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박 넘기 ROUTLEDGE Critical THINKERS(LP) 3
스티븐 모튼 지음, 이운경 옮김 / 앨피 / 2005년 6월
평점 :
절판


<서발턴이 말할 수 있는가?>라는 스피박의 에세이를 읽는데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책을 읽으며 지독히 난해한 글쓰기가 스피박의 의도임을 알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에세이도, 이 책도 잘 이해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서발턴'은 하위주체, 하위계층 등으로 번역된다. 또는 힘을 뺏았긴 사람들로도 옮겨진다. 그러나 서발턴에서는 이렇게 한 묶음으로, 집단으로 규정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라는 반성적 사고가 깃들어 있다.  그들이 노동자, 비정규직, 도시빈민, 소작농민 등의 이름으로 규정되는 순간 그것은 서구 이론의 틀에 갇혀버린다. 힘을 뺏았긴 사람들 하나 하나는 이러한 이론적 틀로는 설명될 수 없는 개별적 고통과 경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들을 서구의 이론적 잣대로 설명할 때, 또는 재현하려고 할 때 그들은 말할 수 없게 된다는 것.   

 

   
 

 식민 담론 연구가 피식민지인이나 식민지에 관한 문제를 재현하는 데에만 집중한다면, 오히려 식민주의-제국주의를 과거에 안착시켜 현재의 식민주의적 지식 생사에 봉사하게 될 수도 있다. -232p

 
   

 

이러한 그의 발언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그런 점에서 스피박은 "유보적이고 비정형적 글쓰기 양식"을 사용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그의 글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물론 그의 글만이 아니라 그의 글이 다루고 있는 서발턴의 삶과 고통이 쉽게 재현되기 어려운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에세이와 이론적 작업이 의미를 갖는 것은 서구, 또는 근대의 이론에 갇힌 피식민지인, 서발턴의 삶을 재현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성찰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주어는 목적어다. 목적어는 주어다'라는 서술문은 사고의 대상이 그것을 탐색하는 주체에 의해 결정되는 방식을 논증한다. 이를 서구가 비서구의 세계에 관해 생산한 지식에 대입해보면, 사고 대상은 서구식 재현의 무게에 짓눌려 사라진다. -82p  
   


결국 서발턴이 말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서발턴에 의해 이야기하도록 하는 것, 서발턴의 자기 역사쓰기일까? 증언을 듣고 고통을 기록하고 그들의 삶을 재현하려는 르포르타주는 이 자기 역사쓰기와 어떻게 만나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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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이도. 흔히 세종대왕으로 일컬어지는 인물로 만원권 지폐에도 들어있다. 
(그는 자신의 초상이 배추잎이 되어 사람들 주머니로, 때로는 사과박스에 담겨 돌아다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아버지 태종 이방원의 철권통치 아래서 스물 두 살에 즉위하여 명색이 왕이었으면서도 자신의 처가 식구들의 숙청을 그저 감내해야 했던 슬픈 군주. 한편으로는 피의 댓가로 얻은 평화의 시대에 농업과 역법, 의학과 과학, 음악, 문학 지리, 천문 등 다방면에서 그야말로 눈부신 업적을 이룬 조선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 할 수 있는 천재.
(그래서 후궁만 다섯에 스물 두 명의 자식을 두어야 했을까?)   

그의 동상이 이제 지폐에서 나와 광화문에 세워졌다고 한다. '하이 서울 페스티발'이 열리는 서울 한복판에, '영어 몰입교육'이 찬양되는 이 시대에, 다름아닌 한글날을 즈음해서 말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동상은 시대착오적이다. 마치 신흥종교 집단에 교주님 같은 모습이랄까,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비단 세종만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광화문에 세워져 온갖 오욕의 현대사를 지켜봐야 했던 이순신은 어떤가.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 볼 수 있는 인간적인 고뇌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슨 무당집의 관운장 같기도 하고, 진시황 무덤에 섰는 토우 같기도 한 그의 동상을 볼 때마다 이 나라 군사정권의 안목이 늘 안타까왔다.

'칼레의 시민'이라는 로댕의 동상이 있다. 별로 맘에 들지 않는 말 가운데 하나인, 노블레스 오블리제(가진 자들의 도덕적 의무)의 상징으로 꼽힌다. 프랑스 칼레시가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시민들이 학살될 위기에 놓이자 '가진 자' 여섯 명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여 나머지 시민들의 학살을 막았다는 이야기인데, 로댕은 칼레시의 요청에 의해 그 여섯 시민의 조각을 만들면서 절대 사람들 눈 높이 위에 세워두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이 조각이 성스럽고 위대해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칼레시로부터 거절당하기도 했다고 하나 지금에와서는 진정한 인간의 품격이 무엇인지, 도덕과 의무가 과연 어떠한 고뇌 가운데 나오는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걸작으로 남아있다. 물론 보는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가운데서 말이다.

4.19 이후 이승만의 동상이 그랬고, 레닌과 사담 후세인의 동상이 마찬가지로 욕을 봤건만 북쪽에는 수령님의 동상이 굳건하고, 남쪽에는 장군의 동상에 이어 대왕의 동상이 세워지는 이 땅 덩어리.(이 나라에서 예술하는 조각가들도 그래서 한편 불쌍한 존재들이다.)

아마도 후대의 예술적 안목과 철학의 빈곤함을 예상했더라면 세종은 아마 "나의 동상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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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나라 이름은 대한민국일까?
  
영문 이름이 Republic of Korea라고 하니 옮기면 고려공화국 쯤 되지 않을까. 그러고보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불온한 낱말이 떠오른다. 써놓고 보니 이게 훨씬 국가 정체성을 잘 밝혀놓은 이름같다(이 대목에선 국가보안법 눈치를 한번 보게 된다. 젠장할 자기검열).

아마도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에서 오지 않았을까 싶다.나는 2002년 월드컵 때 이 나라를 가득 메웠던 '대~한민국' 소리가 좀 끔찍했고 또 불편했다. 왠지 거기서 큰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느껴졌다고나 할까. 마찬가지로 일본사람을 가리켜 왜놈이라 일컬으며 작은 체구를 비아냥 거린 점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사람의 인품이 몸뚱아리 크기로 판명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라도 크고 작은 게 꼭 땅덩어리로 결정되는 것은 아닐게다. 그런데 학창시절을 돌이켜보면 OO고등학교라고 자기 학교를 소개했던 사람들 학교는 정작 명문과는 거리가 한참 먼 학교였다. 물론 여기서 명문이라고 하는 것도 시비거리가 많기는 하지만 말이다. 대한제국도 이 나라 국력이 바닥을 쳤을 때 나온 말인 것을 보면 허세를 떨고자 했던 게 분명해보인다.   

요며칠 MB가 G20 정상회의 한국 개최를 유치하면서 이제 세계 사람들이 한국을 '대국'(Big Country)으로 대접하기 시작했다고 한껏 들뜬 모양이다. 그리고는 국운 상승의 계기니 뭐니 하는데 여기서는 또 김지하가 떠오른다. 사실 김지하의 개벽이니 뭐니 하는 알듯말듯 한 이야기 속에서도, 황석영의 알타이 연합론 같은 말들에서도 그런 비슷한 불편함을 느껴왔다.  

소중화를 꿈꾸던 서생나리들의 유구한 전통을 이어받아 아류 제국주의를 꿈꾸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사실 외교력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국제무역 규모나 경제력, 그리고 인구나 군사력으로 봤을 때 이미 이 나라는 더 이상 작은 나라가 아닌 것도 맞다. 문제는 자신이 어떤 콤플렉스를 가진지도 모르고 성찰할 생각도 하지 못하면서 그저 큰 것이 장땡이고 큰 것만 좇으려는 욕망이다. 이 욕망은 이 나라가 싫다는 말 한마디에 젊은이 하나를 쫓아내고 한국만큼 이주노동자에게 잘 해주는 나라는 없다며 인종차별을 정당화하는 폭력과도 긴밀하게 맞닿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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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인사청문회 같은 것을 즐겨보는 편은 아니지만 우연히 정운찬 국무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를 보게 되었다. 거기서 ‘품격’이란 단어가 나왔는데 정 후보자 자신이 몇 년 전부터 국가의 품격을 높이자고 외쳐왔다는 것이다. 그 말마따나 청문회에서의 답변 태도나 말씨만 놓고 봤을 때 후보자는 나무랄 데 없이 고상하고 겸손해보였다. 하지만 정작 그의 행적은 품위나 품격과는 거리가 멀지 않았나.

도대체 품위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곳이 있다. 용산참사가 벌어졌던 현장, 그리고 참사 유족들이 등장하는 곳이다. 아직도 유족들은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채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투쟁이라 하기에도 뭐한 말 그대로 싸움판이 수시로 벌어진다. 틈만 나면 용역들이 농성장과 참사 현장 주변에 들이닥쳐 물품을 빼앗고 폭력을 일삼는데 그럴 때면 상복이 찢겨지고 영정이 내동댕이쳐진다. 신부나 목사도 멱살을 잡히기 일쑤니 보통 사람들이야 말 할 나위 없다. 개인들끼리 해결할 일이지 정부가 개입할 사안은 아니라면서도 1인 시위가 됐든 삼보일배가 됐든 경찰은 막무가내로 막아서고 사람을 짐짝처럼 들어 차에 옮겨 싣는다. 그러고도 아무런 사과도 해명도 없다. 그 가운데 전경들 뒤에 숨어 희죽거리는 경찰간부, 입에 담을 수 없는 성적 농담을 지껄이고 도망가는 형사들도 만나게 된다. 분에 못 이겨 물을 뿌리고 잡동사니를 집어던지다가 결국 사지가 들리면 허망한 욕설만 난무하는 용산. 그런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이 반복되어 이제 8개월을 넘겼다.

솔직히 말해 MB정부 때문에 용산참사가 일어났고 모든 책임이 이 정부에게 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참여정부, 국민의 정부 시절에도 경찰의 강경진압, 과잉대응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몇몇은 목숨을 잃었다. 서울 전농동, 수원 권선동, 오산 수청동에도 용산처럼 망루가 세워졌고 용산과 비슷한 진압이 이뤄졌다. 어쩌면 누가 대통령이 되고 어떤 집단이 집권을 하던 간에 성장과 개발에 대한 성찰이 없는 한 참사는 예고된 일이었을지 모른다.

지난 1월 20일. 신임 경찰청장 임명을 앞두고 경찰특공대의 전격적인 진압으로 여섯 목숨이 희생된 뒤 집권여당은 철거민들을 테러리스트로 매도했고, 보수언론들은 서둘러 불순한 배후세력을 지목하기 바빴다. 청와대가 연쇄살인범 사건으로 용산을 덮자는 이메일을 보냈다는 사실이 밝혀져도, 검찰이 법원명령에도 수사기록 3천 쪽을 밝히지 않아도 아무 일 없는 세상이다. 오히려 강남 집값이 치솟고, 전세대란이 일어나고, 위장전입자들은 면죄부를 받고 있다. 여전히 재개발로 막대한 이득을 얻는 기업과 조합, 부동산 재테크를 통해 부귀영화를 꿈꾸는 사람들은 기세등등하다. 용산참사는 이렇듯 이 사회가 져야 할 무거운 짐이고 오랜 숙제다. 그래서 청문회에서 정 후보자가 총리에 임명되면 우선 용산참사 유족들과 만나 위로하고 실상을 파악하겠다고 했다지만 그런다고 이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리라 기대할 수 없다.

지난여름 유족들이 의혹투성이의 시신 사진을 공개하기로 했다가 종교계의 만류로 유보한 적이 있었다. 유족만이 아니라 일면식 없는 사람들이 모여 참사 현장에 꽃과 채소를 가꾸고 종교인들은 미사와 예배를 이어간다. 끝 모를 무시와 모욕에 견뎌가며 잔인하고 야비하기 이를 데 없는 공권력과 매순간 맞서면서도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기 위해 이렇듯 몸부림치고 있는 이곳 용산에서 나는 이 사회의 진정한 품격이 싹트고 있다고 믿는다. 국가의 품격을 논하기 전에 그 존재이유를 부정당하지 않으려면 더 늦기 전에 정부가 용산으로 가서 용산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 <내일신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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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글을 찾다가  우연히 오래전부터 보고 싶던 글을 찾았다.    
이 책을 읽고 아래 논문을 읽는 것이 나을지, 논문을 일고 책을 읽는 게 나을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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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주체가 말할 수 있는가? : 다원주의의 문제들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 / 태혜숙(효성 카톨릭대 영문과 교수) 옮김


이 논문의 원래 제목은 <권력, 욕망, 이해관계>였다. 이 주제들에 관한 명상은 실로 어떤 식으로든 힘을 행사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파악하는 내 욕망의 기초적인 전제들을 끝까지 밀고 가 보지 않으려는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생겼을지도 모른다. 가장 단호하게 투신된 담론이나 가장 아이러닉한 담론 모두에 적응되는 이 통속적인 삼박자 규정은 알튀세르가 가장 적절하게 부른 <부정의 철학> (philosophy of denegation)을 따르고 있다. 이렇게 어쭙잖은 방식으로 내 입장을 환기하는 까닭은 탐색자의 자리를 문제삼은 태도가 주권적인 주체를 비판하는 최근의 많은 글들에서 무의미한 경건함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내 입장의 불안정함을 전면화하려고 할지라도 그런 제스처가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나는 익히 알고 있다.  
이 논문은 순환적인 글을 따를 수밖에 없어 주체를 문제화하는 최근 서구의 노력들을 비판하는 데서부터 제3세계 주체가 서구 담론 안에서 재현되는 방식을 문제삼는 데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면서 나는 실은 마르크스와 데리다 양자가 주체의 좀 더 근본적인 탈중심화를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할 기회를 가질 것이다. 그리고 아마 놀랍겠지만, 서구의 지성적 산물들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서구의 국제적인 경제적 이해관계와 공모하고 있다는 논의에 의지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서구의 담론들과 여성 하위주체에 대해(를 위해) 말할 수 있는 가능성 사이의 관계들에 관한 대안적인 분석을 제공할 것이다. 나는 인도의 사례로부터 내 구체적 예들을 끌어와서, 영국이 폐지한 과부 희생 관습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갖는 아주 역설적인 지위를 상세하게 논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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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스피박,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작성자 mukungd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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