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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성시 - City of Sadnes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2003년 4월 오마이뉴스에 실었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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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성시(非情城市)> 다시 보기
평론가 김현은 김수영의 초기 시 <공자의 생활란>에 있는“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라는 구절이 이후 시인의 작품세계와 활동을 규정했다고 밝힌 바 있다.
본다는 것은, 바로 본다는 것은 드러난 것뿐만 아니라 이면에 감춰진 것 까지도, 아름다운 것뿐만 아니라 추하고 더러운 것, 기억하고 싶지 않은 괴로운 것까지도 외면하지 않고 보고 새기겠다는 뜻이리라. 아마 진실은 보는 것에서부터, 똑바로 보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허우샤오셴 감독은 믿는 듯 하다.
허우샤오셴 감독의 <비정성시>는 (자연스럽게 제주4.3사건을 떠올리게 되는) 대만2.28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채 벗어버리지 못한 식민역사의 허물과 해방공간의 어수선함, 검버섯처럼 늘어나는 본토인과 대륙인간의 마찰과 거기에 끼어 든 좌우이념대립, 그리고 마침내‘비극적’이란 수식어가 부끄러울 지경의 대학살.
이 가운데 카메라는 귀머거리 사진사 문량과 간호사인 그의 아내 관미의 삶을 따라가고 있다. 영화는 이들을 쫓아가며 주인공 문량처럼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했으며 말할 수 없다는 듯이 이들이 겪게 되는 혼란과 고난을 그저 담담히 주워 담을 따름이다. 그리고 보는 이로 하여금 그들 삶의 궤적을 따라 대만의 아픈 근·현대사를 또 그저 묵묵히 지켜보게 한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한때, 혹은 가족의 중요한 행사에 사진사는 그 한 장면을 담아내는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문량은 대만 근·현대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가족사의 충실한 기록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단지 기록하는 일에만 머물지 않는다. 징용에서 돌아온 셋째형이 미쳐서 난동을 피울 때 놀란 셋째 형수의 어깨를 쓸어안고, 둘째형의 유품과 유서를 둘째 형수에게 전해주며 그는 드러나지 않게 자기 가족의 아픔을 감싸 안으려 애쓴다.
또한 그의 아내 관미는 전문적으로 상처를 치료하는 (좀더 자세히 말해 치료도 하지만 주로 치료하는 의사를 도와주는) 간호사다. 관미는 문량의 둘째 형 뿐만 아니라 이제 패망을 맞아 곧 대만을 떠나게 될 일본사람들까지도 위로한다. 그리고 이제 문량과 관미는 결혼을 통해 결합함으로써 대만 근·현대사를 때로는 기록하고 때로는 그 상처를 보듬어 간다.
그래서 영화는 귀머거리 사진사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으며 관미의 일기를 빌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이 이중의 장치를 통해 보다 깊이 있게, 그리고 보다 차분하게 이웃나라의 역사를 구경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저 보는 것만으로 그칠 때 관찰에는 거리가 개입하게 되고 관찰자는 제3자로 멀찍이 물러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 영화가 감동적인 것은 감독의 시선이 대만에 대한, 그리고 인간에 대한 두터운 신뢰와 애정에 바탕하기 때문이다. 영화 말미에 아이가 처음으로 ‘엄마’를 불렀을 때 남편이 귀머거리인 사실을 깨닫고 새삼 아쉬워하면서도 그가 가족을 사랑하는 것을 알기에 행복하다고 관미가 말하듯이 애정 어린 시선은 때로는 더 깊고 진한 호소력을 갖는 까닭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