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사건에 대한 사회과학은 아직까지 '사건'에 천착하지 못햇거나 깊이를 갖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생각. 한 10년쯤 지나면 <오월의 사회과학>처럼 <세월호의 사회과학>이란 명저가 나올 수 있을까? 그러한 소박한 기대도 사치스럽게 생각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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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해는 사건 원인의 분석과 규명 이상을 요구한다. 그것은 아렌트가 지적하듯이 "그러한 일들이 전적으로 가능한 세계와 우리 자신을 화해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끔찍한 사건이 가능할 뿐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기도 하는 세계와 그런 세계가 가한 폭력성에 상처 입은 자아 간의 불화와 갈등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 경우 이해와 그것의 선물인 화해는 인지적인 과정일 뿐 아니라 실천적인 과정이 된다. 세계와 자아의 불화는 단순히 인지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자아와 세계 양편에서의 변화를 동반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5쪽


... 사회적 고통에 대한 기술적 분석은 때로 희생자 고유의 언어를 특유한 일반적, 전문적 언어로 전환시켜 고통에 관한 표현과 경험을 바꿔 버린다. 고통, 죽음, 애도의 실존적 과정은 우리가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이성이나 기술에 의해 변질되며, 이러한 변질을 통해 고통의 치유책에 대한 관심은 더욱 옅어진다. 의학은 고통의 실존적, 도덕적, 미적, 심지어 종교적 측면을 관료적으로 변화시키는 강력한 동인이다. -58쪽


'외상'이란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며, 그 기저에는 '사건, 구조, 인식과 행위 간의 인과관계'가 자리한다. -64쪽


정체성의 수정 과정은 곧 집단의 과거를 탐색하고 재기억하는 과정이다. 기억이란 사회적이고 유동적일 뿐 아니라 현재의 자의식과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현재와 미래를 직면하는 것뿐만 아니라 집단의 이전 삶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구성되고 확보된다. 부연해 두자면 재현을 통한 외상의 일상화 과정은 문화적 외상의 특수한 사회적 의미를 결코 상쇄시키지 않는다. 보다 폭넓은 공중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참여하면 문화적 외상에 대한 사회적 이해와 공감의 영역이 확대될 것이며, 이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결합으로의 효과적인 길을 제공할 것이다. -66쪽


장엄한 기념식전의 장소를 구축하는 것보다, 오히려 충실한 현전으로서의 긍정적 장소를 거부하면서 트라우마가 만들어지는 시간의 어긋남의 경험을 천착하는 자리에서, 범람하는 애도에 대한 타협 없는 저항이 모색될 수 있을 것이다. 유포되는 애도에 대한 타협 없는 저항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에게 세월호의 죽음은 개인 차원의 자연사가 아니기에 애도는 정의의 문제로, 산 자들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죽은 자들에 대한 정의로 건나가야 한다"는 철학자 김진영의 전언에 나는 지지를 보낸다. 애도는 산 자들이 죽은 자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지, 죽은 자들에게 어떻게 정의로운 관계를 만들어 줄 것인지를 발본적으로 묻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103쪽


다시 말하면 '애도 공동체'라고 떠벌리는 산 자들의 '안심해 버린' 공동체에 포섭될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들인 그들과 만나고, 그들의 원한을 공유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원한의 감정을 "그 사회의 객관적 존재 방식과의 관련하에서 리얼하게 파악"하고 전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애도의 정치의 출발점인 것이다. -104쪽


죽음에 대한 의미 부여, 그리고 그 한 표현으로서의 애도의 정치는, 비극으로 점철된 지난 60여 년의 한국 현대사에서 강력한 힘을 행사해 왔다. 그 힘의 정당성은 아마 기나긴 문명화 과정을 거치며 인류 사회가 보편적으로 갖게 된 죽음에 대한 성스러움에서 연유하는 것이리라. 그 최소한의 성스러움마저 사라져 버린 사회, 유족의 최소한의 권리마저 통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애도'라는 프레임이 여전히 유효한지 자문해본다. 우리는 죽음의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서의 시대 구분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낯선, 새로운 시대를 몸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108쪽


국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단지 사람들을 죽도록 방치하는 것뿐이다. ...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의 본질을 상징적으로 우리 앞에 드러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그것이 국가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144쪽


'국가의 특수법인화' 과정에서 이루어진 생명, 안전 영역의 전면적인 민영화는 이미 내재적으로 시장경제적 효율성이라는 기준을 지향한다. -172쪽


신자유주의적 국가 개혁의 산물인 규제 완화와 공공부문 민영화, 안전, 위험 부분의 외주화, 고용 조건의 유연호와 같은 국가 장치의 재구조화의 맥락에서 시민의 생명, 안전과 관련한 권력의 작용 방식이 변화하는 양상 가운데 빚어진 사건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진도 앞바다를 우리 모두가 처한 현실적 보편성 속에서 국가 장치의 구성적 결핍, 또는 그 근본적 무능력과 대면하는 장소로 재전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173쪽


사건을 통해 나타난 진리에 충실한 주체가 출현하지 않는다면,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만 갖고는 아무런 의미도 끌어낼 수 없다... 결국 사건은 그것을 통해 드러난 진리에 충실하고자 하는 주체의 행위 속에서만 진정한 의미에서 사건일 수 있는 것이다. -176쪽


'사건에 대한 권리... 이 개념은 피해자가 사건 해결의 전 과정에 주체로 참여해 사태에 입장을 표명하고, 해법을 제안하며, 그 이행을 감시하고 비판하는 공적인 지위를 의미한다. 4.16연대의 인권 선언 초안이나  유엔 인권 피해자 권리 장전이 밝힌 피해자의 '존엄'과 '인정'도 피해자를 국가가 제시한 처방전의 수동적인 수취인이 아니라 능동적인 행위 주체로 표상하는 것이 요구된다. -348쪽


한국은 구조의 표출이었던 외환 위기 사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비정규직과 취업난과 불평등이 만연하 국가 상태를 만들고 말았다. 인간을 위한 국가 개혁의 기회를 실기한 결과가 오늘의 고통스런 인간 현실인 것이다. 물질주의, 시장주의, 기업주의 제일 담론으로 초래된'단기적' 외환 위기로부터 아무런 구조도 개혁해 내지 못한 '장기적' 후과가 오늘날 한국 사회의 모습이다. 세월호 사태는 예외도 특수도 아니다. -365쪽


우리에게는 '국가를 위한 유공'과 '국가에 의한 희생'의 통합적 접근이 필요하다. 이 말이 두 가지가 같다는 의미는 아니다. 둘은 분명 다르다. 특히 개별 생명의 망실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전자는 개인 결단의 측면이, 후자는 구각 책임의 측면이 더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다른다. 

그러나 개인의 한시성과 유일성, 인간 공동체의 영속성과 전체성을 같이 고려할 때 둘을 통합해 이해하는 것은 위에게 '개별 생명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과 관련해 어떤 통합적 지혜를 줄지 모른다. -3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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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그을 곳이 너무 많다!

<모멸감>의 연장에서 한국사회 필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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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 들어오고, 사람이 되는가?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받아들여진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에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사람이 된 것인가? 다시 말해서 '사람'이라는 것은 지위인가 아니면 조건인가? -25쪽


군인에게 우호(또는 환대)의 권리가 없다는 것과 그가 물건처럼 소모된다는 사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환대는 사람의 권리이며, 환대를 통해 우리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미하엘 유르크스의 <크리스마스 휴전, 큰 전쟁을 멈춘 작은 평화>는 이 점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 그들은 중간의 무인 지대에서 만나 담배와 술을 교환하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축구를 하였다. 사령부는 당황하여 이 사근을 은폐하려고 하는 한편, 적과 친교 행위를 하는 자는 군법으로 다스리라고 엄명을 내렸다. -42쪽 각주


현대의 사형제도는 이와 대조적으로, 범죄자를 격리된 장소로 끌고 가서 소수의 입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안락사시키는 방법을 택한다. 

범죄자가 이미 사회 바깥에 있다는 생각은 그를 좀더 '인간적으로' 대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단순한 생명에 불과하기에, 그의 고통은 어떤 상징적인 가치도 갖지 않으며, 그에 대한 마지막 배려 역시 '동물 복지'를 논할 때와 유사하게,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는 문제에 집중된다. -54쪽


노예제도가 도입된 후 버지니아에서 성장한 많은 살마들이, 그 이전 세대와 달리 열렬한 공화주의자가 되었다는 사실에는 단순한 우연 이상의 무었이 있었는데, "적어도 법률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뜻에 거의 전적으로 굴종하는 사람들의 존재는,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제군주에 지배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노예의 존재는 버지니아인들에게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웠을 뿐 아니라, 평등의 감정을 북돋우었다. ... 노예가 아니라는 바로 이 점에서 소농은 대농장주와 동등했던 것이다. -63쪽


남아공 백인들은 흑인들의 노동력을 이용하면서도 그들에게 성원권을 주지 않기 위해 반투스탄이라는 외국을 발명하였다. -72쪽


왜 어떤 범주의 사람들-흑인, 재일조선인, 불가촉천민 등등-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럽다고 여겨지는가? ... 더럽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73쪽


"더럽다는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이라는 더글라스의 명제... 모든 사람과 사물이 우주적 질서 안에 고유한 자리를 가지고 있음을 함축하는 것 같다. ...더글러스의 명제는 자리들, 혹은 그 자리에 배정된 사람들이나 사물들의 상대성과 상호의존성을 가정한다. 하지만 이런 가정이야말로 차별을 은폐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핵심 요소이다. -75쪽


여성이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사회는 여성이 잘못된 장소에 있다는 것, 정확히 말하면 잘못 인쇄된 글자처럼, 여성의 존재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시 말하면 여성은 장소를 더럽히는 존재로서만 사회 안에 현상할 수 있다. '깨끗한' 여성이란 보이지 않는 여성이다. -78쪽


오염의 메타포는 그것이 겨냥하는 대상이 지배계급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음을 함의한다. '더럽다'는 말은 죽일 수도 길들일 수도 없는 타자에 대한 미움과 두려움을 담고 있다. 그 말은 상대방의 존재를 부정하는 동시에, 그러한 부정이 굳이 필요했음을 인정함으로써 그의 주체성을 역설적으로 인정한다. 그래서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더러운 년'이라는 욕을 들어도 전혀 위축되지 않으며, 오히려 이런 말을 듣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는 것이다. -80쪽


사람이 수행적이라는 것은 사람다움이 우리 안에 있지 않다는 뜻이다. 사람다움은 우리가 원래 가지고 태어났거나 사회화를 통해 획득해야 하는 본질이 아니다. 그보다 사람다움은 우리에게 있다고 여겨지며, 우리 스스로 가지고 있는 체하는 어떤 것, 서로가 서로의 연극을 믿어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어떤 것이다. -83쪽


제주도에서 흔히 그러듯이 택시를 종일 대절한 승객은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미묘한 문제에 직면한다. 그는 운전사가 근무에서 벗어났다고 간주하고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눌지, 아니면 운전사가 여전히 근무 중이라고 규정하고 따로 식사를 할지 결정해야 한다. ... 그가 운전사와 따로 앉기를 고집한다면, 운전사는 모욕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운전사와 함께 식사를 한다면, 택시로 돌아갔을 때 그는 더 이상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길 수 없을 것이다. 즉 그는 운전사를 다시 비가시화하는 데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85쪽 각주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얼굴이 있는 듯이 행동하고, 우리의 얼굴에 대해 존중을 요구함으로써 얼굴이 실제로 거기 있게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상대방의 사람 연기에 호응하고, 그의 얼굴에 대해 경의를 표시하며, 그가 얼굴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 말하자면 얼굴은 상호작용 속에서 가정되고 또 실현되는, 의례적인 픽션이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에 대해 의례를 행함으로써 서로를 사람으로 임명한다. -87쪽


상호작용 의례를 통하여 우리가 경의를 표하는 대상은 개인이 아니라 그의 인격이다. 다시 말해 그의 안에 있는 "사회적인 것"이다. 그런데 고프먼에게 이 인격은, 초기의 사회활르 통하여 개인 안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상호작용의 흐름 속에서 그때그때 타인들의 협조에 힘입어 표현되고 확인되는 무엇이다. -115쪽


외부의 관찰자로서 우리는 직원이 재소자를 너무 가혹하게 대한다고 생각할수 있다. 하지만 직원의 입장에서 이러한 가혹함은 불가피한 것이다. 직원은 제소자의 인격을 말살하여 다루기 쉬운 '재료'로 만들어야 한다. 재소자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 그의 처지를 동정하는것은 좋지 않다. "재소자가 인간적으로 보일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121쪽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다는 이유로, 혹은 신체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다는 이유로 격려와 감사의 편지를 받는 장애인처럼, 낙인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주목받고 사랑받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관심의 대상은 그의 인격 전체가 아니라 인격에서 돌출된 부분, 즉 낙인이다. -122쪽


'사회'를 대표하여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는 이 정상인들은 자기 앞에 있는 낙인자들을 아무나 덥석 껴안음으로써 자기가 그들에 대해 아무런 편견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과시하려 한다. 하지만 정상인들이 이렇게 낙인자들의 몸을 함부로 만질 수 있는 대상으로 취급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관계의 불평등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123쪽


체벌은 폭력인 동시에 일종의 의례이다. 체벌이 체벌당하는 사람의 협조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이 점을 잘 말해준다. 다른 모든 의례와 마찬가지로, 체벌은 맞는 사람과 구경하는 사람을 포함한 행위자 모두가 행위의 의미와 절차에 대한 지식을 공유하고, 그것이 이루어져야 하는 방식대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무언의 협력을 할 때만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 ... 폭력의 의례를 순수한 폭력과 구별시켜주는 것은 바로 동의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체벌당하는 사람이 순순히 체벌에 협조하지 않을 때, 폭력은 점점 강도를 높이며 일종의 광기를 띠게 된다. -129쪽


모욕은 타인의 인격을 부정할 뿐 아니라, 그러한 부정에 대해서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 ... 하지만 모욕당하는 자가 모욕에 동의하는 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의 일부이며, 질서의 일부이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131쪽


근대화와 관련하여 나이주의는 양면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나이는 누구나 먹기 마련이므로, 나이에 따른 서열화는 지위나 권력이 없는 사람에게도 대접받을 기회를 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연적인 특징인 나이를 앞세움으로써, 나이주의는 재능과 업적을 중시하는 근대 사회의 원리에 저항한다. -133쪽 각주


신분이란 어떤 위계화된 구조 안에 있는 고정된 위치들이 아니라 무리짓고 , 사회 공간을 점유하고, 경계를 만들며, 배제하거나 포함시키고, 자리를 주거나 뺏는 어떤 운동의 효과이다. -142쪽


사회적 성원권은 이 점에서 시민권과 분명히 구별된다. 주어지거나 주어지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인 시민권과 달리, 사회적 성원권은 의례를 통하여 끊임없이 확인되어야 한다. ... 사회란 결국 이러한 의례의 교환 또는 의례의 집단적 수행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상상적 지평이다. - 144쪽


근대는 복장에 따라 여전히 신분적 차별을 가하면서도, 동시에 복장을 통한 위장의 기회를 누구에게나 열어놓는다. 이것이 복장의 민주주의가 정확히 의미하는 바이다. 옷을 제대로 차려입는다는 것이 교육받은 중산층을 기준으로 정의되어 있으므로, 노동자 계층이 이 기준을 따르는 것은 신분을 위장하는 일이 된다. -150쪽


누구도 나를 모욕하지 않았다면, 내가 느끼는 굴욕감은 전적으로 나 자신의 문제가 된다.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들은 이것을 자존감의 결여 탓으로 돌린다. -160쪽


구조와 상호작용 질서는 개념적으로 구별될 뿐, 현실에서는 결합되어 나타난다. 지위와 특권을 분배하는 구조를 내버려둔 채, 자신의 지위를 남용하는 사람들에게 원칙을 지키라고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모욕이라는 공적 문제를 해결할수 없을 것이다. -165쪽


학교는 겉으로는 존중을 이야기하면서 실제로는 경멸을 가르친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모욕하고, 가난한 아이들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힘센 어른은 힘없는 아이들을 막 대해도 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면서 말이다. 그래서 겉치레로 하는 말과 진짜 메시지를 구별할 만큼 영리해진 아이들은 자기보다 못한 아이를 경멸함으로써 학교의 가르침을 실천한다. ... 지금 아이들은 사회에 나갔을 때 꼭 필요한 두 가지 기술-경멸하는 법과 경멸에 대처하는 법-을 익히는 중이다. -167쪽


"괴롭힘은 갈등의 문제가 아니라 경멸의 문제" -167쪽 각주


사람이 걸인에게 돈을 줄 때 눈길을 피하는 이유를 이런 각도에서 생각배보아도 좋을 것이다. 걸인에 대한 이 같은 '비인격 취급'은 상호작용 의례의 위반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걸인을 도우려고 하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걸인에게 말을 거는 순간, 당시은 더 이상 그에게 돈을 줄 수 없게 된다. -173쪽


능력주의 사회의 도래는 상속제도의 소멸을 가져오지 않았다. 상속의 방식 혹은 전략을 바꾸어놓았을 뿐이다. 부모들은 재산을 직접 물려주는 대신에, 자녀의 몸에 그것을 투자하고 그 몸을 물려주기로 마음먹는다. 그리하여 아이들은 상속자이면서 동시에 투자 대상, 즉 재산 자체가 된다. ... 가족은 만성적인 갈등상태에 놓인다. 부모의 상속 프로젝트에 동의하지만, 물건 취급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아이들, 재산관리인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엄마, 가장이면서도 이 프로젝트에서 소외되어 있다고 느끼는 아빠가 갈등의 세 주역이다. -187쪽


절대적 환대가 불가능하다면, 나는 어떻게 '우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니, 내가 '우리'에 속하는지 아닌지 나는 어떻게 아는가? ... 먼저 환대가 재분배를 포함한다는 점을 확인하기로 하자.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것 또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것, 그가 편안하게 '사람'을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리하여 그를 다시 한 번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사회 안에 자리를 갖는다는 것 외에 다른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을 연기하려면 최소한의 무대장치와 소품이 필요하다. ... 그러므로 환대는 자원의 재분배를 포함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아이들이 소꿉놀이를 ㅎ시작할 때 먼저 장난감을 나누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아무리 욕심 많은 아이라도 상대방이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으면 서로 초대할 수도, 선물을 주고받을 수도 없다는 걸 알기에., 기꺼이 살림을 나누어준다. -193쪽


환대 역시 주는 행위이지만, 이 줌은 증여로 계산되지 않는다. 환대란 주는 힘을 주는 것이며, 받는 사람을 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197쪽


절대적 환대가 타자의 영토에 유폐되어 자신의 존재를 부인당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일, 그들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이릴,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자리를 주는 일, 즉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사회 안에 빼앗길 수 없는 자리/장소를 마련해주는 일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환대가 필요하며 또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환대는 실로 우정이나 사랑 같은 단어가 의미를 갖기 우한 조건이다. 그러므로 환대에 대한 질문은 필연적으로 공공성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다. 환대는 공공성을 창출하는 것이다. -204쪽


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는 현대 사회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이다. (각주) 이것은 민주주의가 현대 정치의 기본 원리라고 말할 때와 같은 의미에서이다. 실제로 우리가 경험하는 정치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 그러나 우리는 정치적 삶을 이해하고 비판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 원리로 돌아간다. 헌법은 이 원리에 따라 만들어져 있으며, 우리는 이 원리에 의거해서만 법을 검토하고 수정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실현이 아무리 요원하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인간은 항상 자기가 해별할 수 있는 문제만을 제기한다”는 마르크스의 생각이 옳다면, 우리가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209쪽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주어져 있는 정체성의 규정 요소들, 예컨대 국적이나 출신 계급이나 인종이나 성별, 심지어 언어와 문화는 개인의 정체성 서사에 통합되는 한에서만 중요하고, 그렇지 않으면 우연하고 부수적인 요소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개인의 정체성의 핵이 더 이상 이런 요소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바탕으로 정체성 서사를 써나가는 주체의 저자성 자체임을 뜻한다. ...(“네가 레즈비언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네가 오늘 레즈비언이라고 고백하고 내일은 그것을 부인해도 상관없다. 나는 너에 대해서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너 자신임을 인정한다”). -215쪽


신원을 묻지 않는, 보답을 바라지 않는, 복수하지 않는 환대. 사회를 만드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의 절대적 환대이다. 누군가는 우리가 한번도 그런 사회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회운동의 현재 속에 그런 사회는 언제나 도래해 있다. -242쪽


자기를 위해 나서주는 제삼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는 한, 벌거벗은 생명은 아직 완전히 벌거벗은 게 아니다(이는 발화의 장소성이라는 주제로 우리를 이끄는데, 우리가 벌거벗은 생명들의 인권에 대해 아무리 열심히 이야기하더라도, 우리의 목소리가 그들에게 닿지 않는다면 그들은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권 담론의 취약성은 그것이 신학적 관념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보다는, 담론의 실천과 분리하여 비장소화한다는 사실에서 생겨난다). -246쪽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사이에 의례적인 관계가 지속된다는 것은 죽은 사람이 여전히 사회의 구성원임을 뜻한다. 사회는 산 자들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다. 죽은 자들 역시 사회 안에 자리를 가지고 있다. -259쪽


... 광주항쟁 이후의 모든 대규모 집회가 어째서 축제이면서 동시에 애도의 형식을 띠었는지 설명해준다. 광주항쟁은 새로운 연대기의 시작을 알리는 “달력의 첫날”이자, 그것에 선행하는 시간을 압축하는 “역사의 저속 촬영기”였으며 축제(1987년과 1990년 군중이 애도 공동체를 형성했던 대규모 시위들, 2007년과 2008년의 촛불집회들)의 모습을 하고 되돌아왔던 “항상 동일한 날”이었다. 축제가 만들어내는 ‘절대 공동체’ 속에서 역사의 연속성은 폭파되며, 죽은 자의 시간과 산 자의 시간이 뒤섞인다. -257쪽 각주 


현대 사회의 도덕의 기초에 있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절대적 환대의 원리이다. 즉 태어나는 모든 생명에게 자리를 주어야 하고, 어떤 명목으로도 이 자리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사람의 신성함이란 바로 이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사회 안에 자리가 있다는 것이며, 신성하다는 것은 이 자리에 손댈 수 없다는 뜻이다. -259쪽


참된 것과 합의된 것을 동일시하는 이러한 입장은 사람들이 잘못된 선택을 할 경우 비판의 가능성을 봉쇄해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 공리주의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 –266쪽


모든 희생 담론은 개인이 죽은 후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공동체 안에서 계속 살아간다는 믿음을 전제한다. 그의 육신이 소멸한 후에도 성원권은 소멸되자 않는다는 것처럼, 달리 말해 그의 자리가 공동체 안에 계속 남아 있다는 것(무덤, 기념비, 동상, 위패 등은 바로 이 자리를 표시한다)-이는 그가 죽은 후에도 사람자격을 유지한다는 말도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 사람자격을 얻는다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자리를 갖는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269쪽


만일 서바이벌 로터리가 국가의 은유라면, 그것은 푸코적인 의미에서 생명을 관리하는 국가일 것이다-‘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는’ 국가, 이 국가는 구성원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을 가장 큰 과제로 삼지만, 동시에 바로 그것을 구실로, 그들로부터 언제든지 성원권을 박탈할 권한을 갖는다. 다른 말로 하면, 이 국가의 구성원들은 사람의 지위를 빼앗기고 벌거벗은 생명의 상태로 떨어질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276쪽


어떤 사람으로부터 사람의 지위를 박탈하는 일은 법의 제정과 집행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그 이전에, 그가 어떤 일을 당하건 그를 위해서 나서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도록, 그를 둘러싼 사회적 연대 자체를 해체해야 한다. 만일 어떤 사회에서 구성원들이 아무 때나 주권자의 명령만으로 벌거벗은 생명의 상태로 떨어질 수 있다면, 그 사회는 이미 사회가 아니며, 구성원들은 사람이 아니다. ... 그들 사이에 연대가 모두 파괴되어 그들이 다만 인구로서 존재함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277쪽


죽음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는 난민들, 골파장 건설에 반대하며 포클레인 앞에 드러누운 농민들, 구조조정에 저항하며 연좌 농성을 벌이는 노동자들... 투쟁의 형식들은 어딘가 닮아 있다. 점거, 누워있기, 안자 있기, 아니면 장소를 원래 정해진 것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기... 몸 자체가 여기서는 언어가 된다. 몸은 문제의 장소 위에 글자처럼 씌어진다. ‘나는 여기 있을 권리가 있다’고 말하기 위하여. ... 그러므로 장소에 대한 투쟁은 존재에 대해 인정을 요구하는 투쟁이기도 하다. -2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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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봄이 올 거에요' 4·16작가기록단 "의무 잊지 않기 위해···고통도 사회가 기억 해야"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입력 : 2016.04.10 17:13:00 수정 : 2016.04.11 18:20:40
‘416세월호참사작가기록단’은 참사 직후부터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의 육성을 글로 기록해왔다. 5일 작가기록단 중 유해정·고은채·박희정·명숙·미류·이호연·정주연·강곤 작가(왼쪽부터)가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좌담회를 가졌다. 작가기록단이 부각되는 것을 꺼려한 이들은 사진촬영도 부담스러워했다.  /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416세월호참사작가기록단’은 참사 직후부터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의 육성을 글로 기록해왔다. 5일 작가기록단 중 유해정·고은채·박희정·명숙·미류·이호연·정주연·강곤 작가(왼쪽부터)가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좌담회를 가졌다. 작가기록단이 부각되는 것을 꺼려한 이들은 사진촬영도 부담스러워했다. /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416작가기록단’이 전하는 생존학생·희생자 형제자매 26명 이야기

다시, ‘아픈 4월’이다. 2014년 4월16일, 단원고 학생 250명을 포함한 304명(사망 295명, 실종 9명)의 생명이 캄캄한 바다 속에 잠겼다. 선장도, 출동한 해경도, 지휘부도 이들을 구하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 2년이 돼가지만 진상규명은 제자리걸음이다.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혀달라는 유가족의 애끓는 목소리는 정치적 시비 속에 잔인하게 묻히거나 폄훼됐다. 슬픔은 분노로 변했다. 이 과정을 낱낱이 기록하는 사람들이 있다. 안산·국회·청운동·광화문·팽목항 등지에서 세월호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글로 기록해온 416세월호참사작가기록단도 그 중의 하나다. 작가기록단은 지난해 1월 단원고 희생학생의 부모 13명의 인터뷰집인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출간했다. 이어 최근엔 생존학생 11명과 희생학생의 형제·자매 15명을 인터뷰한 책 <다시 봄이 올 거예요>를 펴냈다. 이들을 지난 5일 만났다.

-416세월호참사작가기록단은 어떻게 구성됐나.

(유해정) “참사 직후 시민들을 중심으로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가 구성됐다. 영상, 사진, 글로써 기록하는 분들이 모였다. 이 중 글을 쓰는 작가기록단은 르포작가 김순천 씨를 주축으로 약자의 목소리에 관심있던 이들이 알음알음 참여했다. 2014년 6월 첫 회의를 했다. 세월호 참사를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기록해야 할 지, 누구의 목소리를 담을 지 등을 논의했다. 유가족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게 지금은 가장 중요하다고 합의했다. 당시 유가족들은 시시각각 달라지는 상황 속에서 상실의 고통과 분노를 넘어 절망과 무기력 등 매우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고 있었다. 또한 서명운동과 집회, 농성, 단식 등 강경하게 정부와 맞서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을 열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언론으로 입은 상처 탓에, 낯선 타인에게 자신들의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우리는 곁을 지키며 같이 싸웠다. 그 과정에서 부모님들이 마음을 열었다. 첫 결과물이 <금요일엔 돌아오렴>이었다.”

(명숙) “당시 유가족들에 대한 모독과 모욕이 많았다. 공영방송인 KBS 보도국장이 세월호 사건을 교통사고와 비교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큰 논란이 일기도 했다. 유가족의 목소리는 소음이거나 무음으로 치부됐다. 인권이란 의무와 권리가 동반된다. 말할 권리도 있고 들을 의무도 있다. 그게 사회 또는 공통체를 이끌어가는 힘이다. 그런데 당시 한국사회에선 그것이 삭제되고 있었다. 유가족의 목소리를 온전히 전달할 필요성을 느꼈다. 처음엔 고통 속에 신음하는 유가족들을 지켜보며 과연 제대로 기록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그러다 그 분들이 서로를 버팀목 삼아 스스로를 씩씩하게 다잡는 모습을 보면서 ‘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 같은 고통과 고비를 겪은 유가족들은 서로에게 온기가 되고 있었다.”

-유가족 인터뷰를 하면서 세운 원칙 같은 게 있나.

(유해정) “앞장서서 활동하고 계시거나 언론에 노출된 분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대열의 맨 뒤에 서 계시거나 아예 활동을 못하고 계신 분들도 찾아내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지병이 있거나 남은 자식의 상처를 돌봐야 하는 등 다양한 이유로 말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분들이 계셨기 때문이다. 또 단원고가 1반에서 10반까지 희생자가 있었기 때문에 각 반에서 골고루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 열세분의 이야기지만 유가족 전체의 이야기가 될 수 있도록 사건이나 조건이 좀 더 다양한 분들의 목소리를 담으려 했다.”

-기록작업을 하면서 가장 큰 어려움은 뭐였나.

(정주연) “경계심이 강한 유가족의 마음을 얻기까지 과정은 진행상 힘듦일 뿐이었다. 정작 힘든 건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힘들어서 못읽고, 못보겠다는 사람들을 볼 때다. 피해자가 어떤 고통 속에 있는 지 전혀 귀 기울일 마음의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시 봄이 올 거예요>는 어떤 배경에서 기획했나.

(이호연) “10대에 참사를 겪은 생존학생과 희생학생의 형제·자매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다.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생존학생들의 경우 배에서 탈출하는 과정에 대해 언론에 많이 시달린 탓에 다시 이야기하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그러다 지난해 4·16인권실태조사단의 세월호 참사 피해자 인터뷰 작업에 우리 중 일부가 참여했다. 한편으로 우리들의 계획을 설명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생존학생 몇명이 찾아와 청취한 후 다른 친구들을 소개했다. 희생학생 형제·자매들의 모임에도 제안을 하고 세월호가족협의회에도 요청을 했다.”

-생존학생들이 언론 인터뷰는 거부하고 있다.

(강곤) “저와 인터뷰하기로 한 생존학생 한명은 두번 만나고 나서 한달간 연락이 두절됐다. 인터뷰를 안하겠다고 했다. 왜 마음을 접었는지 묻지 않았다. 언론은 생존학생들이 왜 이제서야 입을 열었는지, 또 왜 대다수 생존학생들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참사를 겪고 나온 생존학생들의 발언을 언론은 의도적으로 편집하고 왜곡했다. 정치인은 고통과 모욕을 줬다. 일베뿐 아니라 사회분위기는 ‘지겹다’ ‘그만하라’는 것이었다. 상황이 그런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생존자들의 침묵할 권리도 존중해야 한다. 피해자들의 경험이나 고통을 공적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통을 반추하라고 요구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박희정) “신뢰를 회복하려면 신뢰를 잃게 한 쪽에서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가 중요하다. 언론에서 잘못했다는 자성의 목소리는 나왔지만 이후 상처입은 이들에게 어떤 태도를 보일지 고민하지 않았다.”

-기성세대, 더 나아가 한국사회에 대한 불신이기도 한가.

(명숙) “당연하다. 그러면서도 세월호 관련 도보행진이나 촛불문화제 등에서 자신의 일처럼 아파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을 보고 다른 가능성을 봤다는 이야기도 한다. 특히 피해 학생들과 또래인 10대와 20대가 세월호 참사 애도와 진상규명 활동의 주체로 나선 것에 큰 힘을 얻었다고 한다. 안산에선 중·고등학생들이 세월호 관련 서명에 적극 나서고 노란리본도 정말 많이 하고 다닌다. 진상규명에 대한 의지를 주체적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많은 분들이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을 읽어내는 눈과 귀가 우리사회엔 부족한 것 같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4년 4월 17일 오후 진도 체육관을 찾아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고 원인을 규명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 약속은 지금까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사진은 해경과 해군이  당시 진도 해상에서 실종자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는 모습.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4년 4월 17일 오후 진도 체육관을 찾아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철저히 조사하고 원인을 규명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 약속은 지금까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사진은 해경과 해군이 당시 진도 해상에서 실종자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는 모습.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얼마나 보상 받았냐” “지겹다”
언론은 의도적인 편집과 왜곡
정치인은 모욕과 조롱 날리고
사회는 ‘이제 그만하라’ 하는데
생존자들이 어떻게 입을 열겠나


-이번 책에 등장한 생존학생 11명은 모두 대학생이 됐다. 책 출간에 앞서 웹툰으로 제작해 공개한 첫회엔 생존학생이 타인의 시선을 힘겨워하는 일상이 담겨 있다.

(명숙) “언론이 특례입학을 왜곡하고 과장되게 강조한 것과 관련 있다. 단원고 출신은 특혜받은 집단이라는 이미지가 우리사회에 형성된 것에 걱정과 두려움을 갖고 있다. 또 하나는 동정어린 시선이다. 이런 편견들이 새로운 친구관계를 맺는 데 장애가 되고 있다.”

(유해정) “이는 세월호 참사의 모든 피해자가 겪는 고통이다. 우리 사회는 유가족에겐 ‘배·보상을 얼마나 받았냐’고 하고, 생존학생들에겐 ‘특례입학생, 친구 놔두고 나온 아이’라는 막말까지 했다. 구조활동에 나선 분들에겐 ‘네가 좀 더 구조했더라면’이라는 말이 돌아왔다. 이들에겐 자신을 밝히는 것 자체가 이 모든 모욕과 폭력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 생존자나 유가족이나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자신을 온전한 한 개인으로 봐줄 것인지 고민하고 갈등한다.”

-형제·자매 이야기는 부모들에 비해 많이 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기록작업에 참여한 이유는 무엇인가.

(고은채) “언니를 잃은 한 학생은 인터뷰 첫날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울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다음날도 약속을 잡고 나왔다. 왜 힘들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구술을 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나중에 그 학생이 보여준 글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꿈에 언니가 나왔다며 꿈 내용을 글로 적어 가져왔다. 다른 친구들도 많이 그러는데, 꿈에 나온 형제·자매를 기억하려고 그 내용을 기록하는 것이다. 말로는 다 전달하지 못하는 동생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명숙) “희생된 형제·자매를 기억하고 싶은 마음과 자신의 현재 마음을 기록한 결과물이 훗날 자기를 반추하는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 참여한 경우가 많다. 10대인 자신들이 겪은 게 무엇인지 세상에 말하고 싶어 참여한 이들도 있다.”

-세월호 참사 전과 후, 그들 삶의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유해정) “‘세상에 대한 불신’이다. 이전엔 완벽하지는 않아도 사회적 정의가 있고, 정부가 어려운 이들을 보듬어 안을 것이며, 언론은 공정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게 다 깨졌다. 국가는 정의롭지 않았고, 공권력은 폭력적이었으며, 언론은 왜곡보도로 일관했다. 사람들은 자식을 잃고 형제나 친구를 잃은 피해자들을 모욕했다. 그나마 성인들은 자신의 사회적 자원을 활용해 이런 불신들을 극복해나갈 수 있지만 10대들은 그럴만한 자원도 부족하다. 세월호 참사 후 꿈을 바꾼 친구들이 많다. 내가 만난 희생자의 언니는 죽은 동생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게 삶의 기준이 됐다고 말했다.”

(명숙) “다들 불확실성에 대해서도 말했다. 예전엔 계획도 세우고 ‘내일은 뭘 하지?’ 했다면 세월호 이후부턴 아무리 계획을 세워도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 사회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이젠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겠다’고 말한다”

-생존학생은 트라우마가 심할 것 같다.

(미류) “한 학생은 자주 악몽을 꾸고 감기에 걸리고 이유없이 화가 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저마다 다르게 겪고 있어 일반화시키긴 어렵다. 몸에 새겨져버린 사건이라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중요한 것은 사건 자체의 강도가 트라우마의 강도를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사건 이후 시간이 중요하다. 그것을 함께 기억하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때, 소통 가능한 무엇이 될 때, 트라우마는 달라질 수 있다. 주위사람들이 어떻게 이야기하고 들어주며,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함께 노력하는가가 중요하다. 때문에 트라우마가 어느 정도인가를 묻기 보다는 노란 리본 하나를 더 달고, 생존자나 유가족을 만날 때 어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인터뷰에 응한 10대들이 가장 말하고 싶어한 건 무엇이었나.

(유해정) “‘함께 기억해달라’다. 세월호 피해자 모두의 바램이다. 세월호를 잊지 말아달라는 건 단지 세월호 참사가 많은 생명을 앗아갔고 여전히 다수가 고통속에 있음을 잊지 말아달라는 게 아니다. 진실이 무엇인지를 함께 밝혀 달라는 것이다. 또 우리사회 구성원들이 공포와 불안에 떨지 않고, 자기의 안전과 존엄을 존중받으며 살 수 있는 사회를 세월호를 계기로 함께 만들자는 것이다. 또한 10대들은 우리를 단지 ‘어린 피해자가 아니라 동료시민으로 봐달라’고 요청했다.”

2년 전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열기는 이렇게 뜨거웠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진상을 밝히고 인간 존엄을 지키는 사회를 만들 ‘의무’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사진은 2014년 4월27일 경기 안산 올림픽기념관에 마련된 임시 합동분향소를 찾은 조문객들이 기념관 인근 고잔초등학교 운동장까지 길게 줄을 서 추모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br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2년 전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열기는 이렇게 뜨거웠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진상을 밝히고 인간 존엄을 지키는 사회를 만들 ‘의무’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사진은 2014년 4월27일 경기 안산 올림픽기념관에 마련된 임시 합동분향소를 찾은 조문객들이 기념관 인근 고잔초등학교 운동장까지 길게 줄을 서 추모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정의·국가에 대한 믿음 산산히 깨져
생존자·희생자 형제자매 삶 큰 변화

“우리 고통 기억해달라는 게 아니라
진실이 무엇인지 함께 밝혀달라는 것”



-2년이 흘렀지만 진상규명은 지지부진하다. 시민들의 관심도 멀어지고 있다.

(미류) “답답하다. 그래서 우리가 만난 형제·자매들은 결국 자신들이 끝까지 진상규명을 위한 길을 가야겠다고 스스로 재확인하는 것 같다. 누구도 끝이 언제라거나 혹은 끝이 있다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월호 특별법이 폭발적인 운동을 통해 만들어졌지만 정부의 적극적인 방해 속에 왜소화되고 무능해졌다. 사실 특별법 혹은 특별조사위원회가 진상규명의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당장 5~6월 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이 끝날 수 있다고 하는데 이것도 법 개정을 통해 바꿀 수 있다. 또 특별조사위원회가 아니더라도 상설특검법이 있으니 필요한 건 언제든 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우리가 함께 고민하는 것이다. 혼자 슬프면 절망이 된다.”

(고은채) “세월호 참사는 ‘남의 일’이 아니다. 어느날 갑자기 나의 일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자각이 ‘불안’과 ‘공포’ 사회에 살고 있다는 절망만 주는 건 아니다. 불안하고 무서우면 멀리하고 떠나면 되는데 참사 이후 사람들이 보여준 반응은 함께 곁에 있는 것이었다.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에서 나아가 어떻게 해야할 지 알고 있는 것이다. 지금 세월호 참사에 대한 관심이 적다고 해서 사람들이 해결의 소망을 버린 것도, 남의 일로 여기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돼 있는데 정부가 적극 나서주지 않으니 답답한 것이다.”

-여기 모인 분들은 이전에도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 용산참사 등 현장에서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기록해왔다.

(강곤) “이랜드 파업 노동자들을 어느 매체에선 아무것도 모르다가 억울하게 해고된 아줌마로, 또 다른 매체에선 노조활동한 투사로 그렸다. 언론에 의해 이들은 선량한 피해자와 아주 강력한 투사, 이 양극단의 이미지로 고착됐다. 이런 선입견에서 탈피해 온전한 한 인간으로서 그 사람이 이 사건을 어떻게 겪었고 어떻게 변화했는지 기록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엔 공존할 수 없는 먹이사슬구조임에도 펭귄과 곰, 새가 화목하게 같이 산다. 이들이 합심해 물고기 잡아 먹는다. 그런데 물고기는 대사가 없다. 말할 수 없는 존재는 아무렇게나 대해도 되는 존재, 공동체에서 배제된 존재다. 발언권이 주어지고 누군가 경청한다는 건 곧 시민권의 문제이자 인권의 문제다. 이 두 가지 의미에서 우리의 기록작업도 계속되고 있다. ”

-고통을 사회적 기억으로 만드는 것은 왜 중요한가

(유해정) “역사는 주류가 쓴다. 비주류,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은 소설처럼 창작되기 일쑤다. 우리는 기록을 통해 지금 시대를 산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일상을 구성했고 국가 폭력이나 사회적 부정의를 어떻게 목도했는지,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삶의 전체적 맥락 속에서 기술한다. 밀양 송전탑 투쟁 과정에서 만난 조계순 할머니는 자신의 이야기를 누군가가 소중히 들어준 것만으로도 기뻐하셨다. 책이 나왔을 때 환갑이 넘은 아들이 ‘왜 싸우는지 몰랐는데 엄마가 90평생 살면서 어떤 역사 속에서 일군 땅인지를 알게 됐고, 송전탑이란 게 엄마의 모든 삶을 부정하는 폭력이었음을 깨달았다’며 울었다고 했다.”

(박희정) “어떤 고통이 사회적 기억이 된다는 건 우리가 바라보는 관점과 해석이 있음을 의미한다. 고통을 사회적 기억으로 만드는 게 왜 중요한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하나는 개인적 차원이든 사회적 차원이든 애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사자가 무엇을 잃었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건 진상규명과 연결되는데. 사회적 기억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이분들이 무엇을 잃었는지 우리 사회가 세월호 참사를 통해 무엇을 빼앗겼는지 알아가는 과정이다. 다른 하나는, 이런 참사가 또다시 반복되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점검하는 차원에서다. 이는 참사 발생이 개인적 불운이 아니라 사회구조적 문제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고통을 사회적 기억으로 만드는 것은 사회구성원 모두가 사회적 실천을 할 의무가 있음을 다시 환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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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기억해야 할 구절.... 특히 지금 시대에서!


"제가 만약 1935년에 선서를 거부했더라면, 그건 결국 독일 전역에서 저와 같은 사람 수천수만 명이 선서를 거부했다는 의미였을 겁니다. 이들의 거부는 결국 수백만 명의 마음을 움직였을 거예요. 그랬다면 정권은 전복되었을지도 모르고, 최소한 애초에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일 자체가 없었을 겁니다.1935년에 제가 차마 저항할 채비를 갖추지 못햇다는 것이야말로, 독일에서 저와 유사하게 영향력을 지녔거나 또는 영향력을 지닐 잠재력을 지닌 사람 수천 명, 또는 수십만 명도 저와 마찬가지로 저항할 채비를 갖추지 못햇다는 뜻이었어요. 그리하여 이 세상이 상실되었던 겁니다." -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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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른바 독일의 적들로부터 그런 이야기가 들려왔지만, 독일의 적은 곧 그들의 적이기도 했다. "러시아인과 미국인이 우리에 관해 한 말들 있지 않습니까." 목수 클링켈회퍼의 말이었다. "그런 말들을 이제는 자기들끼리 주고받더군요." -79쪽


그는 거기서 벌어지는 일을 보자마자 아이들의 부모들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지금 유대인을 괴롭힐 뿐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당신들은 지금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고 있어. 지금 당신들은 자기 아이들에게 '도둑질'을 가르치는 거라구." 노인이 이 말을 남기고 가버리자 그제야 부모들은 군중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그러고는 아이들이 갖고 있던 과자를 내버리게 하고, 아이들을 끌고 황급히 그곳을 떠나버렸다. -82쪽


자기가 노예였다는 것을 몰랐던 사람들은 자기가 해방되었다는 것조차 모르게 마련이다. -98쪽


1931년에 독일 국영 철도에서는 불황을 이유로 직원들을 해고했다. ... 그는 자기네 지역 조장이 사실은 나치 반대자였으며, 그 역시 '자기 일자리'를 계속 지킬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에 당에 가입했던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조장의 상관, 즉 그 지역 감독관이 열혈 나치였기 때문이다. 결국 조장은 셰퍼가 자기 결단에 따라 입당했다고 간주한 나머지, 몰래 그를 해고하려 했다. 하지만 이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그 지역 감독관이 나치를 보호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겁니다." 크로넨베르크에서는 이런 사건이 분명히 하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건이 딱 하나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고, 비단 크로넨베르크에서만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133쪽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게 하나 있습니다." 내 동료 가운데 한 명인 언어학자가 말했다. ... "지속적인 변화와 '위기'를 가지고 우리를 계속 바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외부와 내부에 있는 '국가의 적들'의 책동에 위낙 매료되었습니다. 맞습니다. '매료되었던' 거죠. 때문에 우리 주위에서 조금씩 조금씩 자라나던 그 끔찍한 것들에 관해서 생각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무의식중에 감사해 하고 있었습니다. 굳이 생각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235~237쪽


"맨 먼저, '더 작은 악'의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나중에 친구들을 도울 수 없어서 생겨나는 악에 비하자면, 제가 선서를 함으로써 생겨나는 악은 오히려 정도가 덜하다고 할 수 었죠. 하지만 선서라는 악은 확실하고 즉각적이었던 반면, 제가 친구들을 돕는 일은 미래의 일이었기 때문에 불확실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나중에야 가능할 선에 대한 희망으로, 그 당시에 그곳에서 분명한 악을 범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이 악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 선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었던 반면, 악은 이미 뚜렷한 사실이었습니다. ... 그 희망사항은 자칫 실현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음을 시인해야 하겠죠. ... 하지만 핵심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더 작은 악'의 문제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바였어요. 독일에 사는 우리는 힌덴부르크가 히틀러보다는 덜 악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에 가서는 양쪽 모두를 겪게 되었죠. 하지만 미국인은 아마 이해를 못할 거라고 했을 때, 제 말뜻은 이게 아니었습니다. 아니죠. 정말 중요한 핵심은 어겁니다. 나치 때문에 죽고 말았던 무고한 사람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당신은 알고 계십니까?" -253쪽


"제가 만약 1935년에 선서를 거부했더라면, 그건 결국 독일 전역에서 저와 같은 사람 수천수만 명이 선서를 거부했다는 의미였을 겁니다. 이들의 거부는 결국 수백만 명의 마음을 움직였을 거예요. 그랬다면 정권은 전복되었을지도 모르고, 최소한 애초에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일 자체가 없었을 겁니다.1935년에 제가 차마 저항할 채비를 갖추지 못햇다는 것이야말로, 독일에서 저와 유사하게 영향력을 지녔거나 또는 영향력을 지닐 잠재력을 지닌 사람 수천 명, 또는 수십만 명도 저와 마찬가지로 저항할 채비를 갖추지 못햇다는 뜻이었어요. 그리하여 이 세상이 상실되었던 겁니다." -255쪽


"제가 '아니오'라고 대답한 첫날까지만 해도, 저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4시간의 여유를 얻어 '다시 생각하는' 사이에, 저는 결국 믿음을 잃었습니다. 그리하여 이후 10년 동안, 저는 산이 아니라 기껏해야 개미탑 하나밖에는 움질일 수 없었던 겁니다." -256쪽


"우리는 '너희 중에 작은 자들'을 어디까지나 우리 민족 안에서만 찾았어요. 법을 준수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요. 하지만 유대인이나, 집시나, 기타 등등은 아니었죠. 평범한 사람들, 그러니까 '아리아인들' 사이에도 '너희 중에 작은 자들'은 있었으니까요. 수백만 명이나요." -313쪽


히틀러는 자유민이 더듬거리던 노끈을 모조리 칼로 잘라버렸다. 그는 자기 민족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던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 그는 그 문제를 박살내버렸다. 그는 대단한 낭만주의자였다. 나는 자칭 '민주주의자'인 수금원 지몬에게 이렇게 몰어본 적이 있다. 당신은 히틀러의 어떤 면이 그렇게 좋았는냐고 말이다. "아." 그는 곧바로 대답했다. "그의 '어쨌거나' 하는 태도죠. 그러니까 그의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는 내 식대로 하겠다'는 태도 말이예요." -352쪽


만약 미국이 독일인에게는 자유를 '제공할' 수 없다고 판정했다면, 그들은 결국 히틀러가 옳았다고 판정하는 셈이 된다. -4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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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연 응답할 수 있을까

-재난참사에 대한 기록들


어쩔 수 없이 읽게 되는 책이 있다. 나에게는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금요일엔 돌아오렴>이 그런 책이다. 책이 나오기 훨씬 전부터 유족들 인터뷰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소식을 접했지만 막상 책이 나온 뒤에 나는 도저히 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깊은 슬픔과 커다란 고통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을 만들 때 내가 기획했던 책, <밀양을 살다>가 참고가 되었다며 저자 간담회 자리에 내가 패널로 소환(?)되는 일이 벌어졌다. 간담회 날짜가 다가오자 책을 읽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몇 번씩 책을 덮어가며 며칠에 걸쳐 겨우 책을 읽었다. 지난해 여러 곳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이 책의 내용을 여기에서 다시 소개할 필요는 없겠다. 대신 이 책과 함께 읽으면 좋을 책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재난참사에 관한 기록들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제 곧 또 다시 잔인한 봄이 올 것이고 우리는 그렇게 세월호 2주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2년이라는 시간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기에 어느 정도 적당한 시간일까? 아니 적당한 시간이란 게 과연 있기나 할까? 우리는 누구나 같은 시간을 살아간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특히 재난참사를 겪은 이들의 시간은 그렇지 않은 이들과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 몇 십 년 같은 하루를 살기도 하고 며칠 혹은 몇 개월이 하루 같기도 하다. 때문에 재난참사를 겪은 이들에게 동일한 일상의 시간 감각을 회복하라는 요구는 그 자체로 커다란 폭력이다. 최소한 우리는 남겨진 이들이 충분히 슬퍼하고 애도할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의 저자 노다 마사아키는 이 애도의 시간을 절망, 분노, 우울, 용서와 수용, 재출발 등으로 구분하여 ‘상(喪)의 단계’라고 이름 붙였다. 그런데 이 단계는 일직선으로, 순차적으로 밟게 되는 과정이 아니다. 이미 지나온 단계로 돌아가 같은 과정을 다시 밟아오는 경우도 있고, 단계의 지속 기간이나 강도도 저마다 다르다. 결국 재난참사를 겪은 생존자들과 유족들의 슬픔을 함부로 재단하거나 전형화하지 말고 각각의 처지와 조건을 헤아리는 것부터 위로와 공감은 시작되어야 한다.  


정신병리학자인 노다 마사아키는 1985년 일본항공(JAL) 추락 사고 당시 유족들의 상담을 맡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대형 참사 유족들의 슬픔에 대한 책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를 쓰게 되었다. 이 책은 520명이 사망하여 일본 항공사고 사상 최악의 참사로 기록된 JAL 추락 사고와 수학여행 중 수많은 일본 학생들이 희생당한 상하이 열차 사고 등 대형 참사를 겪은 유족들을 만나고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유족들은 왜 그토록 시신을 찾으려고 애쓰는지, 잘못된 보상 과정이 유족들에게 어떤 아픔을 안겨주는지, ‘유족의 시간’과 ‘관계자의 시간’은 어떻게 다른지, 관 주도의 추모행사가 어떻게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바꾸며 어떤 집단은 어떻게 애도를 돈 벌이에 이용하는지 등에 대해 때로는 조근조근 설명하고 때로는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재난참사를 겪은 이들에게 주변 사람과 이 사회가 어떻게 그들을 위로하고 함께할 것인지에 대한 귀중한 조언이다.  


생존자, 그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것이 인재(人災)가 되었든 자연재해가 되었든 재난참사를 겪은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의 경험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재난을 다시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침묵은 어떤 경우라도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혹시 사회가 그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살피는 일도 중요하다. 오해나 편견에서 비롯된 비난의 시선이든 선의에서 비롯된 동정의 시선이든 당사자에게는 무슨 무슨 사건의 ‘피해자’로 낙인찍히는 것은 또 하나의 고통이자 억압이다. 그러므로 재난을 겪은 이들을 피해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 온전히 만나는 일이 중요하다. <쓰나미의 아이들>은 그런 점에서 침묵을 강요당하기 일쑤인 아이들의 목소리를, 재난에서 출발했지만 재난 이후의 삶까지 담아냈다는 점에서 너무나 소중하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북동부에서 진도 9.0의 거대한 지진이 발생했고 후쿠시마 원전을 비롯한 일대 지역에 거대한 쓰나미가 덮쳤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2만여 명, 피난민 수는 38만 명을 넘어선 이 재난이 벌어지자 탐사보도 전문 기자 모리 겐은 현장으로 달려가 대피소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아이들에게 그날의 일에 대한 작문을 부탁했다. 그렇게 아이들이 쓴 글이 <쓰나미; 피해 지역 아이들 80명의 작문집>으로 묶여 일본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거기에 담긴 이야기 중 10개의 스토리를 뽑아서 추가로 취재와 인터뷰를 한 책이 바로 <쓰나미의 아이들>이다. 


하루 아침에 쓰나미로 집을 잃고 가족과 친구를 잃은 아이들은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중고등학생까지 연령대도 다양하고 이혼이나 재혼 등 가족의 구성도 다양하며 당연히 쓰나미 이후 삶을 꾸려가는 방식도 저마다 다르다. 다만 재난을 겪었다는 것과 함께 재난에도 불구하고 서로 서로 삶을 지탱하며 살아간다는 점만은 동일하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재난 이후에도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이라는 것을 <쓰나미의 아이들>은 들려주고 있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책임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소개할 책은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이다. 전후후무한 탈핵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본인 스스로 자신의 작업을 ‘목소리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겪은 수많은 이들의 참혹한 목소리를 가공 없이 있는 그대로 담았다.


20세기 최악의 참사로 불리는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 사고 당일 2명의 작업자가 그 자리에서 죽고, 화재 진압에 나선 소방대원이 방사능에 피폭되어 3개월 뒤 29명이 사망했으며, 원자로 주변 지역 9만 여 명이 강제 이주되었다. 그 뒤로 6년 동안 발전소 해체 작업에 동원된 노동자 6,000여 명, 그 지역에서 소개된 민간인 2,500여 명이 사망했고 최소 40만 명, 최대 70만 명 정도가 암, 기형아 출산 등 각종 후유증을 앓고 있다. 러시아의 한 환경단체의 통계로는 이 사건으로 죽은 사망자는 총 150만 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사건의 참상이나 피해의 규모에 있지 않다. 알렉시예비치는 이 책의 한국어판에 별도의 서문을 실었다. 요약해서 옮기면 이렇다. 
















“두려움만이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 첫 번째 핵 수업은 체르노빌이었다. … 그리고 지금, 우리는 두 번째 핵 수업을 받고 있다. 하나도 아닌 11기의 원자력 발전소에 사고가 났다. 체르노빌처럼 후쿠시마에도 전 세계의 이목이 쏠려 있다. … 오늘날 거의 30개국에서 443기의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 중이다. 미국 104기, 프랑스 58기, 일본 55기, 러시아 31기, 그리고 한국에 21기가 있다. 종말을 앞당기는데 충분한 개수다. …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체르노빌을 겪어 본 인류는 핵 없는 세상을 향해 갈 것만 같았다. 원자력의 시대를 벗어날 것만 같았다. 다른 길을 찾을 줄 알았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체르노빌의 공포 속에 살아간다.”


비단 핵 뿐일까? 우리는 몇 번째 수업을 받고 있나?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대구 지하철,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해병대 캠프… 그리고 세월호. 왜 무겁고 슬프고 힘겨운 재난참사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만 하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뜬금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책임감을 뜻하는 영어단어 ‘responsibility’는 응답(response)과 능력(ability)의 합성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물론 상황은 비관적이다. 알렉시예비치의 한국어판 서문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나는 과거에 대한 책을 썼지만, 그것은 미래를 닮았다.”


-<어깨동무> 2016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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