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마감이라 정신이 없다. 글도 두 편이나 써야 하는데 어제 한 편을 겨우 완성했다.  
촛불시민과 용산에 대해 인터뷰한 내용이다.  

"용산은 늘 2순위여서 미안하다"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한편 무기력과 패배감과 싸우면서도 열정적으로 촛불을 들고 있는 그 앞에서 많이 부끄러웠다.  

오늘 서울시청에서 용산 집중 집회가 열린다. 잠시라도 거기 다녀와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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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촛불과 만나다

“내 아이가 살아가야 할 세상…. 예전에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다들 힘든 시절이었지만, 나이 드신 분들이 참 많은 노력을 하셨겠지만 조금만 더 민주적인 나라를 만들어주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우리나라는 왜 이럴까. 지난 10년간 그래도 내 자식한테 민주주의 국가를 물려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 같아요. 근데 지금 되어가는 꼴을 보니까 아닌 거죠. 이럴 줄은 진짜 꿈에도 생각 못했어요.”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보다 두어 시간 먼저 용산에 도착했다. 8월 15일, 집회도 문화제도 없는 날이다. 천주교 자체 행사가 많아 매일 열리던 미사도 오늘은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부동자세로 서있는 경찰들 뒤로 참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남일당 건물을 한참 쳐다보고 있자니 이 한가로움이 왠지 낯설기까지 하다.

이대로 가면 낙원은 없다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나라는 민주주의 나라,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나라, 자유의지로 살아갈 수 있는 나라, 내가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을 수 있는 나라였으면 좋겠는데 이대로 가면 아무 생각 없이 돈 생기면 외국 여행이나 다니고 하는 이웃나라처럼 되지 않을까, 배부른 돼지들이 사는 나라가 되지 않을까, 아니 배고픈 돼지들의 나라가 되고 말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용산과 관련된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여 촛불을 들고 있는 ‘플라워겐’(닉네임, 김혜경, 44)을 만나 근처 호프집에 마주 앉았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이 상태로 가서는 낙원은 없다.”는 작가 조세희의 말이 떠오른다. 용산참사 다음날 현장을 찾은 조세희는 “30년 전 난쏘공을 쓸 때 미래에는 이런 슬픔, 불공평, 이런 분배의 어리석음이 없기를 소망”했으나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고 토로했다.

"촛불들은 대부분 아프리카(인터넷 개인방송)를 많이 보는데 새벽부터 놀란 가슴에 바로 현장으로 달려가기도 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날 뉴스는 못 봤어요. 현장에 갔던 분이 카페에 올린 글을 보고나서야 알았죠. 그리고 다른 누가 올려놓은 동영상을 봤는데 그 비명소리들…. 미쳤나봐, 미쳤나봐 그랬죠. 너무 가슴 아프고. 그래서 일 끝나고 같이 모여서 여기(용산)로 왔던 거 같아요. 와보니 또 너무 기막히잖아요. 그날도 아마 (경찰이) 여기 앞을 다 막았어요. 그래서 전경버스에 욕도 쓰고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솔직히 말해 저는 철거 이런 거 잘 몰랐고 별로 관심도 없었어요. 철거민들이 억울하고 그렇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왜 그런 일이 생기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별로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죠. 그리고 철거민들은 과격하다, 전철연이 어떻다, 이런 소문들도 많았잖아요. 촛불들 안에서도 그래서 용산과 함께 하기 싫다는 사람도 많았어요.”

플라워겐은 스스로를 그리고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가리켜 촛불이라 한다. 촛불, 촛불시민은 지난 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 이후 여러 사회의제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목소리를 내고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 인칭대명사가 된 듯하다. 촛불들은 연령대만 해도 60대에서부터 열네 살 청소년까지 다양하고 정치적 성향도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싫다는 사람에게 강요는 할 수 없지만 그는 용산에 와서 촛불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촛불은 힘든 사람, 마음 아픈 사람들과 같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게 촛불의 할 일이라는 생각을 했죠. 여기는 이래서 안 오고, 저기는 저래서 안 가고, 이런 건 아니다. 내가 비정규직이건 아니건, 철거민이건 아니건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느냐 하면서 말다툼도 했었어요. 누구든지 도움이 필요하고 촛불을 들어야 될 일이 생기면 가야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금도 가지고 있죠. 또 사회적 약자들도 우리 같은 시민들이고, 누구나 언제든지 비정규직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언제든지 철거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이번에 갖게 된 거 같아요. 내가 사는 동네에 뭘 짓겠다고 하면 바로 나도 철거민이구나. 그렇다고 제가 여기 와서 뭐 한 일은 없어요. 그냥 머릿수 하나 보태려고 앉아있는 거죠.”

그가 처음 촛불을 든 까닭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집회에서 “애들이 나서는데 어른인 자신이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1980년대 후반 부산에서 대학을 다녔던 그는 87년 6월 항쟁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거리에 섰고 그 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학습지 교사로 다시 직장생활을 하다 꼬박 21년 만에, 8년차 학습지 교사로 살아가는 사회인으로, 열 살 아이를 둔 엄마로 다시 거리에 선 것이다.

21년 만에 다시 거리에 서다

“그냥 제 삶만 열심히 살았죠. 사실 사람이 자기 일 아니면 무관심하고 그렇잖아요. 정치에 별로 관심도 없었고 노무현 대통령 때 이라크 파병하는 거 보면서 화가 나기도 했지만 김대중, 노무현 때는 그래도 그럭저럭 사회가 잘 돌아간다고 생각했어요. 남들이 김대중, 노무현 욕을 할 때도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이해를 하고 넘어가는 사람 중에 한 명이었죠. 그런데 이명박 들어서면서부터 뭔가 이상하다 싶었죠. 내 안전이 위협받는다고나 할까. 이번에 기무사에서 사찰한 것도 그렇잖아요. 또 노무현 때 세금이 많이 올랐거든요. 그래도 세금 내는 게 아깝지 않았어요. 내가 이만큼 내면 누군가 혜택을 보겠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세금 내는 게 너무 아까워요.

드라마 즐겨보는 사람들이 모이는 카페 회원이었어요. 솔직히 거기서 저 혼자였으면 촛불을 못 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서너 명 있더라고요. 그 사람들이랑 같이 나왔죠. 그러다가 ‘촛불집회 같이 가기’라는 카페에 가입하게 됐어요. 작년에 촛불집회에서 시민 한 명이 죽었다는 사망설이 있던 전후였는데 막 물대포 쏘고 강경진압을 했잖아요. 그때 생겨난 카페예요. 먼저 집 방향이 같은 사람들이 연락처를 교환하고 촛불집회가 끝나면 살아있냐, 어디냐, 전화를 해서 만나서 집에 같이 가는 거죠. 그리고 지금은 거기 말고도 ‘안티 뉴라이트’ 카페랑 ‘1인 시위’ 카페에서 활동 중이고요.
‘안티 뉴라이트’ 카페는 작년 8월 쯤 만들어졌는데 주로 온라인에서 활동하고 정기적으로 하지는 못하지만 가끔 뉴라이트 바로 알기라는 내용으로 판넬전 같은 전시회를 하죠. 서울에서는 모일 장소도 마땅치 않고 집회신고도 잘 안받아주니까 분당이나 동탄 같은데, 관악산 입구 주차장에서도 했고요. 전시를 하고 있으면 시비 거는 사람도 많아요. 의외로 젊은 사람들이. 무관심한 사람이 80%, 관심 있는 사람이 20%, 그 중에 시비 거는 사람이 한 5% 정도라고 보면 돼요. 그래도 전단지 나눠주면 받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안 받아 가면 속상하죠. 사실 몰랐으면 저도 그 사람들처럼 싫다고 하고 안 받아갔을 텐데. 아는 게 죄인 거 같아요. 모르는 게 약인데. (웃음)”

냉정하게 말하면 촛불을 들게 되면서 얻은 것보다 잃은 게 많다고 한다. 그래서 올 6월까지만 촛불을 들자, 6월이 가기 전에 꼭 이명박을 끌어내리자고 다짐을 했고 아이와도 6월까지만 이해해달라고 약속도 했다. 그런데 이제 곧 가을이고 그의 활동은 더 늘어났다. 다음 아고라에서 뉴라이트에 대해 알게 되면서, 촛불을 드는 일 말고 더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던 끝에 전단지라도 돌려야겠다는 생각에서 카페에 가입해 활동하다 ‘얼떨결에’ 카페지기까지 맡게 되었고 ‘1인 시위’ 카페(1인 시위로 보여주는 행동하는 양심)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주로 을지로 입구에서 1인 시위를 하죠. 사람이 많으면 명동으로 가거나 종각으로 가기도 하고. 아는 동생이 카페에 사진을 올려놓아서 알게 됐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워낙 많다보니까 같이 하자고 해서 그러자 그랬죠. 저는 수요일이나 토요일에 1인 시위를 하는데 두 시간 정도 서있으면 몸이 좀 힘들어서 그렇지 참 좋아요. 1인 시위를 하면 모래요정이라고 한 두 분이 나와 주시거든요. <바람돌이>라는 만화 있었잖아요. 모래요정은 거기서 따온 거래요. ‘3의 법칙’이라고 세 명이 한 곳을 바라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다고 하잖아요. 그런 역할도 하고 시비 거는 사람들로부터 1인 시위 서는 사람들 보호해주기도 하고. 주로 이십대 후반, 삼십대 초반 사람들인데 직장 마치고 퇴근하면서 같이 한두 시간 있다가 가는 거죠. 그런 사람들 만나면 너무 흐뭇하죠. 작년에는 촛불집회에서 ‘닥봉’이라고 있었잖아요. 닥치고 봉사하자는 모임. 촛불을 들게 되면서 정말 따뜻한 사람들,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 거 같아요.
저는 요새 미디어법으로 1인 시위를 했고, 4대강 죽이기로도 했고, 그러고 보니 용산 문제로는 한 번도 1인 시위를 못해봤어요. 솔직히 말하면, 죄송하게도 용산은 늘 2순위였던 거 같아요. 미안해하는 사람은 점점 많아지는 거 같지만 용산문제에 집중하기가 어려운 거 같아요. 노무현 대통령 죽음 때문에 그랬고, 미디어법 터지면서 또 그랬고, 이번에 평택에 쌍용자동차 때문에 또 그렇고.”

평택 쌍용자동차의 파업과 진압과정을 지켜보며 용산에서 만약 그렇게 일찍 경찰특공대가 투입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남일당 옥상의 망루는 며칠이나 견뎠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용산으로 모였을까. 또는 얼마나 많은 비난의 화살을 용산으로 퍼부었을까. 부질없는 생각이다.

용산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켜진 촛불

“빨리 끝장을 보고 저도 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쌍용자동차 보면서 참 나쁜 생각이지만 뭔가 큰 일이 터져서 이명박이 내려왔으면 하는 생각도 했어요. 참 나쁘죠. 평택 가면서도 그랬어요. 사고 터지면 안 되는데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뭔가 촉발할 게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가서 가족들 보니까 절대 용산 같은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더 이상 사람들이 안 다쳤으면 좋겠다, 또 그래서 너무 다행이고요.
쌍용자동차 보면서, 용산도 그렇고, 왜 이렇게 사람들을 막바지로 내몰까. 2순위지만 어떤 다른 문제보다도 용산이 빨리 해결됐으면 좋겠어요. 조금이라도 유족 분들이 마음에 위로를 받고 해결이 되었으면…. 그런데 이명박이 절대 사과는 안 할 거 같고, 지금도 많이 힘드실 텐데, 앞으로도 더 힘드실 거 같고. 철거민 문제, 전철연과 같이 하기 싫다는 촛불도 있었지만 또 좀 다른 이유로 여기 오기 싫다는 사람도 있었어요. 여기 오면 항상 꽉 막혀있고 갇힌 듯이 답답하잖아요.
사실 저희도 기운이 빠지죠. 학부모들 만나면 정말 많은 분들이 이명박 싫어하고, 제가 촛불집회 다니고 그런 거 많이들 아시니까 격려해주고 그런 분들 많거든요. 한나라당 지지하면서도 이명박은 마음에 안 들어서 다음 선거에서 투표 안 하겠다는 분도 계시고. 그래도 결국 보면 이명박이 하고 싶은 데로 다 하잖아요. 쌍용도 그렇고 미디어법도 그렇고.”

희망을 찾기가 만만치 않은 시절의 답답함 또는 막막함. 용산만이 아니라 돌아가신 다섯 분의 시신이 모셔진 순천향병원 장례식장에 들어 설 때마다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건 딱히 공간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용산에서 촛불을 밝히고 있다.

“오체투지가 있었잖아요, 올봄에. 저는 무릎이 안 좋아서 같이 오체투지를 하지는 못했지만 남태령에서 사당까지 두어 시간 동안 뒤에서 함께 걸었어요. 그날 날씨가 참 궂었어요. 비가 무지 많이 왔죠. 사실 오체투지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방으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시간이 맞지를 않아서 못 가고 있다가 서울로 들어온다고 해서 갔죠. 갔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였더라고요. 촛불들도 많이 모였어요. 비가 주룩주룩 오는데 그걸 다 맞으시면서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는 걸 보면서, 그때 저도 그렇고 촛불들도 많이 느꼈을 거예요.
사실 용산이 터지면서 철거에 대해, 개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거잖아요. 우리가 얼마나 개발을 좋아했던가, 그래서 이런 대통령도 뽑힌 거고. 옛날에 바가지 받고 표 찍어주듯 다들 뉴타운 때문에 찍어주고 그런 거 아닌가요? 뭐 다를 게 없죠. 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아파트만 빼곡히 짓는 것, 그 자리가 누군가의 삶의 터전인데. 촛불들도 용산에 함께 하면서 철거민을 보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죠. 전철연, 철거민에 대한 선입견, 편견이랄까 그런 것도 많이 없어지고. 처음에는 너무 씩씩한 아줌마들 보고 무섭고 그랬는데 이제 아는 사이가 되니까, 그분들이 어떤 사정으로 여기 와 있고 그런 거 아니까 이해가 되는 거죠. 다른 건 몰라도 용산 때문에 촛불이 많이 변했고, 철거민에 대한 생각, 개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정말 중요한 거 같아요.”

그를 다시 만난 것은 8월 21일 김대중 전 대통령 분향소가 차려진 서울시청 광장에서였다. 그곳에서 “참으로 야만적인 처사다. 이 추운 겨울에 쫓겨나는 빈민들의 처지가 너무 눈물겹다”는 DJ의 용산참사 당일 일기의 한 구절을 1면 톱기사로 뽑은 경향신문을 보며 그를 기다렸다. 한 시간 반 동안 줄을 서 분향을 한 플라워겐의 눈가는 눈물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 때보다는 (분향이) 빨리 끝났네요. 정말 우리나라 망하려나, 하늘이 우리나라를 버렸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 김대중을 잘 알거나, 그렇게 존경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막상 이렇게 돌아가시고 보니 무기력해지는 거 같기도 하고. 아무 소용이 없나봐 하는 생각도 들고. 슬픔도 슬픔이지만 막막함이 더 많고. 민주주의는 국민이 지켜야 하고 시민이 나서야 한다고 하셨다는데 우리가 더 힘내서 해야 된다고 생각은 하는데 사실 기운 많이 빠지네요.
노무현, 김대중 때 용역깡패 같은 거, 이게 사회 암적인 존재인데 이런 사회악은 제거해주고 갔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아쉬움, 섭섭함이 남아요. 어쩌면 자연적으로 도태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도태되는 분위기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잡초가 더 빨리 자란다고. 사실 겁나요. 희생이 따라야 하잖아요. 이렇게 많이 후퇴했는데 다시 회복하려면 얼마나 큰 희생이 있어야 할까요?”

여섯 명의 목숨, 200여 일간의 장례식장 생활과 농성, 7개월을 넘어선 투쟁. 공개되지 않는 3000쪽의 수사기록. 십여 명의 부상자와 6명의 구속자, 훨씬 더 많은 연행자, 25만 명의 탄원. 더 무엇이 남았을까.

플라워겐은 향수 이름, 플라워겐조에서 따온 것이다. 이 향수는 병에 꽃 한 송이가 꽂혀 있는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이제 곧 찬 바람이 불면 가을꽃이 피고 봄꽃들은 묵묵히 겨울을 견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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