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과연 응답할 수 있을까
-재난참사에 대한 기록들
어쩔 수 없이 읽게 되는 책이 있다. 나에게는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금요일엔 돌아오렴>이 그런 책이다. 책이 나오기 훨씬 전부터 유족들 인터뷰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소식을 접했지만 막상 책이 나온 뒤에 나는 도저히 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깊은 슬픔과 커다란 고통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이 책을 만들 때 내가 기획했던 책, <밀양을 살다>가 참고가 되었다며 저자 간담회 자리에 내가 패널로 소환(?)되는 일이 벌어졌다. 간담회 날짜가 다가오자 책을 읽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몇 번씩 책을 덮어가며 며칠에 걸쳐 겨우 책을 읽었다. 지난해 여러 곳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이 책의 내용을 여기에서 다시 소개할 필요는 없겠다. 대신 이 책과 함께 읽으면 좋을 책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재난참사에 관한 기록들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제 곧 또 다시 잔인한 봄이 올 것이고 우리는 그렇게 세월호 2주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2년이라는 시간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기에 어느 정도 적당한 시간일까? 아니 적당한 시간이란 게 과연 있기나 할까? 우리는 누구나 같은 시간을 살아간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특히 재난참사를 겪은 이들의 시간은 그렇지 않은 이들과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 몇 십 년 같은 하루를 살기도 하고 며칠 혹은 몇 개월이 하루 같기도 하다. 때문에 재난참사를 겪은 이들에게 동일한 일상의 시간 감각을 회복하라는 요구는 그 자체로 커다란 폭력이다. 최소한 우리는 남겨진 이들이 충분히 슬퍼하고 애도할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의 저자 노다 마사아키는 이 애도의 시간을 절망, 분노, 우울, 용서와 수용, 재출발 등으로 구분하여 ‘상(喪)의 단계’라고 이름 붙였다. 그런데 이 단계는 일직선으로, 순차적으로 밟게 되는 과정이 아니다. 이미 지나온 단계로 돌아가 같은 과정을 다시 밟아오는 경우도 있고, 단계의 지속 기간이나 강도도 저마다 다르다. 결국 재난참사를 겪은 생존자들과 유족들의 슬픔을 함부로 재단하거나 전형화하지 말고 각각의 처지와 조건을 헤아리는 것부터 위로와 공감은 시작되어야 한다.
정신병리학자인 노다 마사아키는 1985년 일본항공(JAL) 추락 사고 당시 유족들의 상담을 맡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대형 참사 유족들의 슬픔에 대한 책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를 쓰게 되었다. 이 책은 520명이 사망하여 일본 항공사고 사상 최악의 참사로 기록된 JAL 추락 사고와 수학여행 중 수많은 일본 학생들이 희생당한 상하이 열차 사고 등 대형 참사를 겪은 유족들을 만나고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유족들은 왜 그토록 시신을 찾으려고 애쓰는지, 잘못된 보상 과정이 유족들에게 어떤 아픔을 안겨주는지, ‘유족의 시간’과 ‘관계자의 시간’은 어떻게 다른지, 관 주도의 추모행사가 어떻게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바꾸며 어떤 집단은 어떻게 애도를 돈 벌이에 이용하는지 등에 대해 때로는 조근조근 설명하고 때로는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재난참사를 겪은 이들에게 주변 사람과 이 사회가 어떻게 그들을 위로하고 함께할 것인지에 대한 귀중한 조언이다.
생존자, 그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것이 인재(人災)가 되었든 자연재해가 되었든 재난참사를 겪은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의 경험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재난을 다시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침묵은 어떤 경우라도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혹시 사회가 그들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살피는 일도 중요하다. 오해나 편견에서 비롯된 비난의 시선이든 선의에서 비롯된 동정의 시선이든 당사자에게는 무슨 무슨 사건의 ‘피해자’로 낙인찍히는 것은 또 하나의 고통이자 억압이다. 그러므로 재난을 겪은 이들을 피해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 온전히 만나는 일이 중요하다. <쓰나미의 아이들>은 그런 점에서 침묵을 강요당하기 일쑤인 아이들의 목소리를, 재난에서 출발했지만 재난 이후의 삶까지 담아냈다는 점에서 너무나 소중하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북동부에서 진도 9.0의 거대한 지진이 발생했고 후쿠시마 원전을 비롯한 일대 지역에 거대한 쓰나미가 덮쳤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2만여 명, 피난민 수는 38만 명을 넘어선 이 재난이 벌어지자 탐사보도 전문 기자 모리 겐은 현장으로 달려가 대피소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아이들에게 그날의 일에 대한 작문을 부탁했다. 그렇게 아이들이 쓴 글이 <쓰나미; 피해 지역 아이들 80명의 작문집>으로 묶여 일본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거기에 담긴 이야기 중 10개의 스토리를 뽑아서 추가로 취재와 인터뷰를 한 책이 바로 <쓰나미의 아이들>이다.
하루 아침에 쓰나미로 집을 잃고 가족과 친구를 잃은 아이들은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중고등학생까지 연령대도 다양하고 이혼이나 재혼 등 가족의 구성도 다양하며 당연히 쓰나미 이후 삶을 꾸려가는 방식도 저마다 다르다. 다만 재난을 겪었다는 것과 함께 재난에도 불구하고 서로 서로 삶을 지탱하며 살아간다는 점만은 동일하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재난 이후에도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이라는 것을 <쓰나미의 아이들>은 들려주고 있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책임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소개할 책은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이다. 전후후무한 탈핵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본인 스스로 자신의 작업을 ‘목소리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겪은 수많은 이들의 참혹한 목소리를 가공 없이 있는 그대로 담았다.
20세기 최악의 참사로 불리는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 사고 당일 2명의 작업자가 그 자리에서 죽고, 화재 진압에 나선 소방대원이 방사능에 피폭되어 3개월 뒤 29명이 사망했으며, 원자로 주변 지역 9만 여 명이 강제 이주되었다. 그 뒤로 6년 동안 발전소 해체 작업에 동원된 노동자 6,000여 명, 그 지역에서 소개된 민간인 2,500여 명이 사망했고 최소 40만 명, 최대 70만 명 정도가 암, 기형아 출산 등 각종 후유증을 앓고 있다. 러시아의 한 환경단체의 통계로는 이 사건으로 죽은 사망자는 총 150만 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사건의 참상이나 피해의 규모에 있지 않다. 알렉시예비치는 이 책의 한국어판에 별도의 서문을 실었다. 요약해서 옮기면 이렇다.
“두려움만이 우리를 가르칠 수 있다. 첫 번째 핵 수업은 체르노빌이었다. … 그리고 지금, 우리는 두 번째 핵 수업을 받고 있다. 하나도 아닌 11기의 원자력 발전소에 사고가 났다. 체르노빌처럼 후쿠시마에도 전 세계의 이목이 쏠려 있다. … 오늘날 거의 30개국에서 443기의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 중이다. 미국 104기, 프랑스 58기, 일본 55기, 러시아 31기, 그리고 한국에 21기가 있다. 종말을 앞당기는데 충분한 개수다. …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체르노빌을 겪어 본 인류는 핵 없는 세상을 향해 갈 것만 같았다. 원자력의 시대를 벗어날 것만 같았다. 다른 길을 찾을 줄 알았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체르노빌의 공포 속에 살아간다.”
비단 핵 뿐일까? 우리는 몇 번째 수업을 받고 있나?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대구 지하철,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해병대 캠프… 그리고 세월호. 왜 무겁고 슬프고 힘겨운 재난참사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만 하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뜬금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책임감을 뜻하는 영어단어 ‘responsibility’는 응답(response)과 능력(ability)의 합성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물론 상황은 비관적이다. 알렉시예비치의 한국어판 서문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나는 과거에 대한 책을 썼지만, 그것은 미래를 닮았다.”
-<어깨동무> 2016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