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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계급사회 - 누가 대한민국을 영어 광풍에 몰아 넣는가 ㅣ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4
남태현 지음 / 오월의봄 / 2012년 2월
평점 :
그냥 영어가 싫었다. 국민학교 6학년 쯤인가 성탄절을 앞두고 반에서 카드를 돌리는 게 유행이었는데 그때 난생 처음 영어로, 그것도 필기체로 '메리 크리스마스'를 써보았다. 형이 가리켜줘서 썼다기보다는 그렸다는 게 맞다. ABCD도 다 외우지 못했지만, 왠지 있어보이는 '메리크리스 마스'에 아이들이 좋아라 따라했고 난 꽤나 우쭐했다. 그런데 졸업을 하고 겨울이 지나 중학교에 들어갔더니 왠걸, 아이들은 이미 '아이엠 어 보이, 유알 어 걸' 따위는 다 알고 있었는데 난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영어가 싫어졌는가보다.
그후로 쭉 영어를 등한시 했다. 게다가 작가를 꿈꾸던 고교시절, 대체 왜 내가 영어를 공부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로지 유일한 이유는 좋은 대학을 가야 하기 때문일 텐데, 작가가 되기 위해서 대학을 가야 한다는 것도 좀 웃기는 거라고 생각하던 나는 영어 공부의 동기를 찾을 수 없었다.
고3 학력고사에 죽을 쑤고(국어는 한두 개 틀리고, 수학은 한두 개 맞고, 영어는 서너 개 맞았나) 재수를 시작하며 성문기본을 두 달 동안 세 번 보고, 성문종합을 넉 달 동안 네다섯 번 보니 그해 대입시험에서 영어점수가 꽤나 잘 나왔다.
대학을 갔고 문학을 전공한 나는 다시 영어에게 안녕을 고했다.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
그러다 문득 2년 전, 조지 오웰과 존 버거의 글을 원문으로 읽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우선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부터. 그 다음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그리고 드디어 오웰의 <동물농장>.
나름 원문으로 보는 영어 소설이 재미났지만 읽어야 할 책들, 읽고 싶은 책들이 쌓여가는데 진도가 영 안 나가는 영어책을 붙들고 있기에는 조바심이 났다. 그래서 존 버거까지 가지도 못하고 다시 영어책을 덮었다.
다시 영어책을 펼칠 날이 있을러나 모르겠다.
우연한 기회에 <영어 계급사회>라는 책을 제작하는데 관여하게 되면서 제법 꼼꼼하게 읽게 되었다. 한마디로 한국의 영어 열풍은 사기고 영어의 문제는 계급의 문제라는 것이 이 책의 요지라 할 수 있다.
영어로 쓰여진 책을 재미나게 읽기 위해서, 영어를 쓰는 사람들과 즐겁게 같이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들보다, 동료나 친구나 혹은 경쟁상대들보다 영어를 잘 하기 위해서, 점수를 잘 받기 위해서 영어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 짓이고 결국 투여하는 시간과 돈, 자본에 따라 순위가 결정날 수 밖에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매우 다양한 사례와 통계, 근거를 들어 이야기하고 있다.
"당신의 영어 고민, 반나절에 길을 찾아드립니다." 출판사의 말이다. 어느 정도 홍보성 멘트겠지만 김규항은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란다. 진짜다. 일단 영어 고민은 해결된다. 하지만 이 뒤틀린 계급사회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더 깊어질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