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 - FTA의 지구정치경제학
홍기빈 지음 / 녹색평론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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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여름(2011년 여름), 한미FTA 번역 오류 문제가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을 때 읽은 책이다.  글 내용이 현재 상황과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고치지 않고 그대로 올린다. FTA를 반대하는 의견을 괴담으로 치부해서도  안되며, FTA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근거없는 낙관론도 비판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며칠 전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이정희 후보가 박근혜 후보에게 ISD조항에 대해서 물었다. 박근혜후보는 모든 국가간의 FTA조약에 들어있는 스탠다드 조항일뿐이라고 또다시 앵무새처럼 지껄였다. 우리 기업의 미국 투자활동을 오히려 보호할 수 있는 조항이 아니냐고  반문을 던졌다. 공식만 달달외우고 다니는 얼음공주다운 대답이다.  그 정도 의견은 논술준비하는 고3수험생에게도 어렵지 않은 수준이다. 한 나라의 무역, 경제정책을 좌우할 사람의 식견치고는 참으로 간결명료하다. 세상 모든게 모두 그렇게 간단하고 쉬우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FTA에 비판적인 이유는 우리 삶의 공동체 질서에 직 간접적으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주는 중대한 조약을 우리 정부는 성급하게 추진했다는 것 때문이다.

 

  FTA(free trade agreement)는 국가간에 관세를 철폐하고 무역장벽을 완화하거나 제거하여 모든 상품과 서비스, 투자의 국경 간 거래를 자유롭게 하는 협정을  말한다. 홍기빈씨가 2006년도에 출판한 이<투자자-국가직접 소송제>라는 책은  한국과 미국간의 FTA협정에서 투자자가 투자국가의 중앙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조항의 해악과 위험성을 알리고 한미FTA의 전면 재검토와 범국민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의도로 나온 책이다.

 

 구입한지 5개월이 지난 책인데 근래 한미FTA국회 비준 동의안의 심각한 번역상 오류문제가 불거저 나왔던 터에 완독하게 되었다. 나는 홍기빈씨의 경제관련 저작이나 번역서를 꼭 챙겨보는 편인데 일단 그는 주류경제학의 판에 박힌 원론적이고 보수적인 경제학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쉽고 재미있는 상식적이고 직관적인 경제를 말한다. 어떤 사람은 홍기빈씨의 저작물에서 진보성향을 발견할지도 모르지만 요즘같이 자본과 시장이 사회질서를 공공연히, 혹은 암묵적으로 지배하는 시대에 시장과 자본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은 늘 오해를 사기 십상이다.


 이 책의 제목은 다소 무거워 보이지만 책은 쉽고 빠르게 읽혀진다. 한미 FTA협정 중에서 제 11장 “투자” 가 바로 이 책의 직접적인 타깃인 모양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외교통상부 홈페이지에 접속해보니 한미FTA협정문의 원문과 번역문이 그대로 공개되어 있었다. 홍기빈씨는 이 11장의 “투자”조항이 바로 투자자-국가 직접 소송제라는 치명적인 독소조항임을 강조하고 이 독소조항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투자자-국가직접 소송제, 즉 ISD(Investor-State Dispute )는 투자자인 외국기업이(특히나 초국적 기업들) 국가를 상대로 제소할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이다.

 

  예를 들어 어떤 외국 대기업이 한국에서 두부사업에 엄청난 자본을 투자하였다고 치자. 그런데 어느 날 한국 정부가 중소 두부 사업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두부사업에 일정 규모 이상의 대기업이 진출하지 못하게 하는 규제정책을 채택한다면 한국에서 두부사업을 영위하려던 외국투자자는 한국정부의 두부사업에 대한 대기업의 규제 행위로 인해 한국의 식품시장에서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 마침내 외국투자자는 한국정부의 두부사업 규제로 인해 자신들의 투자에 심각한 손실이 발생했다고 여기고 엄청난 금액의 피해보상금을 한국정부에 청구하는 소송을 국제 중재 심판소에 제기한다. 이 소송은 단 한번의 중재심판만을 확정하고 만약 이 소송에서 패한다면 투자자가 청구한 금액을 즉각 보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물론 상상에 불과하지만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

 

 

 그런데 이 소송이 진행되는 중재심판은 공적재판과는 전혀 다른 원칙과 절차로 구성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이 중재심판의 원류를 중세 유럽의 상인법에서 찾고 있으며 이 상인법이 1990년대의 거대 국제 초국적 자본과의 결탁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FTA와 투자자-국가소송제라고 한다. 중재심판의 원칙은 국제법에 따르는 것도 아니며 또 한 국가의 공공영역이나 환경을 고려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오로지 “투자자의 이익”을 국가가 직, 간접적으로 해쳤냐 아니냐만 따져보는 원칙만이 존재한다. 즉, 외국투자자의 정당하고 공정한 영업이익을 보장하지 않는 일체의 국가 정책이나 공공정책, 규제, 보호, 보조 등은 투자자의 투자활동과 권리를 해치는 것이므로 국가가 만일 어떤 직, 간접적인 조치나 정책으로 인해 외국투자의 활동에 제약을 가하거나 손해를 끼친다면 투자자에게 보상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투자자 보호의 의미는 외국 투자자가 투자대상국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환경적 구조 전체에 걸쳐 돈이 될 만한 어떤 종류의 자산이건 취득하면, 그 자산의 수익성이 떨어지게 할만한 모든 종류의 제도적, 법률적, 행정적 변동을 막아야 할 책임이 국가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본다면 ISD조항이 포함된 한미FTA협정이 발효된다는 것은 일종의 대재앙에 해당된다.

 

 이 조항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한 국가의 공공정책과 복지정책은 외국 투자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정부는 투자자들의 이익과 수익을 해치지 않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립하려고 하지만, 국가의 공공정책과 복지정책, 환경정책은 필연 적으로 부의 임의적 제한과 이동, 재분배를 통해 달성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결국 외국 투자자들의 이익과 수익을 어느 정도 규제하고 제한하지 않고서는 어떤 공공, 복지 정책도 불가능해진다는 결론이 나게 된다. 국가는 어떤 식으로든 외국투자자들의 이익과 수익을 고려하지 않고는 국가정책을 수립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외국투자자들이 한 국가와 동등한 실체로 등장하여 한 국가의 경제와 사회 질서를 좌지우지할 가능성이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 이는 실질적으로 결국 주권양도에 해당하는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홍기빈씨는 이 책의 말미에서 투자자-국가직접 소송제의 본질과 핵심이 바로 ‘법적 관할의 이동’에 있다고 한다. 투자자-국가 소송이 벌어지는 중재심판소라고 하는 곳은 정규적인 법체계의 밖에서 문제를 푸는 곳이며, 이곳을 지배하는 원칙은 오로지 분쟁의 조정, 그것도 오롯이 상업적 고려에 기반한 분쟁의 조정일 뿐이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좀 과격하고 현실적인 표현까지 서슴지 않는다. 국제 중재심판소를 “몇 백억, 몇 천억에 달하는 돈을 놓고서 독기가 오를 대로 오른 양측이 다시 몇 십 억원의 비용을 쏟아 부어 가며 법률회사를 앞세우고 서로 자신이 휘두를 수 있는 모든 주먹을 다 휘둘러 대는 곳”, 혹은 “ 두 당사자가 그냥 쇼부를 치는 곳”, 심지어 “이전투구, 개싸움의 장”이라는 표현까지 여과 없이 사용하고 있는데 국제 중재절차의 실제사례들이 진행된 방식들을 살펴보면 이런 표현으로도 모자란다는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래서 어떤 나라가 자국과 외국 투자자 사이의 분쟁을 국제 중재 절차를 통해 해결한다는 데 동의한다는 것은 그러한 분쟁권의 법적 관할권을 완전히 국재 중재 절차소에 군말 없이 넘기고 자신의 고유한 권한인 법적 관할권을 포기하는, 중대한 주권양도의 사안이라는 저자의 논리와 결론은 전혀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아무리 협정문에서 예외 규정을 명문화한다 해도, 이 제도를 포함한 한미FTA가 발효되어 분쟁이 일어날 경우 협정의 세부적인 조항에 대한 해석과 예외규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중재심판소의 권한에 속하게 된다. 한국 정부는 주권국가의 존엄을 버리고 심판소라고 불리는 ‘사각의 정글’ 로 올라가 악착같고 교활하기 그지없는 초국적 자본과 홀홀단신으로 ‘개싸움’을 벌여한 한다는 저자의 외침은 섬뜩하기 그지없다.


 나는 이 책의 저자인 홍기빈씨의 비판과 지적이 차라리 기우에 불과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이 책이 소개하고 있는 북미자유무역협정에서 일어난 캐나다와 멕시코의 초국적 자본과의 싸움에 대한 생생한 사레를 읽으면서 홍기빈씨의 걱정이 기우임을 바라는 것은 냉정한 현실을 모르는 천진난만한 어리석은 생각이며 비겁한 현실도피에 불과함을 깨닫게 되었다.

 

 정부 외교통상부 홍보 관계자들은 이 제도가 투자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이며, 다른 국가들간의 FTA협정문에도 존재하는 표준적 스탠다드 사항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 이 제도가 악용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떠벌리고 있지만, 그들의 설득에 타당성은 전혀 없어 보인다. 이 책에서 홍기빈씨가 소개한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로 황폐화된 멕시코의 사회, 경제를 떠올린다면 정부 관계자들의 홍보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공정성과 진실성을 상실한 눈먼 폭주임을 실감하게 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외교통상부 홈페이지에 들러 한미 FTA협정문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재미있지만, 한편으로 분노를 치밀게 하는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이 책은 2006년도에 초판이 나왔는데 이 책에서 소개하는 북미자유무역협정 제 11장 조항과 한미FTA의 11장 조항의 내용이 똑같다는 것이다. 한미 FTA는 2007년도에 타결되었는데 미국 측은 캐나다와 멕시코에 막대한 피해를 준 NAFTA협정문을 마치 붕어빵 틀에서 붕어빵 구워 내듯이 그대로 들고 와서 한국과 FTA 협상을 시작했고 한국정부는 일말의 검토도 없이 붕어빵 NAFTA 11장 협정문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전시작전권 이양에 적극적이었던 노무현 정부에서 한미FTA 협상을 시작했고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민주당이 지금은 한미FTA의 극렬한 반대자가 되어있다는 사실도 아이러니하고 기이하다. 이제 한미 FTA는 양국의 국회비준과정만이 남아있는 상태이다. 국회 비준 전에 협정문에서 투자자-국가직접 소송제(ISD)를 보장하는 11장을 뺄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어 보인다. 그리고 현 정부는 임기 전에 분명 한미FTA를 처리하고야 말 것 같다. 한미FTA가 발효되면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삶은 FTA의 직, 간접적인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또 한미FTA로 인한 혜택이 있다 해도, 그 혜택이 다수의 서민들에게 곧바로 직접적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FTA자체를 무조건 반대하자는 것이 아니다. 초강대국인 미국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인식을 나는 냉정히 인정한다. 그리고 막강한 미국과 초국적 거대 기업, 자본들이 강요하는 FTA를 거부하고서 대한민국이 독불장군처럼 홀로서기를 할 수 있는 세계경제 시스템도 아니다. 어차피 FTA를 추진해야 하는 것이라면 제대로 해보자는 거다. 이 책에서 소개된 것처럼, 실제로 호주와 미국의 FTA에서 투자자-국가 직접 소송제 조항은 빠져 있다. 호주정부와 국민들의 적극적인 반대와 참여로 그들은 이 조항을 FTA 협상문에서 아예 빼버린 것이다. 그들은 이 조항의 해악을 정확히 인지했고 호주정부는 자국의 국민들에게 이 조항의 해악성을 널리 알렸다. 호주정부도 했는데 우리라고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지금 우리나라 국민 중에서 이런 조항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도대체 몇이나 될까? 적극적인 홍보부족이 많이 아쉽다. 요즘 미국 의회에서 한미FTA비준을 적극 추진하는 뉴스들이 자주 들려온다. 우리나라는 국회 비준을 미루고 미국과의 추가협상이 필요한데 불행하게 남은 기회도 없고 시간도 없다. FTA에 대해서 좀 더 유연한 사고방식과 좀 더 치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FTA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반미로 몰아세우는 극단적 분열과 적대적 감정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못 된다. 사안과 상황, 혹은 이익에 따라서 누구나 친미적 성향을 가질 수 있고 반미적 성향도 가질 수 있다.


  당장 FTA비준이 되고 협정이 발효되면 아무런 준비도 안 되어 있는 우리 농업은 대체 어떻게 될 것인지 걱정이다. 휴대폰 팔아 쌀 사먹자는 어이없는 논리는 여전히 막강하다. 세계1위 휴대폰 업체 노키아도 무너지고 있다. 삼성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삼성과 현대차가 없으면 나라 망한다고 곡을 하고 삼성과 현대차가 대한민국 국민들 전체를 먹여 살린다는 협박이 횡횡한다.

 

 대기업과 국민들과의 관계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대기업은 국민들 먹여 살리는 시혜자, 국민들은 그런 대기업 덕에 겨우 먹고 사는 수혜자로 만드는 기괴한 논리를 사람들은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 대기업이 이 나라 경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만 대기업이 국민들 먹여 살린다는 논리는 절반의 진실이다. 우리 국민들도 대기업을 먹여 살린다. 대기업과 국민들의 관계는 상생의 관계이지 일방적 시혜와 수혜의 관계가 아닌 것이다.


 서유럽 국가들은 식량 자급률이 대부분 100퍼센트에 육박한다. 우리나라는 쌀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농축산물의 생산량이 소비량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돼지고기는 생산량이 국내 소비량의 50퍼센트 정도밖에 감당하지 못하고 소고기는 전체 소비량의 35퍼센트 정도에 불과하다. 35퍼센트의 소고기는 한우가 아니라 국내산 소고기다. 즉, 국내산의 정의는 한국에서 생산된 소고기이므로 더 이상은 말 안 해도 잘 알 것이다. 정육점에서 한우를 찾아보기 힘든 이유가 짐작되지 않는가.. 밀과 보리를 경작하는 농가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있다고 해도 식구들이나 주변인들 나눠먹을 극소량의 생산량일 것이다. 환금성 작물의 단작은 장기적, 국가 안보적으로 매우 위험하다.

  

  우리는 쌀밥만 먹고 사는 식생활문화를 벗어 난지 오래다. 하루하루 치솟는 밀가루 가격, 과자, 빵 가격에 이제는 놀라지도 않는다. 치솟는 물가에 만성화되어 가는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은 빵을 먹어야 하고 소고기도 먹어야 한다.

 

 나는 일부 과격한 환경근본주의자들의 육식 금지, 가축 사육금지 같은 대책 없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주장들은 한마디로 무책임하다. 우리는 쌀밥도 먹고 빵도 먹고 고기도 먹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무슨 준비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식량주권을 고스란히 포기하면서도 겁내고 무서워하는 분위기는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과연 FTA가 발효되면 더 값싸고 질 좋은 소고기, 밀가루, 콩과 쌀을 마음 편히 실컷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하는가? 어쩌면 당장은 그 낙관이 유효할지 모른다.


 나의 이런 전망이 비관적이고 부정적 시각임을 지적한다면 기꺼이 인정하겠다. 그러나 나는 이런 비관적 전망을 희망으로 바꿀 노력을 우리 정부와 국민들이 정말 제대로 하고 있는가라고 반문을 할 것이다. 누구든 나의 이런 의문에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있다면 이 책과 글들은 그저 의미 없는 식자우환에 불과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유비무환이지 식자우환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생존과 미래가 달린 중대한 결정에 너무 무관심했다는 후세의 비판을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미래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2012년 작성

 

 

2015년 5월 현재, 홍기빈씨의 기우가 결국 현실이 되었다.
바로 미국금융회사 론스타가 한국정부를 상대로 5조원의 ISD 손해배상소송을 걸었고 아랍에미리트의 부호 만수르가 소유한 석유회사인 `하노칼 홀딩 비브이"사도 한국정부를 상대로 1,800억원대의 ISD 소송을 걸었다. 두 개의 소송은 한미FTA의 ISD조항을 근거로 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과 외국이 그동안 체결한 수많은 경제협정에 포함된 ISD조항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공통적인 사실이다. 홍기빈씨의 표현대로 이제 한국정부는 국제중재심판소라는 사각의 정글로 올라가 5조원을 놓고 개싸움을 벌여야 하는데 패소하게 된다면 국가예산 5조원을 고스란히 다국적 금융회사 론스타에게 갖다 바칠 수 밖에 없다. ISD가 얼마나 무서운 조항인지 론스타와의 재판결과가 나오면 실감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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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철학에의 초대
한자경 지음 / 서광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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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경 교수가 쓴 칸트철학 소개서 <칸트철학에의 초대>를 읽고 있다.

한자경 교수는 독일에서 칸트를 전공하신 분인데 쉬운 우리말로 어렵고 딱딱한 칸트철학을 재미있게 소개하고 있다. 제목만 들어도 겁에 질리는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같은 칸트철학을 이렇게 이해하기 쉽게 소개하는 분도 없을 것이다.

 

한자경 교수는 독일에서 칸트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해서 다시 동국대에서 불교철학(유식불교)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신 분이다. 배움의 열정이 대단하신 분이다. 나는 한자경 교수의 <일심의 철학>을 읽고 한자경 교수의 팬이 되어버렸다. 그 책에서 다룬 물리주의 비판글은 정말 대단했다.

 

 그러고 보니 학부시절에 한자경 교수의 철학수업 하나 들어보지 못했던 것은 불운이다.

그 불운은 당연한 것이었다. 당시 나는 철학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으니까..

지금은 한자경 교수가 수도권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지가 오래다. 좋은것은 늘 지나간 뒤에

알게 되는 모양이다.

 

 지금까지 칸트철학이라 하면, 막연히 어렵고 관념론적인 것이라 쉽게 다가갈 수 없었는데 이 책을 읽고 있으니 칸트라는 사람이 지극히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철학을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초월적 관념론, 초월적 자아라는 것은 지금까지 많이 오해되었다는 느낌.. 도올이 그의 저서에서 자주 언급하는 칸트 철학.. 시공의 외재성, 절대성을 부정하고 인간 자체의 근거로 다시 태어난 시공과 절대적 자아라는 주제들은 매우 흥미롭다. 이것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는 것인데 칸트가 살았던 당시의 유럽 과학지식을 뛰어넘는 칸트의 철학적 통찰력은 정말로 대단하다.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이 따라 절대적, 객관적 실체로 존재한다고 여기지만 20세기 위대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임을 증명했고 시간과 공간은 분리된 객체가 아닌 말 그대로 "시공"(space time) 그 자체이다. 그런데 이 시공은 나의 인식(혹은 정신)과 어떤 관계인가?

시공은 정말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실체인가? 아니면 그것은 그저 우리의 감각 인식의 작용이 만들어낸 허구인가? 

 

 칸트가 말하는 "선험"은 범심론적 세계관 같다. 서양문명을 흔히 물질문명이라고 하는데 서구적 전통에서 칸트에서 헤겔로 이어지는 관념론적 세계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고어찌됐든 칸트와 헤겔의 이해는 앞으로 내 독서의 주요한 주제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런데 요즘 철학관련 책들만 자꾸 읽다 보니까 소설이 재미없어졌다. 사실, 소설은 이미 오래전에 흥미를 잃어버렸는데 시시한 소설보다 이런 철학책들이 더 재미있다니.. 내가 이제 미쳐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주제를 꾸준히 소화해 나가는 과정에 절대적 도움을 주는 책이 바로 국내 철학자들이 쓴 이런 이해하기 쉬운 좋은 책들이다. 한자경 교수의 <칸트 철학에의 초대>같은 책은 가까운 책장에 꽂아두고 원전을 읽을 때 헷갈리는 개념이나 용어가 나오면 다시 찾아볼 좋은 참고서다.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원전 번역서보다 이런 책이 칸트철학을 이해하는데 훨씬 더 유용하다. 칸트를 이해한답시고 아무런 준비없이 순수이성비판 원전에 달려드는 것은 아주 무모한 짓이다.

 

그런데 칸트와 헤겔이라는는 훌륭한 철학을 배출한 독일이라는 나라는 어쩌다가 파시즘의 광풍에 휩싸여 그런 어마어마한 죄악을 저지르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하이데거도 한 때 나치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고하는데 아무튼 독일은 대단하면서도 끔찍하다. 일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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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필연 궁리하는 과학 6
자크 모노 지음, 조현수 옮김 / 궁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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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분자 생물학자 자크 모노의 과학철학서.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받은 충격과 감동은 워낙 강력한 것이어서, 책을 완독하고 1주일이 지나서도 아직 책을 책장에 집어넣지 못하고 다른 책에도 손을 대지 못했다. 인류의 모든 사상과 종교와 철학을 무력하게 만들어 버리는 자크모노의 과학 도그마에서 헤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미 과학철학의 고전의 반열에 올라선 이 책을 읽게 된 경위는 평범했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뒤 내가 바라본 세상은 더 이상 예전의 그 평범한 세상이 아니었다. 자크 모노가 쏟아내는 독특하고 매력적인 이야기들은 내게 친숙하고 습관적이었던 것들을 낯설게 만들어 주었고 그럼으로써 근본적으로 내게 전혀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주었다. 나 자신과 이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되면 친숙했던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기 어렵다. 그리고 그 친숙했던 세계관은 이 세상을 바라보는 도구로서의 유효성을 상실하고 만다.

 

 이 책은 내게 생명과 우주에 대한 철학적 개안(開眼)을 가능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왜 혁명적일까? 그동안 내가 알고 있었던 지식과 사상의 근원부터 파고들어 마침내 그 지식과 사상의 시초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위대한 인류의 사상과 종교, 철학의 시원을 신(神)이 아닌 인간 그 자체의 존재로부터 연유했다고 주장하는 모노가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공리(公理)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과학적 객관성이다. 그러나 모노가 말하는 과학적 객관성의 실체는 내가 그동안 상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과학적 객관성이 아니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모노가 말하는 과학적 객관성의 공리는 데카르트 이후 근대과학에서 시작한 인과율과 필연적 자연법칙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주사위 놀이 같은 우연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노는 생명의 기원이 극도로 미세한 물질들의 우연적 조합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우연은 정확히 필연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그 우연의 시작에 어떤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지구상의 원시바다에서 최초의 생명이 우연히 발생하게 된 것은 마치 쓰레기장에 태풍이 휘몰아쳐 그 쓰레기들이 보잉747비행기로 저절로 조립될 확률과 마찬가지이거나 그 확률보다 훨씬 더 희박하다. 모노의 말대로라면 이 지구상에 생명이 탄생할 확률은 거의 0에 가까운 것이다. 그리고 생명의 역사에서 인간이 탄생할 확률도 거의 0에 가깝다.

 

 이 확률들은 쓰레기장에서 쓰레기들이 저절로 보잉747로 조립될 확률보다도 더 희박하다는 것을 다시 상기한다면 얼마나 일어나기 힘든 것이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러한 사건들의 선험적 출현 확률이 0에 가깝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우주에는 분명 생명이 탄생했다는 점이다. 모노의 철학은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인간은 필연적 존재가 아니라 지극히 우연적인 존재임을 직시하자는 것이 모노의 주장이다. 우주에서 생명과 인간은 인간이 아는 한 단 한번 탄생했고 인류의 출현 또한 단 한번의 유일무이한 사건으로써 그 자체로 모든 인간중심주의로부터 우리를 떼어놓는다고 하는 모노는 이제 그동안 인간존재를 우주의 중심으로 여기고 초월적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존재나 신의 의지에 의해 탄생했다는 종교적이고 물활론적 세계관에서 탈피하여 과학적 세계관을 수용하자고 주장한다.

 

 즉, 인간은 이 세계와 우주의 주인도 아니며 인간존재의 근원도 필연이 아닌 그저 주사위 놀이 같은 우연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차갑고 광활한 우주에서 인간은 한 점의 티끌 보다 더 미미한 존재이며 한없이 고독한 존재일 뿐이다. 이러한 세계관과 생각은 우리 자신의 존재를 심각하게 불안하도록 만든다. 모노는 이 사실이 현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애초부터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도록 운명 지어진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인간의 성향과 상충한다고 한다. 그래서 모노는 운명의 존재에 대한 진한 향수애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운명에 대한 진한 향수애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플라톤 이래 서양철학과 사상에 깊이 녹아들어 있다. 이런 운명에 대한 향수가 중세까지 서양을 지배했던 목적론적 세계관이었고 근대과학은 이 목적론적 세계관을 인과적 세계관으로 대체했다. 모노가 말하는 우연은 인과적 세계관의 절정이다.


  모노가 이 책에서 말하는 생명의 진화현상은 더욱 놀랍다. 보통 사람들은 진화현상을 생명이 더욱 좋은 방향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으로써 생명과 물질을 초월한 특정한 진화의 법칙이 존재하여 그것이 생명을 진화하게 하는 것으로 믿고 있으며, 나 역시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필연적 진화론을 상식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모노가 바라보는 생명의 진화 현상은 그저 러시안 룰렛게임처럼 양자적 요란의 우연의 산물에 불과하다.

 

  즉, 생명현상의 본질은 진화가 아니라 DNA의 불변적 자기복제 시스템이며 진화는 이 DNA의 불변적 자기복제 시스템의 부차적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 모노의 의견이다. 이 모노의 의견은 DNA에서 RNA로만 일방적인 정보의 전달만 가능하다는 정보의 비가역성(非可逆性)이라는 엄연한 생물학적 연구 성과로부터 뒷받침된다. 다시 말해 기후나 자연적 변화가 생물체 세포내의 유전자인 DNA를 직접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DNA를 구성하는 극미한 양자들의 우연적 요란이 DNA를 변화시키고 변화된 DNA는 돌연변이를 낳게 되는데 이 돌연변이가 개체 생명으로 성장하여 환경과 조화하여 생존할 수 있다면 이 돌연변이가 곧 진화현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 극미한 양자세계의 우연적 요란은 바로 양자물리학자인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 미시적 원자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뉴튼의 물리학처럼 거시세계에서 보이는 인과율과 기계론적 필연성은 미시세계에서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원자와 전자의 세계에서는 오로지 확률게임만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고전물리학의 최후를 장식했던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던 것이다. 그러나 양자물리학자들의 연구 성과나 이 책에서 소개하는 분자생물학의 성과를 보면 아쉽게도 아인슈타인의 유언이 틀렸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 생물학의 입장에서 볼 때, 진화는 결코 생명체의 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유전정보의 보존의 메커니즘이야말로 생명체만이 특권적으로 유일하게 가진 독특한 본성이라는 모노의 주장은 혁명적이고 충격적이다. 진화란 유전정보 보존 메커니즘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고 그저 우연의 산물이라면 그동안 진화란 것은 생명체내에 내재된 고유한 필연의 법칙의 발현으로 여겨왔던 내 인식을 완전히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는 또 하나의 혁명이다.

 

  이제 모노가 보여주는 생명의 참모습과 진실을 접하고 나면, 눈을 들어 창 밖에보이는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새 한 마리도 더 이상 예전의 그것이 아니다. 툭하면 자연을 살리자, 환경을 살리자라는 오만한 인간중심적 세계관은 이제 폐기되어야 마땅하리라. 인간은 이 우주의, 지구의 주인도 아닌 그저 길가의 풀 한포기와 같은 우연적 운명이며 자연은 더 이상 인간들이 죽이고 살리고 자시고 할 노예적 대상이 아니다.

 

  자연은 인간의 운명에 무관심하며 심지어 자기 자신의 운명에도 무관심하다. 자연과 인간이 존재하는데 결코 어떤 목적이 있을 수 없음을 직시하고 나면 비로소 자연과 인간, 그리고 모든 생명체의 가치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생명과 자연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의 운명이 결코 우주를 초월한 절대자가 미리 써놓았기 때문이 아니라 쓰레기장의 부품들이 보잉747로 저절로 조립될 확률과 같은 완전히 말도 안 되는 우연의 소산물이기 때문이다.

 

 모노는 분자생물학에 근거하여 전혀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주지만 그가 의지하는 분자생물학이 결코 모든 것을 해결하는 만능이 아님을 지적한다. 모노는 분자생물학에서 지식의 최전선, 즉 미지의 수수께끼 영역으로 최초 생명체의 기원, 인간의 중추신경계(뇌 포함), 유전암호의 기원 등을 들고 있다. 생명체를 구성하는 단백질, 그리고 그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의 분자구조가 왜 그렇게 생겼고 그것이 어떻게 기원했는지, 또 그 아미노산의 분자구조 순서를 결정하는 DNA가 어떻게 기원했는지에 대해 현대 과학과 생물학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 책이 출간된 1970년 이후 40여년이 지났지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여전히 미궁이다. 21세기 블루오션은 바로 분자생물학이 될 것이다.

 

  모노가 설명하는 리보솜과 박테리아 퍼지 바이러스의 재구성,  단백질 분자들의 입체 특이적 결합력, 알로스테릭 효소의 피드백 촉매작용, 그리고 생체세포들 간의 합목적성을 보고 있으면 정말 우리가 모르는 어떤 의지가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그리고 이 책의 본질을 모르고 독서를 시작했던 사람은 이 희한한 생명체의 작동방식과 진실을 소개하는 모노의 본심이 필경 초자연적인 의지와 운명을 끌어들이고자 함에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이러한 오해는 순전히 모노의 글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 모노의 글은 마지막까지 읽어야 하는 미스테리 소설처럼 독자를 한 방향으로 몰아가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반전에 떨구어 놓는다. 그만큼 그의 글은 재미있다. 물론 약간의 모호함과 난해함이 매끄러운 독서에 걸림돌이 될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 모노의 글은 매력적이며 흥미롭다. 또 그의 글에는 이 짧은 독서평으로는 결코 다 담을 수 없는 무궁무진한 이야기 거리가 넘쳐난다.


   모노의 글을 읽고 초월적인 神的 의지의 출현을 바랐던 독자들은 모노의 철저한 유물론적, 기계론적 세계관에 실망하게 될 것이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을 했다. 그러나 모노는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객관적 과학적 공리에 의지해 나간다. 그리고 그는 섣불리 독자를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그의 문장에 우글거리는 “나” 라는 1인칭 주어의 반복적 등장은 확신에 찬 그의 문장에서 겸손을 느낄 수 있게 한다. 그의 글을 읽고 나면 한편의 지독한 도그마에 빠진 종교경전을 읽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바로 과학적 객관성이라는 도그마 말이다.

 

  과학책으로써 이 책만큼 재미있는 책을 읽어 본적 없다는 생각이 든다. 모노의 주장이 극단적으로 위험해 또 하나의 과학 근본주의라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걱정이 들었지만 모노의 일관적 태도와 객관적인 설득력에 근거한 압도적인 위력에 이러한 걱정은 기우에 불과할 것이다. 이 우주의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님을 증명할, 아니 그렇게 생각할 그 어떤 이유도 필연성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세계가 어떤 원인자를 가져야 할 필연성 자체가 불합리한 것이 아닐까? 이 책은 종교적 세계관에 대한 강력한 백신이다.

 

모노의 <우연과 필연>은 내가 읽은 책 중에 최고의 책이며 최고의 지적 희열을 제공한다.

 

 분자생물학에 생소한 독자들은 이 책에서 소개하는 알로스테릭 효소의 메커니즘 설명부분에 어려움을 느낄 수 있는데 아래의 책들을 참고하면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참고로 책의 앞부분에 나오는 알로스테릭 효소 부분은 읽지 않고 건너뛰어도 책의 전체적 내용과 모노의 생각을 이해하는데 크게 지장은 없다.

 


 <만화로 쉽게 배우는 생화학>  김성훈 옮김, 성안당 출판사, p163~212

 <내몸안의 작은 우주, 분자 생물학> 하기와라 기요후미 저, 황소연 옮김, 전나무숲 출판사p5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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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란 무엇인가.정신과 물질 궁리하는 과학 4
에르빈 슈뢰딩거 지음, 전대호 옮김 / 궁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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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최근 ‘소스 코드’라는 영화를 재밌게 보았다. 이 영화의 주제인 평행우주론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양자역학 사고실험을 고안한 사람이 바로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양자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이다. 슈뢰딩거는 볼츠만, 맥스웰과 더불어 양자역학의 창시자중에 한사람으로 꼽히는데 원자핵 주변에 존재하는 전자의 발견확률을 구하는 파동함수의 창시자로서 더 유명하다.

 

  엄격하고 냉철한 과학적 이성과 수학으로 무장한 이론물리학자인 슈뢰딩거.   양자물리학자가 바라본 생명현상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이 책은 살아있는 유기체의 공간적 경계 안에서 일어나는 시간과 공간 속의 사건들을 물리학과 화학으로 설명하려 한다. 즉, 생물학의 제반 지식과 이론을 설명하기보다는 한 이론물리학자가 자신의 주특기인 물리와 화학을 기반으로 한 생명현상 그 자체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탐구가 주요내용인 셈이다. 이 책은 프랜시스 크릭과 제임스 왓슨이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하기 전에 씌어진 탓에 슈뢰딩거는 염색체 숫자를 48개로 추정하고 있는데 인간 염색체의 숫자는 모두46개로서 이는 오늘날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또 슈뢰딩거는 인간 유전자를 단백질로 예상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류임이 오래전에 밝혀졌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이점에 대해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오류가 이 책의 장점을 상쇄하지는 못한다.

 

   옮긴이 전대호씨의 서평처럼, 이 책은 제대로 사변적인 책이다. “가장 좋은 책은 독자로 하여금 가장 많이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라는 마크 트웨인의 명언처럼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겨우150페이지 정도의 얇은 책이지만 독자로 하여금 제대로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얼마 전에 읽은 자크모노의 <우연과 필연>에 필적하는, 아니 그 이상의 영감과 감동을 받았다. 자크모노는 모든 생명현상과 진화의 본질을 필연이 아닌 우연적 산물로 본다는 점에서 환원주의적 입장을 고수한다. 마치 미국의 분자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가 모든 생명활동의 본질을 이기적인 유전자의 생존으로 설명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슈뢰딩거는 ‘원자들은 왜 그토록 작은가?’ 라는 의문으로 시작하여 생명에 대한 물리학적 탐구를 시작한다. 왜 우리는 개별 원자들을 느낄 수 없는 것일까? 개별 원자들의 무질서한 열운동을 극복하고 체계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존재가 되려면 다량의 천문학적인 수량의 원자들의 집합체, 즉 인간 신경계인 뇌가 될 수밖에 없음을 슈뢰딩거는 몇 몇 사례를 들어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또, 슈뢰딩거는 유전물질의 기적적인 영속성과 안정성을 물리법칙과 양자역학 법칙으로도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유전물질은 분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분자는 분자 그 자체의 고체적 안정성에 의해 원자들의 불규칙적이고 무질서한 분자적 열운동에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가 됨으로써 영속성과 영구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슈뢰딩거는 유전물질인 DNA가 기체나 액체가 아닌 고체임을 분명하게 밝히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의 생명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이나 직관과 많은 차이가 난다. 한마디로 말해 DNA는 고도의 유전적 암호 정보로 짜여진 비주기적 고체 덩어리, 즉 금속이나 돌과 같은 단단한 물질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DNA가 단단한 고체가 아니라면 수 십 억년을 거치면서도 그 원형을 그대로 기적적으로 유지한 점을 설명하기 어려운데 이러한 슈뢰딩거의 해석에 실망할 독자들도 적지 않을 것 같다.

 아니, 생명의 본질이 겨우 고체덩어리에 불과하단 말인가? 살아있는 세포 속에 존재하는 DNA가 그냥 단단한 분자결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당장 나 자신조차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슈뢰딩거는 생명과 유기체의 본질을 단순하고 명확한 물리적 법칙만으로 움직이는 고체분자덩어리로만 환원하지는 않는다. 이점에서 슈뢰딩거는 물리학자이면서도 생물에 대해서는 적어도 환원주의자로 치부할 수 없다. 슈뢰딩거는 생명현상을 음의 엔트로피를 먹고 사는 존재로 정의한다. 생명현상은 엔트로피 법칙을 거스르는 존재, 즉 끊임없이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존재로 보고 있는데 이 또한 생명에 대한 우리의 직관을 크게 벗어난다. 즉, 우주의 본성은 끊임없이 무질서한 상태로 움직이는 경향을 가지는데 반하여 생명은 끊임없이 질서를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한마디로 생명은 우주의 물리적 질서에 반하는 현상인 셈이다. 생명체의 노화는 우주물리법칙으로 돌아가려는 자연스런 현상임을 알 수 있다.

 

  그토록 작은 원자 집단인 유전자들의 놀라운 영속성을 양자역학의 법칙으로 설명한 슈뢰딩거.

그는 물질과 생명의 간극을 초월적 법칙이나 진리가 아닌 일상적 물리법칙으로 이었다. 물질과 생명의 이음새는 결코 우리가 모르는 초월적 법칙으로 메워져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슈뢰딩거가 말하는 그 물질과 생명의 이음새는 여전히 우리의 직관과 이성으로 받아들이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힘들다.

 

  이 책에서 슈뢰딩거는 생명현상에 대한 인간의 지식에는 한계가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인간정신에 대한 지식은 일정한 한계가 있음을 슈뢰딩거는 솔직하게 시인하고 있다.

 

  그래서 슈뢰딩거는 이 책에서는 생명을 논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정신활동을 다루고 있다. 인간 정신과 의식에 대해 슈뢰딩거는 신비주의적 관점을 이 책의 후기에서 슬쩍 내비친다. 그리고 이러한 신비주의적 관점은 그의 또 다른 책<정신과 물질>에서 제대로 다뤄지고 있다. <정신과 물질>이라는 책 또한 이 책 <생명이란 무엇인가>처럼 제대로 사변적이고 재미있는 책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생명 현상에 대한 지적 호기심과 상상력을 충분히 자극한다. 비록 생명을 전공한 전문학자의 저술은 아니지만, 이 책이 후대 생물학자들에게 제공한 영감과 감동은 지대하다. 특히 DNA이중나선을 발견한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슈뢰딩거의 이 책<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나서 생명의 비밀을 풀고 싶은 강한 욕구와 동기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이 후대 분자생물학의 폭발적 발전의 기폭제와 자극제가 된 것은 분명하다. 

 

  이 책에서 슈뢰딩거는 생명현상에 대해 명쾌하고 확실한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다만, 그는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생명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슈뢰딩거가 말하는 생명현상에 대한 서술만으로는 생명현상에 대한 제대로 된 그림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슈뢰딩거는 그토록 작고 약해 보이는 유전물질(DNA)도 물리와 화학의 법칙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래서 슈뢰딩거가 바라보는 생명에서 생기론적 환상은 

찾아 볼 수 없다. 슈뢰딩거는 생명현상을 궁극적으로 질서로부터의 질서로 생각했다. 유전물질이라는 질서에서 또 다른 유전물질로의 질서 말이다.

 

   이 책은 워낙 분량이 적고 여러 가지 비유를 많이 써서 저자의 원래 의도를 정확하게 읽어내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책에서 생명의 비밀을 조금씩 엿본 것 같은 쾌감과 생명현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이 책은 지금까지도 생물학자들 사이에서 그 해석과 의견이 분분한 만큼 확고한 고전의 반열에 올라섰다고 볼 수 있다. 쉬운 책은 아니지만,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생각해보게 하고 의문을 던지게 만드는 진정한 고전이다. 생명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을 필독서 중에 하나로 꼽아도 무방할 것이다

 

                                                                                           2011.08.02 patrache

 

 

ps: 슈뢰딩거의 또 다른 책 <자연과 그리스인>,<나의 세계관>은 영어 원서를 구입해 놓고 아직 손도 대지 못하고 있다. 궁리 출판사에서 나온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물질과 정신>과 합본으로 되어 있는데 <물질과 정신>을 읽고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과연 슈뢰딩거의 <물질과 정신>을 신비주의로만 치부할 것인가? 아니라고 본다. 슈뢰딩거의 저작들은 내 독서의 중요한 주제들 중 하나다.

 

올 여름엔 책 구입 좀 줄이고 책장에 쟁여놓은 책 좀 해치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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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찾아올 적엔 창비시선 224
하종오 지음 / 창비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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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종오의 시는 시 읽기의 재미를 준다. 시를 읽으면서 시인이 창조해 낸 이미지에 탄복하는 경우는 많지만 시인이 그려내는 이야기와 서사에 몰입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하종오의 시가 빚어낸 사라져 가는 농촌 고향의 이야기와 그 사라져가는 시골 태생으로 도시에 적응하지 못하는 도시인들의 이야기는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일상과 호흡을 같이 한다. 


  그래서 그의 시들은 농촌과 도시, 그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영원한 떠돌이 같은 우리 삶을 차근차근 성실하게, 세밀하게 성찰한 뒤 매끄러운 서사 운문으로 빚어내어 놓는다. 그의 시들에 나오는 시어들은 책상물림의 관념적인 메마른 시어와는 거리가 멀다.
 또 그의 시는 시골에 계신 늙으신 부모님들의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의 깊이만큼 우리마음 깊숙이 골을 내면서 출세와 성공, 돈에 익숙한 도시인들의 마음에 작지만 쓰라린 상처를 낸다.

 

  사람은 반드시 도시가 아니면 시골에서 태어난다. 근대화 이후 도시로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골정서를 보물단지처럼 가지고 살아가며 언젠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는 막연한 희망으로 근근이 도시생활을 이어간다. 시인 하종오도 아마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도시 생활을 한 모양이다. 


   그는 상사에게 불려가 매출 낮은 이유를 추궁 당하고 종일 사표를 끼고 있으면서도 벗어나기 어려운 도시적 삶에 기민하게 적응할 수밖에 없다. 도시생활은 까칠하지만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적응하면 극도로 편할 수 있다.
<편안한 擬態>라는 시는 이러한 도시적 삶의 절정을 이룬다.
 
 고층빌딩의 매일매일은 의태로 시작한다.
 비엠더블유 타고 온 오너는 운동 삼아 계단을 오르지만
 소나타를 타고 온 간부는 눈치 삼아 계단을 오르고
 지하철을 타고 온 사원은 시늉 삼아 계단을 오른다.
 사무실이 같고 책걸상이 같고 유니폼이 같아서
 상사가 알아서 기면 부하도 알아서 기고
 부하가 빙그레 웃으면 상사도 빙그레 웃는다
 여자직원은 남자직원만큼 수치스러워하고
 남자직원은 여자직원만큼 감격스러워한다.
 중심을 가졌거나 안 가졌거나
 내 것을 적게 주고 남의 것을 많이 받아내려는 즐거움도
 똑같아서 불평하거나 감사하는 말투도 서로 똑같다.
 고층빌딩은 유리창이 모조리 사람들과 똑같아서
 안에서는 밖이 보여도 밖에서는 안이 안 보인다.
                                -<편안한 擬態>


 시인은 비록 도시적 삶을 무서워 하지만 남을 따라하면 편안해 질 수 있다는 성찰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 편안한 성찰의 이면에는 도시의 불편한 진실이 도사리고 있다. 중심이 있어도 중심이 없어도 본능적인 이기심은 똑같아서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다.
고층빌딩의 유리창처럼,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하고 타인을 훔쳐보려는 관음증 같은 심리도 일상적이다. 이 모든 것이 도시인들의 편안한 태도이고 이런 습속에 길들여져도 누구하나 불편한지 모른다.

 

~중략~
환율과 주가와 부동산 중 뭐가 폭등하는지 폭락하는지
누가 더 가난해지고 누가 더 부자가 되는지
우리가 죽을 때까지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만 잘 남겨두고 잘 죽는다는 건가
                                -<모르는 것>부분


  편안한 의태를 서로 따라하면서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죽어가는 삶이 도시적 삶의 미덕일지도 모른다. 이런 미덕이 찬양되는 도시를 떠나 시인은 시골 고향에 이른다. 그러나 귀농한 시인 앞에 예전의 그 풍족했던 농촌정서는 찾아 볼 길이 없다.

 

 민둥산을 사들인 도시인들
 측량하여 경계마다 말뚝을 박는다
 두세 마지기씩 나누어가진 뒤
 산등성까지 포크레인으로 밀어 붙인다
 걸어 다닐 밭둑 만들지 않고
 양식 거둘 두둑과 고랑 일구지 않고
 먼저 널찍하게 찻길부터 닦는다
 ~중략~
 승용차 타고 올라가서 눈 내리깔고 본다
 두 마지기 부재지주 세 마지기 부재지주
 도시인들 킬킬대다가 돌아간다
 민둥산에 비 와서 흙탕물이 말뚝을 쓸어버리면
 잡풀들이 지주가 되고 벌레들이 지주가 되어
 ~후략~
                              -<지주>부분
 
귀향한 시인의 눈앞에서는 부재지주들의 땅 잔치가 벌어지고, 
 
~중략~
 들판을 얻어 살아간 이는 아버지였지만
 들판을 버려 살아가는 이는 자식이었다
 ~중략~
 날마다 저녁이 오면 들녘에 안개 내래는 소리를 들으며
 농업 박물관 문을 잠그고 집에 돌아가
 먼 나라서 가져온 쌀밥과
 먼 나라서 가져온 소고기를 구워먹었다
                                  -<농업박물관>부분

 

 한평생 들판을 일구었던 아버지는 늙어 사라져 가고 자식은 그 아버지가 일구었던 들판을 버려야 산다. 도시를 떠도느라 농사짓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농사는 농업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유물로 변하고 아들은 수입쌀과 수입고기로 배를 채워야 한다.

 

 ~중략~
 끝까지 물려주지 않아야 똥오줌이나 받아준다고
 논밭에 일찍 나갔다가 늦게 들어오곤 하더니
 끝까지 왔는데도 안 물려주고 똥오줌이나 먼저 받으라는가,
 잠시 아버지를 뵈러 온 자식은 투덜거리는 것이었다
 자식은 떠날 것이다
 아버지가 해마다 심어먹었던 잡곡과 채소
 아버지가 날마다 길어먹었던 뒤란 찬 우물물마저
 몸에서 다 비워내고 나면 아버지를 묻어버리고
 자식은 논밭을 팔아먹을 것이다
 그래도 거름 만들려고 정랑 파내듯 아버지는
 온몸에 남은 기운이란 기운 모두 끌어서
 논두렁 다지던 발걸음과 새 쫓던 팔매질도
 씨앗 꾸러 온 이웃에게 해대던 손사래마저 모아
 자식에게 조용히 내주고 맥놓는 것이었다
                               -<슬픈 유산>부분

 

  슬픈 자화상과 같은 이런 시들을 마음 편히 읽을 수 없다면 우리는 도시와 시골 그 어디에서도 쉬지 못하고 영원히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해매야 하는 이방인이 틀림없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까? 
 

 농촌엔 농사짓지 않는 부재지주들이 땅값 오르기를 기다리며 킬킬거리고 농사지을 줄 모르는 도시인도 아닌 농부도 아닌 어중간한 시인들이 남은 슬픈 유산을 갖고 어찌해야 할 줄 모른다. 이렇게 하종오의 시들은 수월한 이미지와 시적 재미를 가지고 독자들을 시 읽기의 즐거움에 이르게 하지만 그의 시들을 읽다가 지키지 못하는 땅과 늙어가는 부모님 생각에 다다르면 이렇게 앉아 있기만 해서야 될 것인가 하는 반성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하종오의 시에 귀를 기울이면 더 이상 여기 앉아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2010년 8월 14일

                                                                                                                  patra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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