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편집인(박래군)이 구치소에서 보내온 편지를 '편집인의 글'로 때우고 날로 먹으려고 했는데, 예기치 않게 편집 막바지에 전 편집인이 보석으로 출소하느라 땜방식으로 편집인의 글, 원고를 급조해야 했습니다. (물론 편지도 잡지에 실기는 실었지만)

또 늦어진 변명을 하자면... 칠레 지진사태로 종이 구하기가 힘들었고 편집이 늦어져 인쇄일정도 어그러저버린 탓입니다.

종이잡지를 5년 가까이 만들어왔으면서도 우리 잡지에 쓰이는 종이 펄프가 칠레에서 온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밑에서도 썼지만 참 저는 주변과 관계에 무심한 놈인 거 같습니다.

그래도 좋은 글을 많이 실어 기분이 좋습니다. 편집인의 글에 대해 약간 변명을 하자면, 좋은 글을 소개할 겸 예전부터 한 번 써보고 싶던 방식(서평 방식?)을 도전해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호 편집인의 글은 <사람> 5-6월호 서평인 셈입니다. 그런데 서평은 책을 안 읽은 독자도 고려해야 하는 것인데, <사람>을 다 읽지 않은 사람들,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제 느낌이 전달될까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또 한 권의 <사람>이 나왔습니다. 
 

 

타인의 언어로만 이야기되는 사람들의 연대


대구에 있는 병원 하나가 문을 닫았습니다. 한 달에 1억5000만 원의 적자가 나고 그렇게 쌓인 적자가 120억 원에 달했다고 하니 너무나 당연한 결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문제가 그리 간단치는 않습니다. 그 병원은 바로 적십자병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적십자병원은 공공의료기관으로 저소득층과 이주노동자 같은 취약계층에게 무료진료나 부담이 적은 비용으로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대구적십자병원이 만성적자에 시달렸다는 것은 그 맡은 바 역할을 충실히 했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해 대구적십자병원의 의료급여환자 진료 비율은 다른 지역 적십자병원들보다 많게는 두 배가 넘었습니다. 의료급여환자가 1000원짜리의 진료를 받았다면 일반병원에서는 360원을 내야 하지만 적십자병원에서는 190원만 내도 됩니다. 그래서 대구적십자병원이 일반병원이었다면 오히려 흑자를 낼 수 있었다고도 합니다. 이러한 공공의료기관을 살리기 위해 직원들은 10개월 동안의 임금체불도 감수하면서 폐원만큼은 막고자 애썼습니다. 그런데 애초부터 이윤추구보다 공익성에 무게를 두고 만들어지고 운영되었던 병원이 왜 문을 닫게 된 것일까요?
 
대구적십자병원 폐원 사태를 다룬 이번 호 르포 ‘왜 대구적십자병원은 문을 닫았나’의 앞머리에는 <한겨레21> 기사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서울 강북의 빈곤층이 모여 사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121가구를 심층 조사한 그 기사를 뒤늦게 찾아 읽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하게 살다 가난하게 죽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아픕니다. 아파서 가난해진 것인지 가난해서 아픈 것인지를 구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더 가난하고, 질병이나 장애를 가진 식구가 있는 집은 앞으로 더 가난해질 확률이 높습니다. 노인들은 무능하고 젊은이들은 무기력합니다. 나이가 적으면 적을수록 자포자기가 심하고 세상에 대한 분노는 더욱 크다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새로울 것 없는 내용인데 기사를 읽으니 가난에 대한 공포가 밀려옵니다. 살얼음판을 걷는 위태로움. 벼랑 끝에서 한 발 삐끗하면 저 아래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이러한 불안과 두려움이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게 하는 것 중 하나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해서든지 빈곤층은 면하고 싶다는 생각, 우선 차상위계층에서 벗어나고 봐야겠다는 심리가 절로 작동합니다. 
 
<사람>의 르포에서 대구적십자병원이 문을 닫은 것은 국민들에게서 거둔 적십자회비의 단 1%도 적십자병원에 지원하지 않은 채 그 어떤 개선의 노력도 하지 않았던 대한적십자사와 “목소리가 없는 시민들을 위해선 관심과 시선주기를 꺼리는 국회의원과 관계 당국” 그리고 “소외되고 외로운 이들을 위해 따뜻한 눈길, 마음을 주지 않았던 많은 대구시민들”의 합작품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만약 목소리가 없는 시민들,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되찾아 어떤 울림을 낼 수 있었다면 결론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저 목청 높고 자신들의 정치세력을 확고하게 틀어쥐고 있는 이들,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 또는 그 어떤 희망의 끝자락을 쥐고 그 침묵의 카르텔에 어떻게든 끼어보고자 했던 이들의 담합에 균열을 낼 수 있는 그 목소리, 울림은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사회적 고통, 그 중에서도 특히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진상규명에는 관심없이 천안함 침몰 사건의 희생자들을 ‘대한의 아들’이자‘순국한 용사’로 일컬으며 유족 돕기 성금모금으로 추모를 독려하고 애도기간을 정해 슬픔을 강요하는 것을 보면 사회적 고통을 정치적 이해관계에 맞춰 이용하려 든다는 의심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반면 “이 참혹하고 억울한 죽음을 알려야 한다는 절박함. 그리고 그 죽음의 원인을 밝히고, 책임을 물어야 하며, 이 같은 사건이 다시 재발해서는 안 된다는 모든 당위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그 죽음의 장면을 마구(!) 사용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라는 질문(‘어느 넝마주이가 생각하는 사진과 인권’) 앞에서 과연 우리는 어떠했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통 받는 피해자의 증언을 듣는다는 것, 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는 것, 그들의 고통 혹은 죽음에 대한 의미부여가 또 다른 방식으로 그들을 밀어내고 가두었던 것은 아닌지, 어떤 명분을 내세워 하나의 의미를 독차지하려는 욕망은 없었는지 되짚어봅니다. 
 
어떤 의미부여에 앞서 아픔에 공감하고 서로의 고통과 경험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최근 불거진 낙태 찬반 논란과 관련하여 “태아의 생명권 대 여성의 선택권이라는 현재의 논쟁 구도에서, 여성은 태아를 죽인 자로서 등장”할 수밖에 없기에 자신의 경험을 말할 수 없음(‘말하기 어려움, 또는 낙태에 대한 작은 말하기’)은 제도적 차별만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각종 억압과 편견들 가운데서 우리가 말하고 듣고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깨닫게 해줍니다. 
 
한 가지 고백을 하자면 삼성의 문제가 심각하고 그래서 깊이 있게 다뤄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또 하나의 가족, 아시아의 삼성’이란 글을 읽기 전까지 삼성에 대한 제 머릿속 사고는 대한민국 국경을 한 발자국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소통과 이해의 전제조건은 타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란 말, 연대가 중요하다는 말은 그저 미사여구였을 뿐 아직껏 제 언어가 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재작년 이맘때 서울 청계광장에서는 그전까지 아무도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 청소녀/년들에 의해 촛불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그 광장에서 100여 일 동안 무수한 말들이 흘러넘쳤고 천차만별, 각양각색의 어깨동무가 있었습니다. “무엇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의 “말들에 귀 기울이고, 계속 말하라고 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명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없으며 “누구나 말할 권리”가 있고 누구나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일 의무”(‘김예슬 선언과 나의 스무 살’)가 있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그렇지만 매우 짧은 시간 동안만 증명되었다 곧 다시 부정되고는 하는 명제 앞에서 다시금 목소리를 빼앗긴 이들, 타인의 언어로만 이야기되어지는 이들과 함께 나누는 말, 그 언어로 재구성되는 관계를 그려봅니다.



-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5-6월호 '사람이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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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일이다. 아이가 생긴 것 같다는 아내의 말에 함께 산부인과에 들렸다 돌아오는 길. 내 손에는 콩알만 한(의사가 ‘요 게’ 태아라고 알려준) 물체가 찍혀있는 초음파 사진 한 장이 들려있었다. 불과 십 수 일 된 생명. 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과연 어떠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약간 당혹스러웠다. 열 달 뒤에는 분만대기실에서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촬영대기중인 예비 아빠들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흔한 똑딱이(소형 디지털카메라) 하나 챙기지 않았지만 분만실 어딘가에 있던 카메라를 통해 출산 직후 아이의 모습은 동영상 CD로 구워져 지금 우리 집 책꽂이에 꽂혀있다.

사진을 찍고 찍히는 일은 하나의 의식(儀式)이다. ‘인증샷’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나지도 않았을 무렵부터 우리는 가족사진을 통해 누군가로부터 한 가족, 그것도 화목하고 단란한 가족임을 인증 받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러고 보니 나는 늘 졸업앨범 비를 아까워했지만 어머니는 졸업장보다 졸업사진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듯하다. 그런데 아이를 낳은 뒤 손주와 가족사진을 찍자고 하자 너희 식구 끼리나 찍으란다. 몇 해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자리가 찍힐까봐 두려우셨던 걸까?

인천 동암역 ‘역전 사진관’


언제부터인가 동네 사진관들이 하나 둘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나마 오래된 사진관이 몇 군데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천으로 향했다. 인천은 좀 묘한 도시다. 닫혀 있던 조선이 외세에 의해 처음으로 문을 열어야 했고, 그 문으로 선진 문물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왔던 항구. 한국전쟁의 또한 한국 현대사의 판도를 뒤바꾸어 놓았던 맥아더의 상륙작전의 도시. 낡아서 인기가 높다는 ‘바이킹’의 월미도와 처음으로 짜장면을 만들었다는 ‘공화춘’이 있는 차이나타운. 확인할 수는 없지만 사진에 최초로 등장했던 조선 사람은 고기잡이를 하는 어부였다고 하니 그 무대가 인천은 아닐까 하며, 인천 부평구 십전동 동암역 광장에 있는 참 오래된 동네 사진관 ‘역전사진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버님은 반공포로였어요. 이승만 대통령 적에 거제도(포로수용소)에 있다가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 남아라, 그랬는데 아버님은 이북 사상이 싫어서 여기(남한)에 남게 되었죠. 그런 사람들을 정부에서 당시 인천에 있던 동일방직에 많이 들여보냈어요. 거기 다니면서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시고…… 어머니 막내 삼촌이 평화사진관이란 곳에 근무하셨는데 동일방직을 나와 거기 다니면서 사진 기술을 배워서 사진관을 연 거죠.”

1964년 그렇게 만석동에 문을 연 부흥사진관은 1974년 지금 동암역 근처로 옮겨와 동암사진관이 되었고 1980년 지금의 동암역 남부광장에 자리 잡으면서 역전사진관이 되었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최광남 씨가 증기기관차를 타고 학교를 오가던 시절, 학교를 마치면 아버지 도시락 심부름을 하며 그는 자연스럽게 사진관 일을 돕게 되었다.

“그때는 사진관마다 외무원(외판원)들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티켓(할인권)을 팔면서 사진관 홍보를 해주었는데 이 사진관 가면 설탕 준다, 저기 사진관을 가면 수건 준다, 자기들 멋대로 그러고 다니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사진 찍으러 와서 왜 설탕 안 주느냐? 항의하는 사람도 있었죠. 아버님은 그게 못마땅하셔서 우리 사진관은 조금 하다가 외무원을 아예 안 두게 됐죠.”

다들 어렵던 시절, 설탕을 주거나 말거나 양장점이나 제화점과 같이 사진관은 큰맘 먹고 찾아야 하는 곳이었으리라. 그 무렵 최광남 씨가 기억하는 최고의 호황은 1968년이었다. 1968년 정부는 모든 성인남녀에게 주민등록증이란 것을 만들게 했고 거기에는 하나같이 증명사진을 붙여야 했으니 국가적 차원의 기념촬영이 이뤄졌던 것이다. 또한 1964년부터 1973년까지의 베트남 파병도 사진관 매출을 올리는 데 한몫했다. 처음에는 파병군인 손을 통해, 이후에는 밀수업자들을 통해 손목시계와 사진기가 대량으로 국내에 들어왔고 그만큼 사진을 인화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이 시대적인 특수였다면 연례적인 호황도 있었다.

“3월 입학 시즌이 제일 바빴지. 중고등학교 학생증 때문에 2~300명이 증명사진을 찍으러 한꺼번에 몰려오고 그랬으니까. 그때는 온 식구들이 잠도 못자고 사진관 일에 달라붙어야 했어요. 한 사람당 여섯 장씩 뽑아줬거든. 그때는 일일이 손으로 노광(필름에 적당한 빛을 줘서 밝기를 조정하는 일, 노출이라고도 한다)을 줘서 밝기를 동일하게 해야 하는데 어떤 사진에 조금만 오래 주면 그것만 색이 달라져버려. 그럼 그거 한 장만 오려내고 다시 필름을 현상해야 돼요. (옆에서 함께 사진관을 운영했던 부인 임경희 씨는 ‘다시’라는 말이 제일 징그럽다며 추임새를 놓는다.) 나중에 많이 하면 달인이 되어서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기계적으로 됐지. 그런데 또 학생들이 대부분 까까머리에 옷도 똑같은 검은 색 교복을 입었잖아. 다 인화하고 나오면 요만한(손바닥 절반 크기의) 봉투에 풀칠을 해서 사진 한 장을 붙여가지고 커다란 베니어판에 봉투들을 쫙 붙여놔요. 어떻게 일일이 다 꺼내보고 확인하고 찾아줄 수가 없으니까. 그럼 자기 얼굴 찾아서 떼어 가는 거지. 그런데 자기 것만 떼어 가면 문제가 없는데 꼭 친구 것도 같이 가져가서 안 전해주는 경우가 생겨요. 그럼 그 친구는 왜 자기 사진은 없느냐 그러고. 그럼 그것도 다 필름을 다시 확인해서, 어떨 때는 필름의 명찰까지 확대해서 그걸 보고 찾아서 다시 뽑아주고 그랬죠.”

그리 오래지 않은, 불과 2~30년 전 일이지만 지금은 찾을 라야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 되었다. 암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다니던 학교 사진반 서클룸의 암실은 몰래 담배피기 딱 맞춤인 공간이었다. 한쪽은 검고 한쪽은 붉은 커튼을 걷고 들어서면 풍겨 나오던 알싸한 화학약품 냄새.

“그 당시에는 다 손으로 했어요. 암실에 들어가서 야광이라고, 붉은 다마(전구)에 필름을 비춰서…… 온도계도 없었지만 오래 하다 보면 새끼손가락 끝이 온도계야. 인화지에 노출을 준 다음 욕조에 약품을 타고 인화지를 담가서 희석을 시켜요. 처음에는 현상액, 그 다음에는 정지액, 정착액…… 약품들이 희석이 잘 안 되면 (사진에) 줄이 생기거든. 그럼 또 다시 해야지. 그리고는 흐르는 물에 12시간 정도 담가둬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사진이 좀 오래되면 노랗게 돼. 사진 잘 보는 사람은 인화한 걸 보고 딱 그러지. 금방 변하겠네요. 그때는 그걸 다 손으로 하니까 손톱이 맨날 노래졌지. 또 건조를 해야 하는데 작은 탁자 크기의 건조기가 있어요. 스텐리스 판에 열장씩 얹어놓고 롤러 같은 걸로 물을 쫙 뺀 다음 약간 있으면 김이 모락모락 내는데 조금만 오래 두면 또 사진이 거기에 눌러 붙어. 그럼 또 다시 뽑아야 되고. 그게 다 기술이지. 암실에 있는 시간이 하도 많아서 해를 거의 못 보고 살았어요.”

따라가기 벅찬 디지털 세상

한참 이야기를 하는데 어느 할머니가 사진관 문을 열자마자 대뜸 여긴 처음 올 적에는 총각 사장이더니 지금은 백발이 다 되었다며 농을 던지고는 딸네 사진 한 장 찍어주고 싶다며 가격을 묻고 가신다. 아버지 일을 도와 사진관을 하던 최광남 씨가 군대를 제대하고 결혼을 한 뒤 신혼집을 겸한 사진관을 차려 독립한 것은 1980년. 그때만 해도 동암역 남부광장은 그야말로 허허벌판에 양계단지만 들어서 있어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생활고에 직면한 최광남 씨는 낮에는 사진관을 부인에게 맡기고 인천항에 있는 선원조합에 취직을 했고 80년대 후반 경기가 좋아지고 형편이 좀 나아지자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사진관에 전념했다.

“88년 올림픽 앞두고 큰맘 먹고 그동안 모아둔 돈에 대출까지 해서 칼라사진 인화기를 샀어요. 5000만원이 넘었는데 당시 빌라 한 채 값이었죠. 그때 사람들이 참 사진을 많이 찍은 거 같아요. 사진기를 빌려주기도 했죠. 입학식이나 졸업식, 소풍이나 바캉스 같을 때. 제일 잘 나가던 게 올림푸스 팬이라고 24장짜리 필름 넣으면 48장 나오는 사진기인데 사람들은 같은 필름을 사도 여러 장 찍을 수 있으니까 좋고, 우리는 인화 많이 하니까 좋고. 그 기계(칼라사진 인화기)를 10년도 넘게 썼어요. 애지중지하며 썼죠. 그런데 어느 날부터 디카(디지털카메라)로 바뀌면서 쓸 일이 없어지니까, 기계가 돌아가야 고장도 안 나는 법이잖아요. 그 안에 약이 들어가는데 헌 약이 빠지고 새 약이 다시 들어가고 그래야 되는데 약도 그대로 두니까 상하고. 그러면 쓰지도 않은 약 몇 개월에 한 번 갈아줘야 하고. 이래저래 적자만 계속 쌓여가니까 몇 해 전에 처분을 했죠. 여기 사진관 문으로 나갈 수도 없는 큰 기계여서 내가 다 분해해서 고철상 불러서 가져가라고 했어요. 13만원 고철 값 내주고 가져가는데 마음이 짠하더라고.”

디지털인화서비스란 것이 처음 등장한 게 2000년, 그 시기 대부분의 언론사 사진기자들도 일명 DSLR이라고 하는 디지털카메라로 바꾸던 시기였다. 한 언론에 따르면 디지털인화 시장은 2002년 12억 원 대였던 것이 2년 뒤 600억 원 대로 가파르게 성장했다고 한다. 너나없이 사진기를 갖고 다니고 핸드폰에도 사진기가 장착되던 무렵, 사진기가 많아지니 더 많이 사진을 뽑을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동네 사진관들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시대가 너무 빨리 바뀌어. 디카가 들어오니까 나도 2000년인가 카메라 바디만 천 몇 백만 원짜리를 샀지. 그때는 1기가 메모리만도 60만원에 베터리 가격도 만만치 않아. 그때는 베터리가 TV리모컨만 했어요. 그런데 지금 1기가에 얼마나 해? 4기가에 만원도 안 하잖아. 디카는 너무 빨리 바뀌고 다 수입에 의존하니까 부품도 금방 단종이 되어서 고장 나면 수리할 때도 없어. 그러니까 장비 구입하고 따라가기 바쁘지. 증명사진 전용 프린터기도 코닥 제품으로 600만 원짜리 샀는데 좀 있으니까 코닥이 생산을 안 한다는 거야. 사진관들 문 닫는 게 다 그런 이유야. 디카 나오기 몇 해 전에는 폴라로이드 사진기, 증명사진 찍는 전용 폴라로이드가 있었어요. 25분, 17분, 5분, 3분…… 빨리 뽑아주는 게 경쟁이 될 때였으니까 그걸로 증명사진을 찍었는데 그럴 98만원 주고 샀었는데 그것도 몇 해 지나서 무용지물이 됐지. 또 폴라로이드는 필름 값이 비싸잖아. 딱 찍고 1분 있으면 나오는데 보면 눈을 감았어. 그럼 다시 찍어줘. 또 눈을 감았어. 눈감은 사진 필름은 반품도 안 되는데, 속이 타지. 손님은 왜 자꾸 눈 감을 때 찍느냐고 그러고. 네 번까지 찍은 적도 있어. 그럼 뽑을 때 얼마나 조마조마 한지……. 그 필름이 여기 어디 있는데…… 마지막 쓴 게 2004년 9월이네. 디카가 들어오니까 그거야 좋지. 눈을 감든 말든.”

무언가를 오래 들여다본다는 것

낼 모레 환갑을 바라보는 백발이 성성한 이가 이메일이니 포토샵이니 하는 낯선 용어들과 마주치며 컴퓨터 모니터와 씨름했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부인 임경희 씨는 몇 해 전부터는 “머리 흰 소년(남편을 칭하는 애칭인 듯하다)이 젊은이들 결혼식에 사진 찍고 그러는 게 보기 좋지 않다”며 출장사진도 나가지 말라고 말렸다고 한다. 사실 디지털화와는 별도로 행사사진촬영이 전문화, 기업화되면서 출장사진 주문도 거의 없어졌다.

“예전에는 집에서 돌잔치를 많이 했잖아. 그럼 나는 한 짐 싣고 다녔지. 오토바이에 병풍, 돌상에 올라갈 것들, 삼각대에 조명에, 나중에는 비디오카메라까지 메고. 그런데 가보면 집들이 다 좁아. 지금처럼 좋은 렌즈도 없으니까 방안에서는 돌상이 다 안 나오거든. 그러면 창문 열어놓고 창틀에 매달려서도 찍고 그랬어. 그런데 뷔페 문화가 들어오면서 싹없어졌지. 지금이야 다 그런데서 돌 사진, 결혼사진 그런 거 찍잖아. 또 아이사진 전문 스튜디오가 생겨나고. 애들도 잘 안 낳지만 낳아도 이런 데서는 잘 찍으려고 안 하지. 또 영정사진 작업도 많이 했지. 사진이 서비스업이라고 나는 돌아가신 분들한테도 서비스 잘 했어. (웃음) 구겨지고 접히고 그런 사진 들고 와도 정성들여 복원해주고. 아마 저승에서도 다들 고마워하실 거야. 잘 모르겠는 거는 사진을 뽑아놨는데 안 찾아가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거야. 그것만 다 찾아가도 내 형편이 많이 나아질 거야. (웃음) 신혼여행 사진도 어떻게 됐는지 안 찾아가. 신혼여행가서 갈라섰나? 전화해도 번호가 바뀌었어. 저기 밖에 걸어놓은 사진도 혹시 지나가는 사람 중에 아는 사람이 보고 연락을 해줄까 싶어서 걸어놓은 결혼식 사진이야. 심지어 어머니 팔순잔치 사진을 찍었는데, 그런 사진은 찾으려면 목돈이 들어가니까 형제들 중에서 몇 십만 원 가지고 찾는 사람이 없는 거야. 그래서 재고가 이렇게 많아.”

창고에서 그가 들고 나온 사진을 보니 테이블 한 가득이다. 어려운 살림살이가 많은 동네일수록 버려지는 앨범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진을 찍는 일보다 사진을 정리하고 보관하는 일에 더 많은 여유가 필요하고 더 많은 정성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버려진 사진은 버려진 사연이기도 할 텐데 실시간으로 찍고 버리기가 반복되는 지금 우리는 더 가난해진 걸까, 풍요로워진 걸까?

“필름은 정말 고심해서 찍잖아. 그래서 한 장을 찍더라도 그 사람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돼. 마지막 필름 한 장, 마지막 한 방을 찍을 때 얼마나 생각이 많겠어요. 렌즈를 통해서 보고 또 다시 한 번 쳐다보고.”

사람들은 그렇게 오래 들여다보고 싶어서, 오래 쳐다보고 싶은 것들을 찍어온 모양이다. 그런데 점점 무언가를 오래 들여다보는 일이 쉽지 않다. 사진관을 나서기 전 그는 기억에 남는 한 장의 사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족 중에 누가 아프면 가족사진을 찍으려는 와요. 아버님이 편찮으신데 가족사진을 찍고 싶다고 그래서 모시고 오시라고 했더니 거동을 못하신데. 집에 가서 세팅을 하고 찍으려는데, 가족사진은 화목하게 나와야 하는데 다들 우울해. 얼굴 표정에 다 나타난다고. ‘미소 지으세요.’ ‘좀 웃으세요.’ 그래도 분위기가 침침해. 어떻게 하겠어. 그냥 찍어줬어. 그리고 배경도 다 합성해서 지저분한 거 없애주고 사진관에서 찍은 것처럼 만들어줬는데 그 다음날인가 그분이 그만 돌아가셨어. 그래서 그걸 집에 걸어놓기가 그렇다고 그냥 뽑지 말고 두라고 그러는데 세월이 지나서 마음 바뀌면 찾아가시라고 하고 뽑아서 보관해놓고 있었지. 그랬는데 2년인가 지나서 어머니가 찾아가시더라고. 안 버리기를 잘 했어요, 하시면서.”


- <삶이보이는 창> 5-6월호에 보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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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04-29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날로그 시대의 추억이 묻어나는 좋은 글이네요^^

나무처럼 2010-04-29 11:19   좋아요 0 | URL
감사.. 그런데 갈수록 아날로그가 그리워지니... 나이 먹는게... 쩝...
 

3월 26일 안중근 의사 서거 100주년을 추모하는 평화대행진이 서울시청 광장에서 광화문 광장까지 진행되던 때 바로 그 옆에서 장애인 생존권을 요구하는 피켓을 든 중증 장애인들이 1인 시위를 벌이려다 경찰에 의해 사지가 들린 채 도로 밖으로 끌려나와야 했다.  

4월 1일에는 서울 덕수궁 앞에서 천안함 실종자의 무사귀환과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촛불집회를 열던 2명이 연행되었다. 같은 달 4일에는 광화문 사거리에서 배트맨·슈퍼맨 복장으로 ‘생명의 강을 살리기 위한 투표참여 촉구 1인 플래시몹’이 경찰의 방해로 무산됐다. 12일에도 같은 장소에서 ‘4대강·무상급식 6월2일 투표로 결정하자’는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시작하자 전경 20여명이 에워싸고 피켓이 안보이도록 방해했다.   

그리고 어제, 4월 20일 장애인의 날에도 420장애인차철폐공동투쟁단의 행진은 광화문 광장 앞에서 멈춰야 했다.  

광장은 비어 있음으로 해서 무언가를 드러내는 공간이다. 막힘 없는 자리를 일컫는 그 광장이 가로막힘으로 역설적으로 오늘 대한민국 광장은 대한민국이 어떤 사회인지를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음은 오늘 아침 인권단체연석회의에서 보내온 메일이다. "내 자유가 도대체 누구를 불편하게 하는가"라고 묻는다. 경찰과 정부의 답변은 시민의 불편이라는 것인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권력자의 불편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내 자유가 도대체 누구를 불편하게 하는가
[집회시위 자유 보장을 위한 광화문 1인 시위를 시작합니다]

표현의 자유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언론미디어법, 선거법, 정보통신이용망법, 개인정보보호법, 집시법...우리가 신뢰하고 의지해야할 법에 의해 먼저 힘을 잃었습니다. 법으로 보호받아야할 곳에서는 경찰을 비롯한 숨은 정보기관들과 막강한 정부 조직에 의해서 공개적으로 또는 비밀스럽게 살해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자유와 권리... 그동안 피 흘리며 쌓아왔던 민주주의를 빼앗겼습니다.
 
인권은 공기처럼 없어져야만 그 존재가치를 인지할 만큼 흔하면서 또한 그것이 사라졌을 때 가공할 만한 위협을 주는 무서운 또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 모든 것, 인권, 민주주의, 자유, 권리, 행복이 모두 사라질 위협에 처해있습니다. 아직도 모르시겠다구요? 그렇다면 지금 당신은 인권을 외쳐야 할 만큼 절박하지 않은 어떤 조건에 있을 뿐입니다. 곧 신기루처럼 사라질 어떤 조건.

일단 우리는 집회 시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싸우겠습니다. 물론 이미 집시법에 의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로. 하고자 하는 집회는, 1인 시위와 기자회견 등 모두 불법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국회에서는 헌법재판소의 야간시위헌법불합치에도 불구하고 “모든 야간 집회를 밤 10시부터 아침 6시부터 금한다”는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한나라당 조진형 행정안전위원회 위원장의 입법안입니다.

촛불도 1인 시위도, 삼보일배도 기자회견도 안되는 시청, 광화문 일대에서 직접행동을 하겠습니다. 내 자유와 권리와 인권과 민주주의가 도대체 누구에게만 불편한 것인지, 제2의 ?행금지 시간을 만들면서까지 듣고 싶지 않은 진실이 무엇인지, 찾아내고야 말겠습니다. 우리는 경찰에 의해 구금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집회시위 자유 보장을 위한 광화문 1인 시위] 

- 장소 : 광화문 광장
- 시간 : 저녁 7시부터
- 기간 : 광화문과 시청 광장에서 1인 시위를 감금하거나 체포하지 않는 날까지

※시청, 광화문에서 금기시되는 촛불, 1인 시위, 집회, 기자회견, 문화제. 모든 종류의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날까지. 비폭력 직접행동은 계속 기획될 예정입니다

 
   




해악은 정부가 개인이나 집단의 활동과 힘을 불러일으키는 대신에 자신의 활동으로 그들의 활동을 대체할 때, 그리고 정부가 그들에게 정보를 주고 조언을 하고 때로는 반박을 하는 대신에 그들로 하여금 속박속에서 일을 하게 하거나 그들에게 비켜서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들의 일을 대신 나서서 할 때 시작된다. (209p)
 

벌써 200년도 전에 나온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 나오는 구절이다. 4.19 50주년이 되는 올해 50년전 싸움이 다시 시작되는 느낌이다(물론 그 싸움이 한 번도 중단된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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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단 발표의 의도가 순수하든, 그렇지 않든간에 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학부모의 입장으로는 공개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전교조가 명단 발표를 반대하는 입장도 조금은 이해는 가지만 전교조의 주장보다는 학부모의 알 권리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명단 발표 이후 일부 학교에서 학부모가 전교조 담임을 거부하는 일도 우려된다고 하지만 이 또한 전교조가 짊어져야 할 책임입니다." 

어느 블로그에서 옮겨 온 글이다. 학부모의 알 권리가 전교조 명단이 공개되지 않아야 하는 이유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전교조의 명단이 공개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뭘까? 의도가 순수하든 그렇지 않든 학부모의 알 권리는 존중받아야 하는 걸까? 

87년인가 88년, 나는 중3이나 고1쯤이었을 것이다. 어느 선생님이 "교사도 노동자라고 생각하는 사람?"하고 물었고 우리 반에서 나 혼자만 '교사도 노동자다'라는 데 손을 들었다. 뭔가 선행학습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사설 입시학원 강사였는데, 월급장이는 다 노동자고, 본인도 그렇다는 취지의 말씀을 자주 하시고는 했다. 학원강사가 노동자라면 학교 선생도 노동자인 것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놀라운 것은 그런 생각을 나 혼자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비슷한 생각을 가졌지만 손을 안 들은 이들도 있었으리라.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아직도 일부 보수언론은 교사가 노동자라니! 공무원이 노동자라니!하고 거품을 문다.) 

흔히들 말하는 전교조 세대로 해직교사들이 넘쳐나던 시절이었지만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에는 전교조 소속 교사도, 해직교사도 한 명 없었다. 그래도 시대의 영향을 받아 세미나를 하던 친구, 학원자율화를 위해 학내 시위를 조직하던 친구, 대학을 진학하는 대신 노동운동에, 공장에 투신하는 친구들이 생겨났다. 나는 가끔 언론에 전교조와 관련된 기사가 등장하면(그것이 전교조가 잘 한 일이든, 잘 못 한 일이든) 그때 그 친구들이 떠올랐다.  

'환멸'이란 수식어로 표현되던 90년대를 지나며 사회주의권이 몰락하고 공장에 들어갔던 386들이 대학에 복학하고 유학을 떠나고 정치권에, 학계에, 시민운동에 화려하게 복귀할 때도 그 친구들은 '고졸학력'에 머물렀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절, 그 흔한 위원회에 이력서 한장 넣을 자격도 안 되었던 그이들의 상당수는 아직도 노동현장에서, 지역에서 성실하게 활동하고 있다.  

전교조가 처음 들고 나왔던, 그래서 더욱 울림이 컸던 '참교육'도 참 좋은 말이지만 그 이전에 그런 친구들에게 전교조가 의리를 다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많은 부분 그렇지 못해왔다고 생각된다. 전교조는 그 친구들에게 교육 현장에서 교사로서의 기본의무이자 철학인 '참교육'보다 더 중요한 무엇, '사람됨이 무엇이고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본질적 물음을 던졌고 그 친구들은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젊음을 고스란히 바쳤던 '전교조  키드'였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딴 데로 샛지만... 전교조는 노동조합, 노동자들의 모임이다. 노조는 권력관계에서 강자인 사용자에 맞서기 위해 노동자들이 할 수 있는 합법적인, 그러고 헌법적인 권리인 노동3권 중 하나 단결권, 파업권, 단체협약권에 의한 모임이다. 그러한 노동자들의 모임을 학교 안에서 권력자일 수 있는 교사라고 해서 명단이 공개되어져야 한다는 논리에 동의할 수 없다.  

학부모의 알 권리는 자신의 자녀가 다니는 학교에서 행사되어야 할 권리다. 자기 자녀의 선생이 어떤 철학을 갖고 있고 정치지향을 갖고 있는지, 그 학교 교장은 또 어떤 정치조직에 가입되어 있고 어떤 정치성향인지, 학부모는 분명 물어볼 권리, 알 권리가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한 노조의 전체조합원 명단이 까발려지는 것, 그것도 그야말로 보수언론의 마녀사냥에 시달리는 가운데 공개되는 것은 결코 폭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는 아직 학부모는 아니지만 나도 내 아이의 담임이 전교조인지 아닌지 궁금하고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몇 명이 전교조 선생인지 알고 싶어질 것이다. 또한 흉악범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 커플의 결별 이유가 정말 무었이었는지 궁금하고, 가족의 사생활이 궁금해 아이의 일기장과 마눌님의 이메일이 보고 싶다. 하지만 나의 호기심이, 내 알 권리가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고 상처를 준다면 적절히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 기회가 된다면 담임선생님과의 면담을 통해 넌지시 물어보고, 아이와 함께 놀며, 마눌님과 단 둘이 데이트를 즐기며 가족의 사생활과 최근의 관심사를 들어다보는 게 올바른 인간의 관계라고 믿는다.  

그리고 뱀발... 
학부모를 비롯해 너도 나도 다 교육을 위해서라고 하는데 정작 그 교육의 당사자, 주체인 학생들은 전교조 명단 공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아이들이 선생들이 전교조인지 아닌지를 얼마나 궁금해할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부모들은 자기들을 '공부, 공부' 하며 학교로 학원으로 떠밀고, 왜 학교의 꼰대들은 머리카락 길이에 그렇게 목을 매는지, 왜 이 사회와 우리 학교는 이 모양인지, 고교생이 주도했다는 4.19가 이 나라 민주주의를 가져왔다는데 왜 여태 청소년은 투표권도 없는지(교육감 선거에서마저도!!)...뭐 이런 게 정말 궁금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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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전혁과 전교조 논쟁의 모든 것
    from 블로거의 심정 2010-04-21 03:15 
    1. 엇갈린 하급심 조전혁 의원이 실명이 담긴 교원단체의 가입현황을 자신의 홈페이지에 공개하였다. 그리고 동아일보는, 이미 현황이 공개되어 비공개의 실익이 없으며, 국민의 알권리 차원에서 공개하기로 하여, 동아일보 인터넷 홈페이지인 동아닷컴에 이를 공개하였다. 이는 공개해서는 안된다는 서울남부지법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강행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강력한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조전혁 의원이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공개한 바에 의하면, 이와 같은 사안..
 
 
글샘 2010-04-20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교조 조합원인 교사들에게 반성문이라도 요구할 학부모가 있을까요? 그것이야말로 교권침해의 시발탄이니 전쟁을 일으키는 사라예보의 총성이 될지도 모르지요.
알 권리가 있다고 떠드는 인간들 치고 책 한 권 제대로 보는 넘이 있기나 한지...
그나저나... 저도 저 어둡던 시대에 학교를 떠난 학생들이었던 세대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저는 중학교에서 근무했었기때문에 그런 학생을 직접 본 건 아니지만요.
지금의 '김예슬 선언'을 그 당시엔 고딩들이 뜨겁게 하곤 했지요.
학교에서 애들과 최전선에서 싸우는 저로서는 요즘 전교조의 원래 이념에서 얼마나 뒷걸음질 친 인간인지 상상도 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처음처럼...
산다는 일은 참 어려운데요...
적들은 늘 처음처럼 덤벼드네요. ㅎㅎㅎ

나무처럼 2010-04-20 18:59   좋아요 0 | URL
제 학창시절은 80년대라..뚜드려맞고 눈치보고(군대에서보다 고등학교에서 더 많이 맞고 얼차려 받고 그랬죠) 그래서 졸업이 참 기뼜는데 지나보면, 학교만 보면 지금이 더 어두운 시절이지 않나 싶어요.... 저도 늘 뒷걸음질 치는 인생이어서 처음처럼은 참 힘들지만 그래도 뒷걸음질 친다는 것만이라도 똑똑히 인식하고 허둥대기라도 해보자... 하고 있답니다.ㅎㅎㅎ

기억의집 2010-04-21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학부모 입장으로 말씀드리자면
전 선생님들의 정치적 성향을 아이나 부모가 알아야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선생님이 진보든 보수 꼴통이든지 간에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커밍아웃하는 순간,
아이들도 그리고 학부모들도 고달퍼질 게 뻔하거든요.
이런 비유를 들면 웃기는데
저의 친정모는 한나라빠거든요. 저는 반한나라구요.
그런데 저의 엄마는 어느 정도 그걸 알면서도
노골적으로 한나라당을 종용해요. 완전 괴롭죠.
한번 대판 싸워 친정모가 조심스럽게 대해도
지금도 은근슬쩍 떠 본다니깐요.
저는 선생님들의 정치성향을 커밍아웃 하는 것도
저와 친정모 사이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이와 학부모한테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강요할 수 있다고 봐요.
왜냐하면 일단 선생님이라는 지위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잖아요.
문제는 반한나라당 정서의 선생이면 괜찮은데
한나라당빠인 선생이 문제인 거죠.
어느 자리든 정치적 입장은 무채색을 띠는 것이 젤 편한 거 같아요.

나무처럼 2010-04-21 10:55   좋아요 0 | URL
정치적 성향이 중요한게 아니라 정치적, 종교적 관용을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거 아닐가요? 그게 교사의 기본적인 덕목일 거 같고.. 그런데 대부분의 한빠들은 그런 관용의 미덕을 갖추지 못했으니 문제겠죠. 한편 반한빠 중에도 그런 분들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되는 경우도 있어서...
저도 님처럼 학부모가 꼭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제 개인적 경험도 있어서 아이가 학교 들어가면 무지 궁금할 거 같고, 열성 전교조면 막 친해지고 싶어질 거 같다는... 이것도 자제해야 겠지요^^

기억의집 2010-04-21 11:55   좋아요 0 | URL
지금 제가 우주에는 신이 없다라는 책이 읽는데
이 책의 저자 밀즈가 이런 말을 해요.
친구와 계속 사귀려면 정치와 종교는 이야기하지 말라,라는 옛말이 있다고..

제가 초등학교 다니는 두 아이의 학부모다 보니 학교 선생님들에 대해
어느 정도 잘 아는데,
그 분들 엄마들이 하도 떠 받들어줘서
거의 왕비과에요.

절대 친하게 지내지 마세요~~
그리고 선생님들 자신들도 거의 다 정치색을 숨기고
전교조 선생님이라면 주변의 시선이 만만치 않으니
숨기실 거에요.
여기 알라딘에서 활동하시는 선생님만으로 만족하심이...
 

“내 전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 나는 단 하나에 대해서만-나 자신에 대하여-승리했을 뿐이다.”

지난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죽은 지 딱 100년이 된 날이었다. 그날 난 깜짝 놀랐다. 한국사회가 이토록 독립운동가를 존경하고 사모했었나 싶어서 말이다. 위에 인용문은 내가 안중근보다 훨씬 더 좋아하는 어느 독립운동가의 말이다. 조국의 독립과 혁명을 위해 중국혁명에 뛰어들었던 장지락이란 이름의 조선인. 마침내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비밀리에 처형된 뒤 40여 년이 지나서야 중국에서 공산당원 자격이 회복되었던 그이의 삶은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통해 김산이란 이름으로 알려졌다. 만약 김산이 작가였다면 아마도 조지 오웰과 같은 작품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김산이 죽었던 1938년은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가 출판된 해이기도 하다.

그 유명한 ‘빅 브라더’를 만들어낸『1984년』의 작가, 스탈린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는 이유로 한국에서는 ‘반공소설’의 대명사가 된『동물농장』의 작가인 조지 오웰은 아이러니하게도 꽤나 급진적인 사회주의자였으며 여러 편의 르포르타주를 남긴 르포작가이기도 했다. 몰락한 부르주아 집안의 맏아들이었던 그는 영국의 명문으로 알려진 이튼스쿨을 졸업하자마자 열아홉 살의 나이로 경찰시험을 보고 버마로 가서 5년 동안 경찰 노릇을 했다. 하지만 대영제국의 식민지에서 제국의 말단 관리로서 느껴야 했던 자괴감은 결국 그를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한다. 말이 좋아 전업 작가이지 이십대 후반의 빈털터리였던 그는 2년여 동안 파리의 쪽방촌과 런던의 부랑자 시설을 전전하며 뜨내기 생활을 하게 되고 이때의 경험을 통해 그의 첫 르포작품이자 조지 오웰이란 필명을 최초로 사용했던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 탄생한다. 언뜻 보면 치기어린 젊은이의 방랑기이자 체험기처럼 보이지만 도시 빈민층의 생활에 대한 치밀하고 사실적인 묘사와 지금의 한국과도 별반 다르지 않는 빈곤정책에 대한 통렬한 비판, 자선이 갖는 위선에 대한 통찰은 그를 주목할 만한 신예작가로 만들었다.

이 작품을 읽고 그를 눈 여겨 보았던 진보적인 독서모임 ‘레프트 북클럽’의 편집자는 그에게 영국 북부 노동자들의 실상을 취재하여 글을 써달라는 제의를 한다. 두 달에 걸쳐 위건, 리버플, 반즐리 등 탄광지대를 돌며 탄광노동자들의 노동환경, 주택문제와 실업의 문제 등을 조사하고 쓴 르포르타주가 바로 올해 한국에서 번역되어 나온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오웰은 책의 절반을 할애하여 자신을 비롯한 부르주아 지식인에게 얼마나 뿌리 깊은 속물근성이 있는지(“궁극적으로 속물근성을 떨쳐버려야겠지만, 제대로 준비가 되지도 않았는데 떨쳐버린 척하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다.”), 이른바 사회주의자를 자임하는 이들이 왜 대중들에게 그토록 외면당하는지(“기독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홍보에 가장 해를 끼치는 것은 바로 그 신봉자들인 것이다”)를 조목조목 꼬집으며 그로 인해 사회주의자들이 되려 파시즘을 도와주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러한 지적은 오웰에게 집필을 맡겼던 ‘레프트 북클럽’ 편집자를 매우 당혹스럽게 했고, 책은 출간과 동시에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지만 정작 오웰은 이 책이 나오기도 전에 파시즘과 맞서 싸우러 스페인으로 달려갔다.

스페인 내전은 반파시즘 진영인 좌파 인민전선(공화파) 정부와 가톨릭교회와 파시스트의 지원을 받았던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쿠데타 세력 간의 전쟁이었지만 그 실상은 좀 더 복잡했다. 군부가 반란을 일으키자 민주주의를 위해 나섰던 것은 노동자들, 빈민들로 구성된 민병대였으며 사회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은 스탈린주의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들과 한 편이 되어 싸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카탈로니아 지방을 중심으로 혁명의 기운이 높아지자 사회주의 혁명을 두려워했던 우파 자유주의 진영과 역시 혁명을 원치 않았던 소련 공산당의 지휘를 받는 스페인 공산당은 민병대를 정규군으로 편입시키려 하고 마침내 양 측 간에 무력충돌까지 빚어진다. 그 가운데 많은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은 ‘트로츠키주의자’, ‘프랑코의 내부첩자’로 지목되고 경찰이 동원돼 색출작업이 벌어진다.

카탈로니아의 항구도시 바르셀로나에 도착해 “아무도 아첨하거나 팁을 받지 않았고 웨이터와 구두닦이가 손님을 똑바로 보며 ‘동지’라고 부르는” 사회분위기에 감동받고 “공동의 품위를 위해” 민병대에 들어갔던 오웰은 애초부터 공산주의자냐, 사회주의자냐, 내전을 승리 뒤 혁명을 할 것이냐, 내전과 혁명을 동시에 할 것이냐 하는 정치적인 논쟁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총도 없이 전선에 배치되었던 그에게는 더 나은 무기가 언제 보급될 지가 관심사였고 “부대를 지휘하는 장군의 등을 툭툭 치며 담배를 달라고 하고 싶으면 그럴 수도 있”는 평등하면서도 “어느 누구보다 더 믿음직한 군대”가 언제 파시스트와 제대로 싸울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인민전선 정부와 공산당의 배신이 무력충돌로까지 이어지자 더 이상 방관자로 남을 수 없게 된다. “나는 부르주아적인 공산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이상화된 ‘노동자’에 대한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나, 피와 살을 가진 진짜 노동자들이 그들의 천적인 경찰이 충돌하는 광경을 보니 내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나 자신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어졌다.” 결국 오웰 또한 프랑코의 첩자인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리면서 목숨이 위태로워지고 가까스로 스페인을 탈출하는 것으로 『카탈로니아 찬가』는 끝을 맺는다.

이 세 편의 르포르타주가 씌어진 1930년대는 어떠한 시대였나? 1929년 미국 증시의 폭락으로 대공황이 시작되었고 미국만이 아니라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도 극심한 경제난에 봉착했다. 공장마다 실업자가 속출했고 도시마다 부랑인이 넘쳐났다. 그럼에도 기계화, 산업화, 생산성 증대만이 진보라며 절대시되었고 우생학은 과학으로 포장되어 나치 독일에서만이 아니라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같은 나라에서도 정신장애인, 알콜 중독자, 장애인을 강제로 불임시키는 법들이 만들어지는 등 국가에 의한 반인도적 범죄가 공공연히 자행되던 때였다. 그 가운데 조지 오웰의 경고는 무시되었고 혁명과 전쟁은 패배했다. 2차 세계대전으로 파시즘에 승리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미래를 낙관할 수 없었고 『1984년』을 쓴 다음해인 1950년 오웰은 4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의식, 곧 불의(不義)에 대한 의식이다. 책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을 때 나는 나 자신에게 ‘자, 지금부터 나는 예술작품을 만들어낸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책을 쓰는 이유는 내가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말이 있기 때문이고 사람들을 주목하게 하고 싶은 어떤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라는 산문의 한 대목이다. 스페인 내전이 아니라 내전 속 또 하나의 내전에 대한 르포르타주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그는 냉소와 환멸을 느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인간의 고상함을 발견했다고 고백했다. 사실 카탈로니아는 평택 대추리, 서울 용산, 제주 강정마을에도 있었던 것 아닐까? 도처에 있는 카탈로니아를 위해 더 많은 오웰, 더 많은 르포르타주가 필요하다.

 

 

 

 

 

 

 

 

 

- <인권오름>에 보낸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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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30 16: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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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30 22: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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