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폭풍이 지날 때 나를 찾아가는 징검다리 소설 4
캐런 헤스 지음, 부희령 옮김 / 생각과느낌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처음 펴들었을 때 모래 폭풍을 본적이 없는 나는 그저 모래알갱이 마냥 덤덤하고 건조하였다. 책에 서서히 빠져들며 ‘가뭄, 가난, 사고, 죽음, 방황...’ 따위를 한마디로 줄이라면 서슴없이 “모래폭풍”이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이 낱말에 ‘성숙과 희망’이라는 의미도 덧붙일 수 있게 되었다.


지독한 가난에 몸살을 앓던 1930년대의 미국 경제 대공황과 돈벌이에 급급했던 어리석은 인간들이 대초원을 밀밭으로 개간하는 동안 하늘은 비까지 내려주지 않는 자연재해의 거대한 모래구덩이(Dust Bowl)속에서 열네 살 소녀 빌리 조는 사춘기를 겪는다.


빌리 조는 말수가 적었다. 책이 산문시로 쓰인 것도 사실이지만 장문의 소설로 쓰였다 할지라도 이 소녀가 만드는 말의 따옴표는 적었을 것이다.

 

애타게 비를 기다려야 하는 아버지의 밀농사,

피곤에 쓰러진 아버지를 일으켜 이끌어 내는 어머니의 피아노 연주,

가뭄 속에서도 여린 꽃을 피워내는 뜰의 사과나무,

마음에 자리 잡는 남자 아이의 노래 소리......

 

대사대신 풍경으로 처리된, 가난하지만 잔잔한 평화 속에서 소녀는 나지막하게 말하고 사유한다. 소녀의 눈길을 따라가다 보면 적은 양의(빌리 조의 표현이라면 ‘씹어 먹어야 할 정도의’)우유에 대한 감사가 보이고 배가 불룩한 엄마가 뜨개질 하는 태어날 동생의 배냇저고리만한 설레임도 보인다. 적어도 모래폭풍이 불어 닥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혹독한 가뭄과 함께 동반해 온 모래 폭풍 속에 어른거리던 불길한 그림자는 끝내 빌리 조의 가정을 크나큰 불행으로 빠뜨렸다. 아버지가 부엌 화덕 옆에 갖다 둔 등유 한 양동이는 남편에게 커피를 타주고 싶었던 여인을 불기둥으로 만들어 버렸다. 만삭의 몸으로 회복하기 힘든 화상을 입은 어머니가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쏟아내던 신음은 사람과 동물의 폐에 모래가 가득 차서 서서히 목숨을 끊어놓는 잔인한 모래폭풍이었다. 나는 이 부분에서 소름이 돋도록 전율했다. 이보다 더 한 지옥의 설정이 또 있을까.... 뱃속의 아기의 태동에 비명 지르는 엄마. 간병 도중 물 달라는 애원을 뒤로하고 아내의 비상금으로 술 취하는 아버지. 빌리 조가 아버지 대신 물수건을 비틀어 짜서 입 속에 물방울을 흘려 넣으려 하지만 야속하게 물은 상처에 튀어 도리어 엄마를 아프게만 할 뿐이었다. 그 애도 흰 뼈가 훤히 드러나도록 손에 심한 화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손에 입은 화상은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으나 빌리 조를 통째로 뒤흔들어 놓았다. 사랑하는 엄마와 갓 태어난 동생을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보내야 했고, 좋아하던 피아노 연주를 할 수 없게 되었고, 사람들의 비난을 듣게 했다.


“빌리 조야, 사람들의 말엔 신경 쓰지 마.

넌, 집이 불바다가 되는 걸 막으려고 불붙은 양동이를 밖으로 던진 거야.”

책장을 넘기며 빌리 조를 위해 나는 다급하게 변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겨진 자들의 슬픔은 변호도 받지 못할 만큼 깊다. 아내와 아이를 잃은 허무함에 아버지는 딸을 돌보지 못하고 방치하는 사이, 아이는 거대한 모래 폭풍에 싸여 집을 나선다. 모래폭풍은 상처 난 곳을 더욱 헤집었다. 오, 그러나 삶은 참으로 신비로운 것! 절망으로만 끝내 버리지 않는다. 모래폭풍 속에서는 눈을 뜰 수 없어 오로지 발의 감각으로만 길을 찾아야 한다. 눈에 보이는 세계가 너무나 가혹할 때 눈 감으면 감각의 문이 열리는 것이다.  비로소 소녀는 등유를 부엌에 갖다 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게 되고 아버지를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제일 늦게 나오는 것이 희망이기도 하지만 소녀를 일깨운 희망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다.


나는 밀 같은 사람, 아무데서나 자랄 수 없어.

아버지가 밀을 어떻게 가꾸는지를 보아온 소녀만이 할 수 있는 깨우침이다. 아버지는 몇 달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모두가 절망할 때도 비가 오리라고 굳건하게 믿던 사람이다.


아버지는 잔디 같은 사람이야.

흔들림이 없고, 조용하고, 깊이 뿌리를 내리지.


많은 것을 잃어버렸어도 잡초의 뿌리는 강인한 생명력을 갖고 다시 싹을 틔운다. 빌리 조가 다시 부여잡았던 가족의 소중함이 부녀지간을 화해시키고 새로운 가정으로 회복시킬 전주곡이 되었다. 모래폭풍은 위기이자 기회이다. 비록 불행한 사건으로 내몰았지만 어린 소녀로 하여금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분별할 수 있는 성숙함을 주었기 때문이다. 서정주 시인의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라는 싯귀를 떠올리며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는 삶의 숭고함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051101ㅂㅊ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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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보 2005-11-01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설박사 2005-11-01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참.. 삶은 숭고한 것인데... 그래도 너무 아픈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좋은 리뷰 잘 보고 갑니다. 추천.. ^^

진주 2005-11-02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보님, 왜 음?
설박사님, 네...가슴 안 아프고 철들면 오죽이나 좋을까요....
(두 분 다 추천해주셔서 고마워요)

검둥개 2005-11-02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말없이 추천! ^^

진주 2005-11-02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저는, 이 책 중1 아이들 교재로 낙찰봤습니다^^

미네르바 2005-11-11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른 분들의 리뷰도 읽어봤는데, 님만의 분위기가 잘 느껴지는 글이에요. 모래 폭풍은 위기이자 기회이다 라는 말... 그래요, 위기인 것 같지만 기회가 되는 상황이 있지요. 그 위기를 기회로 잘 만들어야겠지요. 잘 읽고 갑니다. 추천과 함께^^

진주 2005-11-12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만의 분위기는 어떤 걸까요?^^
급하게 쓰는 리뷰도 있고 간단하게 쓰는 리뷰, 담담하게 쓰는 리뷰도 있는데
이 책은 진심을 다하여 공들여 쓴 리뷰거든요.
책은 비교적 간단하지만 마음에 울리는 여운이 아주 커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