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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미시령 ㅣ 창비시선 260
고형렬 지음 / 창비 / 2006년 3월
평점 :
고형렬의 산문집<은빛 물고기>를 매우 감명 깊게 읽었다. 강원도 양양 남대천에 소상하는 연어를 소재로 한 서사 산문이었는데 하나의 소재로 그렇게 아름다운 산문을 써내는 작가가 또 누가 있을까? 삶과 생명에 대한 깊은 성찰과 사색의 결정이 응집된 고형렬의 산문 문장들은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얻기 어려운 문학적 희열을 제공한다.
이번엔 고형렬의 시집 <밤 미시령>.
고형렬은 1979년 현대문학에 <장자>등이 추천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작가다.
이 시집<밤 미시령>에 수록된 시의 소재들은 평범하다.
그러나 시인이 형상화해낸 뒤의 그 평범한 소재들의 이미지는 독자들에게 전혀 새로운 차원의 이미지를 선사한다. <동물원 플라타너스>라는 시는 동물원에서 본 기린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사다리 같은 긴 목을 펼쳤다.
사과모양 입이 항문처럼 오물거린다.
그 주먹 안에 혀가 있어 잎사귀를 부드럽게 말아넣는다.
내 손바닥을 덥석 따 먹을 것처럼 친구 입은 벌레와 풀을 밟지 않는
발처럼 부드럽고, 고기를 모르기에 잎사귀들 네 몸에 얼룩얼룩 나타난다.
-동물원 플라타너스-
위의 시에서 시인은 기린의 작은 머리와 잎사귀를 따 먹는 기린의 입을 주먹과 사과, 항문에 비유해서 묘사하고 있는데, 사과모양 입이라는 형상과 항문처럼 오물거리는 근육의 물리적 운동이 기발하게 융합되어 나뭇잎을 먹고 있는 기린의 입을 재미있는 시각적 형상으로 이미지화하고 있다.
덕분에 독자들은 시인의 독특한 사물 해석과 이미지화 덕분에 새로울 것 없는 기린에게서 전혀 다른 생명을 얻는데, 이것은 시를 읽는 독자들의 적지 않은 즐거움이다.
또 마지막 행 “고기를 모르기에 잎사귀들 네 몸에 얼룩얼룩 나타난다” 라는 구절에 이르면 이 시인이 바라보는 평범한 한 마리 기린은 기린만의 개성을 초월하여 자신이 먹었던 잎사귀들이 몸에 얼룩얼룩 나타나게 되는 주와 객의 구분이 사라지고 윤회의 굴레를 벗어난 불교적 해탈자의 모습까지 보여주게 된다. 고형렬의 산문과 시 곳곳에서는 불교적 색채가 짙은 세계관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시인의 詩心에 걸리는 것들은 다양하다. <메뚜기들 죽은 곳>의 가을 메뚜기 떼, <젖, 차양을 쳐주어라>의 어미 진돗개, <폐차 통지서를 받고, 서울 45라 4706>의 9년 된 프라이드 승용차 등..
이 흔해빠진 사물들도 인드라망처럼 질기게 연결된 인과의 그물에서 시적운율에 맟추어 고형렬의 시세계에 등장한다. <메뚜기들 죽은 곳>이라는 시에서 시인은 시적 기본기를 여실히 보여준다. 메뚜기의 얇디얇은 겉날개와 속 날개를 “풀잎 누런 겉날개 한 벌, 연노랑 속치마”로 이미지화하고 있는데 이런 시적 이미지는 뇌리에 깊게 각인된다. 평범한 메뚜기 날개하나로 인해 정신이 풍부해지고 윤택해지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또, <젖, 차양을 쳐주어라>에서 시인은 유기견인 진돗개의 출산과 새끼를 향한 본능을 무심한 듯이 바라보고 있는데 유기견 어미견을 보살로 인식하는 시인의 시선은 무척 따뜻하다.
그의 산문 속에 등장하는 영북지방(강원도 속초,양양 등지를 말함)의 풍경은 비록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지만, 작가의 문학적 역량으로 인해 매우 친숙한 또 다른 고향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누구라도 그의 산문과 시를 읽는 사람이라면 영북지방으로의 여행을 꿈꾸게 한다.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고향을 꿈꾸게 만드는 능력을 가진 작가가 바로 고형렬이다.
그만큼 그의 시들이 자아내는 영북의 이미지는 사람들이 가진 보편적 감수성을 자극한다. 그의 시들이 부추기는 이 여행은 실현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아직은 계획에 불과하지만 그 여행이 성사되기까지 나는 영북지방의 아름다움과 유년의 눈부신 추억을 노래하는 고형렬의 글과 시들을 자양분처럼 의식에 간직하고 쌓아둘 것이다. 마침내 내가 언젠가 작가의 고향에 이른다면, 그동안 내가 쌓아왔던 자양분들은 비로소 그곳의 자연풍경과 온갖 사물에 녹아들어 그때 내가 바라보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더욱 풍족하게 해주기를 기대한다.
ps: 이 글을 작성하고 2013년도 봄에 강원도 속초와 설악산 여행을 다녀왔다.
강원도 인제쪽에서 속초쪽으로 가려면 미시령을 넘어야 하는데 당시에도 미시령 터널공사가 완료되어 있었지만 고형렬의 시집<밤 미시령>을 접한 뒤라 터널이 아닌 미시령 옛길을 넘었다. 어차피 두 번 오기 힘들 곳이라는 생각에 미시령을 넘는 길을 택했는데 길은 험해 멀미가 나고 자동차 브레이크 패드 타는 냄새가 진동했지만 미시령 정상(아마 황철봉 주변일 것이다)에서 바라보는 동해와 속초 전경은 환상 그 자체였다.
동해쪽에서 외설악을 타고 올라오는 시린 안개를 온 몸으로 받으면서 동해를 바라본 느낌도 잊을 수 없다. 설악 소공원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권금성에 올라 바라본 외설악의 장엄한 능선들도 감동이다. 그 높은곳에서 떨어지는 토왕성폭포를 보고 있으면 세상에 이런 곳이 다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설악산과 금강산 곳곳에 숱하게 전해내려오는 신선, 선녀 이야기들이 왜 생겼는지 짐작이 간다. 서북능선과 대청봉쪽으로 올라 공룡능선과 광대한 동해를 조망하면 조개껍질같은 도시에서 아웅다웅하며 사는 인간의 삶이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나는 이쪽 설악, 속초쪽 동네가 너무 마음에 들어 나중에 돈이 많이 생긴다면 이곳에 정착하면 어떨까하는 짧은 생각도 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