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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나라 대한민국 - 박근혜로 한국 사회 읽기
조윤호 지음 / 오월의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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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에서 보수 세력을 지지하라거나, 진보 세력을 지지하라고 주장할 생각이 없다. 열심히 투표해서 훌륭한 대통령을 뽑자고 말할 생각도 없다.”

문재인-안철수 후보 극적 단일화, 초접전, 박빙의 대선승리…
이렇게 되면 한국 사회는 진보할까?

야권 지지자를 빨갱이와 종북 좌파로, 여권 지지자를 꼴통보수로
서로를 매도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는 서로를 얼마나 이해하고 탐구하는가?

보수 세력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박근혜를 통해
한국 사회 보수의 정체, 그 속내를 들춘다.


50년 전에 혁명을 통해 독재자를 권좌에서 쫓아낸 나라.
30년 넘게 지속된 군사독재를 마침내 시민항쟁으로 물리치고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나라.
1996년 전 세계가 깜짝 놀란 노동자들의 총파업 투쟁이 벌어졌던 나라.
불과 5년 전만 해도 국제사회에서 민주화와 과거청산, 인권 증진의 모범으로 꼽혔던 나라가 한국이다.
그럼에도 “한국은 아직도 보수의 나라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서전에서 남긴 말이다.

보수주의가 지배하는 보수의 나라
대한민국은 어쩌다 이런 나라가 되었을까?


15대 대선에서 1.6%, 16대 대선에서 2.3%의 차이로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탄생했다. 한국의 정치지형은 야권연대, 후보단일화 등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쓰고서야, 그것도 가까스로 보수 세력을 누를 수 있다. 그렇게 두 차례 정권을 연이어 잡았음에도 보수 세력에게 밀려 제대로 된 진보적 정책 하나 펴지 못했다.
반면 온갖 비리가 터져 나오고 수차례 무능함이 증명되었음에도 보수 세력, 새누리당의 지지층은 견고하다. 새누라당의 대선 후보 박근혜의 지지율이 등락을 거듭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콘크리트 지지율’이라 불리는 40%는 확고부동이다. 비단 정치에서만이 아니다. 보수언론은 신문시장 70%를 장악하고 있고 대기업의 횡포는 갈수록 기승을 부린다. 종교와 교육 등 사회 전반에서 보수는 기세등등하다.

“더 기가 막힌 노릇은 (…)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보수의 노력이 먹혀들어가고, 많은 이들이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며 보수를 지지한다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보수단체에 가입하고, 거의 무조건적으로 보수 정치인을 지지하며, 돈 많은 자본가와 기업인들을 존경한다. 가진 게 많은 기득권뿐만이 아니다. 돈 없고 가난한 이들 중 많은 수가 보수를 동경하고, 존경한다.” -p7

어쩌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서 살게 된 것일까? 대체 무엇이 한국 사회를 보수가 지배하는 세상으로 만들었을까? 도대체 왜, 무슨 이유로 그들은 보수를 지지하고 동경하고 존경하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점에서 이 책은 출발한다.

대한민국 보수의 적통, ‘모태보수’ 박근혜를 통해
한국 사회 보수의 정체를 파헤친다


박근혜에 대한 보수 세력의 전폭적인 지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박근혜에게 보내는 열광적인 지지의 이유는 무엇인가? 박정희와 육영수의 생물학적인 딸이므로, 경제 성장과 유신독재의 정치적 계승자이므로, 원칙과 신뢰 혹은 고집불통의 정치인이므로…. 박근혜를 반대하는 사람들과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그러나 IMF 사태 직후 “아버지가 일으켜 세운 나라가 이렇게 무너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정치를 시작한 박근혜는 그동안 새누리당을 두 번이나 벼랑 끝에서 구해냈고, 국가보안법과 사립학교법 개정 반대, 세종시 이전 문제 등 각종 현안과 이슈에서 보수적 정치인으로서의 확고한 정체성과 능력을 보여주었다. 또한 박근혜의 반대자들은 ‘공주’라고 비난하지만 박근혜가 가진 고귀한 이미지와 위기에서 발휘되는 고도의 절제력은 백성의 고달픔을 헤아리고 어루만져 주는 어진 성군과도 같은 지도자로 서민층에게 어필한다.

“박근혜 지지자들이 박근혜를 지지하는 이유는 박정희의 딸이자 여성이자 서민의 편인 그녀가 ‘진짜’ 자신들의 편을 들어줄 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박근혜는 원칙과 소신을 통해 지지자들에게 신뢰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p114

그러므로 우리는 박근혜를 통해 한국의 보수 세력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박근혜가 꿈꾸는 나라를 통해 박근혜 지지자들이 바라는 국가와 사회가 어떠한 국가와 사회인지 꼼꼼히 살펴야 한다. 보수의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인가?

반공 국가에서 시장 국가로…
보수주의자들은 무엇을 욕망하는가


보수주의는 인간 이성에 근거한 진보를 불신하며 현실과 전통을 중시한다. 혼란스러운 다수의 지배보다 현명한 소수 엘리트의 안정적인 통치를 선호한다. 그런 점에서 1970년대는 한국 보수주의자들에게 전성기이자 신화의 시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신화를 재현할 21세기형 군주, 믿음직한 보스를 찾아왔다. 이회창에서 이명박, 그리고 박근혜로.
박근혜는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여 절대왕정 군주 리더십, 권위주의적인 리더십으로 보수 세력에게 안정감을 심어주었으며 동시에 부드러우면서도 따뜻한 ‘국민 행복도우미 리더십’으로 지지층의 확장을 꾀하고 있다. 한국 보수 세력과 서민들은 믿음직하고 든든한 지도자,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애로사항과 어려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강력한 힘과 자상함을 동시에 갖춘 리더로 박근혜를 호명한다.
갈등과 분열이 아니라 국익을 위해 통합되고 단결하는 국가, 기회의 균등과 공정한 경쟁이란 미명 아래 시장의 자유가 절대적으로 보장되는 사회. 이것이 바로 보수가 꿈꾸는 대한민국, 박근혜의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 국민이 되는 길은 험난하다. 시장과 국가, 사회구조나 시스템 따위에 딴지걸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고 성실히 일하는 사람만이 국민이 될 수 있다. 국가가 제공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성공을 위해 뛰어야 한다. 하기에 박근혜와 보수 세력은 끊임없이 과거의 적과는 화해를 시도하고 통합을 외치지만 현재의 정치적 반대자는 비국민, 종북 좌파, 국가의 적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박근혜는 박정희가 김대중을 탄압하던 시절이 아니라, 박정희가 죽고 김대중도 대통령 직에서 물러난 이후에야 김대중과 화합할 수 있었다. 박근혜는 노무현이 죽고 나서야 노무현과 화해했다. 박정희가 노동자들을 때려잡던 시절에는 전태일과 화합할 수 없었다. (…) 박근혜는 과거와 화합할 수 있어도 현재와 화합할 수 없다.” -p190

“박근혜의 나라는 매우 편향적인 나라다. 박근혜의 나라에서 국민이 되는 건 너무 힘들다. 박근혜의 나라에 저항하다 죽으면, 박근혜와 싸운 뒤 수십 년이 지나고 나면 박근혜가 찾아와 국민으로 인정해주지 않을까?” -p200

진보는 보수를 넘어설 수 있는가? 전략과 대안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은 선거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가치와 상징을 넘어서는 것


각종 여론조사에서 박근혜-문재인-안철수, 하루가 다르게 대선주자들의 지지율은 엎치락뒤치락 한다. 야권연대, 후보단일화가 되면 박근혜를 이길 수 있을까?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 ‘야권으로의 정권교체’에 대한 응답이 50%를 넘어섰음에도 대선 결과는 여전히 불투명하며 많은 정치평론가들은 이번 대선에서도 박빙의 승부가 이뤄질 것이라는데 의견 일치를 보고 있다.
그러나 또 다시 극적인 드라마를 통해 대선에서 신승을 거둔다고 한들 안심해도 좋을까? 한국 사회에서 단 한 번도 기득권을 놓쳐본 적 없는 보수 세력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세밀한 진단 없이 한국 사회는 제대로 된 진보를 꿈꾸기 어렵다.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라는 진보 진영의 아젠다를 선점한 보수 세력의 유연성, 경제 위기 속에서 점점 커지는 불안 심리를 잠재울 강력한 리더라는 상징성, 엄격한 아버지인 동시에 자애로운 어머니 같은 지도자 이미지를 넘어설 수 있는 진보의 전략은 존재하는가?

“진보 진영은 박근혜의 상식과 원칙, 국가관을 뛰어넘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이 위기를 끝장 낼 방법이 무엇인지, 자본과 기업을 통제할 방법이 무엇인지 모색해야 한다. 박근혜가 내세우는 국익이 누구에게 이익이고 누구에게 손해인지도 낱낱이 밝혀야 한다. (…) 짓밟힌 평범한 사람들의 연대를 통해 국가와 지도자가 내세운 국익을 넘어설 대안을 보여줘야 한다.” -p263

보수의 가치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은 이 책을 읽는 독자 모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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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쓴 신간 보도자료... 그래도 역시 서평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좋은 서평인지는...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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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계급사회 - 누가 대한민국을 영어 광풍에 몰아 넣는가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4
남태현 지음 / 오월의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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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영어가 싫었다. 국민학교 6학년 쯤인가 성탄절을 앞두고 반에서 카드를 돌리는 게 유행이었는데 그때 난생 처음 영어로, 그것도 필기체로  '메리 크리스마스'를 써보았다. 형이 가리켜줘서 썼다기보다는 그렸다는 게 맞다. ABCD도 다 외우지 못했지만, 왠지 있어보이는 '메리크리스 마스'에 아이들이 좋아라 따라했고 난 꽤나 우쭐했다. 그런데 졸업을 하고 겨울이 지나 중학교에 들어갔더니 왠걸, 아이들은 이미 '아이엠 어 보이, 유알 어 걸' 따위는 다 알고 있었는데 난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영어가 싫어졌는가보다.

 

그후로 쭉 영어를 등한시 했다. 게다가 작가를 꿈꾸던 고교시절, 대체 왜 내가 영어를 공부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로지 유일한 이유는 좋은 대학을 가야 하기 때문일 텐데, 작가가 되기 위해서 대학을 가야 한다는 것도 좀 웃기는 거라고 생각하던 나는 영어 공부의 동기를 찾을 수 없었다.

 

고3 학력고사에 죽을 쑤고(국어는 한두 개 틀리고, 수학은 한두 개 맞고, 영어는 서너 개 맞았나) 재수를 시작하며 성문기본을  두 달 동안 세 번 보고, 성문종합을 넉 달 동안 네다섯 번 보니 그해 대입시험에서 영어점수가 꽤나 잘 나왔다.

 

대학을 갔고 문학을 전공한 나는 다시 영어에게 안녕을 고했다.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

 

그러다 문득 2년 전, 조지 오웰과 존 버거의 글을 원문으로 읽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우선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부터. 그 다음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그리고 드디어 오웰의 <동물농장>.

 

나름 원문으로 보는 영어 소설이 재미났지만 읽어야 할 책들, 읽고 싶은 책들이 쌓여가는데 진도가 영 안 나가는 영어책을 붙들고 있기에는 조바심이 났다. 그래서 존 버거까지 가지도 못하고 다시 영어책을 덮었다.

 

다시 영어책을 펼칠 날이 있을러나 모르겠다.  

 

우연한 기회에 <영어 계급사회>라는 책을 제작하는데 관여하게 되면서 제법 꼼꼼하게 읽게 되었다. 한마디로 한국의 영어 열풍은 사기고 영어의 문제는 계급의 문제라는 것이 이 책의 요지라 할 수 있다.

 

영어로 쓰여진 책을 재미나게 읽기 위해서, 영어를 쓰는 사람들과 즐겁게 같이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들보다, 동료나 친구나 혹은 경쟁상대들보다 영어를 잘 하기 위해서, 점수를 잘 받기 위해서 영어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 짓이고 결국 투여하는 시간과 돈, 자본에 따라 순위가 결정날 수 밖에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매우 다양한 사례와 통계, 근거를 들어 이야기하고 있다.

 

"당신의 영어 고민, 반나절에 길을 찾아드립니다." 출판사의 말이다. 어느 정도 홍보성 멘트겠지만 김규항은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란다. 진짜다. 일단 영어 고민은 해결된다. 하지만 이 뒤틀린 계급사회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더 깊어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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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a 2012-02-08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1년 3월 <한겨레신문>에 실린 기사입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469926.html
드디어 책으로 나왔군요.
 
페다고지 (30주년 기념판)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5
파울루 프레이리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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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들이 일본어로 된 책을 구해 골방에 모여 강독했다는 그 책... 아직도 풀뿌리운동, 직접민주주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그 책... 워낙 유명하기에 제목만 알고 있다가 지난 연휴에 읽게 되었다.  

혹자는 교육에 대한 책으로 알고 있지만 막상 읽어보니 혁명과 사회운동에 관한 책이다. 사실 진정한 교육이야말로 혁명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교육만큼이나 반동적인 것이 또 있을까?

그럼에도 "희망은 인간의 불안전함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누구도 다른 사람을 위해 세계를 드러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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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억압과 착취와 강간을 저지르는 억압자는 그 권력을 피억압자나 자신을 해방시키는 힘으로 만들지 못한다. 오직 피억압자의 약함으로부터 비롯된 권력만이 양측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 -p52

부당한 사회질서는 죽음, 좌절, 빈곤을 양분으로 삼는 '관용'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다. 그렇기에 허구적 관용을 베푸는 자는 그 원천에 조금만 위협이 가해져도 필사적으로 대항하는 것이다. -p53

이처럼 해방은 마치 고통스런 출산과도 같다. -p58

피억압자가 자신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해서 꼭 탁상공론적인 혁명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로 성찰은-물론 참된 성찰의 경우지만-행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상황이 행동을 요구할 때, 행동이 순수한 실천으로 간주되려면 그 행동의 결과가 비판적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 그런 뜻에서 프락시스는 억압자의 새로운 존재근거이다. -p79

피억압자는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자신들을 사물로 전락시켰기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인간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사물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인간으로서 싸워야 한다. 이것이 근본적인 필요조건이다. 그들은 객체로서 투쟁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장차 인간존재가 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p82

대화는 사람들이 세계를 매개로 하여 세계의 이름짓기 위해 만나는 행위다. -p106 

내가 세계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가 민중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는 대화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p108 

또 희망이 없으면 대화도 있을 수 없다. 희망은 인간의 불완전함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인간은 희망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모색에 뛰어든다. -p110 

현실이 제 모습을 드러내면 인간은 침잠 상태에서 탈출하여 현실 속에 개입할 수 있게 딘다. -p130 

행동과 성찰은 동시에 일어난다. 하지만 비판적인 현실 분석은 특정한 행동형태가 현 시기에 불가능하다거나 부적절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도 있다. 따라서 성찰을 통해서 특정한 행동형태의 불가능성이나 부적절함을 인식하는 사람은 결코 무기력한 게 아니다. 비판적 성찰 역시 나름의 행동이다. -p153 

인간적이지 않은 역사적 현실이란 없다. 인간 없이는 역사가 없으며, 인간존재와 무관한 역사는 없다. 무릇 역사란 오직 민중이 만들고 (마르크스에 따르면) 거꾸로 민중을 만드는 인간성의 역사일 뿐이다. -p155 

하지만 누구도 다른 사람을 위해 세계를 드러낼 수는 없다.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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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 - 병역거부가 말했던 것, 말하지 못했던 것
임재성 지음 / 그린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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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2P'라는 이름의 미사일이 리비아 트리폴리로 날아가고 있다.
‘국민보호의 의무(Responsibility to protect)’라는 이 신개념의 전쟁명분은 “자국 국민을 집단학살, 전쟁범죄, 인종청소, 반인륜적 범죄로부터 보호하지 못하는 나라에 대해 국제사회가 집단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논리다. 그럼 미사일은, 인도적 개입이라는 폭격은 리비아 국민을 보호하고 그들에게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일방적인 군사적 열세 속에 진압당하고 있는 리비아 시민군과 리비아 민주주의를 방어하고 평화를 평화롭게 가져올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있나?
평화는 까다롭고 복잡하고 예민한, 참 어려운 문제다. 

2.

평화라는 단어를 언제 처음 듣고 입 밖으로 내게 되었을까? 기억을 더듬으면 여덟, 아홉 살 무렵 엄마 손을 잡고 갔던 어느 교회 부흥회였으리라. 박수를 치며 불렀던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지금 생각하면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우리에게’가 아니라 ‘내게’인가, 그리고 과연 강은 평화로운가?
사람들이 흔히 입에 올리는 평화는 집단적이고 사회적인 어떤 상태라기보다는 한 개인의, 그 내면의 어떤 상태인 듯하다. 그런 평화는 종교적 구원이나 명상과 깨달음을 통해 얻어지는 어떤 경지다. 물론 내면의 갈등이 평화의 경지로까지 이르는 길은 쉽지 않다.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두 사람 사이에서, 삼각관계에서, 성장배경이 다르고 입장과 세계관이 다르고 가치관이 충돌하는 사람들 사이,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의 평화일 것이다.
평화는 조용하지 않고 소란스러우며 정적이기보다는 동적이고 갈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갈등의 굽이굽이를 돌아가는 길인지 모른다, 강물처럼. 

3.
병역거부자들은 전쟁에 (그리고 전쟁연습과 훈련에) 참여하는 대신 평화를 이야기한다. 검사와 판사와 기자들, 그리고 한국사회는 그들에게 “왜 군대에 가지 않느냐?” “다 거부하면 나라는 누가 지키냐?” “네 집에 강도가 들어와도 평화롭게 당할 거냐?”는 질문을 던지고 또 던진다. 병역거부자들의 답변들은 이런 질문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리고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는 (산업기능요원, 소방청, 교도대 등 이미 수많은 종류의 대체복무가 실시되고 있음에도) 노무현 정부에서 도입이 약속되었다가 이 정부 들어서 물거품이 되었다. 오히려 해병대 지원자가 늘었다는 뉴스가 전해지고 뉴스 앵커가 주말마다 병영체험을 하는 영상이 TV에 방영된다.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 속에서 ‘국가를 위해 죽어간 숭고한 죽음’에 대한 애도의 물결이 넘실댔던 한국사회에서 병역을 거부하고 군대 대신 감옥을 선택했던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4.
이 책의 필자는 ‘평화학’이라는 생소한 학문(혹은 연구방법)으로 병역거부자들, 그리고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을 했던 운동가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분석한다. 그들이 애초에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무엇인지, 차마 하지 못한 말은 무엇이었으며 그럼에도 할 수밖에 없었던 말은 무엇인지에 주목한다.
그 가운데 필자는 “대체복무제의 정당성이나 ‘부작용’ 없는 외국 대체복무 운용 사례가 아니라, 양심의 자유가 포괄하는 범위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국제 인권규범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 젊은이들이 어떤 불면의 밤을 보내면서 남들 다 가는 군대를 거부하며 부모 속을 찢어 놓으면서까지 감옥에 갔는지 (...) 이들은 손가락질당해야 할 파렴치한도, 불쌍한 피해자도, 강철 같은 신념의 소유자도 아닌 우리 시대의 평범한, 하지만 폭력에 민감했던 사람들이었음”을 드러내며 공감을 시도해보고 싶었다고 밝히고 있다. 

5.
평화는 서로의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는 것, 그리고 타인의 아픔과 고통, 또는 존재와 욕망에 공감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왠지 아쉽다. 이는 요즘 특히 유행하는 ‘공감’에 대한 문제의식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너나없이 소통이 중요하다고 말들 하지만 권력의 관계가 바뀌지 않는 한 말길이 트이길 기대할 수 없듯이 공감이 한 개인의 성찰과 깨달음을 넘어 어떤 사회적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는 그저 막막할 따름 아닌가. 우리의 공감대를 넓히고 그 깊이를 더 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간 무엇인가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6.
“병역거부자가 말했던 것, 말하지 못했던 것-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
평화의 언어란 무엇일까, 잠시 생각해본다. 침묵은 복종을 뜻할 때도 있지만 때론 저항의 언어가 될 때도 있다.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라는 사파티스타의 말처럼 언어에는 분명 평화를 이끌어올 힘이 있지만 반대로 평화를 깨는 도구가 될 때도 많다. 그렇다면 평화학은 “잘 듣기”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말을 잘 하는 사람은 참 많고 달변이 되는 법, 글 잘 쓰는 법을 다룬 책은 넘쳐난다. 그러나 어떻게 들을 것인가, 무엇을 들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세상이다. 매장된 350여만 마리의 가축들과 일본 쓰나미 피해자들, 아랍 혁명에 나선 민중들의 말을 듣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고 또 무엇을 해야 하나. 우리의 언어는 너무나 빈곤하고 길들여져 있는 것은 아닌가.  
입에서 튀어 나오는 말들 너머의 진심을 듣는 일, 행간을 읽고 공감하고 더 나은 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일이 평화학이라면 이 책은 좋은 출발점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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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의미 있는 사물들>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내 인생의 의미 있는 사물들
셰리 터클 엮음, 정나리아.이은경 옮김 / 예담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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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괴한 것에 대해 글을 쓰면서, 프로이트는 편안하고 익숙하다는 뜻과 괴상하고 이상하다는 뜻의 독일어인 '하임리히'와 '운하임리히'의 어원을 분석한다. 이 두 단어는 외관상 반대인 것처럼 보이며, 괴상하다는 것은 가장 낯선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익숙하다는 의미의 하임리히에는 '감춰진 혹은 눈에 띄지 않는'이라는 뜻도 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이 개념을 확장시켜 프로이트는 가장 기괴한 경험은 이질적인 것이 아닌, 가까이 있는 익숙한 것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 401페이지, 에필로그  
   

 

"내 인생의 OOO들"처럼 진부하고 식상한 주제가 또 있을까? 그런데도 이런 주제의 이야기는 언제나 편하게 읽히고 쏠쏠한 재미를 준다. 하지만 이 책은 그리 쉽게 읽히는 편은 아니다. '과연 사물은 우리 삶에서 무엇인가'라는 매우 철학적인 물음을 깔고 34명의 세계적 석학들이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며 매우 묵직한 에세이를 썼기 때문이다. ('세계적 석학'이라고 책 표지에는 써있는데 내가 들어본 이름은 딱 한 명뿐이었다. 대부분 미국 하버드대, MIT 같은 곳의 교수이고 이공계가 많아서인지, 내가 무식해서인지.) 

 

무엇보다도 이 책의 장점은 이 책을 읽는 도중 문득문득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샘솟친다는 점이다. 작가가 되길 은근히 바라며 외삼촌이 대학졸업 선물로 준 '몽블랑 만년필'. 대학 신입생 시절 멋도 모르고 무턱대고 샀다가 10년 뒤 실직을 하면서 꺼내 읽게 된 양장본 '창비 전집'. 할아버지가 쓰셨던 주머니칼과 아버지가 쓰셨던 맥가이버칼. 어머니가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브라더 미싱. (아, 끝도 없다.)

 

사물의 이야기를 하다보면 사람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물들도 실상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추억 속에서 생명력을 얻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오로지 사물에 집중하는 글도 있다. 아니 이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사물과 사람이라는 이분법이 허물어짐을 느낀다. 그래서 나와 나 아닌 세상의 모든 것, 혹은 나와 세상이 있을 뿐이다(아이를 키우다보면 아이들은 나무와 개미, 돌과 인형, 옛날이야기와도 대화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컴퓨터와 노트북이 다이어리를 대신하고 두뇌의 연장에 있다고 하는 것도, 아이폰이 신체와 정신의 일부가 되어간다는 이야기도 한편 맞는 이야기지만 21세기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이미 예전부터 그래왔던 것의 새로운 모습이 아닌가 싶다. 인간이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없듯이 어떠한 사물도 그 자체로 독립된 것일 수 없으며 인간과 사물, 생명과 물질은 끊임없이 관계맺으며 그 관계 속에서 자기의 존재가 만들어지고 확장되거나 축소되고 변화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이고 결국 이 세상이라는 생각.  

 

첼로와 매듭, 수퍼히어로와 여행가방, 혈당측정기와 우울증 치료제, 신디사이저와 토끼인형, 팔찌와 도끼, 사과와 점균들. 34개의 사물은 무한한 이야기를 품고 그 단면들을 이 책을 통해 드러낸다. 그리고 이 책은 수많은 갈래로 퍼져 더 많은 사물과 사람을 만나고...  

  

   
 

사이보그의 세상에서 우리는 사물을 도구나 인공적인 보조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물과 하나다. - 409페이지,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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