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합과 통합이 고인이 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지이며 바야흐로 시대정신이라고 한다. 좋은 이야기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찰과 반성이 있어야 하고 진심어린 참회와 용서가 앞서야 한다.
지난 6월 10일자 동아일보는 전북 군산 개야도에서 조작간첩 사건 피해자 두 명이 37년 만에 참회와 용서, 화해를 했다는 아름답고도 가슴 아픈 이야기를 전했다(‘참회와 용서’ 37년 앙금을 풀다). 한 젊은 어부는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 끌려가 두 달 가까이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한 끝에 친구를 간첩으로 지목해야 했다. 그는 친구가 간첩임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았다며 불고지죄로 구속되었다가 8개월 만에 풀려났고 졸지에 간첩이 된 친구는 꼬박 7년을 복역하고 출소 뒤에는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혀 고향을 등져야 했다. 이제 흰머리가 성성한 노년의 두 친구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주선으로 다시 만났고 이 사건은 현재 법원에 재심신청을 준비 중이라 한다.
조작간첩 피해자들은 누구와 화합해야 하나
1981년 한국전쟁 당시 행방불명됐다가 남파된 아버지에게 포섭되어 간첩활동을 했다며 박씨와 그의 어머니, 동생, 숙부, 고모 등 일가족 7명을 ‘가족간첩단’으로 만들었던 진도 간첩단 사건. 1980년 신군부에 비판적인 성향을 가진 교사, 공무원 등이 모여 반국가단체를 결성했다고 몰아간 아람회 사건. 북한예술단 공연을 본 소감을 ‘함부로’ 말했다가 재일공작원의 지령을 받고 북한을 찬양, 고무했다며 간첩으로 몰린 김양기씨 사건.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간첩활동을 했다는 이른바 모자 간첩단 사건. 5촌 당숙, 사촌 여동생까지 한꺼번에 엮인 신씨일가 간첩단 사건. 이들은 올해 들어 법원의 재심으로 2, 30년 동안의 빨갱이 누명을 벗은 조작간첩 사건들이다.
이례적으로 몇몇 사건에서는 재심 재판부가 피고인에게 사과하고 법원의 과오를 반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2005년 이용훈 대법원장이 취임하면서 공언한 ‘사법부 과거사 청산’은 이미 실종된 지 오래됐고 신영철 대법관의 이메일 파동에서 보듯 청산해야 할 과거사의 항목은 날로 더해지고 있다. 생사람을 잡아 간첩으로 둔갑시켰던 경찰은 도시재개발과 노동자파업 현장에서 용역과 상부상조하며 시민을 테러범으로 둔갑시키고, 검찰은 수사기록까지 감추면서 이를 뒷수습하고 있다. 또한 미네르바 사건을 시작으로 정부정책을 반대하는 네티즌을 색출하고 TV 시사프로그램 작가의 이메일을 뒤져 반정부인사 낙인찍기에 여념이 없다. 게다가 과거 조작간첩 사건의 한 몫을 담당했던 중앙정보부, 안기부의 후신 국정원은 음지에서 양지로 나와 보란 듯이 활보하고, 보안사의 후신 기무사도 이에 뒤질세라 대통령 대면보고라는 높아진 위상에 걸맞게(?) 민간인 사찰을 일삼는다. 반성이니 참회니 하는 말을 꺼내기조차 무색한 지경이다.
가증스러운 보수언론의 행태
더욱 기막힌 것은 한 사람의 일생, 한 가족의 운명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조작간첩 사건을 다루며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는 듯 무미건조하게 단신처리로 생색을 내거나 미담기사로 그럴듯하게 포장해내는 보수언론의 행태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이들 보수언론은 기무사의 불법사찰 행위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사법부 내 연구모임인 우리법연구회에게 비밀결사, 이념조직이 아니냐며 다그치고 있다. 한편으로는 국가보안법 위반 전력자들이 쌍용자동차 파업에 개입했다며 조작사건을 부추기고, 다른 한편에서는 신임 국가인권위원장에게 “국가보안법 폐지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소신”이라는 답변을 받아낸다. 이 지긋지긋한 색칠하기 위에 덧씌워진 화해의 메시지에서는 최소한의 염치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의 화합과 통합의 제스처는 그저 얄밉고 괘씸할 따름이다.
- <미디어 오늘> 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