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그을 곳이 너무 많다!
<모멸감>의 연장에서 한국사회 필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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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 들어오고, 사람이 되는가?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받아들여진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에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사람이 된 것인가? 다시 말해서 '사람'이라는 것은 지위인가 아니면 조건인가? -25쪽
군인에게 우호(또는 환대)의 권리가 없다는 것과 그가 물건처럼 소모된다는 사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환대는 사람의 권리이며, 환대를 통해 우리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미하엘 유르크스의 <크리스마스 휴전, 큰 전쟁을 멈춘 작은 평화>는 이 점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 그들은 중간의 무인 지대에서 만나 담배와 술을 교환하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축구를 하였다. 사령부는 당황하여 이 사근을 은폐하려고 하는 한편, 적과 친교 행위를 하는 자는 군법으로 다스리라고 엄명을 내렸다. -42쪽 각주
현대의 사형제도는 이와 대조적으로, 범죄자를 격리된 장소로 끌고 가서 소수의 입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안락사시키는 방법을 택한다.
범죄자가 이미 사회 바깥에 있다는 생각은 그를 좀더 '인간적으로' 대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단순한 생명에 불과하기에, 그의 고통은 어떤 상징적인 가치도 갖지 않으며, 그에 대한 마지막 배려 역시 '동물 복지'를 논할 때와 유사하게,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는 문제에 집중된다. -54쪽
노예제도가 도입된 후 버지니아에서 성장한 많은 살마들이, 그 이전 세대와 달리 열렬한 공화주의자가 되었다는 사실에는 단순한 우연 이상의 무었이 있었는데, "적어도 법률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뜻에 거의 전적으로 굴종하는 사람들의 존재는,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제군주에 지배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노예의 존재는 버지니아인들에게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웠을 뿐 아니라, 평등의 감정을 북돋우었다. ... 노예가 아니라는 바로 이 점에서 소농은 대농장주와 동등했던 것이다. -63쪽
남아공 백인들은 흑인들의 노동력을 이용하면서도 그들에게 성원권을 주지 않기 위해 반투스탄이라는 외국을 발명하였다. -72쪽
왜 어떤 범주의 사람들-흑인, 재일조선인, 불가촉천민 등등-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럽다고 여겨지는가? ... 더럽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73쪽
"더럽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라는 더글라스의 명제... 모든 사람과 사물이 우주적 질서 안에 고유한 자리를 가지고 있음을 함축하는 것 같다. ...더글러스의 명제는 자리들, 혹은 그 자리에 배정된 사람들이나 사물들의 상대성과 상호의존성을 가정한다. 하지만 이런 가정이야말로 차별을 은폐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핵심 요소이다. -75쪽
여성이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사회는 여성이 잘못된 장소에 있다는 것, 정확히 말하면 잘못 인쇄된 글자처럼, 여성의 존재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시 말하면 여성은 장소를 더럽히는 존재로서만 사회 안에 현상할 수 있다. '깨끗한' 여성이란 보이지 않는 여성이다. -78쪽
오염의 메타포는 그것이 겨냥하는 대상이 지배계급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음을 함의한다. '더럽다'는 말은 죽일 수도 길들일 수도 없는 타자에 대한 미움과 두려움을 담고 있다. 그 말은 상대방의 존재를 부정하는 동시에, 그러한 부정이 굳이 필요했음을 인정함으로써 그의 주체성을 역설적으로 인정한다. 그래서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더러운 년'이라는 욕을 들어도 전혀 위축되지 않으며, 오히려 이런 말을 듣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는 것이다. -80쪽
사람이 수행적이라는 것은 사람다움이 우리 안에 있지 않다는 뜻이다. 사람다움은 우리가 원래 가지고 태어났거나 사회화를 통해 획득해야 하는 본질이 아니다. 그보다 사람다움은 우리에게 있다고 여겨지며, 우리 스스로 가지고 있는 체하는 어떤 것, 서로가 서로의 연극을 믿어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어떤 것이다. -83쪽
제주도에서 흔히 그러듯이 택시를 종일 대절한 승객은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미묘한 문제에 직면한다. 그는 운전사가 근무에서 벗어났다고 간주하고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눌지, 아니면 운전사가 여전히 근무 중이라고 규정하고 따로 식사를 할지 결정해야 한다. ... 그가 운전사와 따로 앉기를 고집한다면, 운전사는 모욕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운전사와 함께 식사를 한다면, 택시로 돌아갔을 때 그는 더 이상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길 수 없을 것이다. 즉 그는 운전사를 다시 비가시화하는 데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85쪽 각주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얼굴이 있는 듯이 행동하고, 우리의 얼굴에 대해 존중을 요구함으로써 얼굴이 실제로 거기 있게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상대방의 사람 연기에 호응하고, 그의 얼굴에 대해 경의를 표시하며, 그가 얼굴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말하자면 얼굴은 상호작용 속에서 가정되고 또 실현되는, 의례적인 픽션이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 대해 의례를 행함으로써 서로를 사람으로 임명한다. -87쪽
상호작용 의례를 통하여 우리가 경의를 표하는 대상은 개인이 아니라 그의 인격이다. 다시 말해 그의 안에 있는 "사회적인 것"이다. 그런데 고프먼에게 이 인격은, 초기의 사회활르 통하여 개인 안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상호작용의 흐름 속에서 그때그때 타인들의 협조에 힘입어 표현되고 확인되는 무엇이다. -115쪽
외부의 관찰자로서 우리는 직원이 재소자를 너무 가혹하게 대한다고 생각할수 있다. 하지만 직원의 입장에서 이러한 가혹함은 불가피한 것이다. 직원은 제소자의 인격을 말살하여 다루기 쉬운 '재료'로 만들어야 한다. 재소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 그의 처지를 동정하는것은 좋지 않다. "재소자가 인간적으로 보일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121쪽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다는 이유로, 혹은 신체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다는 이유로 격려와 감사의 편지를 받는 장애인처럼, 낙인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주목받고 사랑받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관심의 대상은 그의 인격 전체가 아니라 인격에서 돌출된 부분, 즉 낙인이다. -122쪽
'사회'를 대표하여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는 이 정상인들은 자기 앞에 있는 낙인자들을 아무나 덥석 껴안음으로써 자기가 그들에 대해 아무런 편견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과시하려 한다. 하지만 정상인들이 이렇게 낙인자들의 몸을 함부로 만질 수 있는 대상으로 취급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관계의 불평등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123쪽
체벌은 폭력인 동시에 일종의 의례이다. 체벌이 체벌당하는 사람의 협조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이 점을 잘 말해준다. 다른 모든 의례와 마찬가지로, 체벌은 맞는 사람과 구경하는 사람을 포함한 행위자 모두가 행위의 의미와 절차에 대한 지식을 공유하고, 그것이 이루어져야 하는 방식대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무언의 협력을 할 때만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 ... 폭력의 의례를 순수한 폭력과 구별시켜주는 것은 바로 동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체벌당하는 사람이 순순히 체벌에 협조하지 않을 때, 폭력은 점점 강도를 높이며 일종의 광기를 띠게 된다. -129쪽
모욕은 타인의 인격을 부정할 뿐 아니라, 그러한 부정에 대해서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 ... 하지만 모욕당하는 자가 모욕에 동의하는 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의 일부이며, 질서의 일부이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131쪽
근대화와 관련하여 나이주의는 양면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나이는 누구나 먹기 마련이므로, 나이에 따른 서열화는 지위나 권력이 없는 사람에게도 대접받을 기회를 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연적인 특징인 나이를 앞세움으로써, 나이주의는 재능과 업적을 중시하는 근대 사회의 원리에 저항한다. -133쪽 각주
신분이란 어떤 위계화된 구조 안에 있는 고정된 위치들이 아니라 무리짓고 , 사회 공간을 점유하고, 경계를 만들며, 배제하거나 포함시키고, 자리를 주거나 뺏는 어떤 운동의 효과이다. -142쪽
사회적 성원권은 이 점에서 시민권과 분명히 구별된다. 주어지거나 주어지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인 시민권과 달리, 사회적 성원권은 의례를 통하여 끊임없이 확인되어야 한다. ... 사회란 결국 이러한 의례의 교환 또는 의례의 집단적 수행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상상적 지평이다. - 144쪽
근대는 복장에 따라 여전히 신분적 차별을 가하면서도, 동시에 복장을 통한 위장의 기회를 누구에게나 열어놓는다. 이것이 복장의 민주주의가 정확히 의미하는 바이다. 옷을 제대로 차려입는다는 것이 교육받은 중산층을 기준으로 정의되어 있으므로, 노동자 계층이 이 기준을 따르는 것은 신분을 위장하는 일이 된다. -150쪽
누구도 나를 모욕하지 않았다면, 내가 느끼는 굴욕감은 전적으로 나 자신의 문제가 된다.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들은 이것을 자존감의 결여 탓으로 돌린다. -160쪽
구조와 상호작용 질서는 개념적으로 구별될 뿐, 현실에서는 결합되어 나타난다. 지위와 특권을 분배하는 구조를 내버려둔 채, 자신의 지위를 남용하는 사람들에게 원칙을 지키라고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모욕이라는 공적 문제를 해결할수 없을 것이다. -165쪽
학교는 겉으로는 존중을 이야기하면서 실제로는 경멸을 가르친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모욕하고, 가난한 아이들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힘센 어른은 힘없는 아이들을 막 대해도 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면서 말이다. 그래서 겉치레로 하는 말과 진짜 메시지를 구별할 만큼 영리해진 아이들은 자기보다 못한 아이를 경멸함으로써 학교의 가르침을 실천한다. ... 지금 아이들은 사회에 나갔을 때 꼭 필요한 두 가지 기술-경멸하는 법과 경멸에 대처하는 법-을 익히는 중이다. -167쪽
"괴롭힘은 갈등의 문제가 아니라 경멸의 문제" -167쪽 각주
사람이 걸인에게 돈을 줄 때 눈길을 피하는 이유를 이런 각도에서 생각배보아도 좋을 것이다. 걸인에 대한 이 같은 '비인격 취급'은 상호작용 의례의 위반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걸인을 도우려고 하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걸인에게 말을 거는 순간, 당시은 더 이상 그에게 돈을 줄 수 없게 된다. -173쪽
능력주의 사회의 도래는 상속제도의 소멸을 가져오지 않았다. 상속의 방식 혹은 전략을 바꾸어놓았을 뿐이다. 부모들은 재산을 직접 물려주는 대신에, 자녀의 몸에 그것을 투자하고 그 몸을 물려주기로 마음먹는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상속자이면서 동시에 투자 대상, 즉 재산 자체가 된다. ... 가족은 만성적인 갈등상태에 놓인다. 부모의 상속 프로젝트에 동의하지만, 물건 취급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아이들, 재산관리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엄마, 가장이면서도 이 프로젝트에서 소외되어 있다고 느끼는 아빠가 갈등의 세 주역이다. -187쪽
절대적 환대가 불가능하다면, 나는 어떻게 '우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 내가 '우리'에 속하는지 아닌지 나는 어떻게 아는가? ... 먼저 환대가 재분배를 포함한다는 점을 확인하기로 하자.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 또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하여 그를 다시 한 번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사회 안에 자리를 갖는다는 것 외에 다른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을 연기하려면 최소한의 무대장치와 소품이 필요하다. ... 그러므로 환대는 자원의 재분배를 포함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아이들이 소꿉놀이를 ㅎ시작할 때 먼저 장난감을 나누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아무리 욕심 많은 아이라도 상대방이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으면 서로 초대할 수도, 선물을 주고받을 수도 없다는 걸 알기에., 기꺼이 살림을 나누어준다. -193쪽
환대 역시 주는 행위이지만, 이 줌은 증여로 계산되지 않는다. 환대란 주는 힘을 주는 것이며, 받는 사람을 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197쪽
절대적 환대가 타자의 영토에 유폐되어 자신의 존재를 부인당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일, 그들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이릴,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자리를 주는 일, 즉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사회 안에 빼앗길 수 없는 자리/장소를 마련해주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환대가 필요하며 또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환대는 실로 우정이나 사랑 같은 단어가 의미를 갖기 우한 조건이다. 그러므로 환대에 대한 질문은 필연적으로 공공성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다. 환대는 공공성을 창출하는 것이다. -204쪽
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는 현대 사회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이다. (각주) 이것은 민주주의가 현대 정치의 기본 원리라고 말할 때와 같은 의미에서이다. 실제로 우리가 경험하는 정치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적 삶을 이해하고 비판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 원리로 돌아간다. 헌법은 이 원리에 따라 만들어져 있으며, 우리는 이 원리에 의거해서만 법을 검토하고 수정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실현이 아무리 요원하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인간은 항상 자기가 해별할 수 있는 문제만을 제기한다”는 마르크스의 생각이 옳다면, 우리가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209쪽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주어져 있는 정체성의 규정 요소들, 예컨대 국적이나 출신 계급이나 인종이나 성별, 심지어 언어와 문화는 개인의 정체성 서사에 통합되는 한에서만 중요하고, 그렇지 않으면 우연하고 부수적인 요소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개인의 정체성의 핵이 더 이상 이런 요소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바탕으로 정체성 서사를 써나가는 주체의 저자성 자체임을 뜻한다. ...(“네가 레즈비언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네가 오늘 레즈비언이라고 고백하고 내일은 그것을 부인해도 상관없다. 나는 너에 대해서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너 자신임을 인정한다”). -215쪽
신원을 묻지 않는, 보답을 바라지 않는, 복수하지 않는 환대. 사회를 만드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의 절대적 환대이다. 누군가는 우리가 한번도 그런 사회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회운동의 현재 속에 그런 사회는 언제나 도래해 있다. -242쪽
자기를 위해 나서주는 제삼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는 한, 벌거벗은 생명은 아직 완전히 벌거벗은 게 아니다(이는 발화의 장소성이라는 주제로 우리를 이끄는데, 우리가 벌거벗은 생명들의 인권에 대해 아무리 열심히 이야기하더라도, 우리의 목소리가 그들에게 닿지 않는다면 그들은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권 담론의 취약성은 그것이 신학적 관념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보다는, 담론의 실천과 분리하여 비장소화한다는 사실에서 생겨난다). -246쪽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사이에 의례적인 관계가 지속된다는 것은 죽은 사람이 여전히 사회의 구성원임을 뜻한다. 사회는 산 자들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다. 죽은 자들 역시 사회 안에 자리를 가지고 있다. -259쪽
... 광주항쟁 이후의 모든 대규모 집회가 어째서 축제이면서 동시에 애도의 형식을 띠었는지 설명해준다. 광주항쟁은 새로운 연대기의 시작을 알리는 “달력의 첫날”이자, 그것에 선행하는 시간을 압축하는 “역사의 저속 촬영기”였으며 축제(1987년과 1990년 군중이 애도 공동체를 형성했던 대규모 시위들, 2007년과 2008년의 촛불집회들)의 모습을 하고 되돌아왔던 “항상 동일한 날”이었다. 축제가 만들어내는 ‘절대 공동체’ 속에서 역사의 연속성은 폭파되며, 죽은 자의 시간과 산 자의 시간이 뒤섞인다. -257쪽 각주
현대 사회의 도덕의 기초에 있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절대적 환대의 원리이다. 즉 태어나는 모든 생명에게 자리를 주어야 하고, 어떤 명목으로도 이 자리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사람의 신성함이란 바로 이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사회 안에 자리가 있다는 것이며, 신성하다는 것은 이 자리에 손댈 수 없다는 뜻이다. -259쪽
참된 것과 합의된 것을 동일시하는 이러한 입장은 사람들이 잘못된 선택을 할 경우 비판의 가능성을 봉쇄해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 공리주의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 –266쪽
모든 희생 담론은 개인이 죽은 후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공동체 안에서 계속 살아간다는 믿음을 전제한다. 그의 육신이 소멸한 후에도 성원권은 소멸되자 않는다는 것처럼, 달리 말해 그의 자리가 공동체 안에 계속 남아 있다는 것(무덤, 기념비, 동상, 위패 등은 바로 이 자리를 표시한다)-이는 그가 죽은 후에도 사람자격을 유지한다는 말도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 사람자격을 얻는다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자리를 갖는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269쪽
만일 서바이벌 로터리가 국가의 은유라면, 그것은 푸코적인 의미에서 생명을 관리하는 국가일 것이다-‘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는’ 국가, 이 국가는 구성원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을 가장 큰 과제로 삼지만, 동시에 바로 그것을 구실로, 그들로부터 언제든지 성원권을 박탈할 권한을 갖는다. 다른 말로 하면, 이 국가의 구성원들은 사람의 지위를 빼앗기고 벌거벗은 생명의 상태로 떨어질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276쪽
어떤 사람으로부터 사람의 지위를 박탈하는 일은 법의 제정과 집행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그 이전에, 그가 어떤 일을 당하건 그를 위해서 나서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도록, 그를 둘러싼 사회적 연대 자체를 해체해야 한다. 만일 어떤 사회에서 구성원들이 아무 때나 주권자의 명령만으로 벌거벗은 생명의 상태로 떨어질 수 있다면, 그 사회는 이미 사회가 아니며, 구성원들은 사람이 아니다. ... 그들 사이에 연대가 모두 파괴되어 그들이 다만 인구로서 존재함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277쪽
죽음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는 난민들, 골파장 건설에 반대하며 포클레인 앞에 드러누운 농민들, 구조조정에 저항하며 연좌 농성을 벌이는 노동자들... 투쟁의 형식들은 어딘가 닮아 있다. 점거, 누워있기, 안자 있기, 아니면 장소를 원래 정해진 것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기... 몸 자체가 여기서는 언어가 된다. 몸은 문제의 장소 위에 글자처럼 씌어진다. ‘나는 여기 있을 권리가 있다’고 말하기 위하여. ... 그러므로 장소에 대한 투쟁은 존재에 대해 인정을 요구하는 투쟁이기도 하다. -2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