 용산이 터지면서 철거에 대해, 개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거잖아요. 우리가 얼마나 개발을 좋아했던가, 그래서 이런 대통령도 뽑힌 거고. 옛날에 바가지 받고 표 찍어주듯 다들 뉴타운 때문에 찍어주고 그런 거 아닌가요? 뭐 다를 게 없죠. 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아파트만 빼곡히 짓는 것, 그 자리가 누군가의 삶의 터전인데. 촛불들도 용산에 함께 하면서 철거민을 보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죠. 전철연, 철거민에 대한 선입견, 편견이랄까 그런 것도 많이 없어지고. 처음에는 너무 씩씩한 아줌마들 보고 무섭고 그랬는데 이제 아는 사이가 되니까, 그분들이 어떤 사정으로 여기 와 있고 그런 거 아니까 이해가 되는 거죠. 다른 건 몰라도 용산 때문에 촛불이 많이 변했고, 철거민에 대한 생각, 개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정말 중요한 거 같아요.”

그를 다시 만난 것은 8월 21일 김대중 전 대통령 분향소가 차려진 서울시청 광장에서였다. 그곳에서 “참으로 야만적인 처사다. 이 추운 겨울에 쫓겨나는 빈민들의 처지가 너무 눈물겹다”는 DJ의 용산참사 당일 일기의 한 구절을 1면 톱기사로 뽑은 경향신문을 보며 그를 기다렸다. 한 시간 반 동안 줄을 서 분향을 한 플라워겐의 눈가는 눈물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때보다는 (분향이) 빨리 끝났네요. 정말 우리나라 망하려나, 하늘이 우리나라를 버렸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김대중을 잘 알거나, 그렇게 존경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막상 이렇게 돌아가시고 보니 무기력해지는 거 같기도 하고. 아무 소용이 없나봐 하는 생각도 들고. 슬픔도 슬픔이지만 막막함이 더 많고. 민주주의는 국민이 지켜야 하고 시민이 나서야 한다고 하셨다는데 우리가 더 힘내서 해야 된다고 생각은 하는데 사실 기운 많이 빠지네요.
노무현, 김대중 때 용역깡패 같은 거, 이게 사회 암적인 존재인데 이런 사회악은 제거해주고 갔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아쉬움, 섭섭함이 남아요. 어쩌면 자연적으로 도태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도태되는 분위기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잡초가 더 빨리 자란다고. 사실 겁나요. 희생이 따라야 하잖아요. 이렇게 많이 후퇴했는데 다시 회복하려면 얼마나 큰 희생이 있어야 할까요?”

여섯 명의 목숨, 200여 일간의 장례식장 생활과 농성, 7개월을 넘어선 투쟁. 공개되지 않는 3000쪽의 수사기록. 십여 명의 부상자와 6명의 구속자, 훨씬 더 많은 연행자, 25만 명의 탄원. 더 무엇이 남았을까.

플라워겐은 향수 이름, 플라워겐조에서 따온 것이다. 이 향수는 병에 꽃 한 송이가 꽂혀 있는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이제 곧 찬 바람이 불면 가을꽃이 피고 봄꽃들은 묵묵히 겨울을 견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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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합과 통합이 고인이 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지이며 바야흐로 시대정신이라고 한다. 좋은 이야기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찰과 반성이 있어야 하고 진심어린 참회와 용서가 앞서야 한다.   

 

 

지난 6월 10일자 동아일보는 전북 군산 개야도에서 조작간첩 사건 피해자 두 명이 37년 만에 참회와 용서, 화해를 했다는 아름답고도 가슴 아픈 이야기를 전했다(‘참회와 용서’ 37년 앙금을 풀다). 한 젊은 어부는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 끌려가 두 달 가까이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한 끝에 친구를 간첩으로 지목해야 했다. 그는 친구가 간첩임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았다며 불고지죄로 구속되었다가 8개월 만에 풀려났고 졸지에 간첩이 된 친구는 꼬박 7년을 복역하고 출소 뒤에는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혀 고향을 등져야 했다. 이제 흰머리가 성성한 노년의 두 친구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주선으로 다시 만났고 이 사건은 현재 법원에 재심신청을 준비 중이라 한다.    

 

 

조작간첩 피해자들은 누구와 화합해야 하나

1981년 한국전쟁 당시 행방불명됐다가 남파된 아버지에게 포섭되어 간첩활동을 했다며 박씨와 그의 어머니, 동생, 숙부, 고모 등 일가족 7명을 ‘가족간첩단’으로 만들었던 진도 간첩단 사건. 1980년 신군부에 비판적인 성향을 가진 교사, 공무원 등이 모여 반국가단체를 결성했다고 몰아간 아람회 사건. 북한예술단 공연을 본 소감을 ‘함부로’ 말했다가 재일공작원의 지령을 받고 북한을 찬양, 고무했다며 간첩으로 몰린 김양기씨 사건.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간첩활동을 했다는 이른바 모자 간첩단 사건. 5촌 당숙, 사촌 여동생까지 한꺼번에 엮인 신씨일가 간첩단 사건. 이들은 올해 들어 법원의 재심으로 2, 30년 동안의 빨갱이 누명을 벗은 조작간첩 사건들이다.   

 

 

이례적으로 몇몇 사건에서는 재심 재판부가 피고인에게 사과하고 법원의 과오를 반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2005년 이용훈 대법원장이 취임하면서 공언한 ‘사법부 과거사 청산’은 이미 실종된 지 오래됐고 신영철 대법관의 이메일 파동에서 보듯 청산해야 할 과거사의 항목은 날로 더해지고 있다. 생사람을 잡아 간첩으로 둔갑시켰던 경찰은 도시재개발과 노동자파업 현장에서 용역과 상부상조하며 시민을 테러범으로 둔갑시키고, 검찰은 수사기록까지 감추면서 이를 뒷수습하고 있다. 또한 미네르바 사건을 시작으로 정부정책을 반대하는 네티즌을 색출하고 TV 시사프로그램 작가의 이메일을 뒤져 반정부인사 낙인찍기에 여념이 없다. 게다가 과거 조작간첩 사건의 한 몫을 담당했던 중앙정보부, 안기부의 후신 국정원은 음지에서 양지로 나와 보란 듯이 활보하고, 보안사의 후신 기무사도 이에 뒤질세라 대통령 대면보고라는 높아진 위상에 걸맞게(?) 민간인 사찰을 일삼는다. 반성이니 참회니 하는 말을 꺼내기조차 무색한 지경이다. 

가증스러운 보수언론의 행태

 

더욱 기막힌 것은 한 사람의 일생, 한 가족의 운명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조작간첩 사건을 다루며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는 듯 무미건조하게 단신처리로 생색을 내거나 미담기사로 그럴듯하게 포장해내는 보수언론의 행태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이들 보수언론은 기무사의 불법사찰 행위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사법부 내 연구모임인 우리법연구회에게 비밀결사, 이념조직이 아니냐며 다그치고 있다. 한편으로는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자들이 쌍용자동차 파업에 개입했다며 조작사건을 부추기고, 다른 한편에서는 신임 국가인권위원장에게 “국가보안법 폐지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소신”이라는 답변을 받아낸다. 이 지긋지긋한 색칠하기 위에 덧씌워진 화해의 메시지에서는 최소한의 염치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의 화합과 통합의 제스처는 그저 얄밉고 괘씸할 따름이다.

- <미디어 오늘>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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