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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독 - 유목적 사유의 탄생
이정우 지음 / 아고라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철학자 이정우가 쓴 자신의 지적 순례와 독서인생 에세이.
철학자 이정우 이력은 좀 특이하다. 대학 학부에서는 공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철학으로 전공을 바꾼 것이다. 이런 대담한 선택은 그가 이 책에서 말하는 사유의 ‘가로지르기’ 혹은 ‘유목적 사유’ 라는 맥락에서만 이해 할 수 있을 듯 하다. 한 인간은 직업, 전공, 계층을 비롯해 자신이 속해 있는 장(場)의 영향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場과 場 사이에는 거의 소통이 불가능할 정도의 간극이 패여 있고, 한 인간의 삶도 옮겨 다니는 장들에 따라 뚝뚝 끊어지기도 한다. 이정우는 가로 지르기식 독서와 사유의 실천을 통해 이런 간극들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지를 열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저자의 본격적인 유목적 사유는 문학을 시발점으로 하여 기하학, 물리학, 양자역학, 열역학, 생물학으로 확장된다. 그의 과학적 가로지르기는 흥미롭다. 특히 저자는 자연과학을 공부하면서 수학적 공식과 실재세계의 관계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과학은 세계를 수학적 공식으로 표현한다. 수학적 공식은 실재에 상응하는 것으로 해석 된다. 실재들, 즉 미시세계의 현상들을 확인해서 그것들을 기호화한 것이 수학이 아니라 기호로 제시된 수학적 방정식과 공식들의 풀이 결과가 실재세계의 어떤 특정 측면들에 상응 한다”
이정우가 말하는 수학적 공식과 실재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개념정리는 명확하다. 나는 평소에 천체물리, 양자역학에 관한 책을 자주 읽는 편인데 그런 책에서 언급되는 온갖 수학공식은 과연 실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갈피를 잡지 못해 힘든 독서를 이어가고 있는 터에 이정우가 말한 수학과 실재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사유를 엿보고 나니 과학의 언어인 수학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저자는 물리학과 양자역학을 거쳐 열역학에 이르는 유목을 이어간다. 열역학에 잠시 안착한 그는 엔트로피 개념을 가지고 우주론적 고뇌에 빠진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를 읽고 이 세계의 에너지는 사용가능한 상태에서 사용 불가능한 상태로의 변화밖에 없으니 우리에게 남은 건 결국 완전히 망하는 것 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결론에 심한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이정우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한 모양이다.
그러나 내가 겪은 충격은 금세 잊혀졌지만 저자는 엔트로피 법칙이 일으키는 이러한 우주론적 고뇌를 ‘현실적 맥락에서 볼 때 눈앞의 문제들이 산적해 있고 삶의 문제들이 널려 있는데 그 먼 미래의 일 때문에 고민하면서 전전긍긍하는 것이 너무 어리석어 보였다’ 라고 하면서 엔트로피가 유발하는 기우를 손쉽게 떨쳐버리는 대목은 후련하고 통쾌하다. 이제 더 이상 엔트로피 법칙이 유발하는 이 세상의 끝에 대해 걱정하지 말고 편히 살면 된다.
열역학을 거쳐 생물학에 이른 저자는 생명현상을 ‘음의 엔트로피를 만들고 시간 속에서 차이들을 보듬어 나가며 그로써 더 복잡한 동일성을 만들어 나가는 화학적 회로를 가진 존재’ 로 인식한다. 생명현상에 대한 이정우의 인식은 독특하고 인상적이다. 그의 생명현상에 대한 이해는 인문적이고 철학적이며 또 과학적이다. 그래서 생명을 종합적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
생물학을 떠난 저자의 유목은 경제학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막시즘 경제학을 소개하면서 주류경제학과 막시즘 경제학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는데,주류경제학이 ‘완전 경쟁 시장’ 이라는 모델을 전제로 하고 자연과학의 사고방식을 가지고서 경제현상을 수치화하고 함수화하는데 몰두하여 주류경제학이 경제현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적지 않은 성과를 냈지만 결국 신자유주의적 경제관을 잉태하여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음을 지적하는 부분은 정확하고 타당해 보인다.
주류 경제학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소흘하고 오로지 경제적 측면에만 고립적으로 주목하는데 반하여, 막시즘 경제학은 경제학 자체로서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학, 윤리학, 정치학 등과 결합해서 막시즘 철학이라는 거대한 사유체계의 한 고리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정우가 말하는 막시즘 경제학을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경제학’이란 어디까지나 자본주의 경제학으로 이해해야 하고 주류경제학은 자본가와 기업가의 관점에서 성립된 것이며 막시즘 경제학은 노동자들의 관점에서 성립된 경제학이라는 이정우의 주장에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정우는 주류 경제학과 막시즘 경제학의 차이를 명쾌하고 이해하기 쉽게 풀이해 준다.
저자는 경제학을 거쳐 근대성과 포스트 모더니즘에 잠시 정차하여 사유를 진정시키는데 이 대목에서 조셉 니담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책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왜 중국은 근대과학을 탄생시키지 못했는가에 대한 다음과 같은 혁명적인 답변을 제시한다.
“그러나 서구에서 근대 과학이 탄생한 것에는 과학적 원인들은 있을지 몰라도 형이상학적인 이유는 없다. 즉 우발적인 것이다. 달리 말해 ‘중국에서 왜 근대과학이 탄생하지 않았는가?’라는 물음이 우문(愚問)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중국적 맥락에서 보면 도대체 ‘근대 과학이 꼭 탄생할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문화에서 별 필요가 없었던 것을 두고서 ‘왜 탄생하지 않았을까?’라고 묻는 것은 우문일 것이다.”
나는 평소에 중국과 동양에서 과학이 탄생하지 못한 이유의 탐구를 화두처럼 가지고 있었는데 이정우의 답변을 접하고 나서 그러한 의문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지각하게 된 것은 큰 소득이었다. 중국, 아니 동양에서 근대과학을 찾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저자의 지적 유목은 문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역사학을 거쳐 소은 박홍규 선생을 만나 철학에 정착하게 된다. 저자는 소은과의 만남을 통해서 본격적인 사유를 시작하게 되고 비로소 철학적 개안을 경험하게 됐다고 고백하는데 그가 소은에게서 배운 것은 철학이란 구체와 추상의 오르내림이라는 것이다. 저자의 유목적 사유의 고갱이는 서구 존재론사의 대가인 박홍규선생이 말하는 베르그송과 미셸 푸코인 셈이다.
문학책들을 읽으면서 인간과 인생을 깊숙이 반추하고 과학책들을 읽으면서 물질, 생명, 문화를 합리적으로 분석하는 다양한 방법을 배우고 철학책들을 읽으면서 다양한 지식을 창조적으로 종합하는 사유능력을 배웠다는 이정우.
그의 유목적 사유는 인간과 인생을 종합적이고 총체적으로 바라보려는 근원적인 욕망에서 시작되었다. 이 책이 비록 한 철학자의 공부와 독서에 대한 개인적 체험의 고백이라 해도 이 책이 던지는 영감과 메시지는 가볍지 않다. 바로 진정한 공부와 독서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