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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이태원참사 2주기가 다가온다. 


1주기 책에는 인터뷰어로 참여했지만 2주기는 여러 여건 상 참여하지 못했다. 


대신 해설글 한 편을 실었다. 


편집자와 의견을 주고 받으며 분량이 약간 줄어들었는데... 왠지 아쉬워 초안을 여기에 남겨본다. 때마침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도 축하할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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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기

  • 재난참사의 진상규명과 진실에 관하여




“특조위(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에서 막 조사관으로 일을 시작했을 당시, 조사 방법 세미나 모임에서 한 팀장급 조사관이 ‘강기훈 유서 대필 사건’ 조사보고서를 참고 자료로 가져왔다. 다른 재난조사보고서를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는 왜 성격이 다른 과거사위원회의 사건보고서를 검토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졌다.” (박상은, <세월호, 우리가 묻지 못한 것>(진실의 힘, 2020)



진상규명이란 무엇인가


특조위의 그 팀장이 군사독재와 권위주의 통치 시기 자행되었던 공권력에 의한 국가폭력 사건들을 다룬 과거사위원회의 보고서 대신 1988년 중국 상하이에서 수학여행 중이던 일본 가쿠게이고등학교 학생들을 태운 열차가 맞은 편 열차와 충돌한 열차사고(이 사고로 학생 26명과 인솔교사 1명, 그리고 중국인 열차 검사원 1명 28명이 희생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일본에서 우호적인 중일 관계가 중요하다는 논리가 압도하면서 제대로 된 진상규명도 되지 못한 채 서둘러 배상과 보상 절차가 마무리되었다.)에 관한 자료나 1989년 영국 힐스버러 스타디움에서 인파 관리 실패와 구조물 붕괴로 관중 97명이 숨진 참사의 보고서(힐스버러 참사 직후 영국 경찰과 언론은 사건의 원인과 책임을 훌리건들의 난동으로 몰아갔으나 참사 20주기인 2009년 영국 정부는 독립적인 조사기구를 만들어 재조사에 들어갔다. 2012년에 발표된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경기장의 구조적인 위험이 존재했고, 경찰은 진술조서를 왜곡해 자신들의 책임을 덮었으며 잘못된 응급구조로 59명이 추가로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를 가져왔다면 어떠했을까? 만약 9.11사태 이후 구성된 9.11위원회에서 조사한 뒤 발표한 보고서였다면?(‘9.11테러 보고서’는 이례적으로 출간 후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고 이후 만화책으로 제작되기도 했을 만큼 ‘성공’한 보고서로 평가된다. 한편 9.11위원회는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이 이 사건을 알카에다의 소행으로 전제하고, 당시 부시 행정부의 책임은 묻지 않기로 하며, 왜 테러조직의 공격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했는가라는 아주 제한적인 내용에 대해서만 조사하기로 한 정치적인 타협의 산물이기에 불충분하고 한계가 명확한 보고서라는 비판도 있다.) 또는 바다 밑 지진으로 발생한 쓰나미로 인해, 그렇지만 쓰나미 직후 정부와 도쿄전력의 무능으로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폭발하면서 그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 3.11 동일본대지진 보고서였다면? 


세월호 참사는 이러한 재난참사들 사이 어디쯤에 놓인 사건일까? 아니면 이들과는 전혀 또 다른 성격의 사건일까? 질문은 꼬리를 문다. 재난참사에서 진상규명이란, 진실이란 무엇일까? 수많은 희생자와 피해자가 나온 참사에서 진실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너무나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10.29이태원 참사에서 159명 희생자의 유가족과 피해자들이 갖고 있는 의혹들이 빠짐없이 해소되는 것이 진상규명일까? 100가지 의문점이 있다면 그 중에 몇 십 개가 규명되면 진실이 밝혀졌다고 할 수 있을까? 참사를 야기한 문제에 대해 그 권한을 가진 책임자들이 합당한 책임을 지고 참사의 인적, 구조적 원인이 온전히 밝혀진다면 그때는 진상규명이 다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국가애도기간이라는 국가폭력


2022년 10월 29일, 서울 이태원에서 열린 핼러윈 축제에서 대형 참사가 발생한 뒤 윤석열 대통령은 바로 다음날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 곧바로 정부는 유가족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희생자의 명단은 물론 유가족들 간에 정보도 공유하지 않는 채 희생자의 이름도 영정도 없는 정부합동분향소를 일방적으로 설치하고, 11월 5일까지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함과 동시에 용산구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했다. 


“한없이 무능하다가도 놀랄 만큼 유능”(4.16세월호참사와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조사한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종합보고서 중에서.)했던 정부의 조치들은 11월 8일 국정감사에 나온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의 “국정상황실은 대통령 참모조직이지 재난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는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참사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선제적 행위였을 뿐이다.(2014년 세월호 참사 직후에도 ‘청와대는 재난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는 발뺌이 이미 나온 바 있다.) 참사 유가족들이 어떠한 정보도 제공받지 못하고 모이지도 못한 상황에서 내려진 정부합동분향소 설치와 국가애도기간 선포는 그 형식적 절차에 반해 유가족은 물론 대형 참사를 마주한 시민들의 추모와 애도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절차에 따라 희생자 유가족들이 분리되고 고립됨으로써 이들에게 주어진 사건에 대해 알 권리, 참사의 진실에 접근할 권리를 정부가 애초부터 가로막았다는 점이다. 


그 뒤로도 국정조사는 물론 2024년 1월 31일 국회에서 통과된 특별법에 대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기까지 윤석열 정권은 이 참사의 진상규명에 대해 방관과 외면, 회피, 비협조와 방해로 일관했다. 그리고 지난 2024년 5월 2일 특별조사위원회 구성을 핵심으로 하는 ‘10.29 이태원 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법’(10.29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제정되었음에도 여전히 정부와 여당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이 글의 집필 시점인 2024년 9월 초까지 윤석열 대통령은 별다른 이유 없이 국회가 전달한 특별조사위원회 위원들을 임명하지 않고 있다.)


과정으로서 진상규명


윤석열 정권의 이러한 태도와는 별개로 세월호 참사 이후 만들어진 여러 특별법과 비교해보면 10.29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의한 특별조사위원회의 권한이나 규모, 조사 기간은 턱 없이 부족하다. 그러하기에 특별조사위원회가 만들어지고 거기서 조사를 한들 별 다른 성과 없이 끝날 것이라고 지레 예단할 필요는 없다. 한국사회는 이미 세월호 참사 이후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소중한 경험과 교훈, 성과들을 축적했고, 재난 피해자들과 시민사회는 그것에 굳건히 발 딛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를 참사의 진실을 밝혀가는 기나긴 여정 중 하나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윤석열 정부가 일방적으로 선포한 국가애도기간에 설치된 분향소의 명칭은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분향소’였다. 국회에서 ‘10.29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통과되었음에도 여전히 집요하게 ‘핼로윈 참사’라는 명칭을 고집하는 언론과 특정 집단이 있다. 세월호 참사가 아니라 ‘세월호 사고’여야만 하는 이들, 3.11 동일본대지진이라고 하지 않고 3.11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라고 하면 불편하고 못마땅한 사람들, 그런 세력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재난참사, 특히 대규모 참사는 매우 정치적인 사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렇다고 참사의 진상규명에서 정치적 협상이나 정치 세력 간의 타협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은 아니다. 정치적 사건이기에 서로 다른 관점과 견해가 충돌할 수밖에 없으며, 지난한 과정을 거쳐 그 사건의 진실이 무엇이며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 연장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사유 중 세월호 참사에 대한 책임, 국민의 생명과 안전 보호의 의무가 제외된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 10.29이태원 참사에서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탄핵 심판의 결과 무죄가 나온 것 또한 단순한 실패나 시행착오가 아니라 국가 최고 권력자와 행정 전반의 책임자에게 사법적 책임을 면하게 함으로써 재난참사에서 사법부의 책임 있는 역할이 과연 무엇인가와 함께 참사의 책임자에게 어떻게 온전한 정치적, 사법적 책임을 물을 것인가라는 숙제를 한국사회에 남겼다고 생각한다. 


작별하지 않는다


2020년 10월, 나는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활동 종료를 10개월 앞두고 세월호 참사 피해지원 실태 보고서를 쓰기 위해 조사관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내게 맡겨진 보고서를 마무리한 뒤 다른 개별 조사보고서와 종합보고서를 찬찬히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보고서들을 읽어나가며 이 또한 매우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는 세월호 침몰원인을 밝히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밝혀진 진상조사 결과를 설명하고 세월호 참사의 현재적 의미를 되새기는 데도 실패한 것은 아닌가 하는 우울감이 몰려들었다. 


그 무렵 아직도 이 나라에서 적당한 이름을 찾지 못한 ‘제주 4.3사건’을 다룬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중 “그렇게 끝없이 연기되고 있는 바로 그 상태가 그 일의 성격이 되어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라는 문장에서 묘한 위로를 받았다. 또한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어떤 상태가 그 일의 성격이 될 수 있다면 과정 그 자체가 진실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지난여름 서울 을지로에 있는 ‘별들의 집’에서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 한 분을 만났다. 재난피해자권리센터에서 모집한 재난보도 모니터링단에게 이 참사의 의미와 이해를 돕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먼저 시민대책위원회 활동가에게 참사의 전반적인 개요를 들은 뒤 유가족의 이야기를 들을 순서가 되었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첫 마디는 “우리 아들 이야기를 조금 해도 될까요?”였다. 


‘이태원 참사는 어떤 사건인가요?’라는 추상적인 물음에 유가족은 희생자가 생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본인과 어떤 관계였는지, 희생자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유가족에게 참사는 다른 무엇도 아닌 너무나도 소중했던 사람을 잃은 사건이라는 사실, 그리고 진상규명은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어쩌면 진상규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어리석은 질문은 정해진 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새로운 여러 가지의 질문의 갈래들과 마주하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진실은 숨겨져 있다 어디서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는 단 하나의 무엇이 아니라 여러 가지 모양의 단편적 진실로 존재하고 그 퍼즐을 맞추는 가운데 구성해야 하는 것 아닐까. 참사의 진상규명이 무너진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면 그러한 퍼즐 맞추기를 통해 사법적 정의와 회복적 정의, 역사적 정의가 구현되는 과정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 전까지, 그 뒤에라도 희생자와 그리고 진실과 헤어지지는 말아야하겠다. 


“제목이 뭐야?

밀폐용기에 담긴 것을 나무 숟가락으로 덜어 주전자에 넣다 말고 인선이 물었다. 

우리 프로젝트 말이야.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그녀는 주전자에 생수를 부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제목을 묻지 않았어. 

나는 대답했다. 

‘작별하지 않는다.’

(...)

작별인사만 하지 않는 거야, 정말 작별하지 않는 거야?

아직 주전자의 부리에서 김이 솟지 않았다. 비등점을 넘어서려면 더 기다려야 한다. 

완성되지 않는 거야, 작별이?

흰 실타래 같은 증기가 주전자 부리로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맞물렸던 뚜껑이 달그락거리며 반쯤 열렸다 닫히길 반복했다. 

미루는 거야, 작별을? 기한 없이?

앞문 너머로 보이는 숲의 아래쪽이 거의 검어졌다. 눈에 덮여 둥글고 부슬부슬한 윤곽선을 새로 얻은 나무 밑동들이 박명 속에 희미하게 빛났다.

저 어둠을 뚫고 갈 수 있을까, 나는 생각했다.”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1.) 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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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엄마야 -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엄마들의 이야기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27
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 / 오월의봄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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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유혹] 서로의 질문이 무성히 피어나길

<그래, 엄마야>(오월의 봄,2015)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엄마들의 이야기를 읽고

10년 쯤 전의 일이다. 친하게 지내는 부부였는데 결혼한 지 5년이 지나도 아기가 생기지 않았다. 부부는 인공수정을 했고 쌍둥이를 임신했다. 임산부가 나이가 있어서인지 병원은 태아의 염색체 이상 유무를 알아보는 양수 검사를 권했고 검사 결과 쌍둥이 중 한 명에게 문제가 있다고 했다. 출산을 하면 아이가 장애를 가질 확률은 40%, 인위적으로 유산을 할 경우에는 나머지 아이가 자연 유산할 확률은 50% 쯤.
부부는 인위적인 유산을 선택했고 결국 나머지 아이마저도 잃었다. 그러는 동안 부부는 내게 의견을 묻지 않았다. 그랬기에 나는 그들에게 아무런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의견을 물었다고 한들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까? 만약 우리였다면 하고 잠시 와이프와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다. 그러나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그들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이야기는 무기력하게 주변을 겉돌 뿐이었다. 

적대적 세상에 내던져진 아이와 부모 

“‘그럼 그렇지. 다른 애들보다 반응이 약간 느리긴 해도, 너 잘 크고 있는 거지’” -37쪽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에게 아기가 생겼다. 아기도 그랬겠지만 부모도 부모가 되는 순간 세상에 툭 내던져지는 느낌이다. 낳고 보니 육아와 돌봄에 대해 나는 알고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정보도 제한적이었고 육아 지식이라는 것들도 갑론을박 중구난방이었다. 내 어머니는 몸이 불편하셨고 와이프 부모님은 시골에 사셨기에 도움의 손길을 구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셋이서 치러내야 했다. 야심차게 친환경적이고 생태적이라는 천 기저귀를 구비해놓았지만 단 일주일 만에 포기하고 일회용 기저귀를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와이프가 둘째를 가졌을 무렵에는 신종플루가 창궐했고 아이와 와이프도 걸렸다. 의사는 와이프에게 타미플루를 처방하면서 “아직까지는 임산부에게 부작용이 있다는 보고는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나의 무지, 우리의 무지는 생각보다 훨씬 크고 넓었다. 그러면서 깨닫은 것은 이 세상이 아이에게,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골목의 자동차, 거리의 버스, 땅 밑의 지하철, 식당 앞 계단, 중국에서 날아온다는 황사, 심지어 이웃집 노부부의 말 한마디까지 말이다. 

그런데 만약 아이가 장애가 있다면?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세상은 우호는커녕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낸다. 적대적인 세상에 내던져진 그들의 전쟁, 그 한 가운데 엄마가 있다. 

“아버님이 대놓고 저한테 ‘정신과를 갈 사람은 애가 아니라 너다’라고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럼 아버님이 원하는 병원에, 원하시는 날짜에 원하는 시간 잡아주면 제가 검사를 받을게요. 저는 아버님 며느리니까 아버님이 하라는 대로 할게요. 대신 제가 아버님한테 돈 대달라고 안 할 테니까 제 아이를 가지고 제가 하는 거는 신경 안 써주셨으면 좋겠어요. -71쪽

‘전쟁’이라는 단어를 쓰다가 멈칫한다. 하지만 그들의 곁에 서본 사람, 그들의 일상을 엿본 사람이라면 이 표현이 그저 비유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대를 전혀 배려하지 않고 호기심 어린 시선을 거두지 않는 사람들 속을 헤집고 들어갔다 헤집고 나오는 일, 동정 혹은 멸시의 시선과 말들 속에서 끊임없이 아이의 상태를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하는 일의 반복. 비장애인 큰딸과 장애가 있는 쌍둥이를 둔 엄마는 큰딸에게 “누군가 쌍둥이를 안 좋은 눈으로 보고 있어서 힘들면 가족이 아닌 척해도” 된다, “그래도 엄마는 뭐라 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하는 이 일상이 ‘전쟁’이 아니라면 달리 뭐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전쟁의 책이 아닌 질문의 책

그렇지만 이 책이 전쟁의 기록, 매일매일 벌어지는 처절한 사투를 담았다고 짐작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육아를 해본 사람이라면 다들 공감할 수 있는, 어디서나 흔히 만나게 되는 아이를 키우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들이다. 어떤 엄마는 ‘엄마가 행복해야 자녀도 행복하다’는 생각에 직장과 육아를 병행하면서도 자신이 너무 이기적인 것은 아닌지 고민한다. 어떤 엄마는 가족 내에서 아빠와 비장애 자녀의 위치가 어디쯤일지 살피는 중이다. 어떤 엄마는 조금씩 장애 아이와 거리두기를 시도하기도 하고 어떤 엄마는 아이로부터 그런 도전을 받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들을 ‘이 시대 모든 엄마의 이야기’로 요약해서는 안 된다. 발달장애인이 지역에서 같이 살아야 된다는 지극히 소박하고 상식적인 요구를 하며 ‘엄마’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서울시청에서 36일째 농성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엄마들의 이야기들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면서 자녀의 보호자이자 관찰자이며 적군이자 아군이며 마침내 동료와 동반자가 되는 열여섯 명 엄마들의 마음자리가 어떻게 바뀌는지, 그들의 삶이 어떻게 진동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 진동은 책을 읽는 나의 마음도 진동시킨다. 

“네. 대답을 해요. 그런데 몸으로 하니까, 기다려 주세요. ... 발달장애를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장애인이 이해 대상으로만 여겨지지 않았으면 해요.” -287쪽

큰애가 발달장애 아이와 어린이집을 같이 다니면서 두어 해 동안 가까운 이웃으로 살게 된 경험은 내게도, 아이에게도 장애에 대한, 인간에 대한 새로운 고민을 안겨주었다. 무엇보다 큰애는 차이와 다름에 대해, 사람 저마다가 가진 속도에 대해 미약하지만 머리와 몸으로 이해하는 듯 보였다. 그래서 그 가족과의 만남은 너무나 소중하고 진심으로 그들에게 고맙다. 아이의 변화와 나와 그들의 변화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고 분에 넘치는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장애는 어쩌면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누군가 우리에게 건넨 숙제이면서 선물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이를 키우다보면 굳이 아이가 내게 묻지 않더라도, 내가 아이에게 묻지 않더라도 무수한 질문과 맞닥트린다. 아이는 그 자체로 거대한 질문 덩어리다. 이 책도 그렇다. 아빠들은 다 어디 가고 왜 고군분투의 현장을 엄마만 지켜야 하는 것일까? 아이를 인격적으로 존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부모의 성장과 아이의 성장은 어떤 관계일까? 사회가 강요하고는 하는 아이 발달의 ‘정상성’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 그리고 현실에서 장애를 이해하면서도 이해의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을 방법은 무엇일까? 

“내가 이 손을 놓고서 멀리 떠난다 해도 우리 아이가 엄마의 손길을 이 사회 속에서 여전히 받아가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생에서의 내 삶이 그걸 위해 쓰여도 좋습니다. 우리 아이와 어미인 저는 이번 생을 그렇게 같이 살다 가려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어미가 그렇듯, 이 아이로 인해서 나는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26쪽

책에는 질문에 대한 답이 없다. 질문을 찾아나가는 여러 경로를 보여줄 뿐이다. 답을 찾은 이도 있고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도 있으며 이제 막 발을 땐 이도 있다. 중요한 것은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엄마들의 질문이 그들만의 질문이 아니듯 구하고자 하는 답도 그들만의 답은 아니라는 점, 그들이 찾은 답으로 인해 마침내 서로의 질문이 더욱 무성하게 피어날 테니 말이다. 

물론 그렇지 않아도 좋다. 괜찮다.



- 인권오름 2016.6.18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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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연 응답할 수 있을까

-재난참사에 대한 기록들


어쩔 수 없이 읽게 되는 책이 있다. 나에게는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금요일엔 돌아오렴>이 그런 책이다. 책이 나오기 훨씬 전부터 유족들 인터뷰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소식을 접했지만 막상 책이 나온 뒤에 나는 도저히 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깊은 슬픔과 커다란 고통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을 만들 때 내가 기획했던 책, <밀양을 살다>가 참고가 되었다며 저자 간담회 자리에 내가 패널로 소환(?)되는 일이 벌어졌다. 간담회 날짜가 다가오자 책을 읽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몇 번씩 책을 덮어가며 며칠에 걸쳐 겨우 책을 읽었다. 지난해 여러 곳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이 책의 내용을 여기에서 다시 소개할 필요는 없겠다. 대신 이 책과 함께 읽으면 좋을 책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재난참사에 관한 기록들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제 곧 또 다시 잔인한 봄이 올 것이고 우리는 그렇게 세월호 2주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2년이라는 시간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기에 어느 정도 적당한 시간일까? 아니 적당한 시간이란 게 과연 있기나 할까? 우리는 누구나 같은 시간을 살아간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특히 재난참사를 겪은 이들의 시간은 그렇지 않은 이들과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 몇 십 년 같은 하루를 살기도 하고 며칠 혹은 몇 개월이 하루 같기도 하다. 때문에 재난참사를 겪은 이들에게 동일한 일상의 시간 감각을 회복하라는 요구는 그 자체로 커다란 폭력이다. 최소한 우리는 남겨진 이들이 충분히 슬퍼하고 애도할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의 저자 노다 마사아키는 이 애도의 시간을 절망, 분노, 우울, 용서와 수용, 재출발 등으로 구분하여 ‘상(喪)의 단계’라고 이름 붙였다. 그런데 이 단계는 일직선으로, 순차적으로 밟게 되는 과정이 아니다. 이미 지나온 단계로 돌아가 같은 과정을 다시 밟아오는 경우도 있고, 단계의 지속 기간이나 강도도 저마다 다르다. 결국 재난참사를 겪은 생존자들과 유족들의 슬픔을 함부로 재단하거나 전형화하지 말고 각각의 처지와 조건을 헤아리는 것부터 위로와 공감은 시작되어야 한다.  


정신병리학자인 노다 마사아키는 1985년 일본항공(JAL) 추락 사고 당시 유족들의 상담을 맡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대형 참사 유족들의 슬픔에 대한 책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를 쓰게 되었다. 이 책은 520명이 사망하여 일본 항공사고 사상 최악의 참사로 기록된 JAL 추락 사고와 수학여행 중 수많은 일본 학생들이 희생당한 상하이 열차 사고 등 대형 참사를 겪은 유족들을 만나고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유족들은 왜 그토록 시신을 찾으려고 애쓰는지, 잘못된 보상 과정이 유족들에게 어떤 아픔을 안겨주는지, ‘유족의 시간’과 ‘관계자의 시간’은 어떻게 다른지, 관 주도의 추모행사가 어떻게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바꾸며 어떤 집단은 어떻게 애도를 돈 벌이에 이용하는지 등에 대해 때로는 조근조근 설명하고 때로는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재난참사를 겪은 이들에게 주변 사람과 이 사회가 어떻게 그들을 위로하고 함께할 것인지에 대한 귀중한 조언이다.  


생존자, 그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것이 인재(人災)가 되었든 자연재해가 되었든 재난참사를 겪은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의 경험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재난을 다시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침묵은 어떤 경우라도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혹시 사회가 그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살피는 일도 중요하다. 오해나 편견에서 비롯된 비난의 시선이든 선의에서 비롯된 동정의 시선이든 당사자에게는 무슨 무슨 사건의 ‘피해자’로 낙인찍히는 것은 또 하나의 고통이자 억압이다. 그러므로 재난을 겪은 이들을 피해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 온전히 만나는 일이 중요하다. <쓰나미의 아이들>은 그런 점에서 침묵을 강요당하기 일쑤인 아이들의 목소리를, 재난에서 출발했지만 재난 이후의 삶까지 담아냈다는 점에서 너무나 소중하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북동부에서 진도 9.0의 거대한 지진이 발생했고 후쿠시마 원전을 비롯한 일대 지역에 거대한 쓰나미가 덮쳤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2만여 명, 피난민 수는 38만 명을 넘어선 이 재난이 벌어지자 탐사보도 전문 기자 모리 겐은 현장으로 달려가 대피소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아이들에게 그날의 일에 대한 작문을 부탁했다. 그렇게 아이들이 쓴 글이 <쓰나미; 피해 지역 아이들 80명의 작문집>으로 묶여 일본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거기에 담긴 이야기 중 10개의 스토리를 뽑아서 추가로 취재와 인터뷰를 한 책이 바로 <쓰나미의 아이들>이다. 


하루 아침에 쓰나미로 집을 잃고 가족과 친구를 잃은 아이들은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중고등학생까지 연령대도 다양하고 이혼이나 재혼 등 가족의 구성도 다양하며 당연히 쓰나미 이후 삶을 꾸려가는 방식도 저마다 다르다. 다만 재난을 겪었다는 것과 함께 재난에도 불구하고 서로 서로 삶을 지탱하며 살아간다는 점만은 동일하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재난 이후에도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이라는 것을 <쓰나미의 아이들>은 들려주고 있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책임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소개할 책은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이다. 전후후무한 탈핵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본인 스스로 자신의 작업을 ‘목소리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겪은 수많은 이들의 참혹한 목소리를 가공 없이 있는 그대로 담았다.


20세기 최악의 참사로 불리는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 사고 당일 2명의 작업자가 그 자리에서 죽고, 화재 진압에 나선 소방대원이 방사능에 피폭되어 3개월 뒤 29명이 사망했으며, 원자로 주변 지역 9만 여 명이 강제 이주되었다. 그 뒤로 6년 동안 발전소 해체 작업에 동원된 노동자 6,000여 명, 그 지역에서 소개된 민간인 2,500여 명이 사망했고 최소 40만 명, 최대 70만 명 정도가 암, 기형아 출산 등 각종 후유증을 앓고 있다. 러시아의 한 환경단체의 통계로는 이 사건으로 죽은 사망자는 총 150만 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사건의 참상이나 피해의 규모에 있지 않다. 알렉시예비치는 이 책의 한국어판에 별도의 서문을 실었다. 요약해서 옮기면 이렇다. 
















“두려움만이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 첫 번째 핵 수업은 체르노빌이었다. … 그리고 지금, 우리는 두 번째 핵 수업을 받고 있다. 하나도 아닌 11기의 원자력 발전소에 사고가 났다. 체르노빌처럼 후쿠시마에도 전 세계의 이목이 쏠려 있다. … 오늘날 거의 30개국에서 443기의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 중이다. 미국 104기, 프랑스 58기, 일본 55기, 러시아 31기, 그리고 한국에 21기가 있다. 종말을 앞당기는데 충분한 개수다. …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체르노빌을 겪어 본 인류는 핵 없는 세상을 향해 갈 것만 같았다. 원자력의 시대를 벗어날 것만 같았다. 다른 길을 찾을 줄 알았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체르노빌의 공포 속에 살아간다.”


비단 핵 뿐일까? 우리는 몇 번째 수업을 받고 있나?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대구 지하철,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해병대 캠프… 그리고 세월호. 왜 무겁고 슬프고 힘겨운 재난참사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만 하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뜬금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책임감을 뜻하는 영어단어 ‘responsibility’는 응답(response)과 능력(ability)의 합성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물론 상황은 비관적이다. 알렉시예비치의 한국어판 서문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나는 과거에 대한 책을 썼지만, 그것은 미래를 닮았다.”


-<어깨동무> 2016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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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염없는 손들의 마지막 신호.


연기처럼 사라지는 약속.


킹사이즈의 혼란.


구호에 대한 암호.


등화관제 아래 지각없는 불빛.


습관적인 무적(霧笛).


아마 우리 숨결의 외출.


- 정현종 시 <담배를 보는 일곱 가지 눈>

 

 

 

#1.

일단 담배는 안 좋다. 일산화탄소, 이산화탄소, 니트로사민, 질소화합물, 시안화수소, 암모니아, 니코틴, 타르, 석탄산, 포로늄 크레졸, 싸이나, 벤조피렌, 아크롤레인……. 보통 담배 한 갑에 2천5백 원, 세금을 빼면 천 원이나 될까 싶은데 (그것도 한 갑이 아니라 한 개피에) 무려 4천여 가지 화학물질이 들어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그 중 나프탈아민, 니켈, 벤젠 비닐 크롤라이드, 비소, 카드늄 등은 대표적인 발암 물질로 폐암, 구강암, 후두암, 식도암, 신장암, 방광암, 췌장암, 자궁경부암을 유발하고 뇌세포 파괴나 정신질환 유발, 성기능장애를 가져오기도 한다는 사실은 이미 일반상식에 속한다.

 

게다가 “내 가족, 이웃까지도 병들게” 한다. 이른바 간접흡연. 최근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간접흡연의 정도를 평가할 수 있는 코티닌이라고 하는 환경독성물질의 농도가 높을수록 어린아이들에게서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충동성 등 ADHD증후군(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의 증상들이 심해지고 철자법과 수학계산 등 학습능력이 저하되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또한 우울감, 집중력 저하, 무기력증 등 다양한 심리적 문제가 동시에 발생하며 ADHD증후군 발병률이 1.5배 이상 높게 나타난다니 끽연자야말로 걸어 다니는 흉기라 아니할 수 없고 자녀가 있음에도 담배를 피우는 필자 같은 경우는 가히 제정신이라 할 수 없다. 또한 산불을 비롯한 각종 화재의 주범으로 몰리기도 하고 교통사고의 원인으로 들먹여지기도 하니 어찌하여, 여태껏 흡연이 범죄의 목록에 오르지 않았는지 되려 신기할 따름이다.

 

이런 의학적 연구(로 포장된 공공연한 협박)까지는 아니어도 흡연이 안 좋다는 것은 끽연자라면 매일 매일, 매 순간 순간 온몸으로 느낀다. 전날 술자리에서 좀 많이 피웠다 싶으면 오전 내내 속이 더부룩하고 골이 띵하고 숙취가 오래 간다. 주로 담배를 짚는 검지와 중지 손가락만이 아니라 머리에서 발끝가지 담배냄새에 찌들어 애들이 초등학교만 들어가도 옆에 오기 꺼린다. 호주머니를 털면 담배가루가 날리고 담뱃재는 끽연자의 주변을 맴도니 늘 지저분하다. 담배는 있는데 라이터가 없는 참으로 불미스러운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늘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담배 빵’을 당해 구멍 난 옷 한두 벌쯤은 차라리 애교라 할 수 있다. 지인의 아끼는 옷에 구멍을 냈을 때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 자신이 피운 담배연기가 어쩌다 눈에 들어갔을 때는 그렇게 슬플 수가 없고 내가 떨어낸 불똥에 데었을 떼는 어디다 하소연 할 곳조차 없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 마땅히 피울 데가 없어 우산을 받쳐 들고 한 모금을 빨면 좋다가도 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싶다. 끽연자로 살아간다는 건 구질구질하게 너저분한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다.

 

 

#2.

30년 전만 해도 담배는 우리 삶 도처에 있었다. 할아버지는 사랑방에서, 아버지는 안방에서, 할머니는 장독대 근처에서 무시로 담배를 태우셨다. 아버지가 피우던 450원짜리 거북선 담배 심부름은 곧 용돈 50원이 생기는 것을 의미했다. 지금도 남아있는 무궁화호 열차와 낡은 시외버스 등받이에 (심지어 저가항공 비행기 좌석에도!) 달린 재떨이는 담배가 우리와 참 오랫동안 동행했음을 증언하고 있다.

 

올 봄 TV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1970년대 TBC방송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됐던 드라마 ‘청실홍실’을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당시 3대 트로이카로 불리던 배우 정윤희의 미모도 그렇지만 거의 매 회마다 등장하는 흡연 장면. 그 시절에도 카리스마 넘쳤던 배우 강부자는 담배와 혼연일체의 연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드라마에서 담배는 시인의 고독, 지식인의 고뇌, 시련의 아픔, 일탈과 타락, 노동이 끝난 뒤의 여유로움, 토론의 진지함, 갈등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표현할 수 있는 만능 소품이었다. 요즘 드라마가 시청자를 피곤하게 만들 지경까지 속사포로 대사를 쏟아내는 것은 어쩌면 TV에서 담배가 사라진 탓은 아닐까?

 

물론 그때도 부자들은 비싼 담배를, 가난한 이들은 싸구려 담배를 피웠지만 그럼에도 다들 담배를 나누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아니, 윗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한 개피를 건네는 것만큼 진한 우정과 환대의 표시는 없었다. 특히 손윗사람이 손아랫사람에게 권할 때 담배는 마치 ‘어른 세계’로 들어가는 입장권과도 같았다. 그러므로 담배 앞에서 우리는 평등했다? 아니, 결코 그렇게 말 할 수는 없다. 이 우정과 환대의 울타리 안에 결코 들어올 수 없었던 사람들, 여성과 청소년의 흡연은 곧 탈선으로 지목되어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았던가.

 

 

#3.

여자가 지붕 없는 곳에서 담배를 피우면 경범죄로 처벌받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지만 필자도 남성인 만큼 흡연에 있어서의 성차별을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소극적인 저항으로 아무도 없는 고등학교 교무실에서 후배들에게 망보게 한 뒤에 담임선생님 책상에 발을 올리고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던 필자였음에도 말이다.

 

그러다 전직 기자이자 지금은 제주 올레길로 더욱 유명한 서명숙 씨의 『여성흡연 잔혹사』를 읽게 되면서 그야말로 잔혹했던 흡연에 대한 성차별을 알게 되었다. 데모를 하다가 잡혀간 경찰서에서 남자 대학생에게는 담배를 권하던 형사가 여자 대학생 가방에서 담배와 라이터가 나오자 뺨을 때렸다는 일화에서부터 운전을 하다가 음주단속을 만났을 때 자신도 모르게 담배를 끄고 창문을 내리며 “저 안 피웠는데요.”라고 했다는 일화까지 주옥같은 이야기들을 여기에 다 옮길 수 없다. 다만 책에서의 인상적인 물음. 왜 흡연 문제에서의 극심한 성차별이 유독 할머니에게만은 관대한가? 폐경기를 지난 할머니는 사회적으로 여성이 아니기 때문이고 남성중심 사회에서 바라는 바, 건강한 여성의 몸을 유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란 진단이다. (참 재수 없다.) 더 한 것은 할머니만이 아니라 술집 작부나 마담 등 주부/어머니이어야 할 여성이 아니라면 남성들은 한 없이 담배에 관대했다는 것. 담배를 피우는 것이 한 때 여성해방의 중요한 액션이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 보인다.

 

요즘 들어 부쩍 내몰리고 위협받는, 그래서 흡연권 운운하기까지 하는 (특히 남성) 끽연자들은 먼저 처절한 탄압의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장렬이 전사하기도 했던) 이 땅 여성흡연자들에게 깊은 사과와 무한한 존경을 표하는 것이 먼저다.

 

 

#4.

담배를 피운다는 게 썩 좋은 일이 아닌 이유는 차고 넘친다. 승리, 무궁화, 재건, 새나라, 희망, 신탄진, 새마을, 88, 엑스포, 하나로……. 왠지 담배를 피우기 전에 국기에 대한 경례라도 하고 불을 붙여야 할 것 같지 않은가? 예나 지금이나 담배 가격에서 60%를 넘는 각종 세금은 국가재정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1990년대 농촌활동을 가서 양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2012년 오늘 광화문 한 복판에서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외치는 것만큼이나 위험하고 불경한 짓이었다. 애국, 애족, 애향심이 과하다 싶은 이 나라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왠지 국민의 (신성하지는 않을지라도) 의무를 수행하는 일 같기도 하여 거시기하다. 그것도 1952년에 벌써 담배가 폐암을 유발한다는 신뢰할만한 보고가 이뤄진 것을 뻔히 알았으면서도 스무 살 청년들을 군대로 끌고 가 무료로 담배를 나눠주며 중독 시킨 뒤 수십 년 동안 팔아먹었던 이 정부가 요즘 하는 꼬락서니를 볼 때면 더 그렇다. 그래도 북한이 아시아에서 흡연율 1위를 달리고 한국이 OECD 국가 중 남성흡연율 1위를 차지했다고 하니 이 또한 민족동질성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어릴 적에는 동요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군가였던 노래의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라는 구절만 봐도 알 수 있듯 담배와 군대, 전쟁도 꽤나 사이좋은 관계다. 북미 원주민들이 콜럼버스에게 선물하여 유럽으로 전해진 뒤 어김없이 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흡연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고도의 스트레스가 동반되는 전투에서 군대는 병사들을 다독이기에 담배만큼 좋은 것을 찾지 못했다. 긴장을 완화시켜 주고 집중력을 높여주며 무료함을 달래주기까지 하는 담배. 게다가 담배의 역사는 식민주의와도 밀접하다. 대영제국의 건설의 주요 자금줄은 담배교역이었고 식민지에서 담배를 재배하는 일은 제국에 반하는 범죄였다. 이래저래 담배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사람들은 또한 담배 때문에, 담배를 피며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담배는 해로워야 마땅하다.

 

 

#5.

혐연권(간접흡연을 하지 않을 권리)과 흡연권(담배를 피울 권리)에 대한 논쟁이 간혹 언론에 등장한다. 몇 달 전에는 ‘흡연권의 제한과 한계’라는 꽤나 그럴 듯한 제목의 포럼이 열리기도 했다. 서울시의회는 간접흡연의 피해를 막겠다며 조례를 제정해 공원만이 아니라 길거리에서의 흡연에도 과태료를 물리겠다고 한다. 앞에서 구구절절 언급했다시피 담배가 흉기에 가까운 물건이고 흡연이 범죄에 필적하는 행위이니만큼 혐연권의 주장은 성폭력범에게 전자발찌를 채우자는 주장이나 연쇄살인범을 극형에 처하자는 주장만큼이나 지당하다. 반면 반대 측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개인 사생활에 대한 국가의 과도한 개입을 경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한겨레 2011년 12월 23일 ‘길거리 흡연 금지 어떻게 봐야 하나?’ http://www.hani.co.kr/arti/opinion/argument/511608.html). 또 흡연권이 권리인지, 흡연을 제한하는 것이 과잉금지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도 벌어졌는데(한겨레21 제902호 ‘흡연권은 권리가 아니다, 과잉금지 위헌이다’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32503.html) 헌법재판소는 2004년에 흡연권보다 혐연권이 우선하며 흡연권을 기본권으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이라고 한다. (한 오백년 꾸준히 피우다보면 관습헌법의 지위를 얻게 될 런지 모르겠다.)

 

무리하게 담배 피울 권리를 인권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글이 막바지에 접어든 이 대목에서도 도대체 담배와 인권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 의심스럽고 뭘 어디다 어떻게 끌어다 붙여야 하는지 걱정이다. 그렇지만 단 한 명도 담배 따위는 피지 않는 미래 세상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은가?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살인미수는 처벌받고 자살방조도 처벌받지만 자살미수는 처벌 대상이 아니다. (자살이 미수에 그치지 않고 성공하면 당연히 처벌할 수가 없다.) 자신의 생명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어서 파괴할 권리도 그 자신에게 있다고 보는 것일까? 이건 프라이버시를 넘어 소유권의 문제인가? 그런데 마약 복용이나 문신은 처벌 대상이고 존엄사는 여전히 논란이 있다. 왠지 이 문제에 법철학자나 문화인류학자를 불러와야 될 것 같다.

 

언젠가 모란시장을 갔다가 약장수 옆에서 담배를 피우는 원숭이(침팬지였을 지도 모르겠다)를 본 적이 있는데 왠지 안쓰러웠다. 약장수는 어떤 강압과 사육으로 담배를 가르쳤을까? 놈의 동물권은 침해받은 것일까? 본능적으로 연민의 감정이 치밀어 올랐지만 어쩐지 마주앉아 담배를 핀다면 더 이상 놈을 동물로 대우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흡연이 인권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인간적인 문제인 것만은 확실하다.

 

 

#6.

문화사회학자 호이징가는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라는 개념을 통해 문화 속에 놀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놀이를 통해 문화가 만들어진다는 이론을 세웠다. 일과 놀이가 나뉘지 않고 뒤엉켜 굴러가던 시절 흡연은 뭘 만들어냈을까?

 

담배는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상비약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영혼의 세계와 접촉하는 주술의 도구로 쓰였다. 마야문명에서 흡연은 부족의 중요한 제례의식 중 하나였다고 한다. 3천년이 넘도록 계속 되어 온, 불을 붙이고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는 이 행위는 가장 원초적인 놀이이자 문화의 결정체라 할 만하지 않은가.

 

얼마 전 처갓집에 힘든 일이 있었다. 늘 그렇듯이 사위들과 술잔을 기울이시던 장인어른은 난데없이 사위들에게 맞담배를 허하셨다. (물론 아직도, 차마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있다.) 담배를 피우는 일은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인 동시에 어려운 시간을 함께 거쳐 온 이들이 주고받는 5분간의 위로라는 생각을 했다. 필자의 아이들이 자라 끽연을 하는 날이 온다면 주저 없이 맞담배를 허할 것이다. 이제 필자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7.

25년째 일말의 가책도 없이 하루에도 10여 차례 피우고 있다. 얼추 계산해보니 10만 개피. 내 인생에서 10만 번 반복해서 해왔던 일이 달리 또 무엇이 있을까?

 

1986년. 아시안게임이라는 뭔가 국가적으로 뿌듯한 대규모 행사가 열리는 한편 전교조가 만들어졌던 해. 온 나라가 ‘평화의 댐’이라는 희대의 국가 사기극에 놀아나던 바로 그 1986년 어느 날 필자는 동시상영 극장에 앉아 있었다. 학생 신분을 굳이 속일 필요도 없는 허술하고 허름한 극장은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다들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해야 했지만 (우리는 객기를 부려 애국가 제창을 하기도 했다.) 조금 지나면 바로 담배연기가 자욱해지는 그야말로 ‘대한민국스러운’ 극장이었다. 거기서 많은 홍콩영화들을 봤지만 단연 인상 깊었던 영화는 ‘영웅본색’이었다. 그때 주윤발을 만나지 않았다면 담배를 피우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은 물론 가당치도 않다. 인문계 고등학교 커트라인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도 공부에는 영 흥미가 없어 무협지로 어둔 밤을 하얗게 지새우던 사춘기 소년에게 담배만큼 나름 안전하면서도 매혹적인 것이 또 있었을까?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작가 지망생이 된 소년에게 담배는 더 이상 깡패나 조폭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새벽마다 거울을 보며 주윤발이 아니라 시인 김수영처럼, 소설가 김승옥처럼 담배 피우는 연습을 했다. 놀이터에서 경비 아저씨에게 걸려 ‘엎드려 벋쳐’를 하고 ‘쪽수’만 믿고 8차선 대로변에서 담배를 피우며 가다 형사에게 붙들려 파출소에서 무릎도 꿇어봤지만 청소년이었기에 청소년이 아니고자 했던 욕망, 거기에는 담배가 필수불가결한 소품이었다.

 

돌아보면 어느 자동차 광고의 카피처럼 “나는 당신과 함께” 했다. 대학입학 시험에서 떨어지고 올라간 지리산 노고단에서의 한 모금, 더 이상 너희는 사람이 아니라 군인이라며 연병장을 뒹굴다 10분간 휴식에 차렷 자세로 피워야 했던 한 모금, 3년의 수배생활 끝에 잡혀서 봉고차에 태워진 뒤 수갑을 차고 피웠던 한 모금, 여명에 맞춰 새카맣게 몰려드는 전경들을 보며 대추리 마을회관 옥상에서의 한 모금, 아버지의 영정사진과 맞담배질을 했던 장례식장에서의 한 모금, 산부인과 앞에서 첫째의 탯줄을 자른 손 떨림이 가시지 않은 채 피웠던 한 모금.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g On Heaven's Door’에서처럼 천국의 문 앞에서도 아마 한 모금 깊게 들이마신 뒤 문을 두드릴 것이다.

 

 


 

 

 

 

 

 

 

 

 

 

 

 

 



 

 

 

-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2012년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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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이 운동을 망친다? 마감을 하다 메일함을 보니 이런 글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진보네트워크센터가 보낸 <네트워커>라는 뉴스레터였습니다. 클릭해서 열어보니 ‘클릭 운동(Clicktivism)이 좌파 운동을 망치고 있다’는 글이 실려 있습니다. 미셀 화이트란 외국 사람이 2년 전에 쓴 것을 번역한 글인데 사회운동이 온라인 활동을 하며 시작된 디지털 행동주의 운동이 사회변화의 시장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다시 보니 메일 제목은 ‘클릭이 운동을 망친다’가 아니라 ‘클릭 운동이 운동을 망친다’는 것이었죠. 사실 클릭 운동이란 게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문득 나도 클릭으로 운동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졌습니다. 또 하루에 몇 번이나 마우스를 클릭하는지, 몇 번이나 스마트폰을 터치하는지 궁금해졌지만 이내 헤아리길 포기했습니다. 엄두가 나지 않아서요.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참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20여 년 전 대학에 입학해서야 그동안 제가 알고 있던 컴퓨터는 컴퓨터가 아니라 모니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텔레비전처럼 그냥 끄면 안 되고 꼭 ‘park’라고 입력한 다음에 꺼야 한다는 선배의 말에 이건 뭔가 대단히 복잡하고 다루기 어려운 물건이란 느낌이 들었죠. 몇 년이 지났을까, 삐삐란 호출기가 등장해 학생회에서는 교정에 공중전화기 수를 대폭 늘리겠다는 선거공약을 앞 다투어 내놓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침에 일어나 스마트폰을 확인하는 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 되어버렸고 컴퓨터가 고장이 나거나 인터넷이 안 되면 거의 모든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죠.

 

이렇게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이 고유명사가 되고 ‘나꼼수’ 같은 팟케스트가 화제가 되는 세상이라지만 정보격차, 정보 불평등은 심각합니다. 몇 달 전 스마트폰 보급률이 전체 국민의 50%를 넘겼다는 뉴스가 있었지만 지난해 한국정보화진흥원이 발표한 보고에 따르면 장애인과 저소득층, 노년층, 농어민과 탈북자, 결혼이민자 등 취약계층의 스마트폰 보유율은 8.6%에 불과합니다. 인터넷을 통한 정보 접근성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지만 그 활용도에서의 격차는 쉽게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한편으론 정보통신 강국이란 미명아래 인터넷 실명제가 버젓이 시행되고 있고 CNN의 최근 보도처럼 “이명박 대통령 취임 2년 만에 북한 찬양 내용을 인터넷에 올렸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사람이 5명에서 82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참으로 스마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참 스마트하지 못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구질구질한 통합진보당의 진흙탕 싸움 한복판에 첨단의 인터넷 투표가 있다는 것도 참 아이러니합니다. 어쩌면 신자유주의를 반대한다면서도 편리함과 효율성의 가치를 우선시 하고 기술과 시스템을 맹신하는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민주주의란 본래 불편하고 비효율적이고 성가신 것인데 민주주의를 향한답시고 민주주의를 놓아버린 때문은 아닐까요?

 

그래서 고병권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에서 말한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것은 자기 정체(정치체제)의 근거가 몰락할 위험을 각오하고 비판의 심연에 기꺼이 자신을 개방하며, 그런 개방을 통해 정체 갱신의 힘을 얻겠다는 의지의 표출”이기에 “민주화가 의미하는 것은 ‘교정’이 아니라 ‘이행’일 것”이며 “정체를 척도에 비추어 바로잡는 일이 아니라 척도 자체를 바꾸는 일”이라는 지적을 다시금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몰락의 위험을 감수하고 비판을 통해 갱신하며 척도 자체를 바꾸는 일로 나갈 수 있을까요?

 

편집은 두려운 일입니다. 편집이란 말이 제일 많이 등장하는 데는 아마도 TV 연예프로그램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기서 편집은 잘려나가거나 선택받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마찬가지로 영화에서도 편집은 필름을 오리고 붙이는 일입니다. 단행본이나 잡지에서 편집은 자료를 모아 펼친다는 원래 의미가 있지만 이 또한 선택과 배제를 동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용산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을 보며 저는 이 편집이란 단어와 함께 지난 5월에 봤던 노순택의 사진전 <망각기계>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몇 년에 걸쳐 시간이 날 때마다 광주 망월동 묘역을 찾았다고 합니다. 거기서 해가 질 때까지 카메라를 세워놓고 셔터를 열어놓은 채 5.18 희생자의 영정사진을 다시 렌즈에 담았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눈과 비를 맞고 햇볕과 서리를 견디며 자연스럽게 망가진” 그 사진들은 5.18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5.18을 기억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 같았습니다(대담 ‘나는 살아있는 너, 너 또한 죽은 나’). 마치 그동안 수없이 봐왔던 용산 남일당 망루가 불타오르는 칼라TV의 영상을 <두 개의 문>에서 보여주며 우리가 용산참사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를 되묻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죠.

 

《사람》을 생각합니다. 처음 잡지를 만들 때 다들 요즘 세상에 무슨 종이잡지를 내냐고 물음표를 달았습니다. 그때마다 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내심 이 잡지가 형식에서뿐만이 아니라 내용에서도 시대를 거스르는 잡지였으면 했습니다. 갈수록 스마트해지는 세상에 얼마나 《사람》이 어리석은 저항을 고집해왔는지 반성을 하게 됩니다.

 

어떤 사건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사건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일입니다.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것은 곧바로 지식인이 된다는 뜻이자 그 행위 자체가 지배계급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시절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글을 쓴다는 것은 분명 권력을 행사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글들을 편집하는 일은 또 다른 권력입니다.

 

무수하게 많은 일들 중에 특정 사건이나 사안을 골라 적당한 필자를 물색합니다. 원고가 들어오면 독자의 이해를 위한다는 이유로 문장을 손질하고 어떨 때는 단락을 나누거나 잇기도 합니다. 최선을 다해 필자와 소통을 한다고 하지만 그동안 정말 최선을 다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쉰일곱 번 《사람》을 만들며 570번도 넘는 잘못을 알게 모르게 저질렀으니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러면서도 여러분의 과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편집인의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사람》은 아직도 여러분의 사랑이 더 필요하고 감히 더욱 사랑받아 마땅한 잡지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현장과의 끝을 놓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현장과의 거리를 고민하는 잡지, 진리와 선에 대한 의심과 진실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겸손함을 잃지 않는 잡지, 그러면서도 진실에 다가서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잡지, 권력에 대해 저항하면서도 자신의 권력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 잡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다시 민주주의를 생각합니다. 운동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운동을 통해 사람들이 변화하고 그럼으로 인해 세상이 조금씩 바뀌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럴 수 있게, 사람들이 힘과 지혜를 모을 수 있게끔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민주주의가 아닐까요.

 

-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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