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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서구에서 가장 급진적인 비평의 일부는 서구의 주체, 혹은 보편주체로서의 서구를 보전하려는 관심사가 결부된 욕망에서 나온 것이다. 복수화된 <주체-효과>(subject-effects) 이론은 주체의 주권성을 손상시킨다는 환상을 주는 동시에 이런 지식의 주체를 가리는 덮개를 종종 제공한다. 주체로서의 유럽 역사는 법, 정치경제, 서구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내러티브화되었지만 이 은폐된 보편주체는 자신이 <지정학적 결정항들>(geo-political determination)을 갖고 있지 않은 척한다. 이리하여 주권적 주체에 대해 많이 공론화된 비판 자체가 실제로는 하나의 주체를 열어주고 있다. 나는 주체를 비판하는 두 위대한 실천가들이 쓴 텍스트 <지식인과 권력 : 미셸 푸코와 쥘 들뢰즈 사이의 대화>를 고려해 봄으로써 이런 결론의 타당성을 주장하려고 한다.
나는 두 행동주의적 역사철학자들 사이의 이런 우호적인 교환을 선택했다. 이 글이 권위적인 이론 생산과 경계심 없는 대화적 실천 사이의 대립을 해체하면서 이데올로기의 궤적을 엿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 대화에 참여한 푸코와 들뢰즈는 프랑스 탈구조주의가 이론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기여한 바, 권력/욕망/이해관계의 네트워크는 워낙 이질적이어서 그것을 하나의 일관된 내러티브로 환원해서는 안 되며, 지식인은 한 사회에서의 타자의 담론을 드러내고 알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데올로기의 문제와 지성사/경제사에 연루되어 있는 자신들을 체계적으로 무시한다.
푸코와 들뢰즈가 나눈 대화의 주요 전제들 중 하나가 주권적 전체를 비판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대화는 혁명 속의 두 단선적이고 이름 없는 주체들인 <마오주의자>(FD, 205)와<노동자의 투쟁>(FD, 217)으로 틀지어진다. 하지만 지식인들은 각자 이름이 있고 서로 구별되고 있다. 게다가 중국 마오주의는 아무데서도 작동되고 있지 않다. 여기서 마오주의는 그저 이야기 중의 어떤 세부사항과 같은 분위기를 연출할 뿐이다. 프랑스 지식인들의 <마오주의>와 그것에 뒤이은 <신철학>(New Philosophy)이라는 기이한 현상을 위해서 <마오주의>라는 고유명사를 순진하게 전유할 뜻이 아니라면 그나마 아무런 해가 없는 수사학적인 진부한 말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 현상은 <아시아>를 징후적으로 투명하게 만들고 있다.
노동자의 투쟁에 관한 들뢰즈의 언급도 이와 똑같이 문제적이다. 그것이 정확히 추종이다. 『이 흩어진 대중과 직면해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지 않고서는 권력이 발휘되는 지점에서라도 (권력과) 접촉할 수 없다. 모든 부분적인 혁명적 공격이나 방어는 이런 식으로 노동자의 투쟁과 연결된다』(FD, 217). 이런 명백한 진부함이야말로 오히려 부인을 나타낸다. 이런 진술은 국제적 노동 분업을 아예 무시하고 있는데 탈구조주의 정치 이론이 종종 보여 주는 제스처이기도 하다. 이렇게 노동자들의 투쟁을 환기하는 태도는 바로 그 순진함 때문에 해로울 것이다. 노동자의 투쟁은 지구적 자본주의(global capitalism)를 다룰 수 없다. 즉 노동자주체가 생산되면서도 중심의 국민국가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들어가지 못하는 현상, 주변부의 노동계급이 잉여가치의 실현으로부터나 소비자로서 받은 <휴머니스틱한> 훈련으로부터 더욱 축출되는 현상, 주변부 농업의 이질적인 구조적 지위뿐만 아니라 초자본주의적(paracapitalistic) 노동이 대규모로 존재하는 현상을 다루지 못한다. 이렇게 국제적 노동분업을 무시하고 <아시아>(그리고 때로 <아프리카>)를 투명하게(드러나게 제3세계 주체가 나이라면) 만들며 사회화된 자본(socialized capital)의 법적 주체를 재확립시키는 태도야말로 구조주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많은 탈구조주의 이론에 공통된 문제들이다. 이질성과 타자의 가장 훌륭한 예언자들인 이 지식인들이 이런 식의 차단을 승인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들뢰즈가 노동자 투쟁과 연결되는 고리는, 권력과 연관된 어느 지점에서건 권력을 폭발시키려는 욕망에 놓여 있다. 이 지점은 어떤 형태의 권력이건 그것을 파괴하려는 욕망이면 그 자체가 어떤 내용을 갖건 가치 있게 여기는 태도에 근거를 두고 있다. 발터 벤야민은 이와 비교할 수 있는 보들레르의 정치에 대해 마르크스로부터의 인용을 통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직업적인 음모가를 묘사한다. 『……그들은 기존 정부를 전복한다는 즉각적인 목적 외에 어떤 다른 목적도 갖고 있지 않으며 노동자들의 계급적 이해관계에 관해 노동자들을 좀더 이론적으로 계몽시키는 일도 몹시 경멸한다. 따라서 검은 옷, 즉 운동의 계몽 측면을 재현하고(vertreten) 당의 공식적인 대변자들(reprasentanten)에 대해 그런 것처럼 결코 완전히 독립될 수 없는 다소간 교육받은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분노는 프롤레타리아적인 게 아니라 평민적인 것이다』 보들레르의 정치적 통찰은 이런 직업적인 음모가들에 대한 마르크스의 통찰을 근본적으로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다……. 보들레르는 『내가 모든 정치에 대해 이해하는 한 가지는 반항이다』라고 한 플로베르의 말을 자기 말처럼 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노동자의 투쟁과의 연결고리는 그저 욕망에 놓여 있을 뿐이다. 다른 곳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정신분석학이 제공하는 욕망에 대한 정의를 수정하면서 욕망에 대한 대안적인 정의를 시도한 바 있다. 『욕망은 아무것도 결핍하지 않는다. 욕망은 그 대상을 결핍하지 않는다. 오히려 욕망에서 결핍되어 있는 것은 주체, 즉 고정된 주체이다. 억압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고정된 주체란 없다. 욕망과 그 대상은 통일되어 있다. 욕망은 기계의 기계처럼 기게이다. 욕망이 기계이므로 욕망의 대상 또한 연결된 하나의 기계이다. 따라서 욕망의 생산물은 생산 과정에서 들어올려져 생산물이 되는 과정에서 무엇인가가 떨어져 나오고 부유하는 노마드적 주체에게 나머지를 준다.』
욕망에 대한 이런 식의 정의는 욕망의 특정한 예들이나 욕망하는 기계의 생산물에 끌리는 욕망하는 주체들의 특수성(혹은 나머지 주체효과)을 바꾸지 못한다. 게다가 부적절하거나 그저 역전된 방식으로 욕망과 주체가 연결될 때 대리적으로 등장하는 주체효과는 일반화된 이론가의 이데올로기적 주체와 몹시 유사하다. 이것은 노동도 경영도 아닌 사회화된 자본의 법적 주체로서 <강력한> 여권을 가지고 <경화>(달러)를 이용하여 제때에 그 과정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타자로서 욕망하는 주체(the desiring subject as Other)는 확실히 아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렇게 욕망․권력․주체성 사이의 관계들을 고려하지 못함으로써 이해관계 이론 역시 전개할 수 없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이데올로기(이익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이론인)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은 놀랍지만 일관성 있다. 푸코는 <계보학적> 탐색에 몰두하는 태도로 말미암아 지성사의 일정한 분수령들을 마르크스 및 프로이트와 같은 <위대한 이름들>에서 구하지 못한다. 그의 이런 태도는 <단순한> 이데올로기 비판에 대한 불행한 저항을 그의 이론 작업에 낳고 말았다. 사회적 관계들의 이데올로기적 재생산에 대한 서구의 탐색들이야말로 바로 그 주류에 속한다. 이러한 전통 안에서 알튀세르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기술의 재생산뿐만 아니라 노동자들 편에서 지배 이데올로기에 복종하는 태도의 재생산을, 또 착취와 억압을 담당하는 행위자들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정확하게 조장할 수 있는 능력의 재생산이 요구된다. 그리하여 그들을 <말로써> (par la parole) 지배계급이 지배할 조건을 제공한다.』
푸코가 권력에 배여 있는 이질성을 고려할 때 위에서 알튀세르가 도식화하려고 시도한 거대한 제도적 이질성을 무시하지 않는다. 이와 유사하게 들뢰즈와 가타리는 연대(alliance)와 기호체계들, 국가와 전쟁기계들(《천의 고원 Mille Plateaux》에서)에 대해 말하면서 거대한 제도적 이질성의 영역을 열어 놓는다. 하지만 푸코는 발전된 이데올로기 이론이라면 『지식 형성과 축적의 효과적인 도구에서나』(PK, 102) 제도성에서나 그 자체의 물질적 생산을 인식하리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철학자들은 이데올로기 개념을 텍스트적인 것이라기보다 도식적인(체계적인) 것으로만 이름짓는 모든 논의를 거부해야만 한다고 보기 때문에 이와 똑같이 이해관계와 욕망을 기계적으로 나누는 도식적인 대립을 생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데올로기의 자리를 연속적인 <무의식적> 혹은 초주관적인(parasubjective) <문화>로써 채우는 부르주아 사회학자들의 연계한다. 이해관계와 욕망 사이의 기계적인 관계는 『우리는 자신의 이해관계에 위반되게 욕망하지 않는다. 이해관계란 욕망이 가는 대로 따르고 거기서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FD, 215)와 같은 문장에서 명백해진다. 차별화되지 않은 욕망이 행위자가 되고 권력이 욕망의 효과를 창출하는 것인 양 여겨진다. 『권력이란…… 욕망 수준에서, 또한 지식 수준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생산한다』(PK, 59)
이런 이질성으로 점철된 초주관적 매트릭스가 이름 없는 주체에게로 몰려온다. 욕망이라는 새로운 헤게모니에 영향을 받은 이 지식노동자들에게는 적어도 그렇다. 무엇이 <최종 심급>을 차지할 것인가 하는 경주는 이제 권력과 경제 사이에서 벌어진다. 정통 모델에 따라 암묵적으로 정의된 욕망은 <기만당하는> 상태와 획일적으로 대립된다. 그런데 알튀세르는 <허위의식>(기만당함)으로서 이데올로기 개념에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라이히(Reich)조차도 기만당하지 않는 욕망과 기만의 이분법보다는 집단적 의지개념을 함축했다. 『우리는 라이히의 외침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아니, 대중은 기만당하지 않았다. 그들은 특정 순간에 실제로 파시스트 체재를 욕망했다』(FD, 215)
이 프랑스 철학자들은 구성적 모순(constitutive contradiction)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인정하듯 좌파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지점이다. 그들은 분리되지 않은 주체를 인정하듯 좌파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지점이다. 그들은 분리되지 않은 주체를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권력 담론에 다시 끌어들이게 된다. 푸코는 종종 <개인>과 <주체>를 혼동한다. 그리고 푸코 자신의 메타포에 그것이 미친 영향은 아마 그의 추종자들에게서 더욱 강화되어 나타날 것이다. <권력>이라는 말이 갖는 힘으로 인해 푸코는 <차츰 자신의 환경을 비추어 주는 지점을 가리키는 메타포>로서 <권력>을 사용하는 태도를 인정한다. 덜 조심스런 사람들에게서는 이런 오류가 예외가 아니라 규칙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그 빛나는 지점은 효과적으로 태양중심적인 담론을 발산하면서 행위자의 빈 공간을 이론의 역사적 태양, 즉 유럽의 주체로 채워 버린다.
푸코는 생산의 사회적 관계를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부인함으로써 뒤따르는 또 하나의 명제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들뢰즈가 감탄하며 지적하듯, 『죄수들 자신이 말할 수 있게 되는 조건들을 확립하는 대상적 존재』로서 별 문제의식 없이,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주체의 가치를 부여하는 태도이다. 푸코는 『대중은 아주 잘, 분명하게 알고 있다』―기만당하지 않는다는 주체가 한 번 더 나오는 셈인데―고, 그들은 [지식인]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고 아주 잘 말한다』(FD, 206,207)고 덧붙인다.
이런 선언 속에서 주권적인 주체 비판은 어떻게 되는가? 푸코식의 재현주의적 리얼리즘의 한계는 들뢰즈에게서 『현실이란 공장에서, 학교에서, 병원에서, 감옥에서, 경찰서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FD,212)이라고 말하는 데까지 이른다. 헤게모니에 대항하는 이데올로기 생산이라는 어려운 과제의 필요성을 이런 식으로 앞세우는 것은 그리 환영할 일이 못 된다. 이런 태도는 실증주의적 경험주의―진전된 자본주의적 신식민주의를 정당하게 만드는 기초―가 자신의 영역을 <구체적 경험>, <실제로 일어나는 일>로 정의하는 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죄수들․군인들․학생들의 정치적 호소력을 보증하는 구체적 경험은 그 인식소를 진단하는 사람, 즉 지식인의 구체적 경험을 통해 펼쳐진다. 들뢰즈나 푸코는 사회화된 자본 내부에 있는 지식인이 구체적인 경험을 휘두르면서도 국제적 노동분업의 공고화를 돕고 있다는 것을 결코 인식하지 못하는 것같다.
지식인의 역사적 역할에 아무런 비판 의식도 없이, 억압받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경험을 가치 있다고 여기는 입장 내부에 있는 모순이 아직 인식되지 못한 채, 말장난만 유지되고 있다. 『이론이란 도구 상자와 같다. 그 기표(signifer)와 관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FD, 208)는 들뢰즈의 주목할 만한 진술을 들어보라. 이론세계의 형식적인 문구와, 이론과 대립되는 <실천적인> 것으로 정의된 세계에는 어디라도 이론이 접근할 수 있다는 태도는 환원불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런 선언은 지식 노동이 바로 육체 노동과 같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지식인을 도와 줄 뿐이다. 말장난이 일어나는 것은 기표들이 남아서 자기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이다. <재현>이라는 기표가 바로 그 적절한 사례이다. 들뢰즈는 기표와 이론의 연결을 분리시키는 이와 똑같은 무심한 톤으로 『더 이상 재현이란 없다. 행동 외에 아무것도 없다』, 『이론 행위와 실천 행위는 릴레이처럼 서로 관련되고 네트워크를 형성한다』FD, 206-7)고 선언한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점이 지적된다. 이론의 생산 역시 실천이라는 것이다. 추상적인 <순수>이론과 구체적으로 <적용된> 실천 사이의 대립이 너무나 손쉽게 재빨리 확립되고 있다.
이것이 들뢰즈의 논의라면 그의 진술에는 문제성이 많다. 재현의 두 가지 의미가 한꺼번에 작동되고 있다. 즉 정치에서 누군가를 <위해서 말한다>는 의미와, 예술과 철학에서 말하는 재현의 의미가 동시에 작동되고 있다. 이론이 또한 <행동>이므로 이론가는 억압받는 그룹을 대변(대신해서 말)하지 않는다. 실로, 주체는 대변적인 의식(적절하게 현실을 재현하는)으로서 보여지지 않는다. 한편으로 국가형성과 법 안에서, 다른 한편으로 주체진술에서 재현의 두 가지 의미들은 서로 관련되면서도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이 불연속적이다. 증거로 제시된 상동관계로서 이런 불연속성을 은폐하는 것은 다시금 주체의 역설적인 특권화를 반영한다.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은……언제나 다층적』이기 때문에, 어느 『이론화하는 지식인이나……당이나……노동조합도』『행동하고 싸우는 사람들을 대표할 수는 없다』(FD, 206)는 것이다. 행동하고 마하는 사람들과 대립되는, 행동하는 말없이 싸우는 사람들이 있단 말인가? 이런 엄청난 문제들이 의식과 양심(프랑스어로는 conscience), 대표와 재현과 같은 <똑같은> 말들의 차이들 속에 묻혀 있다. <의식의 변혁>이라는 적극적인 이론적 실천에서처럼 이제 국가기구와 정치경제 시스템 안에서 이데올로기적인 주체 형성과정에 대한 비판은 사라질 수 있다. 자기를 알고 정치적으로 친숙한 하위주체들에 관한 좌파 지식인들의 리스트가 갖는 진부함이 이제 드러나게 된다. 지식인들은 하위주체들을 대표하면서 자신들을 투명한 존재로 나타낸다.
이런 비판적 과제를 포기하지 않으려면 국가와 정치경제에서의 대표와 주체 이론에서의 재현 사이의 구별을 흐리게 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vertreten(전자의 의미에서의 대표)와 darstellen(후자의 의미에서의 재현) 사이의 유희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Der Achtzehnte Brumaire des Louis Bonaparte》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이 글에서 마르크스는 계급본능과 계급입장에 대한 알튀세르의 구분보다 더욱 복잡한 방식으로 묘사적이면서도 변혁적인 개념으로서 <계급>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하나의 계급에 대한 묘사적 정의는 다른 계급들과의 차이에서 내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수백만의 가족들이 그들의 삶의 양식, 그들의 관심사, 그들의 형성을 다른 계급의 그것들과 구분시키면서 해로운 대면 상태에 두게 하는 경제적 생존 조건 하에서 살고 있을 때라야 이들은 하나의 계급을 형성한다.』 여기서 계급본능이라는 것은 작동하지 않는다. 사실 <본능>의 장이라고 할 수 있는 가족 삶의 집단성이 서로 다른 계급들의 고립에 의해 작동되면서도 그 고립된 계급 구분과도 불연속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계급의 형성은 국제적인 주변부보다 70년대 프랑스에 훨씬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한 계급의 형성은 인위적이면서 경제적이며, 경제적 에이전시나 이해관계는 체계적이고 이질적이므로 탈개성적이다. 이런 에이전시나 이해관계는, 역사이자 정치경제인 주체가 없는 과정에서 주체의 빈 공간을 가리키므로 개인주체를 비판하는 헤겔의 비판과도 연관된다. 여기서 자본가는 <자본의 무한한 운동의 의식적 담지자>로 정의된다. 나의 요점은 마르크스는 욕망과 이익이 일치하는, 분리되지 않은 주체를 창출하려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계급 의식은 그 목표를 향해서 일관되게 작동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경제적 영역(자본가)에서나 정치 영역(세계역사적 행위자)에서나 분리되고 전위된 주체―그 부분들이 서로 연속적이지도, 일관되지도 않는―모델을 구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을 파우스트적 괴물로 묘사하는 유명한 구절은 이 점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 나오는 다음 구절 역시 흩어지고 전위된 계급주체(a dispersed and dislocated class subject)의 구조적 원리를 따르고 있다. 즉 소자작농계급 (부재하는 집단적) 의식은 그 <담지자>를, 다른 계급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표자>〔나폴레옹을 가리킴/역주〕에게서 발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쓰고 있는 <대표자>란 <재현>(darstellen)의 의미가 아니다. 바로 이 점이 푸코와 들뢰즈가 슬쩍 넘어가 버리는 대조, 즉 대표와 묘사 사이의 대조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물론 대표와 묘사 사이에 관계도 있다. 다만 시인과 궤변론자, 배우와 웅변가가 새로운 존재로 간주된 이래 적어도 유럽 전통에서 그 관계는 정치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나 악화 일로를 걸어왔다. 권력의 장면을 포스트마르크스주의적으로 묘사한다는 명목 하에 우리는 비유로서의 재현이나 설득으로서의 수사 사이에 훨씬 더 오래 전부터 진행된 논쟁과 만나게 된다. 여기서 darstellen은 첫 번째 진영인 재현에 속하고 vertreten은 대리와 연관되어 더 강한 의미를 갖는 두 번째 진영에 속한다. 다시금 이 두 진영은 서로 관련되어 함께 달리게 되는데 두 진영을 모두 넘어서는 곳에서 억압받는 주체들이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며 안다고 말하려고 할 때 특히 그렇다. 이것은 본질주의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정치로 이끈다.
마르크스는 다음 구절에서 의식과 Vertretung (대표로서의 대리에 훨씬 가까운)이 전위되어 일관성 없게 되는 사회적 <주체>를 논의하면서 영어권의 <대표하다> (represent)를 사용하고 있다. 소자작농들은 『스스로를 대표할 수 없다. 그들은 대표되어야만 한다. 그들의 대표자는 동시에 그들의 주인으로서 그들에게 권위를 행사하고, 그들은 다른 계급들로부터 보호해서 위에서부터 비와 햇빛을 보내주는 무제한적인 정부권력으로 나타나야만 한다. 그러므로 소자작농의 정치적 영향력(통합된 계급주체란 없으므로 계급 이익 대신)은 그 최후의 표현(대리물들―Vertretungen―의 연쇄가 함축하는 의미는 여기서 강력한데)을, 자체에 사회를 종속시키는 집행력(독일어에서는 덜 개인적인 용어인)에서 발견한다.』
마르크스는 <영향>의 원천(이 경우에는 소자작농)과 대표자(루이 나폴레옹)와 사회정치적 현상(집행의 통제력) 사이에 필연적으로 있게 되는 간극들을 인정하는 사회적 간접화의 모델을 제시한다. 이 모델은 개인적 행위자로서 주체를 비판할 뿐만 아니라 집단적 에이전시의 주체성도 비판한다. 필연적으로 전위된 역사기계(machine of history)가 움직인다. 이 소유자들이 <동일한 이해관계들을 추구한다고 해서 공동체 의식이나 국민적 연결, 정치조직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표(Vertretung)라는 사건(설득으로서의 수사 진영에서)이 Darstellung(비유로서의 수사)처럼 행세하며 (묘사적) 계급의 형성과 (변혁적) 계급의 비형성 사이의 간극에다 제자리를 잡는다. 『수백만의 가족들이 그들의 삶의 양식을 (다른 계급과) 분리시켜 주는 경제적 삶의 조건 하에 살고 있을 때라야……그들은 하나의 계급을 형성한다. 그들이 추구하는 동일한 이익들이……공동체 의식을 생산하는 데 실패하는 한……그들은 하나의 계급을 형성하지 못한다.』 마르크스는 대표와 묘사란 실천의 장소로서 차이 속의 동일성을 가지며 공모관계에 있다는 것을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드러내려고 한 것이다. 이 공모성은 대표와 묘사를 혼동하지 않아야만 인식할 수 있다.
이런 해석은 마르크스를 너무 많이 텍스트화함으로써 실증주의의 유산 속에 아주 깊이 빠져 있는 상식의 희생자인 보통 <사람>에게 그를 접근할 수 없는 인물로 만들어 버린다고 논의하는 데에는 저의가 있다고 하겠다. 마르크스의 가장 강력한 적들은 부정의 작동과 구체성을 탈물신화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마르크스의 태도를 집요하게 마르크스에게서 떼어 냄으로써 마르크스를 허공 속의 <역사적 전통>으로 만든다. 나는 평범하지 않은 <사람>, 즉 현대의 실천 철학자가 바로 이와 똑같은 실증주의를 가끔 드러낸다는 사실을 지적하려고 애써 왔다.
마르크스에게는 묘사적인 계급 <입장>으로부터 변혁적인 계급 의식으로 나아가는 것이 의식의 토대 수준에 개입하는 과제〔행위자와 그 이해관계 사이의 바람직한 동일성에 따라 의식의 이데올로기적 변혁을 꾀하는 것을 말한다/역주〕가 아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에 동의한다면 이 문제의 심각성은 분명해진다. 계급의식은 그 구조적 모델이 가족인 공동체의 감정으로서가 아니라, 국가적 연결과 정치조직에 속하는 공동체 감정과 더불어 존재한다. 여기서 가족은 자연과 동일시되고 있지 않지만 철학적으로 말해서 사용가치의 <자리확보자>(placeholder)로서 마르크스가 <자연적 교환>이라고 부른 것과 한 무리를 이룬다. <자연적 교환>이란 <사회화의 교류>와 대조된다. 여기서 <교류>(Verkehr)는 <거래>의 뜻으로 마르크스가 보통 쓰는 단어이다. 그리하여 이 <교류>가 잉여가치의 생산을 유도하는 교환 장소를 확보한다. 그리고 계급 에이전시로 이끄는 공동체 감정이 전개되는 것도 바로 이 교류의 영역에서이다. 완전한 계급적 에이전시(full class agency)란 (설령 그런 게 있다고 하더라도) 토대 수준에서 의식의 이데올로기적인 변혁이 아니라 행위자들과 그들의 이해관계 사이의 바람직한 동일성―그것의 부재로 인해 푸코와 들뢰즈는 고민스러워하는데―일 뿐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인위적인> 무엇, 즉 <그들의 삶의 방식을 분리시켜 주는 경제적 생존 조건들>의 전유(보충)이자 논쟁의 여지가 많은 대치이다. 마르크스의 규정들은 개인적/집단적 주체의 에이전시를 비판하는 의식의 발생을 조심스럽게 존중하고 있다. 마르크스에게는 계급의식의 과제들과 의식의 변혁과제들은 불연속적인 이슈들이다. 역으로 <리비도 경제>와 <욕망>을 결정적인 관심사로 환기하는 현대의 태도는, <자신을 위해 말한다는> (사회화된 자본하의) 억압받는 자들의 실제 정치와 연합함으로써 주권적 주체 범위를 가장 의문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론 안에서 주권적 주체 범주를 복원시키고 있는 셈이다.
가족은 특정한 계급 형성에 속한다. 그런데도 마르크스가 가족을 배제한 것은 의심할 바 없이 마르크스주의가 태동한, 바로 그 남성주의적 틀의 일부를 이룬다. 오늘날 지구의 정치경제에서나 역사적으로나 가부장적 사회관계들에서 가족이 맡고 있는 역할은 너무나 이질적이고 논쟁적이서 그저 이런 문제틀에다 가족을 다시 집어넣는다고 해서 틀 자체를 깨뜨리는 것은 아니다. 억압받는 사람들―똑같이 단선적인 <같은 제도>에 맞서 자신을 위해 말하도록 허용되는 분열되지 않은 주체성을 가진―의 리스트에 <여자들>이라는 단선적인 집단성을 실증주의적으로 집어넣는다고 해서 해결책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마르크스는 전략적이고 인위적이고 이차적인 수준의 <의식>을 발전시킨다는 맥락에서, 대표라는 좀더 광범위한 개념 안에서 아버지의 이름개념을 항상 사용한다. 자작농부들은 『그래서 의회를 통해서건 협의회를 통해서건 그들의 원래 이름으로 그들의 계급 이익을 타당하게 만들 수 없다.』 가족이 아닌, 인위적이고 집단적인 고유명사가 부재하므로 <역사적 전통>이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인 아버지의 이름 자체로 그것을 채운다. 『기적이 일어나서 나폴레옹이라고 이름 붙여진 사람이 자작농민들의 모든 영광을 회복시켜 주리라는 믿음을 역사적 전통이 생산해 냈다. 그리고 한 개인이 나타났다.』 이 구절에서 번역할 수 없는<es fand sich>(자신이 한 개인임을 발견했다?)는 에이전시나 행위자와 이익과의 연관성에 관련된 모든 문제들을 없애 버린다. 이 사람은 『자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자신을 드러내 보였다』(대조적으로 이 허세야말로 그의 유일하게 고유한 에이전시이다). 그는 『부계에 대한 탐색을 금한다고 명령하는 나폴레옹 법전을 담지하였기(tragt―자본가가 자본과 맺는 관계를 가리키는 단어) 때문이다.』여기서 마르크스는 가부장적 은유체계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는 이 구절의 텍스트적 미묘함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자연적인 아버지에 대한 탐색을 역설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아버지의 법(나폴레옹 법전)이다. 그리하여 자연적인 아버지에 대해 형성되어 있으면서도 아직 형성되지 못한 계급의 신념이 부정되는 것도 바로 아버지의 역사적인 법을 엄격하게 준수함으로써이다.
이 구절은 정치적 맥락에서 대표(Vertretung)의 내적 역할을 똑똑히 보여 주기 때문에 나는 오랫동안 그것에 대해 생각해 왔다. 경제적 맥락에서 대표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재현(Darstellung)이다. 이것은 분열된 주체와 간접적으로 관련되는 무대화․의미화로서 재현에 관한 철학적 개념이다. 가장 명확한 다음 구절은 유명하다. 『상품들의 교환관계에서 그것들의 교환가치는 그 사용가치와 완전히 독립적인 것처럼 우리에게 보였다. 그러나 우리가 노동의 산물에서부터 그 사용가치를 추출해 낸다면 그것이 결정되는 대로 가치를 획득한다. 교환관계에서 스스로 나타나는 공통 요소, 즉 상품의 교환가치가 바로 상품의 가치가 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하에서 필요 노동에서건 잉여 노동에서건 생산된 가치란, 객관화된 노동(인간적 행위와 엄격하게 구분되는)을 재현하는/기호로서 계산된다. 역으로 추출(생산), 전유, 노동력의 재현으로서 (잉여)가치를 실현한다는 착취 이론이 부재할 때 자본주의적 착취는 다양한 지배 형식들 중 하나 (권력 메커니즘 그 자체)로 보일 게 틀림없다. 틀뢰즈는 『마르크스주의의 추동력은 (권력이 착취와 국가형성 구조보다 더욱 널리 산재하는 것이라는) 문제를 본질적으로 이해관계들의 견지에서 (권력은 자기 이해관계들에 의해 정의되는 지배계급에 의해 유지된다) 결정하는 데 있었다』(FD,214)고 시사한다.
우리는 들뢰즈가 이렇게 소극적으로 마르크스의 과제를 축약하는데 반대할 수 없다. 《앙티오이디푸스 Anti-Oedipus》의 몇 부분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화폐 형식에 관한 마르크스의 이론을 재치 있고 <시적>으로 파악한 내용을 바탕으로 그들의 사례를 세우는 것을 무시할 수 없듯이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비판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적 자본주의(경제에서의 착취)와 국민국가연합(지정학에서의 지배) 사이의 관계는 너무나 거대해서 권력의 미세한 결을 설명해 낼 수 없다. 권력의 미세한 결을 설명해 내는 쪽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이데올로기 이론들, 거대 구조를 응결시키는 이해관계들을 미세하게 또 종종 잘못 작동시키는 주체형성의 이론들로 나아가야 한다. 거기에서 재현의 두 가지 의미를 무시할 수 없다. 그 이론들에서는 글쓰기 장면, 묘사(Darstellung)로써 재현 속에서 세상을 무대화하느라고 <영웅들>, 부계를 대표하는 자들, 권력의 행위자들을 선택하고 요구하는 과정을, 즉 대표(Vertretung)를 숨기는 경위를 주목해야 한다.
우리 시대에 급진적인 실천이란, 권력과 욕망개념을 전체화해서 개별주체를 다시 끌어들이기보다 이와 같은 대표/묘사의 이중적 세션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게 나의 견해이다. 또한 마르크스는 계급적 실천 영역을 이차적인 추상 수준에 둠으로써 행위자로서 개별주체에 대한 헤겔(과 칸트)의 비판을 열어놓고 있었다. 그렇다고 문화와 관습이 <자연>자체의 전복성을 조직하는 방식처럼 보이는 토대 수준에서 가족과 모국어를 은밀하게 정의하는 마르크스의 오랜 술수를 간과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비판적 실천을 행한다는 탈구조주의적 주장의 맥락에서 볼 때 마르크스의 이런 술수는 주관적인 본질주의의 은밀한 복원보다는 더욱 만회하기가 쉽다.
마르크스를 마음 좋은 구시대 인물로 축소시키는 태도야말로 새로운 해석이론을 출범시키는 관심사를 가장 종종 도와 준다. 푸코와 틀뢰즈의 대화에서 재현(representation)도, 기표(signifer)도 없다는 것이 이슈처럼 보인다 (기표가 이미 전송되었다고 가정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경험을 작동시키는 기호-구조〔sign-structure〕도 없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기호학의 근거를 어디에 둘 수 있을까?) 이론은 실천의 릴레이(이론적 실천의 문제들이 근거를 두게 되는)이며, 억압받는 자들은 자신을 잘 알고 자신을 위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적어도 두 가지 수준에서 구성되는, 즉 환원할 수 없는 방법론적 전제로서 욕망과 권력의 보편주체/자아동일적이지는 않지만 자아에 근접하는 억압받는 자들의 주체를 다시 끌어들이도록 한다. 게다가 이런 보편주체/주체들(Subject/subject)도 아닌 지식인들은 이 릴레이 경주에서 투명한 존재가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재현되지 않은 주체를 그저 보도하고, 권력과 욕망(에 의해 환원할 수 없니 전제된 이름 없는 보편주체)의 작동과정을 (분석하지 않고) 분석하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생산된 <투명성>은 <이해관계>의 자리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 투명성은 <나는 이제 절대로 심판, 판사, 보편적 증인과 같은 역할을 거부할 것>이라고 극렬하게 부정함으로써 유지된다. 비평가를 읽고 글쓰는 행위를 통해서, 지식인 주체에게 부여된 제도적인 특권이라는 이해관계를 갖는 개인주의적(individualistic) 거부를 통해 거부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인식하도록 만들 책임이 있다. 기호체계를 거부하는 것은 발전된 이데올로기 이론으로 나아가는 길을 막는다. <제도 자체가 담론적>이라는 자크 알랭 밀러(Jacques-Alain Miller)의 말에 푸코는 『당신이 그렇게 여기고 싶다면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내 문제가 언어학적인 게 아닌 한……이것은 담론적이고 저것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게 제도적 장치에 관한 나의 관념으로 보건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PK,198)에서 대답한다. 담론 분석의 대가가 언어와 담론을 혼동하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일까?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는 푸코의 권력개념이 <계급들의 역할, 경제의 역할, 소요와 반항의 역할을 지워 버리도록> 허용하는 자가당착적이고 신비화하는 범주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하는 얘기에 가장 적절한 지적이다. 나는 사이드의 분석에다 지식인의 투명성이 가리키는 권력과 욕망의 은밀한 주체개념을 덧붙이고자 한다. 신기하게도 폴 보베(Paul Bove)는 <푸코의 과제는 헤게모니적 지식인과 헤게모니에 맞서는 지식인들의 주도적인 역할에 본질적으로 도전하고> 있는 반면, 사이드는 지식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비판한다. 나는 보베가 말하는 이 <도전>이란 사이드가 강조하는 비평가의 제도적 책임감을 무시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기만적이라는 사실을 시사하여 왔다.
부인하면서도 기이하게도 투명성에 함께 얽혀든 이상과 같은 보편주체/주체는 국제적 노동분업에서 착취자의 편에 속한다. 현대 프랑스 지식인들에게는 유럽의 타자라는 이 이름 없는 주체가 거주할 권력과 욕망의 장을 상상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들이 읽는 비판적이거나 무비판적인 모든 글들이 유럽주체의 형성을 지지하거나 비판하면서 바로 저 타자의 생산 논쟁 안에 포섭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유럽의 타자가 주체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그 주체가 자기 삶의 여정을 집중시키고 점령(투자?)할 수 있도록 하는 텍스트의 구성요소들을 이데올로기적 생산이나 과학적 생산으로써, 또 법의 제도화로써 지워 버리는 데 대단한 주의를 쏟았다. 경제적 분석이 아무리 환원주의적으로 보일지라도 이 전체 중층결정된 기획이 이해관계와 동기(욕망)과 권력(지식의) 사정없는 전위를 요구하는 역동적인 경제적 상황 때문임을 프랑스 지식인들은 위험하게도 잊어버리고 만다. 이런 전위를 급진적인 발견인 양 환기하는 것은 그 전위 작업을 지속시켜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헤게모니적 관계들의 새로운 균형>을 확보하는 것을 도와 줄지도 모른다. 그들의 급진적인 발견이란 경제적인 것(the economic―<계급들>을 묘사적으로 구분해 주는 삶의 조건들)을 낡은 분석 장치쯤으로 진단하도록 만들고 있을 뿐인데 말이다. 나는 곧바로 이 논의로 되돌아갈 것이다. 자아의 그림자로서 타자를 지속적으로 형성하는데 공모할 가능성에 직면하여 지식인이 정치적 실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란 어떤 것일까? 경제적인 것을 일단 <삭제>하고, 경제적 요소가 사회적 텍스트를 재각인할 때 경제를 환원시킬 수 없는 영역으로 보는 길이 있을 것이다. 경제가 최종 결정항이라고, 초월적 기의라고 주장할 때도 아무튼 불완전하게나마 경제가 삭제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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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를 약화시키는 이런 에피스테메적 폭력의 극명한 예는 식민주체를 타자로 형성하기 위해,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조직되고 산재하는 이질적인 기획에서 나타난다. 이 과제는 불안정한 주체성의 존재인 저 타자의 흔적을 불균형적으로 지워 버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푸코가 에피스테메적 폭력을, 에피스테메의 완전한 정밀검사를 18세기 말 유럽에서 시작된 정상성(sanity)의 재정의(redefinition)에서 구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 특정한 재정의가 식민지뿐만 아니라 유럽 역사에 관한 내러티브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에피스테메적 정밀검사를 실시하려는 이 두 가지 과제가 거대한 두 손잡이 엔진 중에서 전위되고 인정받지 못한 부분들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 이런 질문은 제국주의에 관한 양피지적 내러티브의 하부텍스트가 바로 『종속화된 지식』, 『그들의 과제에 부적절하다고 폄하되어 왔거나 충분히 다듬어지지 못한 일련의 전체지식, 요구되는 인식이나 수준 이하라고 위계질서에서 깎아내려진 순진한 지식들』(PK, 82)로 인식되어야 하는가를 묻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이런 질문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도, 제국주의 역사에 관한 내러티브를 최상의 역사적 견해라고 특권화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현실에 관한 특정 설명이나 내러티브가 규범적인 것으로 확립되는 경위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점을 좀 더 정교하게 다루기 위해서 힌두법이 영국적 법전화를 겪게 되는 토대를 간략하게 고려하고자 한다.
우선, 몇 가지 부인 조항들이 있다. 미국의 인문학 분야에 현재 맴돌고 있는 제3세계주의는 종종 공공연하게 인종적(ethic)인 것이다. 나는 인도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초중등 교육을 받았으며, 2년간의 대학원 공부를 포함한 대학 교육을 받았다. 인도인이라는 나의 예는 나 자신의 정체성에서 상실된 뿌리에 향수를 갖고 정체성을 탐색하고자 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 우리가 자유롭게 <동기들>의 덤불로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향수의 실증주의적-관념주의적 형태를 다양하게 지적해 내는 것이 바로 나의 주요 과제라고 주장하려고 한다. 내가 인도 제재를 택한 것은, 선진 학문의 훈련 없이도 출생과 교육 배경이 역사적인 폭에 대한 감각, 브리콜레〔bricoleur:이것저것 끌어들여 조합을 이루는 사람/역주〕에게 유용한 도구들인 몇몇 적절한 언어들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최종 중개자로서 구체적 경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회의와 학문적 형성기제에 대한 비판의식으로써 무장했을 때는 특히 그랬다. 하지만 인도의 예가 자아로서의 유럽의 타자로 환기될 수 있거나, 모든 국가나 문화를 대표하는 것이 될 수는 없다.
여기서 힌두법의 법전화 과정에서 저질러진 에피스테메적 폭력을 도식적으로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요약이 에피스테메적 폭력개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면 과부희생에 대한 나의 최종적 논의가 중요한 의미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18세기 말경에 힌두법은 하나의 통일적인 체계로 묘사될 수 있는 한, 주체가 기억을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 구분되는 네 부분의 에피스테메를 <무대화>하는 네 가지 텍스트들, 즉 스루티(sruti, 들음)․스므리티(smriti, 기억)․사스트라(sastra, 배움)․브야바하라(vyavahara, 수행)의 견지에서 작동했다. 처음에 들은 내용과 나중에 기억한 내용이 반드시 연속적이거나 동일하지 않다. 들은 내용을 환기하는 것은 모두 원래의 <들음>이나 계시 사건을 기술적으로 암송하는(재개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배움과 수행이란 변증법적으로 연속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어떤 주어진 경우에서도 이 구조가 법의 실체를 묘사하는지, 논쟁을 확립시키는 네 가지 방식을 묘사하는지 어떤지, 법이론가들과 실천가들은 확신하지 못했다. <내적으로> 비일관적이고, 양 끝에서 개방된 법적 실천의 다형 구조를 이분법적 시각을 통해 합법화한 것은 에피스테메적 폭력의 예로서 내가 제공하는 법전화의 내러티브이다.
힌두법의 안정화와 법전화에 관한 내러티브는 인도 교육의 이야기보다는 덜 알려져 있다. 그래서 바로 거기서 출발하는 게 좋겠다. 맥콜리(Macaulay)의 악명 높은 《인도 교육에 관한 초고 Minute on Indian Education》(1835)에서 자주 인용되는 계획된 구절을 보라. 『우리가 통치하는 수백만의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서 해석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급을 형성하도록 우리는 현재 최선을 다해야 한다. 태생으로나 피부색으로는 인도인이면서도 취향이나 견해, 도덕이나 지성에서는 영국적인 사람들 말이다. 우리는 그런 계급 사람들에게 인도의 지역 방언들을 세련되게 만들고 서구 전문어로부터 빌려 온 과학 용어로써 그 방언들을 풍부하게 만드는 법을 맡겨야 한다.』식민주체들의 교육은 법으로 그들을 생산하는 것을 보충한다. 이렇게 영국 제도의 또 다른 판을 확립시키는 일은 산스크리트 연구에서의 학문적 형성과 소위 산스크리트 <고급 문화>라는 대안적인 토속 전통 사이를 불편하게 갈라 놓은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산스크리트 연구라는 학문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권위적인 학자들이 제시한 문화적 설명은 법적 과제의 에피스테메적 폭력과 버금 갔다.
여기서 나는 <벵골의 아시아협회>의 창립을 1784년에, 옥스퍼드 대학의 <인도연구소>의 창설을 1883년으로 보고, 식민지 행정가이자 산스크리트 제재의 조직가들인 아서 맥도넬(Arthur Macdannell)과 아서 베리데일 케이스(Arthur Berriedale Keith)와 같은 학자들의 분석적인 분류 작업을 주시하고자 한다. 자신만만하고 공리주의적인 맥락에서 교육의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인도 브라만의 일상 삶에서 산스크리트를 수행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증가하는 <봉건화>나, 일반 교육적 틀에서 산스크리트의 공격적 억압을 간파하기란 불가능하다. 브라만 계층이 영국적인 코드화(그리하여 그것을 합법화)를 꾀하려는 의도를 똑같이 갖는 사람들처럼 나타나도록 하는 역사관이 점차 확립되었다. 『힌두 사회를 흠 없이 보전하기 위해 (원래 브라만들의) 계승자들은 모든 것을 글쓰기로 환원시키고 그들을 더욱 더 엄격하게 만들어야 했다. 계속되는 모든 것을 글쓰기로 환원시키고 그들을 더욱더 엄격하게 만들어야 했다. 계속되는 정치적 격변과 외국의 침입 와중에서도 바로 이런 노력으로 말미암아 힌두 사회는 보전된 것이다.』이것이 학식 있는 인도 산스크리트 연구자이자 식민 생산 안에서 대표적인 명석한 토착 엘리트인 마하마호파드히야 하라프라사드 샤스트리(Mahamahopadhyaya Haraprasad Shastri)가 1925년에 내린 평결이다. 그는 1916년에 벵골의 총독 비서가 추천한 <벵골사> 중에서 여러 장을 쓰도록 청탁받은 사람이었다. 출처와 설명(출처의 인종-계급에 따른) 사이의 불균형을 알리는 신호탄으로는 1928년에 『힌두교는 그렇게 보였던 바로 그것이었다……. 악바르(Akbar)와 영국인들 양자에게 (힌두교에 맞서) 이긴 것은 더 높은 수준의 영국문명이었다』는 영국 지성인 에드워드 톰슨(Edward Thompson)의 지적과 비교해 보라. 그리고 1890년대에 영국인 군인-학자가 쓴 편지 중에서 『<신의 언어>인 산스크리트 연구는 지난 25년간의 인도 삶에서 내게 강렬한 기쁨을 주었지만 감사하게도 몇몇 사람들과는 달리 나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위대한 종교에 대한 애정어린 믿음을 포기하게끔 하지는 못했다』는 구절과도 비교해 보라.
바로 이런 출처들이 비전문가들인 프랑스 지식인들로 하여금 타자의 문명에 입문시킨 최상의 원전들이었다. 하지만 주체로서의 타자가 푸코나 들뢰즈에게 접근할 수 없는 존재라고 내가 말할 때, 비단 샤스트리와 같은 탈식민적 생산반경에서의 지식인이나 학자 들만을 언급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계급 스펙트럼을 가로질러 일반적인 비전문간, 학계와 상관없는 대중을 염두에 두고 있다. 바로 이 대중을 대상으로 이 출처들의 에피스테메가 말없이 그 프로그램적 기능을 작동시키고 있다. 착취의 지도를 고려하지 않는 이 출처들은 어떤 <억압>의 틀에다 이 잡종의 패거리를 놓으려고 할 것인가?
이제 그런 에피스테메적 폭력이 그려내는 회로의 주변부(우리는 침묵당한 말없는 중심에 대해서도 이와 똑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를, 배우지 못한 남녀 농부들, 부족 사람들, 도시 하부프롤레타리아트(subproletariat) 중에서도 가장 하위층 사람들을 고려하는 데로 넘어가 보자. 푸코와 들뢰즈(제1세계에서 그들은 인정하지는 않고 있지만 사회화된 자본의 획일화와 조직화 아래 놓여 있다) 억압받는 사람들이 연대 정치를 통해 유대의 길을 밟게 된다면(여기서 마르크스주의적 주제가 작동한다) 자신의 조건에 대해서 말할 수 있고 알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다름 질문과 부딪혀야 한다. 즉 국제 노동분업상 사회화된 자본의 다른 쪽에서, 초기의 경제 텍스트를 보충하는 제국주의적 법과 교육의 에피스테메적 폭력의 회로 안과 밖에서, 하위주체는 과연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 말이다.
<하위계급> 개념에 대한 안토니오 그람시(Antinio Gramsci)의 작업은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따로 논의된 계급입장/계급의식 사이의 괴리를 확장시킨다. 그람시는 아마도 레닌식 지식인의 전위적 입장을 비판하기 때문에 하위주체의 문화적/정치적 운동을 헤게모니화하는 지식인의 역할에 관심을 갖는다. 하위주체의 이 운동은 (진실의) 내러티브로서 역사의 생산을 결정지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람시는 <남부의 문제>(The Southern Question)에서 국제 노동분업에서 취해진 혹은 그것을 예시하는 독법의 알레고리 안에서 이탈리아에서의 역사적인 정치경제의 운동을 고려한다. 하지만 제국주의적 과제에 뒤따르는 법적․학문적 정의(definition)에 대한 에피스테메적 간섭에 의해 그의 문화적 거대 논리가 작동될 때, 하위주체의 전개 양상에 대한 그의 설명을 삐걱거린다. 내 논문의 말미에서 하위주체로서 여성 문제로 넘어갈 때, 여성 에이전시를 조정함으로써 집단성 자체의 가능성이 집요하게 제외된다는 점을 시사하고자 한다.
인도의 <하위주체 연구 그룹>이라고 불리는 지식인들 모임이 나의 제안의 첫 번째 부분―하위주체의 전개 양상은 제국주의적 과제로 인해 복잡하게 된다는―에 바로 부딪히고 있다. 그들은 하위주체가 말할 수 있는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푸코 자신의 역사학 안에서 그의 영향을 인정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셈이다. 그들의 과제는 인도의 식민역사 편찬을 식민 점령 기간에 일어난 농민반란의 불연속적 반란이라는 시각에서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실로 이것이 사이트다 논의한 <이야기하도록 허용되는> 문제이다. 라나지트 구하(Ranajit Guha)는 다음과 같이 논의한다.
인도 민족주의의 역사편찬은 오랫동안 엘리트주의―신식민주의적 엘리트주의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 엘리트주의―에 의해 지배받아 왔다……. 인도라는 국가의 형성과 그 과정을 확증하는 민족주의 의식의 발전은 배타적으로 혹은 압도적으로 엘리트적 업적이라는 편견을 공유하면서 말이다. 식민주의/신식민주의 역사 편찬에서 이 업적은 영국 식민지 통치자들․행정가들․정책․제도․문화에 귀속된다. 민족주의적/신민족주의적 저작에서는 인도 엘리트들․제도들․행위들과 관념들로 귀속되고 있다.
인도 엘리트들의 특정 형태들은 기껏해야, 타자의 목소리에 관심을 갖는 제1세계 지식인들의 정보원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식민화된 하위주체가 돌이킬 수 없이 이질적(heterogeneous)이라는 사실을 거듭 주장해야 한다.
우리는 토착 엘리트에 맞서 구하가 말하는 <민중의 정치학>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적 생산 회로의 내부(<식민주의>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강력하게 활동하면서 라즈〔Raj〕하에서 만연하는 조건에 스스로를 적응시키고 형식과 내용면에서 전적으로 새로운 긴장들을 개발시킨)와 외부(엘리트 정치학에서 유래하지도, 엘리트 정치학에 그 생존을 의존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자율적인 영역인) 모두에게 말이다. 그런데 나는 민중의 단호한 힘과 완전한 자율성을 주장하는 구하를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실제적인 역사편찬의 절박한 사정들이 하위주체 의식을 특권화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하는 자신의 접근이 본질론적이라고 비난받을 수 있다는 점을 대비하기 위해 차이 속의 동일성일 수밖에 없는 민중(저 본질의 자리)에 관한 정의를 구축한다. 리스트에 나오듯 민중과 거대구조적 지배그룹 사이에 있는 완충 그룹조차도 데리다가 <동굴>(antre)이라고 묘사한 바 있는 매개지점으로 정의된다.
1) 지배적인 외국 그룹
2) 전체 인도 수준에서 지배적인 토착그룹(1․2는 엘리트에 속한다).
3) 지역 수준에서 지배적인 토착 그룹.
4) <민중>과 <하위계급들>이라는 용어는 이 노트 전체를 통해서 비슷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범주에 속하는 사회 그룹들과 요소들은 전체 인도 인구와 우리가 <엘리트>라고 묘사하는 모든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른 인구를 나타낸다.
조심성 많은 역사가들이 하위주체가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씨름하면서 전제하는 상황적 미결정성의 동굴(antre)에 해당하는 세 번째 항목을 고려해 보자. 『전체적으로 추상화하여 보면 이……범주는……그 구성상 이질적이었다. 그리고 지역의 사회경제적 발전이 일정하지 않은 탓에 지역마다 다 달랐다. 한 지역을 지배하던 똑같은 계급이나 요소가……다른 지역에서는 지배받는 층에 소속될 수도 있었다. 이것은 특히 최고 말단 시골 향사층, 피폐한 지주, 부농, 중상층 농부들 가운데 태도와 연계에서 많은 애매함과 모순을 창출할 수 있었고 실제로 그랬다. 바로 이들 모두가 이상적으로(ideally) 말해서 민중이나 하위계급 범주에 속했다.』
여기서 제기되고 있는 <탐색 과제>는 『(세번째 항목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이상적인 민중에서 일탈하는 정도와 특수한 본성을 조사하고 가려 내며 측정하여 그것을 역사적으로 자리매기는 것이다』 <특수한 본성을 조사하고 가려 내며 측정하는> 프로그램보다 본질주의적이고 분류적인 것도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신기한 방법론적 명령이 작동한다. 나는 푸코와 들뢰즈의 대화에서 탈재현주의적 어휘가 본질주의적 일정을 감추고 있다고 논의해 왔다. 하위 연구에서는 제국주의적 에피스테메나 사회적/학문적 각인의 폭력 때문에 본질주의적 용어로 이해된 프로젝트를 차이들의 급진적인 텍스트적 실천 속에서 소통시켜야 한다. 이 그룹의 조사 상은 민중 그 자체가 아니라 지역의 하위 엘리트라는 부유하는 완충지대로서 하위 그룹의 경우인데 그것도 이상, 즉 민중이나 하위주체로부터 일탈하는 정도이다. 여기서는 이 이상 자체도 엘리트와의 차이로서 정의되고 있다. 하위 그룹의 연구 방향은 바로 이런 구조를 향하고 있다. 이것은 제1세계의 급진적 지식인이 자가진단한 투명성과는 다른 곤경이기도 하다. 어떤 분류법이 이런 공간을 고정시킬 수 있단 말인가? 민중 자신이 그 공간을 감지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사실 구하는 <민중>을 주인-노예의 변증법에서 보고 있다. 그리하여 민중의 텍스트는 자신의 불가능한 조건을 가능한 조건으로 다시 쓰는 어려움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지방과 지역 수준에서 (지배적인 토착 그룹들)은……지배적인 모든 인도인 그룹들보다 위계질서상 열등한 사회계층에 속하면서도 자신들의 사회적 존재에 진실로 합당한 이해관계들에 따르지 않고 지배 그룹의 이익을 위해 행동했다.』이렇게 하위주체 연구 그룹 사람들이 이 매개 그룹이 보여 주는 행동과 이해관계 사이의 간극에 대해 본질화하는 용어로 말하면서 내리는 결론은 이 이슈에 대한 들뢰즈의 선언이 보여주는 자의식적 순진함보다는 마르크스에 더 가깝다. 구하는 마르크스처럼, 리비도적 존재라기보다는 사회적 존재라는 견지에서 이해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아버지의 이름 이미저리는 계급이나 그룹 행위 수준에서 <자기 존재에 진실로 일치하는 상태>란 아버지의 이름만큼이나 인위적이거나 사회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도록 도와 줄 수 있다.
세 번째 항목으로 지정된 매개그룹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정체성이 차이인 <진정한> 하위주체 그룹에게는 자신을 알고 말할 수 있는 하위주체의 재현이 불가능하지 않다. 지식인의 해결책이 재현을 억제하도록 하지도 않을 것이다. 문제는 재현하려는 지식인에게 유혹적인 대상일 정도로 하위주체의 편력이 끈기 있게 추적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럴 때 인도 하위주체 연구 그룹의 다소 진부한 언어로 말하자면 우리가 하위층의 정치를 조사한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하면 민중의 의식에 접근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나오게 된다. 하위주체는 어떤 목소리-의식(voice-consciouness)을 갖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그들의 프로젝트는 인도인의 민족 의식이 전개되는 과정을 다시 쓰는 것이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제국주의의 계획된 불연속성으로 말미암아 <(피에르 리비에르)의 이야기를 에워쌌던 의학적․법적 메커니즘들을 보이게 만드는> 작업으로부터 분리되어 진부한 것으로 치부된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만드는 것은 또한 지금까지 역사에 아무런 적절성이 없다고 아무런 도덕적․미학적․역사적 가치도 인정받지 못했던 한 층의 제재에 본격적으로 손을 댐으로써, 수준 자체의 변화를 의미할 수 있다』는 푸코의 시사는 정확한 것이다. 내가 일관되게 고민하는 것은, 『심리적이거나 정신분석학적이거나 언어학적이거나간에 (주체)에 대한 모든 종류의 분석』(PK, 49-50)을 모조리 회피하면서 메커니즘을 보이게 만드는 작업에서부터 개인의 목소리를 들리게 만드는 데로 은근 슬쩍 넘어가는 푸코의 태도이다.
서벵골 마르크스주의자인 아지트 차우드허리(Ajit Chaudhuyr)는 하위주체의 의식을 탐색하는 구하를 비판하고 있는데 이런 비판은 하위주체를 끌어들이는 생산과정의 한 순간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의식의 변혁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견해는 사회관계들에 대한 지식을 포함한다는 차우드허리의 인식은 나로서는 원리상 날카로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전유해 온 실증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유산이 남아 있어서인지 그는 다음 말을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농부의 의식이나 노동자의 의식을 그 순수한 형태에서 이해하는 일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농부와 노동자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풍부하게 하고 나아가 특정 양식이 다른 지역들에서 다른 형식들을 취하는 과정을 이해하도록 통찰을 던져 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서는 2급의 중요성을 갖는 문제로 간주되고 있다.』
차우드허리의 <국제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이런 형태는 순수하고 회복가능한 의식의 형식을 오로지 밀쳐 버리지 위해 믿음으로써 마르크스에게서 생산적인 곤경의 순간들을 봉쇄한다. 이런 흐름이야말로 푸코와 들뢰즈가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하는 목적이자 하위주체 연구 그룹의 비판적 동기의 원천일 수 있다. 이 세 가지 경향 모두가 의식의 순수한 형태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통일되어 있다. 프랑스의 장면에서는 기표들의 얼버무림이 일어나 <무의식>이나 <억압받는 주체>가 <의식의 순수한 형태>라는 공간을 은밀하게 차지한다. 제1세계에서나 제3세계에서나 정통 <국제주의적> 지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의식의 순수한 형태는 관념주의적 기반으로 남아 2급의 문제로 제쳐지면서 종종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의 명성을 얻는다. 하위주체 연구 그룹에서 의식의 순수한 형태는 인정되지 않은 자체의 절합(articulation) 관계들을 따르는 전개과정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런 절합을 분명히 밝히는 데는 발전된 이데올로기 이론이 다시금 가장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차우드허리의 비판에서 <의식>을 <지식>으로 연상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생산>이라는 중요한 중간항을 생략하도록 한다. 『레닌에 따르면 의식은 다른 계급들과 그룹들 사이의 상호 관계들에 대한 지식, 즉 사회를 형성하는 물질들에 대한 지식으로 연상된다……. 이런 정의들은 명확한 지식대상 안에서 형성되는 문제틀―특정 양식의 특수성 문제를 논의의 초점 밖으로 돌리면서 역사 속에서의 변화를, 특히 한 가지 양식에서 다른 양식으로의 변화를 이해하는 것―내부에서만 의미를 획득한다.』
피에르 마셔레이(Pierre Macherey)는 이데올로기를 해석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공식을 제공한다.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작품이 말할 수 없는 내용이다. 이것은 <작품이 말하기를 거절하는 것>―그 자체는 흥미롭지만―이라는 다소 조심성 없는 주석과 똑같지 않다. 작품이 말하기를 거절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나의 방법론을 세우면서 인정받건 그렇지 않건 침묵을 재는(measuring silence) 과제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보다는 작품이 말할 수 없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바로 거기서 침묵으로의 여행 같은 것을 통해 발언(utterance)이 정교하게 되기 때문이다.』마셔레이의 개념들은 그가 따를 것 같지 않은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유럽 지방 문학의 문학성에 대해 쓰고 있지만 자기 논의의 핵심에 약간 어긋나게도 제국주의의 사회적 텍스트에 적용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론을 제시한다. <작품이 말하기를 거절하는 것>이라는 개념이 문학작품에 대해서는 다소 경박하게 비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국주의의 법적 실천을 코드화하는 과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집단적인 이데올로기적 거부와 같은 것을 진단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집단적인 이데올로기적 거부를 진단해 보면 그것이 정치경제적으로나, 다학제적인 이데올로기로 재각인되는 영역을 열어 보여 줄 것이다. 또한 집단적인 이데올로기적 거부는 이차적인 투상화 수준에서 <세계의 세계화>이므로 거부개념은 여기서 그럴 듯하게 된다. 실로 여기 개입되는 문서보관적이고 역사편찬적이며 학문적-비판적이고 불가피하게 간섭적인 작업은 <침묵을 재는> 과제이다. 이것은 환원할 수 없는 차이를 갖는 이상으로부터의 <일탈을……조사하고 가려내고 평가하는> 작업을 묘사하는 용어일 수 있다.
우리가 하위주체 의식이라는 뒤따르는 문제에 도달할 때 <작품이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개념은 중요하게 된다. 사회적 텍스트의 기호현상에서 반란의 정교화는 <발언>의 자리에 놓인다. 보내는 자에 해당하는 <농부>는 만회할 수 없는 의식을 가리키는 암시로서만 나타난다. 받는 자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는 하나의 <반란>의 <실제 수신자>가 누구인가를 물어 보아야한다. <반란>을 <지식을 위한 텍스트>로 바꾸는 역사가는 집단적으로 의도된 모든 사회적 행위의 <수신자>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가는 저 잃어버린 근원에 대한 향수를 하나도 느끼지 말고 그 남자나 그녀 자신의 의식(혹은 학문적 훈련에 의해 작동되는 의식-효과)의 아우성을 (가능한 한) 중단시켜야 한다. 그럴 때 반란을 정교하게 묘사하는 작업이 반란적인 의식으로써 뭉뜽그려져 <조사대상>으로나 더 나쁘게는 모방 모델로 굳어지지 않게 된다. 반란 텍스트가 함축하는 <주체>야말로 지배 그룹 속에 있는 식민주체에게 부여된 내러티브적 승인에 대항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탈식민 지식인들은 그들의 특권이 손실임을 배울 것이다. 이 점에서 그들은 지식인들의 패러다임이다.
(제국주의의 하위주체보다는) 여성성 개념이 해체주의 비평이나 몇몇 페미니스트 비평에 이와 유사하게 사용되어 왔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해체주의 비평의 경우, <여성>이라는 형상이 이슈인데, 미결정적인 존재로 최소화하여 진술될 때 이미 남근중심적 전통에 이용가능하게 된다. 하위주체 연구 그룹의 역사편찬은 그런 책략을 쓰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상의 문제들을 제기한 셈이다. 여성이라는 <형상>에서 여성과 침묵의 관계는 여자들 자신이 꾸며낸 것일 수 있게 된다. 인종의 차이들과 계급의 차이들은 그런 비난하네 포섭된다. 하위 주체 역사편찬에서는 그런 제스처들이 불가능함을 직시하여야 한다. 제국주의의 편협한 에피스테메적 폭력은 일반적인 폭력의 불완전한 알레고리―하나의 에피스테메의 가능성인―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하위주체의 편력이 지워지는 사이에 성차(sexual difference)의 궤도는 이중으로 지워진다. 여기서 문제는 농민반란에의 여성 참여나 성적 노동분업의 기본룰이 아니다. 두 항목에 고나해서는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식민주의적 역사편찬의 대상으로서나 반란의 주체로서나, 젠더의 이데올로기적 구성이 남성(the male)을 지배적인 것으로 유지하고 있는 현실이다. 식민지적 생산이라는 맥락에서 하위주체가 역사도 없고 말할 수도 없다면 여성 하위주체는 더욱 깊은 어둠 속에 있을 뿐이다.
현 단계 국제 노동분업은 19세기의 영토분할적 제국주의의 분리된 장(field)이 치환되어 나타난 것이다. 단순하게 말해서 일반적으로 제1세계에 속하는 국가 그룹들은 자본의 입장에 있고 일반적으로 제3세계에 속하는 또 다른 국가 그룹들은 토착 매판자본가를 통해, 또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변천하는 노동력을 통해 투자의 장을 제공한다. 산업자본의 순환과 성장을 유지할(그리고 19세기의 영토분할적 제국주의 내부에서 뒤따라 나오는 행정 업무를 수행할) 목적으로 수송, 법, 규격화된 교육제도가 전개되어 왔다. 그 사이 지역 산업은 파괴되었고 땅은 재분배되었으며 원자재는 제1세계로 옮아갔다. 소위 탈식민화, 다국적 자본의 성장, 행정적인 비난의 감소와 더불어, 이제 <발전>이라는 대규모의 법령이나 교육제도들의 확립에 비교적 관여하지 않는다. 이것은 매판국가에서 소비주의의 성장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현대적 통신 산업과 진전된 자본주의 경제가 아시아의 두 끝에서 등장함으로써, 국제 노동분업을 유지하는 것은 매판국가에서 값싼 노동력을 계속 공급받을 수 있도록 도와 준다.
물론 인간의 노동은 내재적으로 <값싼> 것도 <비싼> 것도 아니다. 노동법의 부재(혹은 노동법의 차별적인 강화)와 전체주의적 국가(종종 주변부 국가의 발전과 근대화가 수반하는)와 노동자 편에서의 최소한의 생존 조건들이 인간의 노동을 보장해 줄 것이다 .이 중요한 항목을 그냥 두기 위해서 매판국가의 도시 프롤레타리아트는 소비주의 이데올로기(계급 없는 사회적 철학으로 행세하는)에 체계적으로 훈련받아서는 안 된다. 소비주의는 푸코가 언급하는(FD,216) 연대정치를 통해 모든 곤란에 맞서서 저항의 토대를 준비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소비주의 이데올로기로부터의 이러한 분리는 국제적인 하청계약이 번성하는 현상에 의해 더욱 악화되고 있다. 『이런 전략하에서, 선진국에다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제조업자들은 가장 노동집약적인 생산 단계들에 하청을 준다. 예컨대 값싼 노동인구를 가진 제3세계 국가들에다 재봉이나 조립을 맡긴다. 일단 조립되면 다국적 기업은 관대한 관세 혜택을 받으며 그 상품을 다시 수입하여 지역 시장에 내다 팔지 않고 선진국에다 판다.』 여기서 소비주의에의 훈련과의 고려는 거의 잠기게 되는 셈이다. 『1979년 이후 지구적인 경기 후퇴로 인해 전세계적인 무역과 투자가 눈에 띄게 하락하는 동안 국제적인 하청계약 붐이 일어났다……. 이런 경우, 다국적 기업가들은 호전적인 노동자들이나 혁명적인 반란, 경제적인 침체에 더 자유롭게 맞선다.』
매판국가에서 계급 유동성은 점점 더 희박해지고 있다. 매판국가에서 일부 토착지배그룹 사람들, 지역 부르주아지는 연대 정치(alliance politics)의 언어를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나 그럴듯한 저항 형식에 동조하는 것은 라나지트 구하가 묘사하는 부르주아 역사편찬의 엘리트주의적 경향과 일치한다.
지구적 연대 정치의 그럴듯함에 대한 믿음은 매판국가에서 <국제적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는, 지배적 사회그룹의 여자들 사이에서도 만연되어 있다. 푸코가 주장하는 <여자들, 죄수들, 용병들, 환자들, 동성애주의자들> 사이의 연대가능성에서 가장 동떨어진 사람들이 바로 도시 하부프롤레타리아트 계층(subproletariat) 여자들이다. 그들의 경우 소비주의나 착취구조의 거부는 가부장적 사회구조에 의해 더욱 복잡하게 된다. 국제 노동분업의 다른 편에서 착취 받는 주체는, 여성 착취의 텍스트를 알 수 없으며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설령 여성에게 말하는 공간을 만들어 주고 자신을 나서지 않겠다는 멍청한 지식인이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여성은 이중으로 그림자 속에 있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이질적인 타자를 포괄하지 못한다. 국제적 노동분업의 회로 바깥에는(비록 완전한 바깥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포착할 수 없는―자아나 동일자의 자리에 있는 우리 자신의 자리만 지적하는 동질적인 타자를 구축함으로써 우리의 자비심을 봉쇄할 때―의식을 가진 민중이 있다. 생존에 급급하는 농부들, 조직되지 않은 농민 노동자, 부족민들, 거리나 시골을 배회하는 하층노동자들이 있다. 그들과 직면한다는 것은 그들을 대표한다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재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 논의는 우리로 하여금 인류학이라는 학문을, 나아가 기초적인 페다고지와 학문적 형성 사이의 관계를 비판하게끔 할 것이다. 또한 <자연스럽게 진술하는> 억압받는 주체를 선택하는 지식인들의 은밀한 요구―그런 주체가 내러티브라는 축약된 생산양식으로서의 역사를 통해 나타나야 한다는―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할 것이다.
들뢰즈나 푸코가 제국주의의 에피스테메적 폭력이나 국제 노동분업을 무시한다는 사실은 그들이 말미에서 제3세계 이슈들을 건드리지만 않았다면 그리 문제될 게 없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한때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주민들의 제3세계 문제를 무시하기란 불가능하다. 들뢰즈는 이 오랜 지역 토착 엘리트들―이상적으로 말해 하위주체인―에 국한해서 자기 논의를 전개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산업 예비군을 유지하는 문제를 언급함으로써 들뢰즈는 역전된 인종적 감상성에 빠진다. 그는 19세기 영토분할적 제국주의의 유산에 관해 말한 이래, 지구화하는 센터가 아니라 민족국가에 대해 언급한다. 『프랑스 자본주의는 부유하는 실업 기표를 많이 필요로 한다. 이런 퍼스펙티브에서 우리는 억압 형식들의 통일성을 보기 시작한다. 가장 힘들고도 빛이 나지 않는 일자리가 이민노동자들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일단 인정하는 한 이민에 관한 규제들이 보이고, 프랑스인들도 더욱 힘든 일에 대한 <취향>을 다시 획득해야 하니까 공장에서 억압이 일어나고, 젊은이들에 대하 투쟁과 교육제도의 억압이 일어난다』(FD, 211-12). 이것은 수긍할만한 분석이다. 하지만 다시금 이 분석은 제1세계와 직접 접근할 수 있는 제3세계 그룹들만이 <통합된 억압>에 직접 맞서는 연대 정치의 저항 프로그램에 들어올 수 있는 양한다. 이렇게 타자로서의 제3세계를 자비롭게 제1세계 입장에서 전유하고 재기입하는 것은 오늘날 미국 인문과학이 보여주는 많은 제3세계주의의 근간에 있는 폭력이다.
푸코는 지리학적 불연속성을 환기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계속 비판한다. <지리학적(지정학적) 불연속성>의 실제 표지는 국제적인 노동분업이다. 그러나 푸코는 착취(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의 장〔field〕인 잉여가치의 추출과 전유)와 지배(<권력> 연구)를 구분하는 용어를 쓰면서 지배 쪽이 연대 정치에 기반을 둔 저항의 가능성을 더 많이 갖는다고 시사한다. 하지만 푸코는 <권력>개념(방법론적으로 권력의 보편주체를 가정하는)에 대한 획일적이고 통합적인 접근이야말로 착취의 일정단계에서나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지리학적 불연속성에 대한 푸코의 비전을 지정학적으로 제1세계에 특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말하고 있는 지리학적 불연속성이란 아마 다음과 같은 뜻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착취에 맞서 투쟁하자마자 프롤레타리아는 그 투쟁을 이끌 뿐만 아니라 그 목표와 방법, 그 자리와 도구를 정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프롤레타리아와 연계한다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입장이나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고 그들의 투쟁 동기를 다시금 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적 프로젝트에) 완전히 몰입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우리가 투쟁하는 대상이 권력자체라면 권력을 참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발견하는 곳마다 투쟁을 시작할 수 있고 그들 자신의 행위(혹은 수동성)라는 견지에서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들 자신의 싸움―분명하게 그 목표를 이해하고 그 방법을 결정할 수 있는―이기도 한 이런 투쟁에 참여하면서 그들은 혁명적 과정에 들어가는 것이다. 확실히 프롤레타리아의 동지들로서 말이다. 권력은 자본주의적 착취를 유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행사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억압받는 곳에서 싸움으로써 프롤레타리아의 명분에 정말로 복무하고 있다. 여자들․죄수들․용병들․환자들과 동성연애자들은 이제 자신들에게 행사되는 권력의 특정한 형식, 제약과 통제에 맞서는 구체적인 투쟁을 시작하였다. (FD, 216)
이것은 지역화된 저항 프로그램으로서 감탄할 만하다. 이런 저항 모델은 <마르크스주의적> 전선을 따르는 거대 투쟁에 대한 대안은 아니지만 그것을 보충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지역적 저항 상황이 보편화된다면 주체의 특권화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용하는 셈이다. 이데올로기 이론이 없는 상황에서 이것은 위험한 유토피아주의로 이끌 수 있다.
푸코는 공간화 속에서의 권력(power-in-spacing)에 대해 명석한 생각을 펼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제국주의의 지형학적(topological) 재각인을 인식한다고 해서 자신의 전제를 보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런 재각인이 생산하는 서구에 대한 제한된 견해에 빠져서 그 효과들을 공고하게 하는 것을 돕는다. 그는 다음 구절에서 보듯이 17세기, 18세기 유럽에 등장한 권력의 새로운 메커니즘(마르크스주의자는 이것을 경제 외적인 강제 없이 일어나는 잉여가치의 추출이라고 묘사한다) 자체가 영토분할적인 제국주의라는 수단―대지와 그 생산물들―에 의해 다른 곳에서 확보되었다는 사실을 생략한다. 그런 무대에서 주권성의 재현을 중요하다. 『17세기와 18세기에 우리는 중요한 현장의 생산을, 아주 특정한 절차상의 테크닉들을 소유한 새로운 권력 메커니즘의 등장을, 아니 발명을 보게 된다……. 그런데 내 생각으로는 이 메커니즘은 또한 주권성의 관계들과는 절대로 양립하지 못한다. 이 권력의 새로운 메커니즘은 육체에, 대지와 그 생산물들보다 육체가 하는 일에 더욱더 의존한다.』(PK, 104)
<지리학적 불연속성>의 첫 번째 파장에 관련된 이런 맹점 때문에 푸코는 20세기 중반의 두 번째 파장에 대해 무감각한 채 그것을 그저 『파시즘의 붕괴와 스탈린주의의 쇠퇴』(PK, 87)와 동일시한다.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는 대안적인 견해를 보여준다. 『미국의 주도 하에, 순화된 대서양 제국주의의 평화로운 경제적 상호 의존성의 조건을 창출한 것은 반혁명의 지구적 논리였다……. 1958년과 1973년 사이에 만개한 상업적 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시대를 가능하게 하면서 자본주의 경제들의 상호 침투에 앞서 그것들을 활성화시킨 것은 소련에 맞서 집단적 안전을 확보한다는 슬로건에 따라 이루어진 다국적 군사통합이었다.』
바로 이런 <권력의 새로운 메커니즘> 안에서 우리는 푸코가 보여주는 민족국가 장면에의 고착, 경제에 대한 저항, 미세논리를 특권화 하는 권력과 욕망개념을 강조하는 태도를 읽어내야 한다. 데이비스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국이 전략적 군사력을 이렇게 거의 절대주의적으로 집중하는 것은 그 주요 총독들에게 계몽되고 유연한 종속을 허용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미국의 이런 집중화는 프랑스와 영국이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엄격한 이데올로기적 동원을 내내 유지하는 가운데……각국에 잔존하는 제국주의적 허세들과 아주 잘 순응하는 것으로……입증되었다.』<프랑스>와 같은 통합된 개념들이나 『권력처럼 저항도 다중적이라서 지구적 전략으로 통합될 수 있다』(PK, 142)는 통합적인 진술들은 데이비스의 말을 통해 해석될 수 있는 것 같다. 폴 보베와는 달리, 나는 『군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공격받고, 고향을 잃은 민족(팔레스타인)에게……(<정치에 참여하는 것은……혁명이 바람직한지 어떤지를 가능한 한 가장 정직하게 알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은 푸코의) 질문이 부자 서구 나라의 어리석은 사치일 뿐』이라고 시사하려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나는 서구에 대한 자기 수용적인 견해를 구매하는 것은 제국주의적 프로젝트에 의한 그 견해의 생산을 무시하는 것임을 시사하려고 한다.
몇 세기 동안에 걸친 유럽 제국주의를 아주 명석하게 분석하고 있는 푸코는 때때로 저 이질적인 현상―의사들이나 행정의 발전에 의한 공간의 처리가 수용소라는 형태로 수행되고, 미친 사람들이나 죄수들․아이들의 견지에서 주변부를 고려하는 등―의 축소판을 생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클리닉,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학교 같은 모든 것이 제국주의라는 좀더 광범위한 내러티브를 읽지 못하게 막는 스크린 알레고리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논의를 들뢰즈와 가타리에 나오는 <탈영토화>라는 잔인한 모티브에서 펼칠 수 있다.) 푸코는 『우리는 무엇인가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무엇인가에 대해 완벽하게 말할 수 없다』(PK, 66)고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제국주의 비평가가 모두 갖고 있는 허가된 무지에 대해 이미 말한 바 있다.
하위주체가 말할 수 있는가? : 다원주의의 문제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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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영향>을 받아들이는 미국 학자들과 학생들의 일반적인 수준에서 보자면, 푸코는 실제 역사와 정치나 실제 사회 문제를 다루는 반면 데리다는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비교적(esoteric)이며 텍스트주의적이라는 식으로 이해되고 있다. 독자들은 이렇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관념을 아마 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글턴 역시 『(데리다) 자신의 저작이 생경하게 비역사적인데다 정치적으로 회피적이며 실제로 <담론>으로서의 언어(기능 중인 언어)를 망각해 온 사실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라고 쓰고 있다. 이글턴은 계속해서 푸코의 <담론적 실천> 연구를 권장한다. 패리 앤더슨(Perry Anderson)도 이와 관련된 역사를 구축한다. 『데리다와 더불어 구조주의의 자기 철회(self-cancellation)―레비-스트로스와 푸코가 호소하는 음악이나 광증에 잠재되어 있는―는 절정에 이르렀다. 데리다는 사회현실을 탐색하는 데 전혀 투신하지 않으면서 구조주의와 사회현실의 구축을 해체하는 데 거의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그는 구조주의와 사회현실에다가 <기원에 대한 향수>―각기 루소적이거나 소크라테스 이전의 것인―의 혐의를 씌우면서 그것들이 자체의 전체에 따라 각기 자기 담론의 정당성을 추정해야 하는 것은 무슨 권리이냐고 묻고 있다.』
이 논문에서는 데리다를 옹호해서건 그렇지 않건 간에 상실한 기원에 대한 향수가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틀 안에서 사회현실을 탐색하는 데 해로울 수 있다는 개념에 투신하고 있다. 실로, 앤더슨의 오독이 보여 주는 재치로 말미암아 내가 푸코에게서 강조하던 문제가 정확하게 지적되는 것을 막지 않는다.『푸코가 1966년에 <언어의 존재가 우리 지평선 위에서 어느 때보다도 계속해서 밝게 빛나기 시작할 때 인간은 쇠락하는 중>이라고 선언했을 때 특징적으로 예언적인 분위기를 포착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지평선을 감지하거나 소유하는 <우리>란 누구인가?』앤더슨은 후기 푸코에게 서구의 주체가, 즉 부인함으로써 주재하는 주체가 슬그머니 끼어드는 것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 앤더슨은 보통 그렇듯 푸코의 태도를 인식하는 주체(the Knowing Subject) 자체의 사라짐을 주장한다고 본다. 더 나아가서 앤더슨은 데리다에게서는 그런 경향이 최종적으로 진전된 것으로 본다. 『(우리)라는 공허한 대상명사에다 그 프로그램의 아포리아를 놓는다.』마지막으로 데리다의 <텍스트성> 개념을 심각하게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이드의 울려 퍼지는 경구를 살펴보자. 『데리다의 비평은 우리를 텍스트 속으로(into) 움직이게 하고 푸코는 텍스트의 안과 밖을 동시에 넘나들도록 한다.』
억압받는 자의 정치학에 대한 실질적인 관심은 푸코가 갖는 호소력을 종종 설명해 준다. 나는 이런 관심이 지식인과 억압받는 <구체적> 주체를 특권화하는 태도를 은폐할 수 있다고 논의해 왔다. 여기서 나는 영향력 있는 이 저자들이 부추겨 온 데리다에 대한 세부적 견해에 맞서려는 게 아니라 데리다의 몇몇 논점들이 제1세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장기간의 유용성을 갖는다고 논의하고자 한다. 이것은 변명이 아니다. 데리다의 글은 읽기 어렵고 그가 실제로 검토하는 대상은 고전 철학이다. 하지만 그는 제대로 이해될 때, 억압받는 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끔 해놓고서, 부재하는 비재현자(nonrepresenter)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제1세계 지식들보다 덜 위험하다.
나는 데리다가 20년전(1968년)에 쓴 《실증과학으로서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 Of Grammatology As a Positive Science》(OG, 74-93)라는 장을 살펴볼 것이다. 이 장에서 그는 <해체>가 적절한 실천―비평적이든 정치적이든―을 이끌어 낼 수 있는가 하는 이슈와 부딪히고 있다. 이 이슈는 인종중심적 주체가 선택적으로 타자를 정의함으로써 자신을 확립하지 않도록 하는 길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의 주체를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오히려 자비로운 서구 지식인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우리는 <주체>가 역사를 가지고 있고, 우리의 역사적 순간에 제1세계 지식주체의 과제는 <동화>를 통한 제3세계의 <인정>에 저항하고 비판하는 것이라고 느낀다. 이런 우리들에게는 구체성이 중요하다. 데리다는 유럽 지식인의 인종중심적인 충동을 파소스가 담긴 비판보다는 사실적인 비판을 수행하려고 한다. 그는 이것을 위해 자기 논의의 근거를 확립시키는 데 필요한 <최초의> 질문들을 자신이 물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는 그라마톨로지가 단순한 경험주의를 <넘어서는>(프랭크 렌트리키야〔Frank Lentricchia〕의 말) 것이라고 선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라마톨로지 역시 경험주의처럼 최초의 질문들을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적 지식>을 <경험적 탐구>와 똑같은 문제선상에 놓는다. 그러므로 <해체>란 <이데올로기적 탈신비화>를 말하는 새로운 단어가 아니다. 『경험적 탐구처럼……그라마톨로지적 지식의 영역에서 거처를 구하는 것은 <예들>을 통해 작동하지』(OG, 75) 않을 수 없도록 한다.
실증과학으로서 그라마톨로지가 갖는 한계를 보여 주기 위해서 데리다가 내세우는 예들은 제국주의적 과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적절하게 자기 합리화하는 데서 나온다. 데리다는 17세기 유럽에 『유럽적 의식의 위기를 나타내는 징후』(OG, 75)를 형성하는 글쓰기의 역사적 과정에는 세 종류의 편견들이 작동하고 있었다고 쓰고 있다. 즉 <신학적 편견들>, <중국에 관한 편견들>, <상형문자적 편견들>이다. 첫 번째 편견은 신이 히브리어건 그리스어건 원시적 혹은 자연적인 스크립트〔인쇄가 아니라 손으로 쓴 글/역주〕를 썼다고 하는 것이다. 두 번째 편견은 중국어는 철학적 글쓰기를 위한 완벽한 청사진이지만 청사진에 지나지 않으며 진정한 철학적 글쓰기는 『역사와 상관없는 독립적인』(OG, 79) 것이라고 하면서 중국어를 손쉽게 배우는 스크립트로 희박하게 만들어 실제 중국어를 폐기시키도록 한다. 세 번째 편견은 이집트 스크립트는 너무 숭고해서 해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첫 번째 편견은 피브리어나 그리스어의 <현실성>을 보전하고 나머지 두 편견(각각 <합리적>이고 <신비적인>)은 첫 번째 편견을 지지하는데서 충돌을 일으킨다. 첫 번째 편견에서 로고스의 중심을 유대-그리스도교적 신(동화를 통해 헬레니즘적 타자가 수용된 것은 더 일찍 일어난 일이다)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편견>은 유대-그리스도교 신화의 지도 그리기에다 지정학적 역사의 지위를 부여하려는 노력 속에서 지금도 견지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중국 글쓰기 개념은 일종의 유럽적 환각이라는 기능을 하게 되었다……. 이런 기능화는 엄격한 필요성에 복종했다……. 그것은 그때 수중에 넣을 수 있었던 중국 스크립트에 대한 지식에 의해 동요되지 않았다……. <상형문자적 편견>은 이미 이해관계와 결부된 맹목성과 똑같은 결과를 생산했다. 엄폐(occultation)는 인종중심적 조롱에서부터……진행되기는커녕 과장된 찬양의 형태를 취한다. 우리는 이런 패턴의 필연성을 입증하는 작업을 아직 완수하지 못했다. 우리 세기는 이 패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인종중심주의가 급속하고도 허세 좋게 역전될 때마다, 내부를 공고하게 하고 내부에서부터 자국의 이익을 끌어내려는 스펙터클한 효과 뒤로 어떤 노고(some effort)가 말없이 숨는다 (OG, 80 : <상형문자적 편견>만 데리다의 강조이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데리다는 내부를, 즉 자신의 주체 위치를 공고하게 하는 타자를 생산하려는 유럽적 주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두 가지 특징적인 가능성을 제안하는 데로 나아간다. 먼저 데리다는 글쓰기, 가정/시민 사회의 개시, 욕망/권력/자본화의 구조 사이의 공모성을 설명한다. 그런 다음, 그는 역설적이게도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면서도 초월적이지 않은 무엇인가를 보전하려는 자기 욕망의 취약성을 드러낸다. 데리다가 식민주체의 생산을 비판하면서 제기하는, 바로 이 말로 표현하 수 없고 초월적이지 않은(<역사적>)장소는 하위주체에 의해 집중된다.
데리다는 그라마톨로지의 프로젝트는 현존의 담론(discourse of presence) 안에서 전개되어야 한다고 다시 한번 주장하면서 《실증과학으로서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를 끝맺는다. 그라마톨로지는 현존의 비판에서 나아가 자기 자체의 비판에 담겨 있는 현존의 담론의 편력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투명성에 대한 거대 주장을 경계한다. 데리다에게 그라마톨로지의 대상의 이름이자 모델 이름으로서 <글쓰기>라는 단어는 『역사적 폐쇄 안에서만, 말하자면 과학과 철학의 한계 안에서의』(OG,93) 실천이다.
여기서 데리다는 타자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유럽적 인종중심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 특별히 정치적인 선택보다는 니체적이고 철학적이며 정신분석적인 선택을 하고 있다. 탈식민 지식인으로서 나는, 데리다의 그런 비판이 꼭 필요하게끔 만드는 구체적인 길로 그가 나를 인도하지(유럽인들은 불가피하게 그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않는다고 고민하지 않는다. 나는 유럽 철학자인 그가 타자를 유럽중심주의의 주변부로 형성하는 유럽적 주체의 경향을 분명하게 짚어내고, 그 경향을 모든 로고스중심주의적이고 따라서 모든 그라마톨로지적 노력들이 지니는 문제로 자리매긴 점(《실증과학으로서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의 주된 논지는 로고스중심주의와 그라마톨로지 사이의 공모성이다)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문제는 일반적인 문제가 아니라 유럽적 문제이다. 그가 『사고(thought)는…… 텍스트의 빈 부분』(OG, 93)이라고, 텍스트에 나타나지 않더라도 텍스트 속에 여전히 있는 사고가 역사의 타자에게 넘겨져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사고와 지식의 주체를 강등시키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도 바로 이 인종중심주의라는 맥락 안에서이다. 탈식민 입장에서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비평가는 익히 해석할 수 있는 텍스트가 한정하고 있는 빈 공간이 유럽적 폐쇄(the European enclosure) 안에서도 이론 생산의 거점으로 진전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할 것이다. 탈식민 비평가와 지식인은 텍스트에 각인된 빈 공간을 미리 가정해야만 그들 자신의 이론적 생산물을 전위시켜 볼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고나 사유하는 주체를 투명하게 혹은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은 타자를 동화시킴으로써 무자비하게 인정하는 태도를 은폐하는 것처럼 보인다. 데리다가 <타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도록 하기>보다 (자기를 공고하게 만들어 주는 타자와 다르고), 우리 안에 존재하는 타자의 목소리라는 저 내면의 목소리를 환각으로 만드는〔따라서 실제로 외부에 존재하는 목소리를 실증해 주는/역주〕<quite-other>(tout-autre)에 <호소>하고 그것을 <요청>하는 것도 타자를 동화시킴으로써 인정하는 태도를 경계하려는 뜻에서이다.
데리다는 17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의 글쓰기의 유럽적 과학에 배여 있는 인종중심주의를 유럽적 의식의 일반적 위기를 가리키는 징후라고 부른다. 물론 이것은 더 큰 징후의 일부로서 위기 자체이고,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첫 번째 파도를 경유하여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서서히 넘어가는 변화와 관계된다. 타자를 동화시킴으로써 그것을 인식하는 편력은, 정신분석이나 여성의 <비유>―해체 안에서 이 두 가지 개입 지점들이 갖는 중요성을 축소해서는 안 되지만―보다 식민주체가 제국주의적으로 형성되는 과정에서 더욱 흥미롭게 추적될 수 있다. 데리다는 정신분석이나 여성 쪽으로 옮겨 가지는 않았다 (아마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이런 특별한 부재를 초래한 이유가 무엇이건간에, 내가 데리다에게서 유용하다고 발견한 것은 타자 형성의 공학(mechanics)에 관한 지속적으로 진척되는 작업이다. 우리는 타자의 진정성을 환기하기보다 타자 형성의 공학을 이용함으로써 분석이나 개입에서 훨씬 더 큰 이점을 확보할 수 있다. 이런 수준에서 볼 때 푸코에게서 유용한 부분은 식민주의자의 형성, 제도화, 학제화의 공학이다. 하지만 푸코는 이것을 제국주의의 전후 현실 어느 것과도 연결시키지 않는다. 데리다와 푸코는 서구의 쇠락에 관심을 갖는 지식인들에게 크게 유용하다. 데리다와 푸코가 검토하는 주체(남성 전문가이든 여성전문가이든)의 공모성을 투명성 속에서 위장하게끔 허용했을 수도 있다는 점은 서구 지식인들에게는 유혹이자 우리에게는 두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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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주체가 말할 수 있는가? 하위주체의 지속적인 구축을 경계하기 위해서 엘리트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이런 맥락에서 <여성> 문제는 가장 문제적인 지점으로 보인가. 당신이 가난한 흑인 여성이라면 삼중적인 여성 문제를 분명히 안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런 규정을 제1세계적 맥락에서 탈식민(제3세계와 동일하지 않은) 맥락으로 옮겨 놓는다면 <흑인>이나 <유색>이라는 묘사는 설득력 있는 의미심장함을 상실한다.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의 첫 번째 단계에서 식민주체 형성에 필요했던 층위들이 해방적 기표로서 <피부색>을 쓸데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대부분의 미국과 서유럽 인문과학자들의 급진주의가 안고 있는 잔인하고 규격화된 자비심, 점점 다양한 형태로 매판 주변부로 후퇴하고 있는 소비주의, 중심-주변지 논의에서조차 결국 배제되는 주변부(<다른 진정한 하위주체>라는 식으로)에 직면한 오늘날, 이런 분야에서 인종의식보다 계급의식 같은 것은 더욱더 역사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우파나 좌파 모두에 의해 똑같이 금지되는 것 같다. 이런 형편은 그저 이중적 전위의 문제만도 아니고 제1세계 여성과 함께 제3세계 여성을 수용할 수 있는 정신분석적 알레고리를 찾는 문제만도 아니다.
내가 방금 말한 경계 사항들은 우리가 여성 하위주체의 의식, 더 수긍할 만하게는 여성 하위주체에 대해 말할 때만 타당하다. 유색 인종 여자들이나 제1세계와 제3세계에서 계급적으로 억압받는 여자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차별주의 반대 운동을 보고하거나, 아니 더욱 좋게는 거기에 참여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이 우리의 일정에 올라 있다. 우리는 또한 인류학이나 정치과학․역사․사회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침묵당한 영역들에 관한 정보 회수를 환영해야 한다. 하지만 의식이나 주체를 가정하고 구성하는 것은 그런 작업을 지속시키고 결국 에피스테메적 폭력을 학식과 문명의 진전과 뒤섞어 버린 제국주의적 주체형성 작업과 밀착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여성 하위주체는 언제나처럼 말없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위험한 영역인데 여성 하위주체의 의식에 대해 묻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런 질문이 사람들의 관심을 관념론으로 돌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실제적인 급진주의자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더욱더 필요하다. 모든 페미니스트 프로젝트나 성차별주의에 반대하는 프로젝트를 의식에 관한 것으로 축소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의식을 무시하는 것은 탐색자의 자리를 투명하게 만드는 남성주의적 급진주의와 협력하는, 오랜 역사를 가진 정치적 제스처인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거나 대변하려고 하기에 앞서) 말거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탈식민 지식인은 체계적으로 여성의 특권을 <깨닫고 벗어난다>(unlearn). 이런 체계적인 벗어남을 통해 탈식민 담론이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를 갖고 탈식민 담론을 비판하는 법을 배우고, 그저 식민지인의 상실된 형상을 대체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하위주체 연구라는 反제국주의 기획 안에서조차 여성 하위주체의 침묵을 간과하는 태도를 문제삼는 것은, 조나단 컬러(Jonathan Culler)가 시사하듯, 『구별함으로써 차이를 생산하거나 성적 정체성과 결부된 본질적이고 특권적인 경험들로 정의된 성적 정체성에……호소하자』는 게 아니다.
페미니스트 프로젝트에 관한 컬러의 견해는 엘리자베스 폭스-제노비즈(Elizabeth Fox-Genovese)가 『여성의 사회정치적 개인주의에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이 기여한 바』라고 부른 것 안에서 가능하다. 우리가 아직 미국 학자로서 선동하는 중이라면, 지금 컬러가 묘사하고 있는 대로 페미니스트 프로젝트를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지식인의 특권을 <깨닫고 벗어나기>를 통해 나 자신이 교육받는 데서 필요한 단계였다. 또한, 서구 페미니즘의 주도적 과제가 계급적인 상승을 꾀하면서 여성과 남성 사이에 개인주의적 권리를 놓고 벌이는 싸움을 지속시키고 전위시키고 있다는 믿음을 확실하게 해주었다. 여기서 미국 페미니즘과 유럽 <이론>(영이 쪽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이론) 사이의 논쟁도 바로 그런 영역의 중요한 한 구석을 차지한다는 의심이 든다. 나는 미국 페미니즘을 더 <이론적>으로 만들라는 요청에 대해 일반적으로 공감하는 편이다. 하지만 잃어버린 기원들을 <본질주의적으로> 탐색한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는 하위층의 말없는 여성주체 문제가 영미 쪽에서 이론을 보강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론을 보강하라는 요청은 <본질주의>와 동일하게 보이는 <실증주의>를 비판하는 맥락에서 종종 나온다. 하지만 <부정의 작업>을 창시한 근대인인 헤겔은 본질개념에 낯설지 않았다. 본질주의가 변증법 안에 신기하게도 계속 남아 있는 것은 마르크스에게는 심각하고도 생산적인 문제였다. 그러므로 실증주의/본질주의(미국)과 <이론>(영미를 통한 프랑스-독일이나, 프랑스) 사이의 엄격한 이원대립은 피상적인 것일 수 있다. 이런 이분법은 본질주의와 실증주의 비판 사이의 애매한 공모성(데리다가 <실증과학으로서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에서 밝히고 있는)을 억압하는 것과 별도로, 실증주의는 이론이 아니라는 뜻을 함축함으로써 또한 오류를 범한다. 이런 움직임은 고유명사나 실증적인 본질로서 이론이 등장하는 것을 허용한다. 다시금 탐색자의 위치는 의문시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영역의 논쟁이 제3세계로 향한다고 하더라도 방법상의 문제에서 아무런 변화도 감지되지 않는다. 이 논쟁은 하위주체로서 여성의 경우, 구체적으로 퍼뜨릴 가능성을 자리매기기 위하여 성적 주체의 흔적을 담는 편력을 형성하는 요소들을 하나도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려할 수 없도록 한다.
그렇지만 나는 페미니즘을 실증주의 비판과 구체적인 것의 탈물신화와 연계시키는 태도에 일반적으로 동조하는 편이다. 또한 나는 서구 이론가들의 작업으로부터 배우는 데 반감을 가지지 않는다. 물론 그 때 탐색하는 주체들로서 서구 이론가들의 입장을 계속 짚어내는 법을 배우면서 말이다. 이런 조건에서 나는 문학비평가로서 하위주체로서의 여성의 의식이라는 거대한 문제와 전략적으로 부딪혔다. 나는 한 문장〔『백인 남자가 황인종 남자에게서 황인종 여자를 구해 주고 있다』를 가리킴/역주〕으로 이 문제를 다시 써서 단순한 기호현상의 대상으로 바꾸었다. 이 문장의 뜻은 무엇인가? 여기서 나타나는 유사관계는 프로이트 같은 사람이 이데올로기적으로 희생시키는 태도와 탐색주체로서 탈식민지식인의 입장 사이에서 성립된다.
사라 코프만(Sarah Kofman)이 보여 주듯, 여성을 속죄양으로 써먹는 프로이트의 깊은 애매함은, 히스테리 여성에게 목소리를 주어 그녀를 히스테리의 주체로 변형시키려는 애초의 지속적인 욕망에 반동-형성(reaction-formation)이 된다. 애초의 그런 욕망을 <딸의 유혹>으로 바꾸는 남성주의자-제국주의자의 이데올로기적 형성이야말로 획일적인 <제3세계 여성>을 구축하게 하는 것과 똑같은 형성의 일부이다. 탈식민 지식인으로서 나 또한 그런 이데올로기적 형성에 영향을 받고 있다. <깨닫고 벗어나는> 우리의 과제 일부는 바로 그런 이데올로기적 형성체를, 필요하다면 침묵이라도 측정해서 탐색 대상으로 명료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위주체가 말할 수 있는가, (여성으로서) 하위주체가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직면하여 하위주체에게 역사 속에서 목소리를 주려는 우리 노력은 프로이트의 담론이 겪는 위험에 이중으로 노출되는 셈이다. 이 점을 고려한 덕택에 나는 『백인 남자가 황인종 남자에게서 황인종 여자를 구해 주고 있다』는 문장을, <아이가 매맞고 있다>는 문장을 프로이트가 검토하는 가운데 부딪힌 것과 같은 맥락에 두게 되었다.
여기에서 프로이트가 쓰고 있는 용법은 주체 형성과 사회적 집단체의 행위 사이에 동형적인 유사관계―들뢰즈와 푸코 사이의 대화에 나오듯 라이히(Reich)를 언급하는 가운데 종종 수반되는 실천방식―를 함축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백인 남자가 황인종 남자에게서 황인종 여자를 구해 주고 있다』는 문장이 집단적 제국주의적 기획에서 새도매저키스틱한(sadomasochistic) 억압의 집단적 여정을 나타내는 집단적 환상을 가리킨다고 시사하지 않는다. 그런 알레고리에는 만족스러운 균형은 있겠지만 나는 차라리 독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하나의 고정된 해결보다는 <길들여지지 않은 정신분석학>이 갖는 문제로 보도록 초대하고자 한다. 『아이가 매맞고 있다』는 문장이나 그 외의 곳에서 여성을 속죄양으로 만들기를 주장하는 프로이트가 자신의 정치적 관심사가 불완전하게나마 드러내듯, 이 문장을 기화로 제국주의적 주체 생산을 주장하는 나 역시 나의 정치를 드러낸다고 하겠다.
프로이트는 그의 환자들이 자신에게 제시한 많은 유사한 실질적인 설명들로부터 하나의 문장으로 위 문장을 구축했다. 나는 그 문장에 대해 그가 취하고 있는 전략의 일반적인 방법론적 분위기를 빌려 오고자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독자와 텍스트(나의 문장) 사이의 거래를 나타내는 동형의 모델로서 분석 중의 전이(transference-in-analysis) 사례를 제시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전이와 문학비평이나 역사편찬 사이의 유사성은 비유를 생산적으로 남용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주체가 텍스트라고 말한다고 해서 언어 텍스트가 주체라는 반대되는 진술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프로이트가 그 마지막 문장을 생산해 낸 억압의 역사를 진술하는 경위에 매료된다. 그 역사는 유아의 기억상실에 감추어져 있는 기원과 같은 이중적 기원을 갖는다. 이렇게 보는 것은 억압의 역사를 인간과 동물이 아직 분화되기 전의 기원전(preoriginary) 공간을 함축한다고 가정하게 된다. 우리는 제국주의적 정치경제의 이데올로기적 위장을 서명하고, 또 내가 막 묘사한 문장을 생산하는 억압의 역사를 윤곽짓기 위해 마르크스주의적 내러티브에 이런 프로이트적 전략과 유사한 전략을 부과하도록 내몰리고 있다. 또한 이 역사는 다음과 같은 이중적 기원을 갖는다. 하나는 1829년에 영국이 과부 희생을 폐지한 사건 이면에 작동하고 있는 술책에 감추어져 있고, 다른 하나는 인두 고전 베다인 《리그베다 Rigveda》와 다르마샤스트라(Dharmasastra)에 자리잡고 있다. 또한 이 역사를 지탱하는 분화되지 않은 기원적 공간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내가 구축한 이 문장은 황인종 남자와 백인 남자들 사이의 관계(때때로 황인종 여자와 백인 여자의 관계도 끼어드는)를 묘사하는 많은 전위들(displacements) 중의 하나이다. 전위는 <과장된 찬사>에 관한 몇몇 문장들이나 데리다가 <상형문자적 편견>과 연결하여 말한 신성한 죄의식에 관한 몇몇 문장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제국주의적 주체와 제국주의 주체 사이의 관계는 적어도 애매모호하다.
힌두 과부는 죽은 남편의 장작더미에 올라가 거기서 자신을 희생시킨다. 이것이 소위 과부 희생이다.(이런 과부를 가리키는 산스크리트어가 사티〔sati〕이며, 식민주의 영국은 이것은 수티〔suttee〕로 옮겨 적었다. 이 의식(rite)은 보편적으로 실천된 것도, 특정 신분이나 계급에 고정된 것도 아니어서 굉장히 유동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영국이 이 관습을 폐지한 것은 <황인종 남자로부터 황인종 여자를 구해 준 백인 남자>의 사례로 일반적으로 이해되었다. 19세기 영국 선교사들의 기록에서부터 미국 페미니스트 메리 데일리에 이르기까지 어느 백인 여자도 이와 다른 대안적인 이해를 생산하지 않았다. 이런 진술에 대항해서 인도에 있었던 토착 논의는 <여자들이 실제로 죽고 싶어했다>는 것인데 잃어버린 기원에 대한 향수를 패러디한다고 하겠다.
이 두 진술은 서로를 합법화 해주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우리는 여자들 자신의 목소리나 의식을 증언하는 진술을 한번도 들어 보지 못했다. 물론 그런 증언은 이데올로기적으로 투명하지도, <완전히> 주체적이지도 않을 것이며, 위의 진술에 반대하는 진술을 생산하기 위한 요소들을 형성했을 것이다. 동인도 회사 기록에 포함된 경찰 보고서에 나오는 이 여자들, 순사(殉死)한 과부들의 이름조차 아주 기괴하게 잘못 옮겨 쓴 기록을 훑어 내려가면서 우리는 <하나의 목소리>를 짜맞출 수 없다.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은 골격만 남은 무지한 설명(예컨대 신분이 종족이라고 정규적으로 묘사된다) 중에서조차 존재하는 거대한 이질성․다양성이다. 탈식민 여성 지식인들 <백인 남자는 황인종 남자에게서 황인종 여자를 구해 주고 있다>는 식으로 구축될 법한, 변증법적으로 상호 교차하는 문장들에 직면해서 간단한 기호현상에 대한 질문―이것의 의미는 무엇인가와 같은―을 묻고 새로운 역사를 꾸며 내야 한다.
시민 사회 뿐만 아니라 좋은 사회가 국내의 혼란으로부터 생겨나는 순간을 지적해 내기 위해 법의 문자를 깨뜨리는 특별한 사건들이 종종 환기된다. 남자들이 여자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이 종종 그런 사건을 제공한다. 영국인들이 인도의 토속적인 관습/법에 대해 완전히 동등하게 대한 태도나 간섭하지 않은 태도를 자랑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드레트(J.M Derrett)는 법의 정신을 위해 문자를 위반하는 허가된 경우를 환기시킨다. 『힌두법에 가해진 최초의 법령은 단 한 사람의 힌두인의 동의도 받지 않고 수행되었다.』 여기서 그 법령의 이름이 무엇인지 밝히고 있지는 안다. 다음 문장에서는 그 조치의 이름이 나온다. 우리가 식민지에서 확립된 <좋은> 사회의 잔재가 탈식민 후에도 남는 현상의 의미를 고려해 본다면 다음 문장은 똑같이 흥미로울 것이다. 『독립한 인도에서 사티가 다시 등장한 것은 아마 가장 후진적인 인도 지역에서조차도 오래 살아 남을 수 없는 반계몽주의가 부흥한 것이다.』
이런 관찰이 정확하건 그렇지 않건 내게 흥미로운 것은 여성(오늘날 <제3세계 여성>의 보호가, 사회의 초창기에 문자만의 법, 즉 법적 정책상의 평등성을 위반해야만 되는 좋은 사회를 확립하는 데 필요한 기표가 된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 특별한 경우에서는 좋은 사회로 되어가는 과정 자체가, 의식으로서 관용되고 알려져 있고 칭찬받는 관습을 범죄로 재정의하는 것을 허용했다. 달리 말하자면 힌두법에서의 한 가지 사안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의 경계를 뛰어넘어 버렸다.
서유럽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푸코의 역사적 내러티브는 범죄자에 대한 관용이 그저 18세기 후반에 형법이 발전하는 현상에 선행한다(PK, 41)고 보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 <에피스테메>에 대한 그의 이론적인 묘사는 여기서 적절하다. 『에피스테메는 진실과 거짓의 분리가 아니라 과학적이지 않은 것과 과학의 분리를 가능하게 만드는 <장치>이다』(PK, 197). 즉 서로 대립되는 의식과 범죄, 미신에 의해 고정되는 것과 법과학에 의해 고정되는 것의 분리 말이다.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사티가 비약하는 것은 상업적인 영국 존재로부터 영토분할적이고 행정적인 영국의 존재로 변화하는 상황과 분명하고도 복잡한 관계가 있다. 경찰서, 하급/상급 법원, 섭정 동궁의 법원 등 사이에 행정적인 영국의 존재가 뒤따라 나올 수 있다. (토착 <식민주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티는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등장하여 역전된 사회적 비난을 담는 기표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다. 『서구의 영향에 노출됨으로써 심리적으로 주변부가 된 그룹들이……자신들에게나 다름 사람들에게 그들의 의식상의 순수함이나 전통 고급 문화에 대한 충성심을 입증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게 되었다. 사티는 그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 옛날 규범들이 내부에서 흔들리게 되었을 때 그 규범들에 순응한다는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
이것이 내 문장의 최초의 역사적 기원이라면 분명 그것은 일로서의 인류 역사, 자본주의적 팽창의 역사,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의 느린 해방, 생산양식에 관한 내러티브, 봉건주의에서 상업주의를 거쳐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상실된다. 그렇지만 이 내러티브의 불안한 규범성은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고 추정되는 변함없는 임시변통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이 내러티브를 유지하기 위하여 발걸음을 내딛는다. 자본의 논리 이야기는 서구의 이야기이며, 제국주의가 생산양식 내러티브의 보편성을 확립하고, 오늘날 하위주체를 무시하는 것이 아무튼 제국주의적 프로젝트를 지속하는 일임이 분명해질 때마다 말이다 .이리하여 내 문장의 기원은 더욱더 강력한 다른 담론들이 진동하는 사이로 상실된다. 여하튼 사티의 폐지 자체는 칭찬할 만한 일인데 내 문장의 기원을 지각하는 태도가 개입주의적 가능성을 담지할 것인지 여전히 궁금하게 여길 수 있을까?
좋은 사회의 확립자로서 제국주의의 이미지는 여성을 같은 종족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옹호하는 입장에 의해 지적된다. 우리는 겉으로는 여성에게 주체의 자유로운 선택 권한을 부여하는 가부장적 전략의 위장을 어떤 식으로 검토해야 할 것인가? 달리 말해 우리는 <영국>에서부터 <힌두교로>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 그런 시도만 해보아도 제국주의는 변색(색의 차이), 즉 유색인에 대한 단순한 편견과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 질문에 접근하기 위해 나는 다르마샤스트라(남아 있는 경전들)과 《리그베다》(지식의 찬양)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할 것이다. 이것들은 프로이트와 나 사이의 상등관계가 갖는 오랜 기원을 나타낸다. 물론 나의 태도는 모든 자료를 다 파고드는 철저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 독법은 탈식민 여성의 관심사가 개입된 비전문가로서 억압의 조제과정을 검토함으로써 여성 의식, 여성 존재, 좋은 여성, 좋은 여성의 욕망을 구축하는 대항 내러티브이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사회적 개인을 각인시키는 과정에서 기표로서 고정되지 않은 여성의 자리를 동시에 증명할 것이다.
내가 관심을 갖는, 다르마샤스트라의 두 순간들은 허가된 자살과 죽은 사람들을 위한 의식의 본성에 관한 담론이다. 과부의 자기 희생은 이 두 담론들 속에 틀지어져 있으면서도 그 규칙에 예외적인 사항인 것 같다. 일반적인 경전의 교리로 보자면 자살은 혐오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규정에 따른 실행(formulaic performance)으로서 자살이 갖는 현상적 정체성을 상실한 특정 자살 형식들이 존재할 여지 또한 있다. 허가된 자살의 첫 번째 범주는 타느바즈나나(tatvajnana), 진리에 대한 지식에서 나온다. 여기서 앎의 주체는 자기 정체성의 비실체성이나 단순한 현상성(비현상성과 동일한)을 포괄한다. 특정 시간 속에서 타트트바(tat tva)는 <바로 너>로 해석되는데 <바로>를 뺀 타트바(taatva)는 그것임(thatness) 또는 본질이다. 이렇게 계몽된 자아는 자기 정체성의 <그것임>을 진실로 안다. 그런 정체성의 분쇄는 아트마가타(atmaghata, 자아의 죽임)가 아니다. 지식의 한계에 대한 앎의 역설은 에이전시의 가능성을 부정하기 위하여 에이전시를 가장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 에이전시의 예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신기하게도 신들의 자기 희생은 자기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과 우주의 경제가 작동되는 데 유용한 자연생태학에 의해 허가된다. 인간 존재들보다는 신들이 거주하는, 전위들의 특정 고리로 이루어지는 논리 이전 단계에서 자사로가 희생(아트마가타와 아트마다나〔atmadana〕)는 <내부적인>(자기 지식) 허가와 <외부적인>(생태학) 허가로 딱히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런 철학적 공간은 자기를 희생시키는 여성을 수용하지 않는다. 진리-지식을 아무튼 쉽사리 증명할 수 있는 상태라고, 스미르티(smirti, 기억된 내용)보다는 스루티(sruti, 듣는 내용)의 영역에 속하는 상태라고 주장할 수 없는 자살들을 여성에게 허가할 여지가 어디에 있을지 찾아보다. 자살에 관한 일반적 규율에서 여성에게 적용되는 이런 예외는 계몽된 상태에서라기보다 일정한 장소에서 수행되는 자기 희생의 현상적 정체성을 폐기시킨다. 이리하여 우리는 내부적 허가(진리-지식)으로부터 외부적 허가(순례지)로 옮겨 가게 된다. 여성은 이런 유성의 (비)자살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순례지조차도 자신의 고유한 자아를 파괴하는 자살이라는 고유명사를 여성이 폐기하는 데에 적당한 장소가 아니다. 왜냐하면 죽은 배우자의 장작 위에서 수행된 여성의 자살만이, 허가받은 자기 희생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장작 위에서 자기 희생한 몇몇 남자들의 예가 힌두 고전에서 인용되고 있는데 스승이나 우월한 사람에 대한 열정과 헌신의 증거로서 의식 내부의 지배구조를 드러낸다). 자살이 아닌 이런 자살은 진리-지식과 경건한 장소 둘 다를 나타내는 이미지로 읽힐 수 있겠다. 만일 그 자살이 진리-지식을 가리킨다면 자신의 비실체성과 현상에 관한, 주체 안에서의 지식이 극화되어서 죽은 남편은 소멸된 주체의 외화된 예이자 장소가 되고 과부는 <그것을 실행하는> (비)행위자인 양한다. 만일 그 자살이 경건한 장소를 가리킨다면 자신으로부터 법적으로 전위된 여성주체가 소진되는 정교한 의식에 의해 구축되는 저 불타는 장작더미가 모든 신성한 장소를 가리키는 환유가 되는 것 같다. 자유로운 선택의 역설이 작동되는 것은 바로 여성주체라는 전위된 장소에 관한 이런 심각한 이데올로기의 견지에서이다. 남성주체에게 주목되는 것은 자살의 행복, 자살 자체의 지위를 확립시킨다기보다 폐기시키는 행복이다. 여성주체에게 허가된 자기 희생이란 허가되지 않은 자살에 부여되는 <타락>(pataka)의 효과를 부인하면서도 또 다른 기준에서 선택의 행위라고 찬양받게 된다. 순사는 성적 주체를 냉혹하게 이데올로기적으로 생산한다. 그리하여 여성주체는 그 죽음을 과부의 행위의 일반 법칙을 초과하는, 자기 욕망의 예외적인 기표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예외적인 규율은 특정 시기와 특정 지역에서 특정 계급에만 일반적인 규율이 되었다. 아시스 낸디(Ashis Nandy)는 18세기와 19세기 벵골에서 이 규율이 눈에 두드러지게 만연한 현상을 인구 조절에서부터 공동체의 여성혐오에 이르는 요소들과 연결시킨다. 확실히 이전 세기에 벵골에서 이 관습이 만연한 것은 인도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벵골에서는 과부가 재산을 상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국인들이 불쌍한 인도 여자들이 살육되고 희생된다고 본 것은 사실 이데올로기적인 전쟁터였다. 다르마샤스트라의 위대한 역사가인 칸(P.V.Kane)이 정확하게 관찰했듯이, 『벵골에서는 아들이 없는 집안의 과부에게 인척 재산에 대해 고인이 된 남편이 누렸을 권리와 거의 똑같은 권리가 주어진 (사실은)……살아 있는 식구들로 하여금 그녀가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순간에 그녀의 남편에 대한 사랑과 그녀의 헌신에 호소함으로써 과부를 없애 버리도록 수차 부추겼던 게 틀림없다』(HD Ⅱ. 2, 635)
하지만 자비롭고 계몽된 남자들은 이 문제에서 여성이 자유롭게 선택하는 <용기>에 동조했고 지금도 동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적 하위주체의 생산을 받아들인다. 『근대 인도는 사티 관습을 합리화하지 않는다. 다만 사티가 된 여자들, 여성다운 행위의 이상을 품고 자우하르(jauhar)를 수행한 인도 여자들의 냉엄하고 굽힐 줄 모르는 용기를 찬양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한다고 근대 인도인들을 비난하는 것은 왜곡된 심성이다』(HD Ⅱ. 2, 636). 장 프랑수아 료타르(Jean-Francois Lyotatd)가 <differend>라고 부른 바, 문제의 담론 양식으로부터 다른 담론 양식으로 접근할 수 없거나 번역할 수 없는 상황이 여기서 생생하게 예증되고 있다. 영국인들이 이교도적 의식으로 감지하던 담론이 범죄로 여기는 담론으로 깎아내려지면서(료타르가 주장하듯이 번역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자유의지에 대한 한 가지 진단이 다른 진단으로 대치된다고 하겠다.
물론 과부의 자기 희생은 변함없는 의식(儀式)적 처방은 아니었다. 하지만 과부가 의식의 문자를 초월하기로 결정한 이상, 그 결정을 되돌리는 것은 특정 처벌을 받아야 하는 위반이 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희생 행위를 감독하는 지방 영국 경찰한테 설득당해 과부가 자기 결정을 되돌리는 것은 진정한 자유로운 선택, 자유의 선택을 가리키는 지표가 된다. 토착 식민지 엘리트의 입장이 갖는 애매모호함은 이렇게 자기 희생하는 여자들의 순수함․힘․사랑을 민족주의 입장에서 낭만화하는 데서 드러난다. 그런 두가지 예를 들자면 라빈드라나스 타고르(Rabindranath Tagor)가 <자기를 부인하는 온정적인 벵골의 할머니들>에 바친 찬사와 아나다 쿠마러스와미(Ananda Coomaraswamy)가 <육체와 영혼의 완벽한 통일성의 마지막 증거>로 수티(suttee)에 바친 찬사이다.
분명히 나는 과부들을 죽이는 행위를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다. 자유에 관한 서로 경쟁하는 두 견해들 안에서 볼 때 삶에서의 여성주체 형성 자체가 <differend>의 장소임을 시사하고자 한다. 과부가 자기 희생하는 경우, 이제 의식은 미신이 아니라 범죄로 다시 정의된다. 사티는 <보상>으로서 이데올로기적인 집중을 받는다는 점에서 심각하였다. 제국주의가 <사회적 소명>으로서 이데올로기적인 에너지를 집중시켰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톰슨(Thompson)이 사티를 <처벌>로 이해한 것은 초점을 빗나간 것이다.
산 채로 마음대로 꿰찌르고 껍질을 벗기는 무굴〔Mogul, 16세기의 인도에 침입했던 몽고족 및 그 자손/역주〕인들이 수티에 대해 느꼈던 감정은 부당하고도 비논리적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또한 수티가 영국인의 양심에 충격을 주기 거의 1세기 전에 마녀 화형과 종교적 박해의 소란을 알았던 유럽인들 역시 몹시 잔혹한 처형 코드를 갖고 있으면서도 수티에 대해 느꼈던 감정이라는 것은 부당하고도 비논리적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차이점이란 다음과 같아 보였다. 즉 그들의 잔혹함에 희생되는 사람들은 그들을 범죄자로 간주하는 법에 의해 고통을 받았던 반면, 수티라는 희생자들은 아무 죄도 없이 단지 남자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만큼 육체적으로 약하다는 점 때문에 처벌받았다는 것이다. 순장 의식은 그밖의 어떤 다른 인간적 악도 드러내지 못할 타락성과 오만함을 입증하는 것 같았다.
18세기 가운데 후반 내내 인도의 영국인들은 브라만의 동질화된 힌두법에 따를 때 수티가 합법적인지 아닌지 학식 있는 브라만들에게 의견을 구했고 그들과 협력했다. 그 제휴는 설득당하지 않는 과부의 경우, 종종 이상한 것이었다. 어린 자식들을 두고 있는 과부들의 희생을 금지하는 샤스트리(Ssastri)에서 보듯, 때때로 영국의 협력은 혼란스러워 보인다. 19세기 호에 영국 당국과 특히 영국 본토의 영국인들은 브라만과 제휴함으로써 영국인들이 순장 관습을 용인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고 거듭 지적했다. 마침내 법이 씌어졌을 대 제휴의 긴 역사는 지워졌고 야만적인 악습을 실행하는 나쁜 힌두인에 반대하는 고상한 힌두인을 찬양했다.
수티의 실천은……인간 본성의 감정에 역겨운 것이다……. 많은 경우들에서, 힌두인 자신들에게도 충격적인 잔학한 행위들이 영원히 계속되었다……. 바로 이런 고찰에 고무되어 협의회에서 총독은 다음 법령을 확립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정의와 휴머니티라는 최상의 명령들을 범하지 않고 제도를 지킬 수 있는 한, 모든 계층의 백성들이 안전하게 그들의 종교적 용례를 준수하도록 해야 한다는, 인도에서 영국 통치제도의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원리들 가운데 하나로부터 떨어져 나올 의향은 추호도 없이 말이다. (HD Ⅱ. 2, 624-25).
이것이 자살을 죄로 보기보다 예외로 보고 거기에 등급을 두어 승인하는 대안적인 이데올로기였다는 사실은 물론 이해되지 않았다. 아마 사티는 고인이 된 남편이 초월적인 존재를 대표하는 가운데 순교하는 존재로 읽혀야 했을 것이다. 혹은 전쟁과 더불어 주권자나 국가를 대표하는 남편과 더불어 주권과 국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기를 희생한다는 도취적인 이데올로기가 동원될 수도 있다. 실제로 사티는 자살, 영아살해, 낡은 것의 치명적인 노출로 범주화되었다. 여성으로 형성되는 성적 주체의 자유의지라는 수상한 자리는 성공적으로 지워졌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추적할 수 있는 주체의 편력이란 없다. 다른 허가된 자살들이 여성 주체 형성의 장면을 포함하지 않았던 이래로 그 자살들은 고전적 기원―다르마샤스트라―에서의 이데올로기적 전쟁터에도, 의식을 범죄로 재기입하고 영국 쪽에서 폐기하는 장면에도 들어가지 못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된 유일한 변혁은 마하트마 간디가 배고픈 자의 스트라이크라는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개념을 저항으로 재각인한 데서 일어났을 뿐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저 다채로운 바다-변화의 세부사항들을 논의할 장소가 아니다. 나는 그저 독자들이 과부 희생과 간디식 저항의 아우라를 비교해 보기를 바라고 초대할 뿐이다. 사티아그라하와 사티의 처음 어근은 같다.
푸라나 시기(400년경)가 시작한 이래, 학식 있는 브라만들은 일반적으로 신성한 장소에서 허가되는 자살에 대해서도 그렇고 사티의 원론적인 적절성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은 학술적인 방식으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때로는 순장 관습의 출처가 문제로 떠올랐다. 하지만 과부들이 브라마카르야(bramacarya)를 지켜야 한다는 일반법에 대해서는 거의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브라마카르야를 <수절>로 번역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존재의 네 단계를 언급하는 힌두(브라만)의 규정적(regulative) 심리전기에서 브라마카르야는 결혼의 친족관계에 선행하는 사회적 실천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남자―홀아비나 남편―는 바나프라사(vanaprastha, 숲의 생활)을 거쳐 성숙한 금욕과 삼냐사(samnayasa)의 포기(버림) 단계로 들어간다. 아내인 여성인 가르하스샤(garhasthya, 살림)에 필요불가결한 존재이며 남편을 따라 숲생활에 동반할 수도 있다. 여성은 (브라만의 제재에 따르면) 금욕주의의 최종적 단계인 삼냐사에 접근하지 못한다. 신성한 교리의 일반법에 따르면 과부가 된 여자는 정지상태로 바뀐 내부로 퇴행해야만 한다. 이런 법에 수반되는 제도적인 해악들은 잘 알려져 있다. 나는 이 법이 성적 주체의 이데올로기적인 형성에 불균형적으로 초래된 결과를 고려해 보고 있는 중이다. 그리하여 힌두인들 사이에서나 힌두인과 영국인들 사이에서나 자기 희생의 예외적인 경우를 적극 주장하지 않고 비예외적인 과부들의 운명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다는 사실은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닌다. 바로 여기서 (성적으로) 하위주체를 복원시킬 가능성이 다시금 상실되고 중층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체의 지위에서 법적으로 프로그램된 불균형으로 말미암아 여성은 한 남편의 대상으로 효과적으로 정의된다. 분명히 이런 불균형은 법적으로 균형된 남성의 주체지위를 위해 작동한다. 그리하여 과부의 희생은 남성의 법적 주체지위에 예외라기보다는 일반법의 극단적인 경우가 된다. 그렇다면 다른 여성들과의 경쟁을 통해 단독 소유자의 대상이 되는 삶을 강조함으로써 사티가 받는 하늘의 보상을 구한다고 해서 놀랄 것도 없다. 거기서는 저 황홀경에 빠진 천상의 댄서들, 여성의 아름다움과 남성 쾌락의 권화들이 사티를 칭찬하는 노래를 부른다. 『하늘에서 남편에게 유일하게 헌신하고 아프사라스(apsaras. 하늘의 댄서들) 그룹의 찬사를 받는 그녀는 열네 분의 인타라(천둥과 비를 관장하는 베다교의 으뜸 신)가 다스릴 만큼 오랫동안 남편과 재미있게 논다』((HD Ⅱ. 2, 631).
이렇게 여성의 자유의지를 자기 희생에서 구하는 데 깃든 심각한 아이러니는 앞에서 인용한 구절에 뒤따라 나오는 시에서 다시 한 번 나타난다. 『여자(아내)가 죽은 남편을 따라 자기 몸을 불태우지 않는 한, 자신의 여성 육체(탄생의 사이클)로부터 결코 해방되지 못한다.』 여성에게만 허가된 자살은 개인적 에이전시로부터 해방되는, 가장 미묘하고도 일반적인 해방을 작동시키면서도 개인적 에이전시를 초개인적 에이전시와 동일시함으로써 그 이데올로기적인 힘을 끌어오고 있는 셈이다. 당신 남편의 장작 위에서 지금 너 자신을 죽여라. 그러면 탄생의 사이클 속에 있는 네 여성 육체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역설을 좀더 비꼬아 보면 자유의지에 대한 이런 강조 자체가 여성 육체를 장악하고 있는 특이한 불행을 확립시킨다. 실제로 불타는 자아에 해당하는 단어는 가장 고상한 의미로 정신을 가리키는 표준어(아트만)이다. 반면 <해방시키다>라는 동사는 가장 고상한 의미에서의 구원의 어근을 통해 수동태로 쓰이고 있으며, 탄생의 사이클에서 폐기되는 것은 늘상 사용하는 육체이다. 그 이데올로기적 메시지는 자비로운 20세기 남성 역사가의 찬탄에 씌어 있다. 『치토르(Chitor)나 다른 지역들의 라즈푸트〔Rajput:인도의 무사 계급의 일원인 크샤트리아/역주〕부인들이 승리한 모슬렘의 수중에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잔학한 행위를 당하지 않기 위해 실행하는 자우하르(Jauhar. 귀족 라즈푸트 전쟁 과부들이나 절박한 전쟁 과부들이 그룹으로 하는 자기 희생)는 너무 잘 알려져 있어서 새삼 길게 주목할 필요가 없다』(HD Ⅱ. 2, 629)
엄밀히 말해서 자우하르는 사티의 행위가 아니다. 또한 모슬렘이든 그 외 남성 정복군에게 허가되는 성폭력을 대변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것에 부딪힌 여성의 자기 희생은 강간을 <자연스런> 것으로 합법화하고 결국 여성의 독자적인 성기를 소유하기 위해 작동하는 것이다. 정복자들이 영구화하는 집단 강간은 영토 획득을 축하하는 환유이다. 과부들을 위한 일반법에 대해 추호도 의문을 품지 않듯이 여성 영웅주의 행위도 아이들에게 일려 주는 애국 이야기 가운데 살아남아 가장 조잡한 이데올로기적 생산을 일삼는 수준에서 계속 작동된다. 여성 영웅행위는 또한 힌두 공동체주의를 실행하는 가운데 중층결정된 기표로서 엄청난 역할을 수행해 왔다. 이와 동시에 성적 주체의 형성이라는 더욱 광범위한 문제는 사티를 둘러싼 눈에 보이는 폭력만을 내세움으로써 은폐되고 만다. (성적으로) 하위주체를 복원하는 과제는 옛날부터 있었던 제도적인 텍스트성 속에서 상실된다.
내가 앞서 언급했듯이 고인에게 남은 여성 식구에게 재산 소유자로서 법적 주체의 지위가 일시적으로 부여될 수 있을 때 과부들의 자기 희생은 엄격하게 강요되었다. 그렇게 강화되는 데 가장 큰 권위를 행사한다고 생각된 15/16세기 법률 존중주의자 라구난다나(Raghunandana)는 자기 텍스트로 가장 오래 된 힌두 경전이나 슈루티(Sruti) 중에서 첫 번째 텍스트인 《리그베다》에 나오는 이상한 구절을 택한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그는 허가를 내리는 바로 그 자리에서 시행되는 특이하고도 투명한 오독을 기념하는 오랜 전통을 따르고 있는 셈이다. 죽은 사람들을 위한 의식 중 몇 단계의 개요를 그리는 대목이 여기서 나온다. 간단하게 읽어 보아도 그것은 <과부들에게가 아니라 친척 남자가 고인이 되었지만 남편은 살아 있는 귀부인들에게 말하는> 내용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왜 이 구절이 권위적인 것으로 대체되었을까? 죽은 남편을 살아 있는 남편으로 슬그머니 바꾼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해 온 것과 다른 측면에서 오랜 기원을 갖는 신비의 질서이다. 『살아 있는 가치 있는 남편들이 자기들 눈에 깨끗한 버터를 바르고 집에 들어오게끔 하라. 이 아내들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지 않고 건강하고 잘 차린 상태로 먼저 집에 들어가게끔 하라』(HD Ⅱ. 2, 634). 그러나 이 중요한 전환이 여기서 유일한 실수는 아니다. 권위는 또 다른 논쟁적인 구절과 대안적인 독법에 맡겨져 있다. 여기서 『이 아내들로 하여금 먼저 집에 들어가게끔 하라』고 번역된 두 번째 줄에서 <먼저>에 해당하는 단어는 아그레(agre)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아그네(agne), 즉 <불>이라고 읽었다. 하지만 칸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듯이 『이런 변화가 없다고 하더라도 아파르카(Apararka)와 다른 사람들은 사티의 실천을 바로 이 구절에 의존한다』(HD Ⅱ. 2, 199). 여성 하위주체의 역사의 기원주위에 또 하나의 스크린이 여기 있다. 우리는 『그러므로 MSS가 오염된 것이든, 라구난다나가 순진하게 실수한 것이든 어느 한편이라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HD Ⅱ. 2, 634)와 같은 진술을 역사적으로 해몽해야 한단 말인가? 시의 나머지 부분은 과부들을 위한 정지된 브라마카르야의 일반법―사티는 여기에 예외적인―을 다루고 있거나 <과부와 결혼함으로써 고인이 된 남편의 자손을 양육할 형제나 가까운 인척을 지정하는> 니요가(niyoga)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해야 한다.
칸이 다르마샤스트라사의 권위자라면, 무랄(Mulla)의 《힌두법의 원칙들 Principles of Hindu Law》은 그 실제적인 안내자이다. 우리가 여기서 파헤치려고 하는 것은 프로이트가 <솥 논리>(kettle logic)라고 부른 것을 구성하는 역사적 텍스트의 일부이다. 물라의 책이《리그베다》에 나오는 시를 살펴보면서 <옛날 텍스트들 중 몇몇 텍스트에서 과부들의 재혼과 이혼을 인정하고> 있는 증거라고 확정적으로 제시하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우리는 요니(yoni)라는 단어의 역할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지역을 표시하는 부사 아그레(앞에서)와 함께, 맥락상 그 단어는 <거주 장소>를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이 <성기>(아직 특별히 여성 성기는 아닌)의 원천적인 의미를 지우지는 못한다. 이 경우 요니라는 이름이 환기하는 거주 장소에 들어가는―그리하여 맥락 외적인 초상이 거의 시민적 생산이나 탄생으로의 입문이 되는―잘 차려 입은 아내를 찬양하는 구절을 우리는 자기 희생이라는 선택을 하게 되는 아내의 출처로 볼 수 있는가? 역설적으로 질과 불의 이미지적 관계는 출처 주장에 일종의 힘을 실어 준다. 이 역설은 『그들로 하여금 먼저 유체의 거주지(혹은 물론 요니라는 이름을 가진 기원―로한두자라요니마그네〔rohanatujalayonimagne〕)나 불(혹은 불의)에 먼저 올라가도록 하여라』라고 라구난다나가 수정한 구절에 의해 강화된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불이 물만큼 차가울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HD Ⅱ. 2, 634)고 왜 우리는 수긍해야만 하는가? 타락한 문구인 흐르는 불의 성기는 타트바즈나나(진리-지식)의 지적 미결정성을 가리키는 이미지를 제공하는 성적 미결정성을 형상화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위에서 여성의 의식, 나아가 여성 존재, 좋은 여성, 좋은 여성의 욕망, 여성의 욕망을 새로 구축하는 대항 내러티브에 관해 썼다. 이런 빗나감은 사트의 여성형인 사티라는 단어 자체에 각인된 분열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사트는 남성성에 대한 사회적으로 특정하게 형성된 관념을 넘어서는 인간적 보편성뿐만 아니라 정신적 보편성으로 올라간다. 그것은 <있다>라는 동사의 현재분사로서 존재뿐만 아니라 진실․선․올바름을 의미한다. 경전에서 그것은 본질이자 보편정신이다. 접두어로서 그것은 적절한․지고의․적당한이라는 뜻을 갖는다. 존재에 관한 하이데거의 명상에서처럼 현대 서구 철학 중에서도 가장 특권적인 담론에 들어간 것만 봐도 충분히 고상한 것이다. 그런데 이 단어의 여성형인 사티는 그저 <좋은 아내>를 의미할 뿐이다.
과부의 자기 희생 의식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인 사티나 수티가 영국인들 편에서의 문법적 오류를 전문어로 기념하게 된 것이다. 이제 이 사실을 폭로할 때이다. <미국 인디언>은 콜럼버스의 사실적 오류를 기념한다. 다양한 인도어 중에서 그런 단어가 바로 <불타는 사티>, 즉 좋은 아내이다. 그리하여 브라크리야 중인 과부의 퇴행적인 정지상태를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 단어는 그 상황의 인종적․계급적․성적 중층결정항들을 예시하며 아무리 뭉툭해지더라도 아마 그 뜻은 포착될 수 있을 것이다. 황인종 남자들에게서 황인종 여자들을 구해주려고 애쓰는 백인 남자들은 담론적 실천 안에서 좋은 아내됨을 남편 장작 위에서의 자기 희생과 절대적으로 동일시함으로써 황인종 여자들에게 더 큰 이데올로기적 억압을 가한다. 이렇게 대상을 형성하는 다른 편에서는 내가 지금껏 논의하려고 했듯이, 여성주체 형성의 힌두적 조정이 있는데 대상의 폐지(혹은 제거)가 단순한 시민사회와 구별되는 좋은 사회를 확립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미 나는 1928년에 발간된 에드워드 톰슨의 《수티》에 대해 언급했다. 아는 여기서 제국주의를 문명화라는 소명으로 합리화하는 이 완벽한 예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없다. 공공연히 <인도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썼다는 그의 책 어디에서도 영토 확장주의와 산업 자본의 경영이 촉발한, 인도에서 영국이 보여 준 <자비로운 냉혹함>에 대한 의문을 품지 않는다. 실로 톰슨의 책이 갖는 문제는 합리적인 휴머니티의 투명한 목소리를 들려 주려는 <양식 있는 남자>의 시각으로부터 국가 수뇌들과 영국 행정가들의 견지에서 지속성 있고 동질적인 <인도>를 구축하려고 하는, 재현의 문제이다. 여기서 톰슨이 수티를 언급하는 이유는 자기 책의 첫 번째 문장에서 사티를 <충실한>이라는 뜻을 갖도록 마무리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부정확한 번역인데도 여성주체를 20세기 담론에 집어넣기 위해 영국적인 허용을 감행한 것이라 하겠다.)
찰스 하비(Charles Hervey) 장군이 사티 문제에 내린 평가를 톰슨이 칭찬하는 대목을 고려해 보자. 『하비는 여성에게서 아름다움과 지조만을 찾는 제도를 동정하는 구절을 쓰고 있다. 그는 비카니르 라자스(Bikanir Rajas)의 장작 위에서 죽은 사티들의 이름을 확보했다. 그 이름들은 <빛의 여왕, 햇빛, 사랑의 즐거움, 화환, 발견된 미덕, 에코, 부드러운 눈, 위로, 달빛, 사랑에 애달픈, 소중한 마음, 눈의 유희, 나무 태생, 미소, 사랑의 봉우리, 즐거운 징조, 가득 찬 안개, 구름을 내뿜는 여인> 등인데 마지막 이름이 애호하는 이름이었다.』 다시금 톰슨은 <그의 여자>(그가 선호하는 문구)에 상층 빅토리아인의 전형적인 요구들을 부가하면서 <제도>에 대항해 구원할 힌두 여자를 자신의 여자로 전유한다. 비카네르(Bilkaner)는 라자스탄(Rajasthan)에 있다. 특히 지배계층 내부에서 라자스탄의 순장 논의는 모두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힌두(혹은 아리아인의) 공동체주의를 구축하는 태도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사티가 가장 흔히 쓰인 벵골에서 직공․농부․시골 사제․전주․서기와이들과 비교할 수 있는 사회그룹들이 가련하게도 사티라고 잘못 쓴 이름들을 한번 봐서는 그런 수확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톰슨이 벵골인들에 대해 즐겨 쓴 형용사는 <비겁한>이다). 혹 그랬을 수도 있다. 고유명사를 보통명사로 전환하고 번역하여 그 보통명사를 사회학적 증거로 이용하는 것보다 위험한 오락은 없을 것이다. 나는 그 리스트에 있는 이름들을 다시 구축하려고 시도하는 가운데 하비와 톰슨의 오만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예컨대 <위로>란 무엇이었단 말인가? 그것은 <산티>(Shanti)였던가? 독자들은 엘리엇(T.S. Eliet) 시인의 《황무지 The Waste Land》의 마지막 줄을 상기할 것이다. 거기서 산티라는 단어는 인도에 관한 상투형들 중 하나를, 보편적인 우파니샤드의 장엄함을 가리키는 표식을 담는다. 아니면 <스와스티>(swasti)였던가? 독자들은 가정적 위로(우리 가정을 축복하소서>에서처럼)의 브라만적 표식인 스와스티카(swastika)―아라비아인의 헤게모니를 범죄로 패러디함으로써 상투적으로 된―를 상기할 것이다. 이런 두 가지 전유 중에서 우리의 아름답고 지조 있는 불타 버린 과부는 어디에 있는가? 그 이름들의 분위기는 사회학적 정확성보다는 《오마른 하이얌의 루바이야트 Rubaiyat of Omar Khayyam》의 <번역자>인 에드워드 피츠제럴드(Edward FitzGerald)와 같은 작가들에게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들은 소위 번역의 <객관성>으로써 그려진 동양 여성의 일정한 상을 구축하는 데 일조했다. (여기서 사이드〔Said〕의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1978)도 그 출처가 되는 텍스트로 남아있다. )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이나 위신 있는 미국 남부 회사들의 이사회가 아무렇게나 뽑은 번역된 이름들은 이런 종류의 계산을 통해 대천사의 성인중심 신정정치의 잔혹한 면을 증거하는 자료로 제시되곤 하였다. 또한 그런 펜의 움직임은 <보통명사> 위에서 영구화될 수 있지만 고유명사는 그 술수에 가장 민감하게 영향받는다. 그리고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것도 바로 사티를 둘러싼 영국의 술수이다. 톰슨은 그런 식으로 주체를 길들인 후에 <사티의 심리학>이라는 제목하에 『나는 이것을 검토해 보려고 노력할 생각이었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사티는 내게 더 이상 수수께끼처럼 보이지 않았다』라고 쓸 수 있는 것이다.
가부장제와 제국주의 사이에서, 주체구성과 대상형성 사이에서 여성의 모습은 본래의 무(無)가 아니라 격렬한 진동 속으로, 전통과 근대화 사이에 사로잡힌 <제3세계 여성>이라는 잘못된 형상화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이런 점들을 고려함으로써 서구 섹슈얼리티의 역사에서나 타당해 보이는 모든 세부적인 판단을 수정하게 될 것이다. 푸코는 『억압의 속성이 이런 것이라서 단순한 처벌적 법을 유지하는 금지들과 구별된다. 억압이란 사라지라는 선고뿐만 아니라 침묵하고 비존재(non-existence)를 긍정하라는 명령의 기능을 잘 수행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모든 것에 대해서 말할 것도, 볼 것도, 알 것도 없다고 진술하게 한다』고 《섹슈얼리티의 역사》에서 쓰고 있다. 제국주의 속에서 여성의 사례로서 수티(suttee)의 경우는 주체(법)와 지식의 대상(억압) 사이의 이런 대립에 도전하고 그것을 해체할 것이며 침묵이나 비존재와는 다른 무엇으로써, 주체와 대상 지위 사이의 격렬한 아포리아로써 <사라진> 자리를 가리킬 것이다.
사티는 오늘날 인도에서 여성의 고유명사로서 상당히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여아에게 <좋은 아내>라는 이름을 갖다 붙이는 것은 자체의 예기된 아이러니를 갖는다. 그리고 이 보통명사의 의미는 고유명사에서의 제1차적인 작동요소가 아니기 때문에 그 아이러니는 더욱 크다. 아이에게 그런 이름을 붙이는 이면에 힌두사회의 사티, 좋은 아내로 나타난 더가(Durga)가 버티고 있다. 그 이야기 중에서 사티―이미 그렇게 불리고 있는―는 초대받지 않은 채, 심지어 자신의 남편 시바(Siva)의 초대도 받지 않은 채 아버지의 집뜰에 도착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시바를 학대하기 시작하고 사티는 고통을 받으며 죽는다. 시바가 분노하며 도착하고 자기 어깨에 사티의 시체를 걸머지고 우주 위에서 춤을 춘다. 비스누(Visnu)는 사티의 몸을 잘라 그 조각을 대지 위에 흩뿌린다. 그런 조각들 주변에 위대한 순례지가 생긴다.
아스나(Athena) 여신―<자궁에 오염되지 않았다고 스스로 공언하는 아버지의 딸들>―과 같은 인물들은 본질주의적 주체에 대한 해체주의적 태도와 구별되는, 여성의 이데올로기적 자기 비하를 확립시키는 데 유용하다. 신화에 나오는 사티의 이야기는 의식의 모든 내러티브 요소를 역전시키면서 비슷한 기능을 수행한다. 살아 있는 남편이 아내의 죽음에 복수하며 위대한 남성신들 사이의 거래는 여성 육체의 파멸을 완수하고 그리하여 대지를 신성한 지리로 각인시킨다. 이것을 고전적 힌두교나 여성 중심적인 인도문화의 페미니즘을 나타내는 증거로 보는 것은 토속주의나 그 역전된 형태인 인종중심주의에 의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오염된 것이다. 마치 찬란하게 싸우는 어머니 더가의 이미지를 지우고 사티라는 고유명사에다가 구원받을 수 있는 신성한 제물로서 무력한 과부를 불태운다는 의미만 부여하는 결과가 제국주의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성적 하위주체가 말할 수 있는 공간이란 없다.
사회화된 자본하에서 억압받는 자들이 <정확한> 저항에 직접 접근하지 못한다면, 주변부 역사에서 나온 사티의 이데올로기가 개입주의적 실천 모델로 변형될 수는 없을까? 이 에세이에서는 상실된 기원들에 대한 그런 분명한 모든 향수는 특히 반헤게모니적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근거로서 의심스럽다는 개념을 따르고 있는 만큼 나는 하나의 예로써 내 논의를 계속해 나가야 할 것이다.
(여기서 내가 제공하는 예는 자기 파멸을 일삼는 어떤 격렬한 힌두 자매애를 호소하자는 것이 아니다. 영국화한 인도인을 힌두법상 힌두인으로 정의하는 것은 인도의 이슬람 지배자들에 대해 영국인들이 벌이는 이데올로기적 전쟁의 표식들 중 하나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그 전쟁에서 중요한 복병 하나가 분할이었다. 게다가 내 견해로는 이런 종류의 개인적 예들은 개입주의적 실천 모델로서는 비극적인 실패일 뿐이다. 나는 그런 모델들 자체의 생산에 대해 의문을 품기 때문이다. 한편 담론 분석의 대상으로서 개인적인 예는 자기를 포기하지 않는 지식인에게 사회적 텍스트의 한 섹션을 되는 대로라도 밝혀줄 수 있을 것이다.)
열여섯 살이나 열일곱 살 되는 젊은 처녀인 부바네스와리 바두리(Bhuvaneswari Bhaduri)가 1926년에 북캘커타에 있는 자기 아버지의 점잖은 아파트에서 목을 맸다. 부바네스와리는 그때 생리중이었으므로 분명 혼외임신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 때문에 그 자살은 기이하게 보였다. 거의 10년 후에 그녀는 인도 독립을 위한 무장 항쟁에 개입한 많은 그룹들 중 한 멤버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마침내 근에게는 정치 요인을 암살하라는 임무가 맡겨졌다. 그녀는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으면서도 그 실제적인 필요성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살하고 말았다.
부바네스와리는 자신의 죽임이 불법적인 열정의 결과로 판단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생리가 시작될 때를 기다렸다. 좋은 아내자격을 인정받기를 틀림없이 기대했던 브라마카리니(brahmacarini)로서 부바네스와리는 생리를 기다리면서 아마 개입주의자의 방식으로 사티의 자살에 관계된 사회적 텍스트를 다시 썼을 것이다. (설명할 수 없는 그녀의 행위를 시험삼아 한번 설명해 보자면 그녀가 너무 나이 들어 아내가 될 수 없을 거라고 그녀를 반복해서 놀려먹은 형부가 초래한 우울증이 원인이었을 수 있다.) 그녀는 독신 남성에 의한 합법적인 열정 안에 자기 육체를 감금하는 것을 자기 육체의 생리학적 각인 속에서 전위시키려고(그저 거부할 뿐만 아니라) 엄청난 수고를 치름으로써 여성에게 허가된 자살 동기를 일반화하였다. 그 즉각적인 맥락에서 보자면 그녀의 행위는 불합리한 것이었고 정상이라기보다는 환각에 빠진 경우였다. 생리를 기다리는 치환 제스처는 우선 자신을 희생시키려는 과부가 생리중이어서는 안 된다는 금지를 역전시키는 것이다. 더러운 과부는 자신의 수상한 특권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생리를 하지 않는 나흘째 되는 날에 목욕하고 몸을 깨끗하게 할 때까지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바네스와리의 자살을 읽을 때, 그 자살은 찬란하게 싸우는 더가 가족에 대한 헤게모니적 설명만큼이나 사티의 자살을 둘러싼 사회적 텍스트를 별다른 강조 없이 특히 하위주체의 입장에서 다시 쓰는 것이라고 하겠다. 싸우는 어머니에 대한 헤게모니적 설명에 이견을 제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대두하고 있는 현상은 독립 운동에서의 남성지도자들과 참여자들의 담론을 통해서 자료로 훌륭하게 남아있고 널리 기억되고 있다. 여성으로서 하위주체는 들릴 수 없고 읽힐 수 없다.
나는 가족적인 끈에 의해 부바네스와리의 삶과 죽음에 대해 알고 있다. 그 끈들을 좀더 철저하게 검토하기에 앞서, 그 작업의 출발점으로 나는 초기의 지적 산물이 내 것과 거의 동일한 철학자이자 산스크리트 학자인 벵골 여성에게 부바네스와리에 관해 물어보았다. 두 가지 반응이 나왔다. 하나는 부바네스와리의 두 자매―놀랍고도 완전한 삶을 영위한 사이레스와리(Saileswari)와 라세스와리(Raseswari)―대신 불운한 부바네스와리에 왜 내가 관심을 갖느냐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 벵골 여성의 조카가 보여 준 반응인데 불륜을 저지른 경우 같다고 한 것이다.
나는 이 그에서 데리다식의 해체―페미니즘 입장에서 그대로 환호할 수만은 없는―를 이용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해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내가 제기한 문제틀의 맥락에서는 더욱 <정치적인> 이슈들에 대한 푸코나 들뢰즈의 즉각적이고 실질적인 관여보다 데리다의 형태학(morphology)이 훨씬 더 힘들고도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여성이 되라>는 푸코나 들뢰즈의 초대는 열렬한 급진주의자인 미국 학자들에게는 더욱 위험한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급진적인 비판 자체에, 타자의 동화를 통해 타자를 전유하는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애초에 있는 비유의 남용을 읽고 있다. 그는 <우리 안에 있는, 타자의 목소리인 내면의 목소리를 환각으로 만드는> 유토피아적인 구조적 충동을 다시 쓰기를 요청한다. 여기서 나는 《섹슈얼리티의 역사》나 《천의 고원》의 저자들에게서 더 이상 발견할 것 같지 않은, 데리다가 갖는 장기간의 유용성을 인정해야겠다.
하위주체는 말할 수 없다. 지구적 세탁소 리스트에 <여성>을 신성한 항목으로 또 하나 올린다고 해서 무슨 득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재현은 완전히 시들어 버리지 않았다. 여성 지식인은 지식인으로서의 어떤 제한된 과제를 가지고 있다. 한번의 화려한 몸짓으로써 결코 부인해서는 안 되는 과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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