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좀 읽으려는 분들이 가끔씩 나한테 어떤 책을 보면 좋을지 묻는 일이 생긴다. 독서라는 것도 개인적인 취미활동이고 내 취향이 타인의 취향과 일치하는 경우도 거의 없기 때문에 그럴 때는 주로 내가 재미있게 읽은 장르소설 몇 권을 추천해준다. 일단 책읽기에 대한 흥미를 가져야 꾸준한 독서를 할 수 있고 어느 정도 읽다보면 결국 자기가 알아서 책을 찾아 읽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장르소설이 자신한테 맞을지 안 맞을지 순전히 본인 몫이지만 책읽기에 대한 흥미를 가질 수 있다면 어떤 책이든 상관없을 것이다. 책이란 것(특히 좋은 책은)인터넷 하이퍼 링크와 같아서 좋은 책은 또 다른 좋은 책을 소개하기 마련이다. 저자가 그동안 읽어 왔던 좋은 책을 소개하기도 하고 주석이나 해설에 참고서적을 소개하기도 하고 저자가 독자에게 관련주제에 대한 읽을만한 좋은 책을 추천해주기도 한다. 이렇게 연쇄적인 독서를 이어가다 보면 자기가 스스로 책을 찾아 읽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좀 어렵다 싶은 책을 한 권 씩 골라 시간이 좀 걸리더라고 독파해내는 과정을
거치고 나면 생각의 근육도 자라고 세계관이 눈에 띄게 달라진다. 한자어 중에 관견(管見)이라는 말이 있다. 대롱구멍으로 세상만물을 본다는 뜻이다. 만날 쉬운 책만 찾아 읽으면 관견에 빠지기 쉽다. 어려운 책 한 권을 읽기 위해 관련 참고 서적이나 입문서 몇 권을 같이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독서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물론 쉬운책들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좋은 책중엔 좀 어려운 책에 속하는 책들이 많기 때문이다.
운동을 할때 걷기, 달리기,수영 같은 유산소 운동만 할 것이 아니라 근육운동동(웨이트 트레이닝같은)도 병행해줘야 유산소 운동과 더불어 열량을 태우는데 시너지효과가 생겨 지방이 더 잘 연소되고 몸의 주요 근육들이 탄탄해지고 몸에 힘이 붙는다.
마찬가지로 책읽기도 문학, 인문학, 철학, 사회과학 분야만 파고들것이 아니라 생물학, 물리학, 수학, 화학, 공학, 천문학등과 같은 자연과학분야의 책도 병행해서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보통 인문과 과학분야의 책 비율을 5:5 정도로 구입하고 읽고 있다. 감성과 이성의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 제대로 된 철학이나 과학책을 읽어야 그럴듯하게 사실인것처럼 포장한 거짓과 사기를 간파할 수 있고 속지 않을 생각의 힘이 생긴다.
물론 인문학에 이성이 없는 것도 아니고 과학에 감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현대영미철학에서 분석철학분야의 책들을 보면 이게 수학책인지 철학책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로 논리적으로 전개된다. 자크모노의 <우연과 필연>같은 책을 보라. 분자생물학과 진화에 관한 책이지만 문장이 매끄럽고 유려해서 문학성도 뛰어나다.
지금부터는 내가 인상깊게 읽은 좀 어려운(내 기준에서) 과학책(교양과학)몇 가지 소개한다. 대부분 유명한 책이지만 개인적 취향이 반영된 것이고 특히 심리철학분야(분석철학, 뇌과학, 인지과학, 신경철학)의 책은 이쪽 분야에 익숙하지 않고 관심이 없는 사람에겐 어렵고 따분한 책이 될 수도 있음을 감안하기 바람..
그러나 다음 세대의 최고 블루오션은 바로 이 뇌과학과 생물학(진화생물학)이 확실하다고 생각함.
<우연과 필연>,자크모노 : 분자생물학과 현대 진화론을 다룬 고전 중의 고전. 길거리에서 자라는 풀한포기, 개미 한마리도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생명체들이 수십억년 우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독자를 전율시키는 필독서.
이 책 초중반부에 나오는 생화학적 지식 부분은 관련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많이 어려우므로 아래 소개한 2권의 책에서 관련 부분을 같이 병행해서 읽으면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만화로 쉽게 배우는 생화학> 김성훈 옮김, 성안당 출판사, p163~212
<내몸안의 작은 우주, 분자 생물학> 하기와라 기요후미 저, 황소연 옮김, 전나무숲 출판사p51~59
<진화란 무엇인가>,에른스트 마이어 : 며칠 전에 완독한 책.
현대 진화론을 집대성한 책이다. 진화에 대한 대부분의 이론이
다 들어있다.
<진화의 미스터리>, 조지 윌리암스 : 진화란 것은 완전히 맹목적이
고 아무런 목적도 없음을 설명하는 책. 진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부순다.
<엘러건트 유니버스>, 브라이언 그린 : 양자역학적 코스몰로지
를 소개한 책이다. 문장도 매끄럽고 쉬운 설명이지만 완독하려면
끈기가 좀 필요하다. 읽고 나면 그동안 알고 있던 세상이 달라
보일 것이다.
<엘러건트 유니버스>보다는 좀 읽기 쉽다. 수학공식 하나도 사용
하지 않고 중력을 설명하는 부분이 대단하다. 좀 두꺼운 책이긴
하지만 완독하고 나면 뿌듯해짐..
<멀티 유니버스>, 브라이언 그린 : 11가지 버전의 다중우주에 대한
책이다. 읽고 나면 우리가 얼마나 희한한 세계에 대해 살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책. 아마 이 책 한권만으로도 수없이 많은
SF물의 영감이 될 듯.. 브라이언 그린 책 중에서 제일 재밌다.
<물질과 의식>, 처칠랜드 : 심리철학 입문서이다. 현대 심리철학은
통속적 심리학과 다르다. 의식의 물질적 기원과 구성, 작동원리를
연구한다. 좀 어렵긴 하지만 최근 구글의 인공지능분야 연구에 대한
학문적 기반과 철학이 어떤 것이지 감이 올 것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정신과 물질>, 에르빈 슈뢰딩거 :
현대 양자역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손 꼽히는 양자물리학자
슈뢰딩거의 과학철학 에세이 집이다.
슈뢰딩거가 왜 말년에 인도 베단타 철학에 몰두하게 됬는지 알
수 있다. 궁리출판사에서 번역이 매끄럽게 잘 되어 나왔다.
이 책도 필독서.
<눈의 탄생>, 엔드루 파커 : 캄브리아기 생물종의 대폭발 사건
의 원인을 파헤치는 책.
빛을 수용해서 사물과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눈이라는 기관
이 진화한 사건으로부터 생물종의 대폭발이 일어났다는 이론을
입증한다. 재밌는 책이다.
<아이 투 아이>, 켄 윌버 : 한국어 번역판이 알라딘에서
검색되지 않아 원서사진을 첨부.
켄 윌버는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를텐데
이 책 <아이 투 아이>정도만 읽어봐도 이 사람의 사상이
사이비 신흥종교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내가 갖고 있는 책은 대원출판사에서 나온 것인데 절판되
어 나오지 않는 듯하다. 공교롭게도 켄 윌버의 책들이
증산도 전문 출판사인 대원출판사에서 나왔다는 점.ㅎㅎ
암튼 이 책 한권만 읽어봐도 그의 사상이 허투루 나오지
않았다는 걸 알수 있음.
그런데 보통 문학이나 인문학 분야로 독서를 시작한 사람들은 계속 그쪽 분야의 책만 찾아 읽게 되는 습관이 생긴다. 특히 자기계발류의 책들은 중독성이 강해서 계속 찾아 읽게 되지만 정작 필요한 자기계발 그 자체를 실행하지 못하는 폐단이 생긴다.
영어를 잘하고 싶으면 단어와 표현 덩어리를 외우고 자주 듣고 따라 말하고 많이 읽어야 된다. 그런데 주구장창 영어공부 방법 소개한 책만 읽고 있으면 진짜 영어공부는 언제하나? 요즘 나오는 자기계발류 책들이 꼭 그렇다.
그 중에서 특히 인문학을 열심히 하면 성공할 것 같이 말하는 책이 꾸준히 나온다(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 그리고 작년에 이 작가는 <생각하는 인문학>이라는 책을 또 냈다. 이 사람이 무슨 책을 그동안 써 왔는지 알라딘에서 검색해보니 전부 그런 책들이다. 인문학만 하면 곧 성공할 것 같은 끝없는 동어반복.. 그런데 이 사람의 책들이 대단한 성공을 한 모양이다. 마침 대학 도서관 추천코너에 이 작가의 책들이 있길래 <리딩으로 리드하라>이하 "리딩"으로 줄임, 와 <생각하는 인문학> 두 권을 읽어봤는데 독자에게 독서 욕구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은 좋았지만 인문학만 하면 모두 천재가 될 수 있을 듯 말하는 저자의 교회목사님 간증같은 헛소리는 정말 조심해야 된다. 책을 책 그 자체로 읽지 않고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만 읽게 된다는 점이다.
세상에 모든게 잘되면 인문학 독서 탓, 안되는 것도 인문학 독서를 안한 탓이라고 역설하는 저자의 입담에 독자들은 혹하기 마련이다. 정말 인문학 독서만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아 위의 두 책을 읽는 동안에도 하루빨리 인문고전 독서를 시작하고 싶어 안달나게끔 하는(이 책들을 읽은 사람들의 평을 보면 그런 내용이 많다) 저자의 재주는 대단하지만 성공하려면 인문학 독서만이 유일한 답이라고 몰아가는 저자의 외침은 나한테는 섬뜩하기만 하다. 저자는 "지금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한자는 인문학독서로 경제적 자립을 실현하라" 고 아예 대놓고 말한다. 인문학 독서만 열심히 하면 누구든지 돈방석에 앉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이 책들을 다 읽기도 전부터 벌써 <논어>와 플라톤의<국가>를 사들이는 이도 적지 않겠지. 그러나 저자의 책을 아무리 뜯어봐도 인문학독서로 돈을 벌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나오지 않는다. 그냥 인문학독서를 하면 뇌가 천재가 되어 남이 상상하지도 못하는 제품과 아이디어를 만들어낸다는 뜬금없는 소리만 반복한다.
그리고 저자는 세속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모두 인문학 천재였다는 결론을 도출하지만 설득력은 전혀 없다. 인문학 천재가 되는 것과 성공이 비례한다고 믿는 것은 한마디로 순진한 발상이다. 운이 좋으면 <논어>,<국가>를 읽고 독후감 대회에서 입선이라도 하면 도서상품권 몇 장은 쥘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누구도 인문학 독서만이 유일한 답이라고 말하지 않는데 유독 이 사람만 인문학독서만이 모든 걸 해결해 줄 듯 몰아간다. 작가 김훈이 거대담론 이야기하는 놈들 믿지 말라고 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세상에서 성공한 상위 1%부자들과 위대한 학자들은 모조리 인문학의 천재였다고 하면서 우리도 그들처럼 성공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인문학 독서로 스스로 천재가 되는 길 밖에 없다는 저자의 주장엔 나는 단 1%도 동의하지 않는다. 논리적 일관성도 없는 저자의 간증같은 주장은 반박할 가치도 없거니와 저자의 책들을 읽다가 떠 오른 책은 다름아닌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였다.
<리딩>과 <생각하는 인문학>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삶은 <피로사회>에서 개진한 전형적인 성과사회의 병리적 현상 아닌가? 그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오로지 부와 명예, 성공을 위해 끊임없이 자기자신을 인문학독서로 내몰아치면서 스스로 착취하는 강박증말이다.
저자는 업무능력을 천재수준으로 향상시키는 "포토그래픽 메모리 능력"이라는 어마어마한 능력도 소개한다. 저자 자신도 그 능력을 터득해서 같은 학교 재직중인 30년 선배교사들도 처리하지 못하는 업무들을 단 몇 시간만에 다 처리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과 정약용도 이 능력으로 어마어마한 성과를 냈다고 하는데 이 능력을 갖기 위해서 해야 할 훈련으로는
두뇌관련 서적을 많이 읽고
자기계발 서적을 많이 읽고
두뇌관련 다큐멘터리를 많이 보고
스스로에게 칭찬의 말을 해주고
남을 칭찬하고
감사일기를 매일 쓰고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한다.
업무천재가 될 수 있는 어마어마한 능력 개발방법치곤 참으로 소박할 뿐이다. 당신을 아인슈타인과 정약용처럼 만들어줄 "포토그래픽 메모리" 능력이 생기는 방법이란다. 한 번 실행해 보는 건 어떨지..ㅎㅎ 천재적 능력이 생긴다고 하니..
당신도 스티브잡스, 빌게이츠, 워렌 버핏이 될 수 있으니 무조건 인문학의 천재가 되라!
이렇게 저자는 상위1%의 성공을 이야기하면서 가난한 쪽방촌 어린이들에게 인문학공부를 해준다고 한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인문학인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대부분 <피로사회>에서 이야기한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의 긍정적 조동사로 채워진다. 그러나 긍정의 긍정은 결국 <피로사회>에서 한병철이 경고했듯이 끝없이 자신을 착취하는 피로사회다. 그리고 이런 책들의 가장 큰 문제점을 <거대한 사기극>에서 이원석씨가 아래와 같이 간파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설혹 자기계발서를 싫어하더라도 자기계발 자체는 회피할 수가 없게 된다. 모든 관계를 자기계발적으로 다루게 되고, 모든 서책을 자기계발적으로 읽게 된다. 이지성이나 공병호가 고전을 대하는 태도는 이미 어느 정도 우리 모두에게 스며들어 있다. <리딩으로 리드하라>는 고전독서가 우리의 뇌를 천재로 바꾸고, 또한 돈과 명예와 권력을 안겨준다고 주장한다. <공병호의 고전강독>은 아예 구체적으로 고전에 파레토 법칙(80대 20)을 적용해 실용적으로 독해하도록 유도한다. 이들에게 고전은 위대한 자기계발서일 따름이다. 굳이 말하자면, 특정한 자기계발서를 읽지 않는 것보다 모든 서적을 자기계발적으로 읽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그만큼 더 어렵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욕망의 회로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개인의 역량으로는 한계가 있다.
이원석 저,<거대한 사기극>중에서
저자는 더이상 인문고전과 자기계발서적을 혼동하지 않기 바란다.
인문학적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내가 보기엔 그런 삶은 없다. 그저 내 삶이 있을 뿐이다.
내 삶이 좋은 삶이 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수많은 주제 가운데 하나로 인문학이 될 수는 있겠지..
그리고 이제 책읽는 방법 가르쳐준다는 책은 그만보고 진짜 책을 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