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9이태원참사 2주기가 다가온다. 


1주기 책에는 인터뷰어로 참여했지만 2주기는 여러 여건 상 참여하지 못했다. 


대신 해설글 한 편을 실었다. 


편집자와 의견을 주고 받으며 분량이 약간 줄어들었는데... 왠지 아쉬워 초안을 여기에 남겨본다. 때마침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도 축하할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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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기

  • 재난참사의 진상규명과 진실에 관하여




“특조위(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에서 막 조사관으로 일을 시작했을 당시, 조사 방법 세미나 모임에서 한 팀장급 조사관이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 조사보고서를 참고 자료로 가져왔다. 다른 재난조사보고서를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는 왜 성격이 다른 과거사위원회의 사건보고서를 검토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졌다.” (박상은, <세월호, 우리가 묻지 못한 것>(진실의 힘, 2020)



진상규명이란 무엇인가


특조위의 그 팀장이 군사독재와 권위주의 통치 시기 자행되었던 공권력에 의한 국가폭력 사건들을 다룬 과거사위원회의 보고서 대신 1988년 중국 상하이에서 수학여행 중이던 일본 가쿠게이고등학교 학생들을 태운 열차가 맞은 편 열차와 충돌한 열차사고(이 사고로 학생 26명과 인솔교사 1명, 그리고 중국인 열차 검사원 1명 28명이 희생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일본에서 우호적인 중일 관계가 중요하다는 논리가 압도하면서 제대로 된 진상규명도 되지 못한 채 서둘러 배상과 보상 절차가 마무리되었다.)에 관한 자료나 1989년 영국 힐스버러 스타디움에서 인파 관리 실패와 구조물 붕괴로 관중 97명이 숨진 참사의 보고서(힐스버러 참사 직후 영국 경찰과 언론은 사건의 원인과 책임을 훌리건들의 난동으로 몰아갔으나 참사 20주기인 2009년 영국 정부는 독립적인 조사기구를 만들어 재조사에 들어갔다. 2012년에 발표된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경기장의 구조적인 위험이 존재했고, 경찰은 진술조서를 왜곡해 자신들의 책임을 덮었으며 잘못된 응급구조로 59명이 추가로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를 가져왔다면 어떠했을까? 만약 9.11사태 이후 구성된 9.11위원회에서 조사한 뒤 발표한 보고서였다면?(‘9.11테러 보고서’는 이례적으로 출간 후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고 이후 만화책으로 제작되기도 했을 만큼 ‘성공’한 보고서로 평가된다. 한편 9.11위원회는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이 이 사건을 알카에다의 소행으로 전제하고, 당시 부시 행정부의 책임은 묻지 않기로 하며, 왜 테러조직의 공격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했는가라는 아주 제한적인 내용에 대해서만 조사하기로 한 정치적인 타협의 산물이기에 불충분하고 한계가 명확한 보고서라는 비판도 있다.) 또는 바다 밑 지진으로 발생한 쓰나미로 인해, 그렇지만 쓰나미 직후 정부와 도쿄전력의 무능으로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폭발하면서 그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 3.11 동일본대지진 보고서였다면? 


세월호 참사는 이러한 재난참사들 사이 어디쯤에 놓인 사건일까? 아니면 이들과는 전혀 또 다른 성격의 사건일까? 질문은 꼬리를 문다. 재난참사에서 진상규명이란, 진실이란 무엇일까? 수많은 희생자와 피해자가 나온 참사에서 진실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너무나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10.29이태원 참사에서 159명 희생자의 유가족과 피해자들이 갖고 있는 의혹들이 빠짐없이 해소되는 것이 진상규명일까? 100가지 의문점이 있다면 그 중에 몇 십 개가 규명되면 진실이 밝혀졌다고 할 수 있을까? 참사를 야기한 문제에 대해 그 권한을 가진 책임자들이 합당한 책임을 지고 참사의 인적, 구조적 원인이 온전히 밝혀진다면 그때는 진상규명이 다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국가애도기간이라는 국가폭력


2022년 10월 29일, 서울 이태원에서 열린 핼러윈 축제에서 대형 참사가 발생한 뒤 윤석열 대통령은 바로 다음날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 곧바로 정부는 유가족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희생자의 명단은 물론 유가족들 간에 정보도 공유하지 않는 채 희생자의 이름도 영정도 없는 정부합동분향소를 일방적으로 설치하고, 11월 5일까지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함과 동시에 용산구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했다. 


“한없이 무능하다가도 놀랄 만큼 유능”(4.16세월호참사와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조사한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종합보고서 중에서.)했던 정부의 조치들은 11월 8일 국정감사에 나온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의 “국정상황실은 대통령 참모조직이지 재난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는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참사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선제적 행위였을 뿐이다.(2014년 세월호 참사 직후에도 ‘청와대는 재난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는 발뺌이 이미 나온 바 있다.) 참사 유가족들이 어떠한 정보도 제공받지 못하고 모이지도 못한 상황에서 내려진 정부합동분향소 설치와 국가애도기간 선포는 그 형식적 절차에 반해 유가족은 물론 대형 참사를 마주한 시민들의 추모와 애도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절차에 따라 희생자 유가족들이 분리되고 고립됨으로써 이들에게 주어진 사건에 대해 알 권리, 참사의 진실에 접근할 권리를 정부가 애초부터 가로막았다는 점이다. 


그 뒤로도 국정조사는 물론 2024년 1월 31일 국회에서 통과된 특별법에 대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기까지 윤석열 정권은 이 참사의 진상규명에 대해 방관과 외면, 회피, 비협조와 방해로 일관했다. 그리고 지난 2024년 5월 2일 특별조사위원회 구성을 핵심으로 하는 ‘10.29 이태원 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법’(10.29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제정되었음에도 여전히 정부와 여당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이 글의 집필 시점인 2024년 9월 초까지 윤석열 대통령은 별다른 이유 없이 국회가 전달한 특별조사위원회 위원들을 임명하지 않고 있다.)


과정으로서 진상규명


윤석열 정권의 이러한 태도와는 별개로 세월호 참사 이후 만들어진 여러 특별법과 비교해보면 10.29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의한 특별조사위원회의 권한이나 규모, 조사 기간은 턱 없이 부족하다. 그러하기에 특별조사위원회가 만들어지고 거기서 조사를 한들 별 다른 성과 없이 끝날 것이라고 지레 예단할 필요는 없다. 한국사회는 이미 세월호 참사 이후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소중한 경험과 교훈, 성과들을 축적했고, 재난 피해자들과 시민사회는 그것에 굳건히 발 딛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를 참사의 진실을 밝혀가는 기나긴 여정 중 하나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윤석열 정부가 일방적으로 선포한 국가애도기간에 설치된 분향소의 명칭은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였다. 국회에서 ‘10.29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통과되었음에도 여전히 집요하게 ‘핼로윈 참사’라는 명칭을 고집하는 언론과 특정 집단이 있다. 세월호 참사가 아니라 ‘세월호 사고’여야만 하는 이들, 3.11 동일본대지진이라고 하지 않고 3.11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라고 하면 불편하고 못마땅한 사람들, 그런 세력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재난참사, 특히 대규모 참사는 매우 정치적인 사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다고 참사의 진상규명에서 정치적 협상이나 정치 세력 간의 타협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은 아니다. 정치적 사건이기에 서로 다른 관점과 견해가 충돌할 수밖에 없으며, 지난한 과정을 거쳐 그 사건의 진실이 무엇이며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 연장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사유 중 세월호 참사에 대한 책임, 국민의 생명과 안전 보호의 의무가 제외된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 10.29이태원 참사에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탄핵 심판의 결과 무죄가 나온 것 또한 단순한 실패나 시행착오가 아니라 국가 최고 권력자와 행정 전반의 책임자에게 사법적 책임을 면하게 함으로써 재난참사에서 사법부의 책임 있는 역할이 과연 무엇인가와 함께 참사의 책임자에게 어떻게 온전한 정치적, 사법적 책임을 물을 것인가라는 숙제를 한국사회에 남겼다고 생각한다. 


작별하지 않는다


2020년 10월, 나는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활동 종료를 10개월 앞두고 세월호 참사 피해지원 실태 보고서를 쓰기 위해 조사관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내게 맡겨진 보고서를 마무리한 뒤 다른 개별 조사보고서와 종합보고서를 찬찬히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보고서들을 읽어나가며 이 또한 매우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는 세월호 침몰원인을 밝히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밝혀진 진상조사 결과를 설명하고 세월호 참사의 현재적 의미를 되새기는 데도 실패한 것은 아닌가 하는 우울감이 몰려들었다. 


그 무렵 아직도 이 나라에서 적당한 이름을 찾지 못한 ‘제주 4.3사건’을 다룬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중 “그렇게 끝없이 연기되고 있는 바로 그 상태가 그 일의 성격이 되어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라는 문장에서 묘한 위로를 받았다. 또한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어떤 상태가 그 일의 성격이 될 수 있다면 과정 그 자체가 진실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지난여름 서울 을지로에 있는 ‘별들의 집’에서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 한 분을 만났다. 재난피해자권리센터에서 모집한 재난보도 모니터링단에게 이 참사의 의미와 이해를 돕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먼저 시민대책위원회 활동가에게 참사의 전반적인 개요를 들은 뒤 유가족의 이야기를 들을 순서가 되었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첫 마디는 “우리 아들 이야기를 조금 해도 될까요?”였다. 


‘이태원 참사는 어떤 사건인가요?’라는 추상적인 물음에 유가족은 희생자가 생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본인과 어떤 관계였는지, 희생자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유가족에게 참사는 다른 무엇도 아닌 너무나도 소중했던 사람을 잃은 사건이라는 사실, 그리고 진상규명은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어쩌면 진상규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어리석은 질문은 정해진 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새로운 여러 가지의 질문의 갈래들과 마주하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진실은 숨겨져 있다 어디서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는 단 하나의 무엇이 아니라 여러 가지 모양의 단편적 진실로 존재하고 그 퍼즐을 맞추는 가운데 구성해야 하는 것 아닐까. 참사의 진상규명이 무너진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면 그러한 퍼즐 맞추기를 통해 사법적 정의와 회복적 정의, 역사적 정의가 구현되는 과정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 전까지, 그 뒤에라도 희생자와 그리고 진실과 헤어지지는 말아야하겠다. 


“제목이 뭐야?

밀폐용기에 담긴 것을 나무 숟가락으로 덜어 주전자에 넣다 말고 인선이 물었다. 

우리 프로젝트 말이야.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그녀는 주전자에 생수를 부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제목을 묻지 않았어. 

나는 대답했다. 

‘작별하지 않는다.’

(...)

작별인사만 하지 않는 거야, 정말 작별하지 않는 거야?

아직 주전자의 부리에서 김이 솟지 않았다. 비등점을 넘어서려면 더 기다려야 한다. 

완성되지 않는 거야, 작별이?

흰 실타래 같은 증기가 주전자 부리로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맞물렸던 뚜껑이 달그락거리며 반쯤 열렸다 닫히길 반복했다. 

미루는 거야, 작별을? 기한 없이?

앞문 너머로 보이는 숲의 아래쪽이 거의 검어졌다. 눈에 덮여 둥글고 부슬부슬한 윤곽선을 새로 얻은 나무 밑동들이 박명 속에 희미하게 빛났다.

저 어둠을 뚫고 갈 수 있을까, 나는 생각했다.”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1.) 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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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바인
데이브 컬런 지음, 장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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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비극에 대한 가장 완벽한 보고서라는 이름의 콜롬바인


#0

딱 10년 전, 1999년 4월 20일 미국 콜롬바인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볼링 퍼 콜롬바인>도 봤고,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당시 사건의 가해자 중 한 명인 딜런의 엄마가 쓴 책이다)도 읽은 터라 이 사건에 대해 나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에 읽기 시작한지 30분도 되지 않아서 깨달았다. 나는 이 사건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 


#1

중간중간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콜럼바인 사건 이전에도 고등학교에서의 총기 사고는 없지 않았다. 다만 콜럼바인에서는 세월호와 마찬가지로 근 4시간여를 미국 전역, 심지여 다른 나라까지 생중계로 이 사건을 지켜봤다.(가해자는 사건 발생 직후 불과 1시간도 안 되어서 자살했지만 결국 4시간이 지나서 확인되었고 그 사이 몇몇 부상자가 사망했다) 또 하나, 그 이전과 다른 점은 모든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갖고 있는 시대에 맞이한 사건이라는 점도 있다.


#2

대부분의 사상자가 난 학교 도서관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대목에서 단원고 기억교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 구성원들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지점도 닮았다. 우리는 콜럼바인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과연 그러했을까?


#3

주 당국은 사전 위협을 인지했다는 사실을 은폐했다. 축소 은폐를 위한 공모 회의도 열었다. 이 사실은 근 4년이 지난 2003년에 밝혀졌다. 경찰 당국의 대처도 미흡했다. 인질극이 아닌 묻지마 총격에 대한 대처 방법에 무지했다. 사이코패스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이 이후 FBI보고서에 담겼고 이후 개선 방안이 마련되었다. 


#4

가해자인 두 학생은 자살했다. 피해자들을 비롯한 사람들은 표적, 분노의 대상이 필요했다. 가해자의 가족이 지목되었고 가해자는 '괴물'이 되었다. 배를 버리고 떠난 선장, 유병언 회장, 구조하지 않은 해경, 박근혜, 그리고 언론... 이 또한 비슷한 패턴이다. 하지만 이런 분노의 대상 찾기는 오히려 문제의 원인과 재발 방지에 커다란 걸림돌을 마련할 뿐이지 않을까. 손쉬운 해결책, 속 편한 증오의 대상 찾기는 어쩌면 진실 규명과 재발 방지에 가장 커다란 경계 대상이어야 할 것이다. 


#5

이 지점에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의 한 대목을 인용해 본다. 

"참사가 일어났을 때 사람들이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은 '왜?'이다. 이 질문은 잘못된 질문일 수 있다. 나는 '어떻게?'라고 묻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도 세월호 참사에 대해 손쉬운 '왜'에 대한 답을 찾기보다 집요하게 '어떻게'에 더 집중해야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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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쓴 이 글 때문에(덕분에?) 무려 네 군데나 불려다녔다. 이제 좀 새로운 내용의 글과 이야기를 할 때가 된 거 같은데... 여전히 게으르다. 


첫 발표는  9월 20일 세계인권선언 70년 '문제적 인권, 운동의 문제 토론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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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에 하고 싶은 제안이 있다. … 이들의 결정이 존중되어야 한다. 남기를 원하든, 다른 결정을 하든 이들의 의사 결정이 존중되어야 한다. 이들의 결정을 유엔이 개입할 것도 아니고, 한국과 북한 정부가 내릴 것도 아니다.” -토마스 오헤아 칸타나 유엔북한인권특별보고관


인권위를 포함해 우리 국민 모두가 고려해야 것은 이들 탈북 여종업원들이 탈북 시점에서 자유의사로 탈북했는지 여부를 솔직히 말할 없는 딜레마를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실 이들 일부가 재입북을 희망한다면 길은 얼마든지 있다. 여행의 자유가 있는 이들이 3국을 통해 재입북하면 되는 일이다.” -자유한국당 김영우 국회의원


언제나 뜨거운 감자였던 북한


국가정보원에 의해 납치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된 중국의 북한 식당 종업원 12명의 문제는 간단치 않다. 북한은 12 전원 송환을 줄기차게 요구하고 있고, 민변과 유엔 특별보고관은 독립적인 기구의 진상조사를 전제로 이들의 자유의사에 따른 결정을 촉구하고 있다. 반면 자유한국당과 보수우익 단체들은 이들에게 자유의사를 묻는 자체가 반인권적 행위라며딜레마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상규명조차 반대하는 저들의 저의는 그렇다 치더라도 북한에 있는 종업원들 가족의 처지를 고려할 (북한에서 외국 근무는 상당한 사회적 신분이 보장되었을 가능하다고 한다) 딜레마 솔직히 전혀 이해되지 않는 바도 아니다. 사건이 지금처럼 첨예하게 정치적 이슈화가 되기 이른바조용한 외교 통한 접근이 되었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해본다. 남북, 북미 관계가 급진전하여 탈북민과 이산가족 모두에게 남이든 북이든 자유로운 왕래가 보장된다면 하는 상상도 해본다.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상황에서 터무니없는 상상이다. 만약 그런 시대가 온다면 어떨까? 


1984 강원도 부대에서 남한 병사가 동료 15명을 죽이고 북한으로 넘어간 사건이 있었다. 이후 병사는 북한에서 훈장도 받고 북한 매체에 나와새로운 조국의 품에 안겨 행복하게 사는 월북 대표선수 되었다. 1995년경에는  GOP 초소에서 술자리 다툼 끝에 중사가 월북한 사건도 있었다. 중사 또한 며칠 귀순 영웅으로삐라 등장했다. 지난 2 판문점에서 군사분계선을 넘어오다 총상을 입은 북한 병사는 만취 상태에서 차를 운전하다 사고를 탈북한 것으로 언론에 보도되었다. 공식적으로 북한은 1950년부터 1999년까지 6446명의 공작원을 남파했고 남한은 1951년부터 1972년까지 7726명의 공작원을 북파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다고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문제도 여전히 남북 모두에게 아물지 않은 상처이자 숙제로 남겨져 있다. 어떠한 형태로든 분단체제가 평화체제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인권, 인권운동은 수많은 딜레마를 만나게 것이다. 



















한국 인권운동에서 북한 문제, ‘북한인권 언제나 딜레마이자 뜨거운 감자였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의 대량 기아 사태가 알려지고, 일부 보수언론을 통해 러시아의 북한 벌목공 노동 실태가 보도되면서인권 빙자한 반공주의의 확산과 노골적인 체제 붕괴 시도에 대한 경계와 우려가 인권운동 안에서 고민되기 시작되었다. 김일성이 갑작스레 사망한 직후였고 동구 사회주의권이 붕괴한 불과 10년도 시점이었다. 2004년 경에는 미국의 북한인권법 제정 움직임을 계기로 통일운동단체와 시민단체, 인권단체가 함께하는 비공개 논의 테이블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어렵게 만들어진 테이블도 북한의 인권 문제 제기 자체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입장과 어떤 정치적 배경과 의도도 배제한 동포 돕기라는 인도주의만을 주장하는 입장의 긴장 속에서 결국 유의미한 활동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인권의 보편성과 한반도의 특수성, 그리고 사회운동의 복잡 미묘한 진영논리 사이에서 인권운동의 운신의 폭은 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북한인권결의안 문제는 보수세력의 정치공세에 단골 메뉴가 되었고 다양한 경로로 한국에 들어온 탈북민의 숫자는 3만여 명에 이르렀다. 


분단체제의 조난자, 탈북민


정부가먼저 통일이라고 일컫는 사람들. 통일부에서는 새터민, 과거에는 귀순자, 법적 명칭은 북한이탈주민. 조사에 따르면 현재 한국에 있는 탈북민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떠나고 싶다고 응답한 이가 20%라고 한다. 실제로 지난 10년간 탈남한 사람들이 2000, 현재 연락이 닿지 않는 이들이 800 명이고, 북한으로 돌아간 이들도 28명에 이른다. 탈북민이자 통일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주승현 교수는 스스로를조난자 호명한다. 탈북민은 분단이라는 재앙을 맞아 난파된 존재라는 것이다.  



















여론조사들은 판문점회담 이후 북한과 김정은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한국 사회에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시선이 담긴 탈북민의 SNS에는북한으로 돌아가라”, “김정일, 김정은 개새끼 해봐라는 등의 온갖 모욕적인 댓글이 달린다. 어느 탈북민 약사는한국에서 우리는 이등 국민이고 장애인처럼 사회에 적응 교육을 받고 재활해야 하는 존재라며 한국의 정착지원 사업을 비판한다. 


탈북민은 헌법적으로나 법률적으로 한국 국민이다. 이들은 자기 결단에서든, 외부적 요인에서든 자기가 태어나 성장했던 사회와 체제에서 이탈한 사람들이다. 문화적으로 북한 사회는 핏줄과 혈통을 중요시하는 가부장제, 유교적인 사회다. 북한의 교육은 우리 민족끼리 자주통일을 이루자며 우리 민족 제일주의를 가르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오랜 기간 북한 주민에게 휴전선을 넘어오면 부귀영화를 누리게 것이라고 선전해왔다. 그러나 많은 탈북민은 한국에 와서야 나라가 직업을 구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알아서직업을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참으로 당혹스러웠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탈북민은 한국 사회에서 자신들이 받는 차별에 훨씬 민감할 수밖에 없다. 2000년대 중반 국가인권위원회 토론회에 나온 탈북민은 자신이 받은 차별을 증언하며솔직히 말해서 남한은 친구를 만나서 이렇게 떵떵거리며 살고, 북한은 친구를 잘못 만나서 저렇게 가난해진 아닌가라고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여전히 다수의 탈북민은 스스로 조선족이라 밝히며 탈북민임을 숨기고 생활하고 있다. 제주에 도착한 예멘 난민을 통해 이제 본격적으로 난민 문제에 직면한 한국 사회가 만약 가까운 시기 해외에 거주하는 수백 명의 탈북민이 집단으로 한국행을 요구한다면 어떤 반응일지 걱정스럽다. 실제로 인터넷 공간에서는 탈북민에 대한 정착지원금과 생활보조금에 대한 불만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있다. 


이는 북한, 북한 사람들에 대한 인식과도 연결된다. 흔히들 10, 20대가 통일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가장 낮고 50, 60대로 갈수록 높아진다고 하고 실제 여론조사도 그렇다. 그런데 연구에서통일로 인해 경제적 손해가 발생할 경우라는 조건을 달자 40 이상에서 급격히 찬성률이 낮아진다며기성세대의 통일의식은 위선적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없다라고 꼬집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탈북민 절대다수가 급격한 통일, 남한체제로의 흡수통일에 반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반면 한국 사회는 통일, 혹은 평화체제로의 전환 속에 값싸고 좋은, 통역도 필요 없고 노조도 불가능한 노동력의 출현, 새로운 블루오션의 등장, 돈벌이가 되는 희귀 광물이라는 휘토류 등의 매장량에 대한 높은 관심, 판문점회담 직후 건설, 철도 관련 주가의 폭등 북한을 내부 식민지로 삼고자 하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유머러스한 김정은과 세련된 김여정 뒤에 가려진 북한 주민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종편이 확대재생산하면서 소비하는 체제 순응적인 꼭두각시와거기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며 1970년대 향수를 자극하는 선량한 동포의 모습으로 대상화되는 가운데 갈등하고 불화하며 입체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북한 사람들의 얼굴은 여백으로만 존재한다.    


3 세습, 1 독재와 정치범 수용소, 형과 고모부를 암살한 독재자의 나라. TV조선을 봐야만 있는 이미지가 아니다. 여러 탈북민의 증언에 따르면 대부분의 북한 지역에서, 최소한 평양에서만큼은 아직도 무상주거, 무상교육, 무상의료가 실현되고 있다고 한다. 편에서는 분단 70 동안 쌓여온 반공이데올로기 위에 편견과 악의적 선동이 횡횡하고, 다른 편에서는 북한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 장막처럼 드리워져 있다. 사이 빈자리를 혐오와 적대가 채워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다시 생각하는 국가보안법


인권운동사랑방이 1993년부터 13 동안 발행했던 팩스 신문 <인권하루소식>, 창간의 계기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잡혀간 인권운동사랑방 소속 활동가의 연행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인권단체의 주된 활동은 공안기관의 부당하고 위법한 연행을 막고, 구금과 고문 피해 사실을 알리고, 양심수 석방을 요구하고, 석방된 양심수를 지원하는 국가보안법과 싸움이었다. 싸움은 1970년대 민주화운동이 1980년대 변혁적 민중운동으로 바뀌는 가운데 등장한 민족해방 노선과 노동해방 노선 사이에서 한반도의 자주적 평화통일과 남한 사회 계급혁명이라는 노선의 과제가 만나는 지점이자 초보적이나마 독자적인 인권운동진영 열리는 공간이기도 했다. 


87 6월항쟁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은 민가협의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같은 문화행사, 하루감옥체험과 같은 퍼포먼스는 물론 200 단체가 모인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를 중심으로 100만인 서명운동, 단식과 삭발, 집단 농성, 피해자 증언대회, 국제심포지엄 그야말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그럼에도 김대중-노무현 정부 집권 10 동안 법의 폐지는커녕 조항의 개정도 이뤄내지 못했다. 


반면 확연히 줄어든 양심수의 숫자만큼이나 국가보안법에 대한 대중과 운동사회의 관심도 식어 갔다. 인권운동 내에서도 비록 국가보안법 피해자가 중심에 자리하고 있지만 과거 국가폭력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불처벌운동, 과거청산운동이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의 자리를 대신했다. 


국가보안법 피해자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과거 국가보안법 피해자는 김근태, 서준식으로 대표되는 가장 급진적이면서 반체제적인 운동가이자 동시대 가장 가혹한 국가폭력에 맞선 민주주의자로 표상되었다. 그러나빨갱이’, ‘좌파 자리를종북 대신한 이후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의 RO 내란음모 사건-통합진보당 해산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조작 간첩 사건의 피해자는 문화적으로후진사람들, 시대 변화에 낙오된 운동권, 마치 사이비 종교집단의 광신도 모습으로 그려졌다. 통합진보당 사건은 평화통일의 동반자, 대화와 협상의 상대이면서도 대한민국의주적’, 정부를 잠칭하고 있는 괴뢰집단이기도 북한과 공존하고 있는 분단체제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지만 위험한 사상을 품고 저항을 꿈꿔서는 되는가?’라는 질문은 봉쇄된 종북이라는 낙인찍기와 혐오, 마녀사냥만이 난무했다.



















그러는 사이 국가보안법의 새로운 피해자가 등장했다. 원정화 간첩 사건, 황장엽 암살 간첩 사건,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북한보위부 직파 간첩 사건. 모두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탈북민을 대상으로 벌어진 조작간첩 사건이다. 사건들 외에도 미수에 그친 사건까지 대략 10 건의 탈북민 조작간첩 사건이 현재 민변에 집계되어 있다.  


탈북민은 한국에 입국과 동시에 합동신문센터(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에서 최장 6개월 동안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조사를 받으며 탈북 과정과 입국 경위는 물론 북한에서의 생애 전반에 대해 진술해야 한다.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거나 다른 탈북민의 증언과 어긋나는 점이 있다면 곧바로 국가보안법의 그물망이 좁혀 들어온다. 한국의 제도를 알지 못했던 탈북민은한국에서는 마약범은 5년을 살아야 하고 간첩은 3년만 살면 된다 회유에 넘어가 간첩이라고자백했다며 만기출소 민변을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했다. 합동신문센터의 무사히 조사를 마쳤다 하더라도 하나원에서 정착 교육을 받은 사회에 나온 탈북민은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고 중국 브로커를 통해 가족에게 돈을 전달하는 국가보안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 수밖에 없다. 그야말로 공안기관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엮을 있는 먹잇감, 잠재적인 간첩 셈이다. 


끊임없이 변주되는너는 어느 편이냐?’ 추궁


국가보안법을 무고한 조작간첩 사건 피해자를 양산하는 악법 이상의 무엇이라고 봐야 한다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학문의 자유의 앞에 문지기로 자기 검열 기재를 작동시키는 일종의 사회 규범이자 헌법 위의 법으로서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를 떠받치고 있는 하나의 체제라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테러방지법, 전기통신망법, 보안관찰법, 북한이탈주민보호법 등과 유기적으로 맞물려 작동하며 움직임이 멈춘 상태에서도 사람들의 내면을 규율하고 국제인권기준을 비롯한 인권의 보편적 원칙에 끊임없이 예외를 강요한다.  


이는 1948 정부 수립 이래 한국에서는 하나가 아닌 개의 헌법, 공식 헌법과 함께이면헌법 존재해 왔다는 백낙청 교수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이면헌법, 국가보안법은 일종의 관습헌법으로 헌법을 해석할 권위를 갖고 있으며 때로는 헌법을 무력화시키기도 한다. 동성애 반대로 결집한 기독교 근본주의와 반공주의, 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반대하는 전현직 국방부장관과 장성들, 헌법재판관 인사청문회장에서천안함 침몰에 대한 정부 발표를 믿느냐, 믿느냐라며 사상검증이 벌어지는 작태, 질문이 성소수자 인권과 낙태의 찬반으로 바뀌는 상황, 대한문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분향소에 태극기집회 사람들이 난입해종북’ ‘빨갱이라고 소란을 피우는 장면. 모두가 분단체제 아래서 이면헌법의 작동이라 있지 않을까.  



















2018년은 세계인권선언 70주년의 해이자 제주 4.3사건 70주년이며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진 해이기도 하다. 우연의 일치라 있겠지만 전대미문의 국가폭력을 교훈 삼아 세계 인류의 이름으로 인권선언의 문구가 다듬어지던 바로 순간 제힘으로 해방을 맞지 못한 3세계 식민지에서 이제 탄생한 국가권력은 학살로 국가 만들기를 시작하며 앞으로 반세기가 넘도록 손에서 놓지 않을 국가폭력의 만능검을 벼리고 있었다. 


4.3사건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벌어졌다는 의미에서 한국이라는국가 연루되어 있으며 마찬가지로 북한이라는국가와도 연루되어 있다. 따라서 분단체제의 극복이 체제의 통합이든, 체제의 비적대적 안착이든, 새로운 평화체제의 도래든, 체제의 극복 또는 분단 문제의 해결 없이 4.3사건의 진정한 해결, 진실 규명과 화해는 불가능할 것이다. 또한 국가폭력, 국가범죄의 단죄는 국가에 대한 성찰, 국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관계 맺음의 상상력으로 이어져야 터이지만 우리의 사고는 어쩌면 고립된 섬처럼 갇혀 있고 어느새 거기에 길들여져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제주에서,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만들기는너는 누구 편이냐?” 물음으로 국민과 비국민을 나누는 것에서 출발하였으며 비국민은 곧바로=절멸의 대상 되었다. 그리고너는 누구 편이냐?” 물음은 너는 종북인가, 너는 이성애자인가, 너는 학교에 다니고 있는가, 너는 복무를 마쳤는가, 너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는가, 너는 성실한 납세자이며 근로자인가, 너는 순수한 시민인가 등으로 끊임없이 변주하며 여전히 합동신문센터에서, 대공분실에서, 청문회장에서, 일터와 쉼터에서, 집과 학교에서 그리고 광장과 거리에서 오작동의 작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제주 4.3사건이 일어난 그해, 파리의 유엔총회에서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되기 열흘 한시적이라는 조건을 달고 탄생한 국가보안법은 여전히 건재하고 강정의 해군기지 문제, 소성리의 사드 문제의 해결은 요원하기만 이때 인권운동은 과연 어떤 응답을 마련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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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하면 외할머니가 생각난다. 장남으로 태어나지 않은 까닭에 친가의 사랑은 받지 못한 반면 외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어릴 적 내가 들은 옛날이야기 대부분은 외할머니에게서 들은 것이다.



“운동보다도 운동가를/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고백하자면 발터 벤야민의 철학과 사상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를 둘러싼 어떤 분위기가 좋았다. 그의 사유나 이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여기저기 인용되거나 언급되는 그의 글은 어릴 적 옛날이야기처럼 매혹적이었다. 특히 그의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가 그렇다.



누군가는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 인권활동가들을 ‘인권의 저자’라 표현했는데 내가 보기에 그들은 영락없는 이야기꾼들이다. 이 동네 저 동네를 떠돌며 사람들을 불러 모아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들. 또는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 마을에 오면 대청마루에 붙들어 앉혀놓고 마을의 유구한 전통을 주절주절 풀어놓는 ‘어르신’이 아니라 부엌 아궁이 근처에서 들을 놈은 들으라는 듯 무심히, 하지만 의미심장하게 마을의 숨겨진 내력을 풍문처럼 읊조리는 할머니 같은 이들.



이 저널이 그런 이야기꾼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인권저널 준비모임(이제 ‘준비’자를 떼야겠지만)에 내 마음대로 “이야기꾼에 대한 이야기”라는 구절을 슬쩍 달았다. 좀 더 공식적으로는 기획편집위원회라 할 수 있는 이 모임은 6읠 첫 모임을 시작으로 저널이 발간이 되기까지 총 여섯 차례의 모임을 가졌다. 첫 모임에서 저널의 편집 방향을 함께 기획하고 토론을 통해 같이 원고를 생산하는 작업 방식으로 잡았고, 이후 매번 모일 때마다 네댓 시간을 훌쩍 넘기는 토론이 이어졌다. 거기서 나왔던 글들이 보태어지고 깊어지며 이렇게 원고가 되었다. 목차의 구성은 물론 각 원고의 내용까지 함께 검토하며 인권저널은 이제 창간호를 세상에 내놓는다. 



첫 번째로 실린 ‘이야기에 기대어 말을 이어간다’(류은숙)는 부제 ‘인권운동을 묻다’에서 알 수 있듯 그동안의 인권운동을 돌아보고 있다. 하지만 연도 별, 사안이나 의제 별 접근이 아닌 인권운동이 그간 어떤 이야기를 해왔는지, 인권운동의 언어가 무엇이었으며 어떠했는지를 통해 인권운동과 인권운동의 언어가 가진 현재적 의미를 짚은 독특한 회고이다. 류은숙의 글이 인권운동의 과거를 돌아본다면 나영정의 ‘정체성 정치, 교차성 정치, 인권의 정치’는 인권운동이 피해자와 어떻게 만날 것인가, 피해를 승인하는 권력에 맞서 어떻게 피해자의 자리에서 이동할 것인가라는 당면한 현실에서 솟아오른 질문들을 담았다.  



창간호에 걸맞게 인권운동에 수많은 영감을 주었던 연구자 엄기호,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미디어활동가인 김일란 감독, 본지 편집위원이자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공동대표인 김영옥, 이렇게 세 분을 모시고 ‘고통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를 주제로 좌담을 진행했다. 이야기의 시작은 ‘고통의 소통 불가능성’에서 출발했지만 어떤 가능성을 간간히 엿보이며 현재의 인권운동, 그리고 이 저널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환기하고 그래서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자리였다. 이 좌담은 ‘416세월호참사작가기록단’이 진행한 <고통 받는 이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듣고 기록할 것인가> 연속 강좌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자리를 빌려 고마움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평등에 거듭 도전해야 한다면’(미류)과 ‘변혁을 위한 새로운 시도들’(정정훈)은 지금 여기서 무엇을 준비하고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나름의 제언이다. 미류가 인권운동의 자리 이동을 통해 ‘함께 실패하는 연대’로 세력화의 모색을 구상하고 있다면, 정정훈은 1990년대 이후 인권운동을 ‘2세대 인권운동’으로 이름 붙인 뒤 근 25년간의 전개 과정을 짚어보고 3세대 인권운동으로의 전환을 주문한다. 두 글 모두 새로운 만큼 여러 개의 물음표가 달릴 수 있는 주장을 담고 있기에 더욱 많은 이견과 의견, 응답을 기대한다. 



글이, 저널리즘이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기여하기보다는 세계를 망가뜨리고 사회를 파괴하는 데 일조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 거기서 인권운동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무력감이 존재함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잡지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화려한 무대 위에서보다 고단한 무대 뒤에서, 광장의 중심이 아니라 그 언저리에서, 바로 지금도 후미진 뒷골목 어딘가에서 말 걸기를 멈추지 않는 수많은 이야기꾼들 덕분이다. 그들과 어깨를 같이하며, 그들과 연루되어 오늘의 인권 현실에 눈 감지 않는 더 많은 이들과의 마주침을 꿈꾼다. 이야기는 또 이렇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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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구한 인연
김원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5년 5월
평점 :
절판


일제말부터 해방공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또 하나의 역사. 이런 진솔한 회고록이라니... 중국 공산당과 문화대혁명에 대한 또 하나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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