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
데라야마 슈지 지음, 김성기 옮김 / 이마고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데라야마 슈지, 이 남자 흉포하다! 말하자면 이 말은 나의 정신세계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 이상한 남자에게 내가 바칠 수 있는 최대의 찬사다. 이틀만이라도 게이가 되고 싶고 여장이라면 언제라도 하고 싶은 나머지 베트남의 아오자이를 입고 ‘나를 사 가세요’라는 표정을 지으며 수치를 동반한 쾌락을 말하던 시마다 마사히코의 “퇴폐예찬” 이후 일본인으로서는 가장 강력한 포스를 내뿜는 이 귀여운 중년의 아저씨를 미워할 수는 있어도 무시하기는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는 ‘아버지, 제 생각은 다릅니다’ 라고 보통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질겁할 이야기부터 먼저 꺼내고 본다. ‘내가 어머니에게 같이 자고 싶다고 하면 어머니는 정색을 한다. 어째서 거부하는 것일까?’ 라고. 아니 정말 몰라서 묻는 말일까? 그의 도발은 계속 된다. ‘잠이야 담요 한 장으로 다리 밑에서 자도 상관없으니 일단은 원하는 스포츠카부터 사고 보자.’ 라고.


실제로 그는 바퀴벌레가 우글대는 아파트에서 양복 한 벌로 버티고 살았지만 스포츠카는 알아주는 로터스 엘란을 가지고 있었단다. 가격대를 알아보니 미국에서 4천만원 정도에 팔리던 차라고 한다. 지금은 단종된 모델이지만 중고가는 1천만원 대에 이른다고 하니 아무리 봐도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다.


그러니 아무리 작가라고 해도 이 남자의 황당무계한 주장에 화도 나고 도대체 그 머릿속에는 무슨 똥이 들었길래 이러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도 그런 항의를 많이 받았는지 10페이지도 넘어가기 전에 친절히 그 이름을 알려주고 있으니 그 똥은 바로 ‘일점호화주의(一點豪華主義)’ 라 불러 달라고 한다.


데라야마 슈지에 따르면 ‘일점호화주의(一點豪華主義)’ 는 본인이 만든 말로 ‘자기 존재 중 쏟아부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여겨지는 한 점(一點)을 골라 그곳에 경제력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는 삶의 방식이라고 한다. 얼핏 들으면 굉장히 멋진 말 같지만 솔직히 말해 김 빠지는 소리다. 열심히 살아보려고 젖 먹던 힘까지 다 내고 있는데 ‘일점호화주의’는 계속해서 딴지나 걸고 있다고 할까.


성(性)에 대해서는 ‘청년이여, 큰 엉덩이를 품으라’ 고 호통을 치고 직업에 대해서는 ‘당신도 야쿠자가 될 수 있다’고 손 쉽게 돈 버는 방법을 가르친다. 그럼 취미생활은? 일단 ‘지방 경마장에서 만나자’ 고 마약쟁이처럼 유혹의 검은손을 내민다. 하지만 당신, 그 손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미래에 대한 교육도 빠트릴 수 없는데 어른이 돼서 기껏 가르친다는 게, 소년에게는 플레이보이로 전락하지 않고 ‘브레이보이’로 살아가는 ‘불량소년 입문’ 따위나 알려주고, 소녀에게는 ‘내가 만일 창녀가 되면 이제까지 사 모은 책들은 모두 헌책방에 팔아치우’겠다는 시시한 ‘하이틴 시집’이나 쓰게 하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다. 쯧쯧쯧..


그러니 뭐 이런 책이 다 있어! 라고 버럭 화를 내며 집어던지는 게 내 정신건강에도 좋았을지 모르나 남자 보는 눈도 없더니 작가 보는 눈도 없는 것 같다. 부주의하게도 나는 그만 이 나쁜 남자에게 홀딱 반해버리고 말았다. 일찍이 사행심이 부족하여 로또 복권 한번 뽑아본 적 없고 투기심 또한 부족하여 경마장 가는 길 근처에도 가본 적 없지만, 미셸 투르니에가 말한 대로 나는 에밀 졸라의 돈귀신 ‘나나’ 보다는 구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에 가까운 ‘생은 다른 곳에’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여자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생은 다른 곳에’ 있다고 믿고 끊임없이 달아난 데라야마 슈지에게서 (이런 표현이 실례가 안 된다면) 잃어버린 고향을 느끼고, 고향을 버리고 떠난 이방인만이 가지고 있는 상실감을 공유할 수 있었다. 하기사 그는 뭐든지 나보다 잘 버렸다. 소년시절에는 부모를 버렸고, 홀로 기차에 올라탐으로써 고향을 버렸고, 동거하던 여자를 버렸다.


물론 달아나는 데도 선수였다. 학교로부터 달아났고 스포츠카를 타고 달아났다. 마권을 사서 서러브레드(경주마)를 타고 달아났다. 예술가가 되서는 답답한 책과 한정된 무대를 벗어나 거리의 연극으로 달아났고, 자살용 기계를 만들어서 죽음으로부터 달아나고자 하였다. 실제로 그는 마흔 일곱 살 그 한창 나이에 요절하는데도 성공했다!


그런데 그렇게 도망쳐서 어디로 가겠다는 말인가? 그에 따르면 ‘산 너머 저편 하늘’ 을 동경하는 것은 소년시절의 이야기로 아무데도 갈 수 없으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 그러나 ‘인생은 자세를 고쳐 앉는 것’이라고 할 때 문제는 어떻게 마음가짐을 변화시킬 것인가? 그 마음가짐의 변화가 바로 그가 강조하는 ‘일점호화주의’라고 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일점호화주의’의 방식은 평범한 우리로서는 낯설고 두렵고 불온하며 정치적으로도 올바르지 않다. 우선 낯짝이 두껍지 않고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판이다. 그러나 ‘직장인들의 평균화된 일상생활이나 알맞게 짜인 경제생활, 무사안일한 부조리, 뭔가 새로운 재미를 갈구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반복되는 나날’ 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는다. 그 것은 살아있으나 결코 존재하는 삶은 아니다.


그러므로 어느날 자신의 인생에 갑자기 찾아든 ‘새로운 사건과 같은 존재를 추구하는 것, 그의 말대로 아프리카 원주민이 난생 처음 비행기의 존재를 확인했을 때 받은 충격을 그들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사상의 출발점이라고 한다면 경주에 돈을 건다는 것 그 자체가 일종의 사상적 행위다. 안전한 마권보다는 위험한 마권에 손을 대어야만 일확천금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가 부추키는 도발이 ‘인간소외적 경향이 있는 벨트 컨베이어에 작은 못으로 구멍을 뚫어 바람이라도 약간 통하게 하자는 것’ 이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똑같은 모양의 소시지가 줄줄이 비엔나가 되어 생산되는 현대사회의 공장을 벗어나 인간 본연의 모습을 위하여 상상력의 지평을 넓히자는 것, 나는 그의 ‘일점호화주의’가 무엇보다 바로 ‘삶을 낯설게 하기’였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죽어서도 계속 달아나고 있고 우리는 여전히 그를 붙잡지 못하고 있다. 그가 남긴 삶의 지도는 가야할 길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네비게이터가 아니라 순수한 속도 그 자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1935년에 태어나 1982년에 죽은 데라야마 슈지는 지금 읽어도 너무 새롭고 너무 젊고 너무 빠르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너무 뒤늦게 그를 만났다. (너무 늦어서 그의 천재성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는 연극도 볼 수 없지 않는가!)


잠깐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사람들의 선입견과 달리 그는 지극히 평범하고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우선 원폭을 반대하고 베트남 전쟁을 미워했다. 세련된 현대의 도시인이 아니라 마음껏 사투리를 쓰는 것이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아무에게도 보호받지 못하는 작은 올리브 기름병을 들고 방황하는 터키탕 아가씨의 고독을 누구보다 염려하며 평범한 인간으로 대했다. 심지어 그는 애꾸눈 경주마에 터무니 없는 돈을 걸고 그 말이 우승하는 꿈까지 꾸었을 정도로 휴머니스트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20세기를 전력으로 앞질러 달리면서 시대를 도발했던 천재 예술가’가 남긴 ‘일점호화주의’에서, 그 위험천만한 도발에서 뜻밖에 도덕을 읽었고 그 행간에서 아주아주 쓸쓸한 페이소스를 맡고 꽤 오랫동안 슬퍼했다는 걸 알려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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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03 21: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히나 2005-12-04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아침까지 눈이 왔으면 좋겠어요 :)

비로그인 2005-12-04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저야말로 일점호화주의 의 방법을 택해 살고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쁘다고 생각하다가 허를 찔린 기분이 들었거든요. 그리고, 응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저는 님의 댓글을 응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괜찮지요?)

히나 2005-12-04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Jude님, 지금 님은 연애에 일점(一點)을 하고 있잖아요. 아주 행복해 보여요. ^^

검둥개 2005-12-04 0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데도 갈 수 없으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 오오오~~~
첫 눈 오는 날 이렇게 멋진 리뷰를 쓰시다니! ^^ 필 받으셨어요? 우헤헤

히나 2005-12-04 0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검둥개님, 위의 말은 데라야마 슈지가 한 말입니다. 책을 읽어보면 촌철살인의 멘트가 한두개가 아니예요. 정말 멋진 책이예요. 전 그 말을 '...'로 옮겨왔을 뿐인 걸요. 눈도 오고 할일도 없고 읽은 지 한참 되서 더 잊어버리기 전에 쓰자 맘먹은 거죠 우헤헤.

blowup 2005-12-04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꽤나 궁금한 책이었어요. 아, 그런데 이런 엑기스 리뷰를 보고 나면 한편으론 책에 대해 시들해지는 마음도 생기니.. 참 난감하죠. 다 본 것 같다니까요. 리뷰를 너무 잘 쓰셔도 문제인 걸요. 음핫핫.

비로그인 2005-12-04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셨군요...;;; 일점호화주의, 만세..;;;

히나 2005-12-04 15: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namu님, 리뷰랍시고 책에 나온 말을 그대로 옮겨와서 문제인 거죠. 그래서 저는 아직 보지 않은 것들에 대해선 영화든 책이든 음악이든 간단한 보도자료 이상은 잘 보지 않아요. 님 말씀처럼 시들시들.. 흥미를 잃어버리잖아요. 그래서 리뷰를 쓸 때 최대한 다른 관점에서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이번 리뷰는 데라야마 슈지에 대한 정보가 이 책 말고는 너무 없다 보니 책에 대한 인상을 그대로 나열한 게 되버리고 말았네요. 그래서 좀 아쉬워요. 데라야마 슈지처럼 리뷰를 써서 한껏 도발도 좀 하고 싶었는데.. 즐찾이 열몇개 쯤 떨어져 나간다던지 하는 식으로 ㅎㅎ

endo님, 다 버리고 거리로 나갈 생각이었으면 탄핵이든 뭐든 감수해야죠.
그게 정직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비숍님, 님의 맨 처음 리뷰를 읽고 제가 댓글을 단 것도 기억나네요. 글 말고 데라야마 슈지의 다른 예술세계도 보았으면 하는 게 제 바램입니다. 일점호화주의 만쉐이!!

icaru 2005-12-04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하고...씨름 같은 대화를 나누는 인상을 주는 리븁니다! ㅋ
근데근데.. 소복소복 첫눈 오는 날 밤... 노릇노릇 군밤같은 페이퍼와 리뷰를 많이 구워내셨어요~
오늘 전... 잠깐 외출을 했는데... 엉금엉금 이리기우뚱 저리기우뚱...돌아다니고 있어요... 딱! 펭귄처럼!

히나 2005-12-04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icaru님, 그런데 이번 씨름은 저의 패배예요 패배. 데라야마 슈지 아저씨 승~~!
촌스런 생각이지만 첫눈 온 날 특별한 페이퍼나 특별한 리뷰를 쓰고 싶었어요.
글로서 나를 정화하고 싶었다고 할까 ㅎㅎ
근데근데.. 그 말 하시니까 갑자기 군밤이랑 군고구마가 먹고 싶어졌어요.
책임지세요!! 엉금엉금 펭귄처럼 기어서라도 사러 나갈까봐요..
하얀 눈밭 위에 새까만 펭귄의 연미복이라.. 님의 모습이 그려지네요.
내가 상상하는 님의 모습은 블랙 보다는 브라운.. 카키빛이 도는 브라운 계열.
얼마전 올린 사진의 의상 때문에 그런 걸까요?

2005-12-06 1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히나 2005-12-08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정말 위험한 발상이라고 말리고 싶을 정도예요 그래도 전 요즘
T H는 이해하고 있어요. 페미니스트로부터 그 사람도 지독할 정도로
공격을 당했고 자신의 언어인 시 조차도 금지당했으니.
하지만 오랜만에 그 시집 나오면서 내 마음의 얼음이 녹았나봐요
(속닥) 우선 이 아저씨는 스타일이라도 근사하잖아요ㅎㅎ
W A는 이상할 정도로 그 쪽 스럽지 않죠. 그 사람은 그냥 뉴요커잖아요.

예전에 그 책이 3권짜리로 번역되어 나왔을 때 안 산 게 후회 돼요.
왜 그랬을까 정말.

2006-01-18 0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 - 박홍규, '에세'를 읽으며 웃다
박홍규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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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셸 드 몽테류를 발견한 것은 알랭 드 보통의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라는 대중 철학서를 읽으면서다. 그 때까지 수상록이 뭔지도 모르면서 (재미 더럽게 없을 거 같은) 수상록의 저자로만 알고 있었는데 내 예상과는 너무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좀 더 알고 싶었다. 복도에 드리운 긴 그림자만 보고도 키다리 아저씨를 좋아하게 된 쥬디 아보트처럼 단 몇 줄만의 문장으로 나는 그만 "에세" 라는 작품에 매료되고 말았다.

그런데 세상에는 나와 달리 호기심이 생기면 직접 발로 뛰어서라도 알아내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있다. 이 책의 저자 박홍규가 바로 그런 용감한 사람이다. 그는 프랑스 문학 전공자도 아니면서 "에세" 해설서를 내게 된 까닭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1960년대에 번역된 엉텅리 "에세" 말고는 제대로 된 번역서가 우리나라에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은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 라는 제목처럼 완전한 번역서도 아니고 깊이 있는 해설서도 아니다. 그 대신 박홍규라는 열혈 가이드의 안내로 산책이라도 하는 것 처럼 여유롭게 '에세' 라는 거대한 숲을 가로지르는 초심자 코스다. 물론 저자의 안내가 기대했던 것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판국에 이 정도라도 어딘가! 그리하여 마침내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생활의 르네상스인' 몽테뉴의 영혼까지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미셸 드 몽테뉴는 누구이고 "에세"는 어떤 책인가?

미셸 드 몽테뉴는 1533년 2월 28일 프랑스의 보르도 부근 몽테뉴 성에서 태어나 (이럴수가! 나와 생일이 똑같다) 고등법원 판사를 지내다 은퇴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몽테뉴 성에 은거하면서 20년 동안 평생의 역작 "에세"를 쓰기 시작한다. 그 사이 중요한 사건으로 결혼을 하고 두 차례 시장직을 역임하며 지병을 이유로 일년 정도 유럽 여행을 다녀온 바 있다.

그런데 프로필로 짐작컨대 일생이 평온무사했으리라는 예상과 달리 그의 일생은 불행한 멜로드라마와도 같다. 수십년간 계속된 신구교도 간의 전쟁으로 삶은 긴장의 연속이었고 부인은 동생과 바람을 피웠으며 아이들의 대부분은 일찍 죽었다. 유일한 친구라 여긴 라 보에티는 그보다 수십년 일찍 세상을 떠났다. 여기까지 보면 참 불쌍한 사람이고 외로운 사람이다. 그러나 책에서는 그런 어두운 그림자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대신,

'몽테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그의 모토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능력을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이성으로 구별하여 인간의 한계를 안다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그는 역사상 최초로 자기 자신에 대해 쓰기 시작한 사람이다. "에세"는 1571년 말 전후부터 그가 죽는 1592년까지 20년간에 걸쳐 쓰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이란 놀라울 정도로 공허하고 다양하며 변하기 쉬운 대상이고 인간에 대해서는 언제나 변치않는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는 간단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평생 화두를 붙잡고 매달린 자기 자신에 대한 회의는 그 어떤 사상이나 종교나 국가도 절대적일 수 없다는 더 큰 회의를 불러왔다. 그리하여 16세기 고대 그리스로 돌아가자는 르네상스의 바람을 타고 그는 인간존재의 다양성을 부르짖었고 삶을 둘러싼 모든 것에 다양한 가치를 인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예를 들어 몽테뉴는 종교전쟁 와중에 그 자신이 카톨릭이면서 신교도와 구교도의 잘못을 공정하게 비판하였고 그 어떤 사람보다 아메리카 신대륙의 원주민의 삶의 방식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당시로서는 쉽지 않은 생각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자유로운 르네상스인, 바로 그 전형이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의 선구자였고, 민중문화를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었다. 또한 과학적인 사회학과 심리학의 창립자였고, 서양중심주의에 반대한 최초의 문화상대주의자로서, 인류학과 민속학 그리고 비교법학의 선구자였다. 동시에 자유교육을 주장하고 자연의 보호와 회귀를 주장한 상태주의의 아버지였다. 또한 당대의 전쟁과 부정부패에 대한 신랄한 고발자였다.'

그러나 박홍규가 몽테뉴에게 매료된 까닭은 다른 데 있다. '박홍규, 에세를 읽으며 웃다' 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그는 이 비범한 르네상스인의 일기에서 그 어떤 위대한 사상 보다 생활의 유머를 먼저 발견하였다.

'몽테뉴는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높은 경지에 오른 자의 고고한 웃음이 아니다. 언제나 타인과 같은 눈높이에서 타인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이어 자신도 같은 부류라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비웃는다. 이 '겹눈'이 몽테뉴 웃음의 고갱이다. 그래서 서글프다. 언제나 쓴웃음이 난다. 그는 웃는 모랄리스트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런 모럴리스트가 없다. 굳이 찾는다면 김형석, 안병욱, 이어령, 김동길, 이태규 등을 꼽을 수 있겠지만, 그들에겐 웃음이 없다. 최근의 박노자나 강준만에게도 웃음은 없다. 그들 역시 도덕 선생이다. 몽테뉴처럼 웃는 모럴리스트는 도덕 선생이 아니다. 그가 도덕 선생과 다른 점은 자기동일성이 없고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에세'를 읽으면서 자유롭다. 도덕 교과서가 아니고 사상서가 아닌 몽테뉴가 말한 것 처럼 아무 것도 아니기에 지극히 편안하다. (물론 담고 있는 내용은 절대 만만치 않다) 어느 정도냐면 평생 책 속 둘러쌓여 산 책벌레가 이런 자기부정까지 하고 있으니 낄낄거릴 수 밖에. '책을 통한 공부는 활기 없고 무기력하다. 따라서 우리의 정신에 단번에 자극을 주지 못한다. 하지만 대화는 단번에 우리의 정신을 일깨워 주고 단련시켜 준다. 이렇게 책을 부정하기에 그를 읽는 것이 더욱 즐겁다.'

나는 철학에는 아는 바 없지만 전적으로 박홍규의 정의에 동의하는 바다. 인류가 짊어지고 가야할 무거운 사상에 깃털처럼 가벼운 유머를 입힌 다음 날려버릴 수 있다는 것, 나는 그런 것들이야말로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 속에서 웃음을 발견할 수 있는 여유.. 미셸 드 몽테뉴는 평생을 통해 천착한 '에세'를 통해 우리에게 그런 삶을 시사하고 있다. 

'그들은 인생을 흘려보내고, 피하고, 빠져나가고, 죽이고 교묘하게 피하고, 또한 인생이 고달프고 경멸해야 하는 것인양, 가능한 한 무시하고 회피하는 것만큼 멋진 삶의 방식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인생이 그런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지금 내가 그것을 잡고 있는 최후의 노경에 와서도 인생은 가치가 있으며, 쾌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박홍규라는 중간자를 통해 바라 본 몽테뉴는 진짜 몽테뉴가 아닌지도 모른다. 그리고 비전공자로서 감히 몽테뉴는 누구라고 '에세'는 어떤 책이라고 정의를 내릴 자신도 없다. 그러나 나는 그 거대한 영혼의 숲에서 길을 잃고 참으로 오래도록 황홀하였다. 16세기 한 르네상스인의 내실의 철학이 마침내 우리를 자유롭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몽테뉴의 말을 빌어 이렇게 리뷰를 끝맺음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렇게도 경박하고 부질없는 일이니 그대로 한가하게 시간을 허비할 거리도 못 된다. 그럼 안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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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5-09-13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혼의 숲에서 황홀해하셨다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 추천드려요.

히나 2005-09-13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통 무슨 소린지 이해가 안 돼 길을 잃고 헤맸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죠 암튼 추천은 감사드려요 호호호.. ^^

marine 2005-09-14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읽으셨군요 전 절반쯤 읽다가 다른 책 읽고 있어요 얼른 읽어야 하는데... ^^

책속에 책 2005-09-14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주의 마이리뷰로 추천합니다~~~^.^

히나 2005-09-14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나님, 이 얘기 저 얘기 좀 산만하게 진행되는 통에 중간에 좀 지루하죠.. 저도 덮었다가 다시 읽었어요..

Daydreamer님, 어머나 이렇게 고마울 데가.. 영광이예요

속삭이신 님, 네 접수했습니다..

2005-11-21 1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몸으로 하는 공부 - 강유원 잡문집
강유원 지음 / 여름언덕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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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강유원의 "책과 세계"를 읽고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는 문장에 홀딱 반해 "몸으로 하는 공부"까지 한달음에 읽게 되었다. 그 때가 지금으로부터 2주 전, 그러나 기대한 만큼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우선 저자의 표현대로 '잡문인 만큼 논리적 연결고리가 없고 겨냥하는 독자가 없었으니 누구 읽으라고 쓴 글인지 알 수 없으며 정제되지 않은 감정들이 흩어져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잡문집이었다. 다만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에 인문학적 매스를 들이대는 강유원의 '방법론적 시니컬'한 글쓰기만은 마음에 쏙 들었다는 걸 밝혀둔다.

그렇다면 '방법론적 시니컬'함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책읽기와 쓰기를 인생의 알리바이로 삼은 저자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책은 왜 읽어야 할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리고 반드시 책을 좋아하는 사람만 이 물음에 답을 해야 할 것이다.' 라고. 나는 철학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철학박사와 논쟁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 질문에 대한 강유원 식 '방법론적 시니컬' 함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아래 나오는 글은 본문 p152부터 p163 에서 그대로 옮겨왔다. (리뷰가 아니라 밑줄긋기로 옮겨야 하나..)

책에 따르면 저자는 본래 시니컬한 사람이다. 그 시니컬을 만들어주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인간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다는 명료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게 의심스러우면 아예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즐기면서 살아가면 좋으련만 한순간만이라도 정확한 뭔가를 가지고 싶은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있으니 그 게 문제다.

그리고 영원한 것을 포기하니까 순간의 정확성에 집착하게 된단다. 마치 염세주의적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 '어차피 인생은 불행하니까 당장이라도 즐겁게 살자'는 마음-이런 것을 우리는 '낙관적 염세주의'라고 할 수 있겠다-으로 살아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그래서 순간순간 살아가며 매사에 개념을 따진다. 바로 고민하고 의혹을 제기하며 결론에 대해 회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세상'의 개념을 생각해보자. '세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적절한 방법은 무엇인가? 첫째, 개념을 묻는 질문은 'what is it' 이 질문은 본질을 묻는 것이다. 따라서 개념=본질이라는 공식이 성립한다.

둘째, 그는 위에서 '세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기보다는 대답하는 방법부터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이는 대답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답을 제대로 해보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그러한 대답을 주는 학문 분과는 무엇인가? 철학? 형이상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그런데 '세상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의문에 자연과학적 방법이나 사회과학적 방법으로는 대답을 내놓기가 어렵다. 다시 말해서 형이상학적 질문에 답하는 방법은 아직까지 확실하게 정해진 것이 없다. 그러므로 결국 이런 질문에 답을 내려면 그냥 정처 없이, 지도도 없이 각자 알아서 '세상의 본질'을 찾아다니는 수밖에 없다. 그 본질에 대답하는 학문이 바로 철학이다.

그런데 그는 '삶이 무엇인가' '세상은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에 대한 답을 (철학이 아닌) 다른 방법을 통해서 찾아보려고 한다. 그것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 구체적으로는 '현재의 사회'에 대해서 깊이 따져 봄으로써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나, 그리고 나의 삶에 대해서 알아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철학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어려움이 있으니 그것은 우리가 살고있는 사회가 워낙 변화무쌍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는 사회에 관해서도 상대적 개념과 잠정적인 규정으로 만족해야 할지도 모르고 이런 상황이 자신이 시니컬하게 만든다고 저자는 털어놓는다. 그러나 시니컬할망정 절망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유원의 '시니컬'은 철저하게 본질을 찾아내기 위한 방법론적인 시니컬일 뿐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위에서 옮긴 것처럼 잡문집 '몸으로 하는 공부'는 책이란 무엇인가, 글쓰기란 무엇인가, 공부란 무엇인가,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개념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강의평가제를 쿠폰으로 해결하자는 대답처럼 생뚱맞을 수도 있지만) 철저하게 본질을 찾아내기 위한 그만의 방법론적인 시니컬함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 방법은 마음에 들 수도 있고 안 들 수도 있다. 그건 각자 공부하는 방식의 취향이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애초에 기대했던 대답은 얻지 못했지만 세상의 끝을 찾아나가는 길에서 얻은 '방법론적인 시니컬'이라는 무기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이제 그 무기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은 읽은 이의 몫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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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12 0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히나 2005-09-12 0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아, 고맙습니다. 덕분에 고쳤어요. 저는 이 사람의 문장이 참 맘에 들어요 굉장히 시니컬하면서도 쓸쓸하거든요. 세상의 모든 염세주의자란 상처받은 로맨티스트라는 말을 믿으세요? 물론 이 말을 한 사람은 궤변론자였지만요..

marine 2005-09-12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면서 책에 제 생각을 많이 적었어요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았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아주 마음에 드는 책이었습니다 제가 너무 앞서가는 걸수도 있겠지만, 강단 철학계에서 소외됐기 때문에 시니컬함으로 무장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시니컬함이 무기이자 한계가 될 수 있다는 거죠

히나 2005-09-12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나님, 저도 위에서 쓴 것 처럼 기대한만큼 만족스럽지는 않았어요 사실 별표 네개는 만족도보다 애정의 표현이죠 ^^ 막 쓴 글들을 모은 잡문집이라 좀 두서가 없잖아요. 그리고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았다는 데 저도 동의합니다 상당히 까칠하셔서 반발이 생기기도 하더라구요. 그렇죠 자기가 아웃사이더가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표독하게 굴까, 혹시 자격지심이나 콤플렉스가 아닐까 하는.. 저는 괜히 폼 잡고 삐딱하게 구는 사람들 보면 한 대 쳐주고 싶거든요 한두살 먹은 애도 아니고..
그래도 그 시니컬함함에 유머가 들어있어서 용서를 했답니다. 어떤 글들은 굉장히 웃기잖아요..

릴케 현상 2005-09-13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듣자하니 학교와 인연을 끊고 직장생활하면서 멍잡고 있다가, 문득 뭐라도 써봐야겠다고 출근해서 업무시작하기 전 시간에 짬짬이 써놓은 글이라고 하더군요. 지금의 강유원씨가 그렇게 쓰지는 못하겠지 싶네요^^

히나 2005-09-13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명한 산책님, 호올 그래요? 강유원 대단하군요 전 출근하면 이미 업무시작시간.. 커피 마시다 보면 한시간이 훌쩍 가던데.. ㅎㅎ
 
버진 블루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권민정 옮김 / 강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좋아하는 작가의 처녀작을 뒤늦게 읽는다는 것은 누군가로부터 내가 그 사람의 첫사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그건 사랑을 막 시작한 사람으로서 좀 서운한 일인데, 더 이상 소유할 수 없는 연인의 과거를 질투하는 것일 수 있고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좋았을지 모른다는 후회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데뷔작 ‘버진 블루’는 너무 늦게 우리에게 왔다.


이 소설은 종교개혁으로 신교도와 구교도가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휩싸였던 16세기 프랑스의 이자벨 트루니에라는 중세여성과 남편을 따라 생면부지의 프랑스로 건너와 유럽 사람들의 무지와 문화적 편견에 시달리는 현대여성 엘리자베스 터너를 통해, 아무 관련 없는 두 여자가 어떻게 수백 년의 세월을 넘어 ‘버진 블루’라는 공통된 운명을 소유하게 되었는지 슈발리에 특유의 유려한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책의 앞날개를 보면 소설의 제목 ‘버진 블루’는 ‘성모의 파란색’을 뜻하는 말로 중세 서양에서는 청금석이 함유된 파란색 물감이 매우 귀했기 때문에 성모 마리아의 옷처럼 소중한 대상을 그리는 데만 쓰였다고 한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컬러에도 길융화복이 있었으니 중세여성 이자벨과 현대여성 엘리자베스는 그 색 때문에 곤욕을 당한다.


한 사람은 칼뱅교를 받아들인 시골 사회에서 성모 마리아를 닮은 빨간 머리색 때문에 ‘라 루스’라고 왕따를 당하고, 한 사람은 파란 색 천이 나오는 꿈 때문에 악몽에 시달리고 피부에 마른버짐이 생기면서 남편과의 관계가 위태로워진다. 그러나 두 사람은 끝까지 ‘버진 블루’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같은 민족끼리 종교전쟁을 치러야 했던 중세여성에게 그 색은 고귀한 성모 마리아의 색이었고, 터너에서 투르니에까지 숨겨진 가계를 밝혀 나가는 미국여성에게 그 색은 소중한 자아찾기의 다른 이름이었다. 다시 말해 ‘버진 블루’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어떤 것이다. 그것은 딸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다. 누구든지 이름 붙이기 나름일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 소설이 데뷔작이라 그런지 우리는 주인공 엘리자베스에게서 작가의 냄새부터 찾게 된다. 미국에서 건너와 프랑스의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엘리자베스 터너는 어쩌면 그렇게 작가와 닮았을까.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엘리자베스가 자신이 겪은 일을 바탕으로 글을 쓰기로 마음먹는 장면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이 책은 신대륙 미국에서 나고 자라 구대륙 영국으로 온 저자가 자기의 유럽조상이 누구인지 더듬어가는 ‘자기 정체성 찾기’인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결코 만만치 않으리라는 것은 엘리자베스가 도서관에서 처음 빌리는 책이 헨리 제임스의 ‘여인의 초상’인 걸 보면 알 수 있다. 헨리 제임스가 누구던가! 그 자신이 영국으로 귀화, 구대륙과 신대륙의 문화적 차이에 주목하여 화려한 유럽사회에 쩔쩔매는 청교도 미국사회를 다룬 위대한 미국 작가가 아니던가.


그러나 저자는 그 힘든 길에 이보다 더 멋질 수 없는 장 폴이라는 남자를 준비해놓았으니 염려할 거 없다. (왜 여성의 자아 찾기는 남자라는 도구가 필요한 걸까!) 도서관 사서라는 로맨틱한 직업에 물론 야성도 빠트릴 수 없으니 한 마리 ‘외로운 늑대’같이 위험하다는 이 남자. 담배 피는 것도 어찌나 멋진지 금연광고에 치명적이다. 거기다 밤이면 술집에서 재즈 피아니스트로도 활약하시고, 저 중세의 기사처럼 언제나 한발 앞서 그녀를 도와줘서 엘리자베스의 원성(?)을 듣는다. 당연하지만 가슴 아픈 과거도 있다. 그러나 일이년 전인가, 미국 여성에게 버림받은 과거는 더욱 더 그 남자를 멋있는 남자로 부각시켜 줄 뿐이다.


언젠가 ‘진주귀고리 소녀’에서 저자는 도저히 소란스런 현대사회를 그릴 자신이 없다고 엄살을 떨었는데 정말 데뷔작을 읽어보니 손 떼길 잘 했다. 16세기 중세여성을 그려낼 때의 섬세함이 현대여성으로 와서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만다. 결말 부분도 우연의 남발(?)이라는 불만이 고개를 든다.


그러나 이 책은 그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그린 첫번째 여인의 초상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그녀가 어떻게 발전해 나갈지 보여준다는 데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사람들의 편견과 종교적인 압박 속에서도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한 이자벨과 마리에게서 훗날 ‘진주 귀고리 소녀’ 그리트를 발견했다고 할까. 그리트의 귀를 뚫은 생경한 고통처럼 화덕에서 발견한 진실은 지금까지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아름다움이란 때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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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05-09-02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사한 리뷰입니다. 아참, 배수아씨도 물고기자리같던데요.

urblue 2005-09-02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네요.

로드무비 2005-09-02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부터 화덕에서 고구마를 맛있게 구워먹는 느낌!
좋습니다!^^

히나 2005-09-02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anicare님, 맞아요 냉혈한 물고기자리라는 인터뷰 기사를 읽은 적이 있어요 저는 따뜻한 물고기자리 ^^

urblue님, 고마워요 이 리뷰 굉장히 쓰기 난해해서 마구 헤매고 다닌 느낌인데..

로드무비님, 페이퍼의 그 고구마? ㅋㅋ 이 소설 보면 감자는 인간이 먹는 게 아니라는 말이 나와서 놀랐어요 돼지나 그런 동물만 먹었대요..

인터라겐 2005-09-10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고기 자리... 2/19일 부터 3/15일까지... 전 양력 음력 모두 이곳에 들어가요...ㅎㅎㅎ 지금 저도 이책을 사고 싶은데 혹시 쿠폰이나 적립금 더 주는 행사할까봐 기다리고 있어요...

히나 2005-09-10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라겐님도 물고기자리군요 반가워요 ^^
 
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 - 이 시대 가장 매혹적인 단독자들과의 인터뷰
김경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솔직히 말해 피처 에디터 ‘김경’은 좋아하지만 패션잡지 ‘바자’는 보지 않는다. 그건 경쟁지 보그도 마찬가지다. 언제부턴가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과 함께 지상에 내려온 ‘천상의 피조물’처럼 사랑스러운 것들은 나로부터 아주 멀리 달아나 버렸다. 그깟 몇 푼 안 되는 돈에 눈이 팔려 회사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에 잡아먹힌 나로서는 미안하지만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내게 남아있는 유일한 것은 활자 중독증뿐인지 모른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것만은 처녀막처럼 상당히 질겨서 난생 처음 읽어보는 2억짜리 손해배상 청구소장의 딱딱한 법률 용어도 (이 책 53페이지에 나오는) 왼쪽 손바닥에 그려진 ‘시’라는 글자처럼 따뜻하고 아름다운 상징을 품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이처럼 자신의 직업을 미워할 수도 온전히 사랑할 수 없는 어떤 불행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돌연변이를 저자는 ‘뷰티플 몬스터’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지?


분명 당대의 첨단을 걸으며 스타일리쉬 그 자체인 멋진 언니오빠들과 청담동 라이프를 구사하는 김경의 코드는 ‘패션피플’이지만 그렇다고 그 아름다운 백조들의 세계에 ‘주류’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명품이라고는 무슨 라벨같은 것이 굴러다니길래 예뻐서 강아지 목걸이를 만들어 본 게 전부인데다 자신의 드레스코드는 빈티지도 아닌 그런지에 불과하다나?


그러나 작가는 자신이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경계인이기 때문에 오히려 두 극단을 자유롭게 오가는 ‘뷰티플 몬스터’가 될 수 있었다고, 직업은 다르지만 비슷한 생각으로 괴로워하던 나에게 언젠가 위안을 준 적이 있다. 물론 내 경우 그 앞에 뷰티플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지는 심히 의심스럽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제 첫 번째 작품으로부터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이 시대 가장 매혹적인 피처 에디터’ 중의 한 사람 김경은 그 보다 더 멋진 두 번째 작품으로 우리를 찾아왔다. 이번에는 ‘이 시대 가장 매혹적인 단독자들과의 인터뷰’라는 가슴 설레이는 부제를 달고서 말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김훈은 (우리가 아는) 김훈이고 싸이는 (우리가 아는) 싸이라는 어찌 보면 단순 재확인 절차과정일 뿐인 이 책에는 총 22명의 사람들이 나와 저자와 대화를 주고 받는다. 직업군도 작가를 비롯해 가수, 배우, 화가, 건축가, 정치인, 만화가 등 다양한데 그만큼 기자 김경이 소화할 수 있는 영역이 넓다는 의미도 되지만 잡지라는 매체가 깊이보다는 오지랖이 넓다는 반증도 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짧은 시간 밖에 허용되지 않은 취재의 어려움일 수도 있고 기자와 취재원 사이의 친밀도가 반영된 탓일 수도 있지만, 22명이라는 출연인물 사이에 그 편차가 어느 정도는 들쭉날쭉한 것이 사실이다. 구성에 있어서도 ‘보이스 레코더’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도 있고 에세이로 재구성한 것도 있는데 차이가 나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런 사소한 아쉬움만 제외한다면 영악한 그녀는 여자라는 카멜레온의 특성을 십분 활용하여 정치인 노무현과는 마포의 허름핫 대폿집에서 서민적인 술자리를, 제멋대로 꼴통 뮤지션 싸이와 DJ DOC에게는 우리 놀아본 선수끼리 청담동에서 같이 한번 ‘지대로’ 놀아보자고(?) 덤비는 등 각각 다른 방법식으로 작업을 걸고 있다. 그리고 그 작업은 원나잇 스탠드까지는 못 가더라도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까.


그리고 인터뷰이에 관한 얘기를 하다가도 언제나 인터뷰어인 자신에게 초점이 돌아오는 이충걸과 달리, 인터뷰이에 대한 애정은 그대로 간직한 채 자신의 자의식을 너무 많이 쏟아내지 않는 (그렇다고 너무 적지도 않게) 김경의 인터뷰 방식은 본받을 만하다. 그렇다고 이충걸의 방식이 못마땅하다는 건 아니지만.. (나는 그의 팬이다)


또한 인터뷰가 끝난 다음에도 냉정하게 그 자신인 채로 남을 수 있는 이충걸과 달리 김경은 만나기 전부터 언제나 ‘폴 인 러브 위드 유’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녀의 인터뷰는 솔직하지만 공정하다고는 볼 수 없고 도발적이지만 그렇다고 큰 파문을 일으켰다고도 볼 수 없다. 하지만 이충걸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자기 자신의 색깔을 강하게 드러낸다고 할까. 그 전체적인 색의 조화가 멋들어진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얘기다.


처음인 김훈부터 시작해 마지막 순서인 싸이까지 오면 어느새 그녀의 용의주도한 페이스에 그만 말려들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데, 대한민국 땅에 (마태우스님 말고) 자기분야의 대가들을 한 자리에 이 정도 모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스포츠 신문이 아니라 청담동 현장(!)에 떠도는 소문이 있으면 직접 찾아가 ‘당신은 가진 게 많잖아. 그러니까 좀 내놔 봐’ 라고 앙탈을 부릴 수 있는 그녀의 멋진 직업과 대담한 용기가 부러울 따름이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의 지도를 매혹적인 방식으로 풀어낼 줄 아는 그녀의 말빨, 글빨, 맘빨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처럼 김경 만세?


마지막으로 아쉬운 점 하나가 있다면 구판 ‘뷰티플 몬스터’와 마찬가지로 ‘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 또한 당대 문화의 최첨단을 걷는 패션지 기자께서 만든 책 치고 디자인이 너무 스타일리쉬하지 못하다는 사실. 나의 소견이 다음 세 번째 작품에는 꼭 반영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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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8-28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샀어요.
당장 읽고싶은 책 중의 하나이건만......
이충걸과의 비교 재미나네요.ㅎㅎ

히나 2005-08-28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번 이충걸과 비교하게 되더라구요.. 두 사람 다 좋아하지만요.. ㅎㅎ
아유, 일요일같은 날 일찍도 댓글을 남기셨네요..
저는 일하러 나왔어요.. 흑..

sudan 2005-08-28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 안 좋아하고, 이충걸과 김경 누군지 모르지만. 리뷰 마음에 들어 일단 보관함에 넣어요.

클리오 2005-08-28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경 좋아요... ^^ 근데 왜 책을 아직도 안읽었을까나...

히나 2005-08-28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udan님, 김경은 몰라도 인터뷰 모음집이니까 나오는 사람들 면면이 재미있어요 함 읽어보세요..

클리오님, 빨리 읽으세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