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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진 블루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권민정 옮김 / 강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좋아하는 작가의 처녀작을 뒤늦게 읽는다는 것은 누군가로부터 내가 그 사람의 첫사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그건 사랑을 막 시작한 사람으로서 좀 서운한 일인데, 더 이상 소유할 수 없는 연인의 과거를 질투하는 것일 수 있고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좋았을지 모른다는 후회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데뷔작 ‘버진 블루’는 너무 늦게 우리에게 왔다.
이 소설은 종교개혁으로 신교도와 구교도가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휩싸였던 16세기 프랑스의 이자벨 트루니에라는 중세여성과 남편을 따라 생면부지의 프랑스로 건너와 유럽 사람들의 무지와 문화적 편견에 시달리는 현대여성 엘리자베스 터너를 통해, 아무 관련 없는 두 여자가 어떻게 수백 년의 세월을 넘어 ‘버진 블루’라는 공통된 운명을 소유하게 되었는지 슈발리에 특유의 유려한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책의 앞날개를 보면 소설의 제목 ‘버진 블루’는 ‘성모의 파란색’을 뜻하는 말로 중세 서양에서는 청금석이 함유된 파란색 물감이 매우 귀했기 때문에 성모 마리아의 옷처럼 소중한 대상을 그리는 데만 쓰였다고 한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컬러에도 길융화복이 있었으니 중세여성 이자벨과 현대여성 엘리자베스는 그 색 때문에 곤욕을 당한다.
한 사람은 칼뱅교를 받아들인 시골 사회에서 성모 마리아를 닮은 빨간 머리색 때문에 ‘라 루스’라고 왕따를 당하고, 한 사람은 파란 색 천이 나오는 꿈 때문에 악몽에 시달리고 피부에 마른버짐이 생기면서 남편과의 관계가 위태로워진다. 그러나 두 사람은 끝까지 ‘버진 블루’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같은 민족끼리 종교전쟁을 치러야 했던 중세여성에게 그 색은 고귀한 성모 마리아의 색이었고, 터너에서 투르니에까지 숨겨진 가계를 밝혀 나가는 미국여성에게 그 색은 소중한 자아찾기의 다른 이름이었다. 다시 말해 ‘버진 블루’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어떤 것이다. 그것은 딸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다. 누구든지 이름 붙이기 나름일 것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 소설이 데뷔작이라 그런지 우리는 주인공 엘리자베스에게서 작가의 냄새부터 찾게 된다. 미국에서 건너와 프랑스의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엘리자베스 터너는 어쩌면 그렇게 작가와 닮았을까.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엘리자베스가 자신이 겪은 일을 바탕으로 글을 쓰기로 마음먹는 장면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이 책은 신대륙 미국에서 나고 자라 구대륙 영국으로 온 저자가 자기의 유럽조상이 누구인지 더듬어가는 ‘자기 정체성 찾기’인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결코 만만치 않으리라는 것은 엘리자베스가 도서관에서 처음 빌리는 책이 헨리 제임스의 ‘여인의 초상’인 걸 보면 알 수 있다. 헨리 제임스가 누구던가! 그 자신이 영국으로 귀화, 구대륙과 신대륙의 문화적 차이에 주목하여 화려한 유럽사회에 쩔쩔매는 청교도 미국사회를 다룬 위대한 미국 작가가 아니던가.
그러나 저자는 그 힘든 길에 이보다 더 멋질 수 없는 장 폴이라는 남자를 준비해놓았으니 염려할 거 없다. (왜 여성의 자아 찾기는 남자라는 도구가 필요한 걸까!) 도서관 사서라는 로맨틱한 직업에 물론 야성도 빠트릴 수 없으니 한 마리 ‘외로운 늑대’같이 위험하다는 이 남자. 담배 피는 것도 어찌나 멋진지 금연광고에 치명적이다. 거기다 밤이면 술집에서 재즈 피아니스트로도 활약하시고, 저 중세의 기사처럼 언제나 한발 앞서 그녀를 도와줘서 엘리자베스의 원성(?)을 듣는다. 당연하지만 가슴 아픈 과거도 있다. 그러나 일이년 전인가, 미국 여성에게 버림받은 과거는 더욱 더 그 남자를 멋있는 남자로 부각시켜 줄 뿐이다.
언젠가 ‘진주귀고리 소녀’에서 저자는 도저히 소란스런 현대사회를 그릴 자신이 없다고 엄살을 떨었는데 정말 데뷔작을 읽어보니 손 떼길 잘 했다. 16세기 중세여성을 그려낼 때의 섬세함이 현대여성으로 와서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만다. 결말 부분도 우연의 남발(?)이라는 불만이 고개를 든다.
그러나 이 책은 그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그린 첫번째 여인의 초상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그녀가 어떻게 발전해 나갈지 보여준다는 데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사람들의 편견과 종교적인 압박 속에서도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한 이자벨과 마리에게서 훗날 ‘진주 귀고리 소녀’ 그리트를 발견했다고 할까. 그리트의 귀를 뚫은 생경한 고통처럼 화덕에서 발견한 진실은 지금까지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아름다움이란 때로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