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
데라야마 슈지 지음, 김성기 옮김 / 이마고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데라야마 슈지, 이 남자 흉포하다! 말하자면 이 말은 나의 정신세계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 이상한 남자에게 내가 바칠 수 있는 최대의 찬사다. 이틀만이라도 게이가 되고 싶고 여장이라면 언제라도 하고 싶은 나머지 베트남의 아오자이를 입고 ‘나를 사 가세요’라는 표정을 지으며 수치를 동반한 쾌락을 말하던 시마다 마사히코의 “퇴폐예찬” 이후 일본인으로서는 가장 강력한 포스를 내뿜는 이 귀여운 중년의 아저씨를 미워할 수는 있어도 무시하기는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는 ‘아버지, 제 생각은 다릅니다’ 라고 보통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질겁할 이야기부터 먼저 꺼내고 본다. ‘내가 어머니에게 같이 자고 싶다고 하면 어머니는 정색을 한다. 어째서 거부하는 것일까?’ 라고. 아니 정말 몰라서 묻는 말일까? 그의 도발은 계속 된다. ‘잠이야 담요 한 장으로 다리 밑에서 자도 상관없으니 일단은 원하는 스포츠카부터 사고 보자.’ 라고.
실제로 그는 바퀴벌레가 우글대는 아파트에서 양복 한 벌로 버티고 살았지만 스포츠카는 알아주는 로터스 엘란을 가지고 있었단다. 가격대를 알아보니 미국에서 4천만원 정도에 팔리던 차라고 한다. 지금은 단종된 모델이지만 중고가는 1천만원 대에 이른다고 하니 아무리 봐도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다.
그러니 아무리 작가라고 해도 이 남자의 황당무계한 주장에 화도 나고 도대체 그 머릿속에는 무슨 똥이 들었길래 이러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도 그런 항의를 많이 받았는지 10페이지도 넘어가기 전에 친절히 그 이름을 알려주고 있으니 그 똥은 바로 ‘일점호화주의(一點豪華主義)’ 라 불러 달라고 한다.
데라야마 슈지에 따르면 ‘일점호화주의(一點豪華主義)’ 는 본인이 만든 말로 ‘자기 존재 중 쏟아부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여겨지는 한 점(一點)을 골라 그곳에 경제력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는 삶의 방식이라고 한다. 얼핏 들으면 굉장히 멋진 말 같지만 솔직히 말해 김 빠지는 소리다. 열심히 살아보려고 젖 먹던 힘까지 다 내고 있는데 ‘일점호화주의’는 계속해서 딴지나 걸고 있다고 할까.
성(性)에 대해서는 ‘청년이여, 큰 엉덩이를 품으라’ 고 호통을 치고 직업에 대해서는 ‘당신도 야쿠자가 될 수 있다’고 손 쉽게 돈 버는 방법을 가르친다. 그럼 취미생활은? 일단 ‘지방 경마장에서 만나자’ 고 마약쟁이처럼 유혹의 검은손을 내민다. 하지만 당신, 그 손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미래에 대한 교육도 빠트릴 수 없는데 어른이 돼서 기껏 가르친다는 게, 소년에게는 플레이보이로 전락하지 않고 ‘브레이보이’로 살아가는 ‘불량소년 입문’ 따위나 알려주고, 소녀에게는 ‘내가 만일 창녀가 되면 이제까지 사 모은 책들은 모두 헌책방에 팔아치우’겠다는 시시한 ‘하이틴 시집’이나 쓰게 하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다. 쯧쯧쯧..
그러니 뭐 이런 책이 다 있어! 라고 버럭 화를 내며 집어던지는 게 내 정신건강에도 좋았을지 모르나 남자 보는 눈도 없더니 작가 보는 눈도 없는 것 같다. 부주의하게도 나는 그만 이 나쁜 남자에게 홀딱 반해버리고 말았다. 일찍이 사행심이 부족하여 로또 복권 한번 뽑아본 적 없고 투기심 또한 부족하여 경마장 가는 길 근처에도 가본 적 없지만, 미셸 투르니에가 말한 대로 나는 에밀 졸라의 돈귀신 ‘나나’ 보다는 구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에 가까운 ‘생은 다른 곳에’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여자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생은 다른 곳에’ 있다고 믿고 끊임없이 달아난 데라야마 슈지에게서 (이런 표현이 실례가 안 된다면) 잃어버린 고향을 느끼고, 고향을 버리고 떠난 이방인만이 가지고 있는 상실감을 공유할 수 있었다. 하기사 그는 뭐든지 나보다 잘 버렸다. 소년시절에는 부모를 버렸고, 홀로 기차에 올라탐으로써 고향을 버렸고, 동거하던 여자를 버렸다.
물론 달아나는 데도 선수였다. 학교로부터 달아났고 스포츠카를 타고 달아났다. 마권을 사서 서러브레드(경주마)를 타고 달아났다. 예술가가 되서는 답답한 책과 한정된 무대를 벗어나 거리의 연극으로 달아났고, 자살용 기계를 만들어서 죽음으로부터 달아나고자 하였다. 실제로 그는 마흔 일곱 살 그 한창 나이에 요절하는데도 성공했다!
그런데 그렇게 도망쳐서 어디로 가겠다는 말인가? 그에 따르면 ‘산 너머 저편 하늘’ 을 동경하는 것은 소년시절의 이야기로 아무데도 갈 수 없으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 그러나 ‘인생은 자세를 고쳐 앉는 것’이라고 할 때 문제는 어떻게 마음가짐을 변화시킬 것인가? 그 마음가짐의 변화가 바로 그가 강조하는 ‘일점호화주의’라고 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일점호화주의’의 방식은 평범한 우리로서는 낯설고 두렵고 불온하며 정치적으로도 올바르지 않다. 우선 낯짝이 두껍지 않고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판이다. 그러나 ‘직장인들의 평균화된 일상생활이나 알맞게 짜인 경제생활, 무사안일한 부조리, 뭔가 새로운 재미를 갈구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반복되는 나날’ 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는다. 그 것은 살아있으나 결코 존재하는 삶은 아니다.
그러므로 어느날 자신의 인생에 갑자기 찾아든 ‘새로운 사건과 같은 존재를 추구하는 것, 그의 말대로 아프리카 원주민이 난생 처음 비행기의 존재를 확인했을 때 받은 충격을 그들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사상의 출발점이라고 한다면 경주에 돈을 건다는 것 그 자체가 일종의 사상적 행위다. 안전한 마권보다는 위험한 마권에 손을 대어야만 일확천금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가 부추키는 도발이 ‘인간소외적 경향이 있는 벨트 컨베이어에 작은 못으로 구멍을 뚫어 바람이라도 약간 통하게 하자는 것’ 이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똑같은 모양의 소시지가 줄줄이 비엔나가 되어 생산되는 현대사회의 공장을 벗어나 인간 본연의 모습을 위하여 상상력의 지평을 넓히자는 것, 나는 그의 ‘일점호화주의’가 무엇보다 바로 ‘삶을 낯설게 하기’였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죽어서도 계속 달아나고 있고 우리는 여전히 그를 붙잡지 못하고 있다. 그가 남긴 삶의 지도는 가야할 길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네비게이터가 아니라 순수한 속도 그 자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1935년에 태어나 1982년에 죽은 데라야마 슈지는 지금 읽어도 너무 새롭고 너무 젊고 너무 빠르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너무 뒤늦게 그를 만났다. (너무 늦어서 그의 천재성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는 연극도 볼 수 없지 않는가!)
잠깐 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사람들의 선입견과 달리 그는 지극히 평범하고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우선 원폭을 반대하고 베트남 전쟁을 미워했다. 세련된 현대의 도시인이 아니라 마음껏 사투리를 쓰는 것이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아무에게도 보호받지 못하는 작은 올리브 기름병을 들고 방황하는 터키탕 아가씨의 고독을 누구보다 염려하며 평범한 인간으로 대했다. 심지어 그는 애꾸눈 경주마에 터무니 없는 돈을 걸고 그 말이 우승하는 꿈까지 꾸었을 정도로 휴머니스트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20세기를 전력으로 앞질러 달리면서 시대를 도발했던 천재 예술가’가 남긴 ‘일점호화주의’에서, 그 위험천만한 도발에서 뜻밖에 도덕을 읽었고 그 행간에서 아주아주 쓸쓸한 페이소스를 맡고 꽤 오랫동안 슬퍼했다는 걸 알려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