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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귀신 - 조선시대 여인의 한과 복수 ㅣ 키워드 한국문화 6
최기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얼마 전 한 외고생이 제 엄마에게 유서를 남기고 베란다에서 투신했다. 유서는 단 네 글자였다. “이제 됐어?” 엄마가 요구하던 성적에 도달한 직후였다. 그 아이는 투신하는 순간까지 다른 부모들이 부러워하는 아이였고 투신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런 아이였을 것이다. 스스로 세상을 떠나는 아이들이 매우 빠르게 늘고 있다. 아이들은 끝없이 죽어 가는데 부모들은 단지 아이를 좀더 잘살게 하려 애를 쓸 뿐이라 한다. 대체 아이들이 얼마나 더 죽어야 우리는 정신을 차릴까?
- <한겨레> 2010.7.7 '야, 한국사회' 김규향의 칼럼 중에서
"이제 됐어?"
이렇게 짧고 그러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 유서를 읽어본 기억이 없다. 모든 자살은 충격적이다. 그렇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처럼 애틋한 죽음도 있고 스스로 곡기를 끊고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스콧 니어링의 경우처럼 품위 있는 죽음도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자살이란 "사회적 약자가 비자발적인 타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마지막 대안일 때가 많다."(p26) 그렇게 죽은 이들은 원한을 가진 귀신으로 이야기 속에 등장하며 그 대표적인 예가 처녀귀신이라고 할 수 있다.
<처녀귀신>은 조선시대 야담과 고소설에 등장하는 억울하게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인에게 귀신 이미지가 유독 처녀귀신으로 고착된"(p173) 이유를 묻는다. 사대부를 위한 여담이라 할 수 있는 조선후기 야담집 속의 귀신 이야기가 사대부에게 어떤 식으로 봉사를 했는지를 살피고, 죽어서도 존경받는 남자 귀신(조상신)과 구천을 떠돌다 구원자(남성 관리)에 의해 원을 풀고 자취없이 사라지는 여자 귀신(원귀)을 대비한다.
또한 <처녀귀신>은 "부모의 명을 따라 혼인해야 했던 딸, 전쟁의 폭력 속에서 성적으로 희생당한 여성, 사랑의 자율성을 원천적으로 차단당한 처녀, 재혼 가정에서 소외되었던 전실의 딸, 일부일처제로 구성된 가족관계망의 바깥에 있었기에 출산과 양육의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던 첩, 남자의 사교 파트너로만 인정되었던 기생 등"(p173) 조선시대 여성들이 귀신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자살과 원한, 저주와 복수라는 굴레 속에서 귀신이 되어서야 비로소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던 전근대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근대에서 압축적 근대화를 이루고 이제 당당히(?) 세계화로 달려가는 한국사회는 어떨까? 영화 <여고괴담> 시리즈나 <장화, 홍련>, <분홍신>, 드라마 <M>의 경우에서도 보듯 이제 더 이상 소복 입고 긴 머리를 늘어뜨린 처녀귀신은 아니라 하더라도 여전히 공포물에는 여고생, 소녀, 미혼 여성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어쩌면 처녀귀신은 여름이면 <전설의 고향>으로 소비되고 향유되는 소품이 되었다면 이제 등골 서늘한 원귀,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인해 죽음을 강요받고 이야기 속에서 복수를 해야만 하는 존재는 1960~70년대 김기영 감독의 영화 <하녀>에서 등장하는 여공, 그리고 미혼모와 여고생으로 전이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인신매매에 가까운 형태로 돈에 팔려 들어오는 이주여성,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인종주의와 편견, 차별에 의해 고통받는 이주민 가정의 여성들, 장애를 이유로 20~30년을 시설에 갇혀 살아가야만 하는 이들, 외모로 대표되는 몸 자본을 갖지 못한 이들, 가정의 파탄으로 몸 자본 하나로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청소녀들...
비자발적으로 타의에 의해 마지막 선택을 강요받는 이들의 목록은 별로 줄어들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처녀귀신>은 조선시대 마이너리티의 목소리와 거기에 담긴 불편한 진실을 들추고자 하는 작업인 동시에 지금 이 시대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일 수도 있다.
아쉬움...
너무나 도발적인 제목은 실망을 불러오기 쉽다. 누가 '처녀귀신'이라는 제목의 책을 보고 집어들어 펴보지 않을 수 있겠나? 하지만 '조선시대 여인의 한과 복수'라는 부제가 오히려 정직한 제목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 실망감은 저자의 잘못은 아니다. 문학동네의 '키워드 한국문화' 시리즈 여섯 번째 편인 <처녀귀신>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재발견하는작업"이라는 시리즈 기획의도에 충실하다. 또한 국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야담과 고소설을 적절히 인용하며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저자에게 역사적, 문화적, 사회학적 분석이 부족하거나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하는 것도 옳지 않다.
다만 그런 작업이 더해져 처녀귀신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미시사적인 접근으로 조선시대를 새롭게 재해석하고, 지금 이 시대의 '처녀귀신'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소비되는지를 문화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면서 이 시대를 비판하는 텍스트가 되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제목이 너무 섹시한 까닭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