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 찾아올 적엔 창비시선 224
하종오 지음 / 창비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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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종오의 시는 시 읽기의 재미를 준다. 시를 읽으면서 시인이 창조해 낸 이미지에 탄복하는 경우는 많지만 시인이 그려내는 이야기와 서사에 몰입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하종오의 시가 빚어낸 사라져 가는 농촌 고향의 이야기와 그 사라져가는 시골 태생으로 도시에 적응하지 못하는 도시인들의 이야기는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일상과 호흡을 같이 한다. 


  그래서 그의 시들은 농촌과 도시, 그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영원한 떠돌이 같은 우리 삶을 차근차근 성실하게, 세밀하게 성찰한 뒤 매끄러운 서사 운문으로 빚어내어 놓는다. 그의 시들에 나오는 시어들은 책상물림의 관념적인 메마른 시어와는 거리가 멀다.
 또 그의 시는 시골에 계신 늙으신 부모님들의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의 깊이만큼 우리마음 깊숙이 골을 내면서 출세와 성공, 돈에 익숙한 도시인들의 마음에 작지만 쓰라린 상처를 낸다.

 

  사람은 반드시 도시가 아니면 시골에서 태어난다. 근대화 이후 도시로 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골정서를 보물단지처럼 가지고 살아가며 언젠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는 막연한 희망으로 근근이 도시생활을 이어간다. 시인 하종오도 아마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도시 생활을 한 모양이다. 


   그는 상사에게 불려가 매출 낮은 이유를 추궁 당하고 종일 사표를 끼고 있으면서도 벗어나기 어려운 도시적 삶에 기민하게 적응할 수밖에 없다. 도시생활은 까칠하지만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적응하면 극도로 편할 수 있다.
<편안한 擬態>라는 시는 이러한 도시적 삶의 절정을 이룬다.
 
 고층빌딩의 매일매일은 의태로 시작한다.
 비엠더블유 타고 온 오너는 운동 삼아 계단을 오르지만
 소나타를 타고 온 간부는 눈치 삼아 계단을 오르고
 지하철을 타고 온 사원은 시늉 삼아 계단을 오른다.
 사무실이 같고 책걸상이 같고 유니폼이 같아서
 상사가 알아서 기면 부하도 알아서 기고
 부하가 빙그레 웃으면 상사도 빙그레 웃는다
 여자직원은 남자직원만큼 수치스러워하고
 남자직원은 여자직원만큼 감격스러워한다.
 중심을 가졌거나 안 가졌거나
 내 것을 적게 주고 남의 것을 많이 받아내려는 즐거움도
 똑같아서 불평하거나 감사하는 말투도 서로 똑같다.
 고층빌딩은 유리창이 모조리 사람들과 똑같아서
 안에서는 밖이 보여도 밖에서는 안이 안 보인다.
                                -<편안한 擬態>


 시인은 비록 도시적 삶을 무서워 하지만 남을 따라하면 편안해 질 수 있다는 성찰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 편안한 성찰의 이면에는 도시의 불편한 진실이 도사리고 있다. 중심이 있어도 중심이 없어도 본능적인 이기심은 똑같아서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다.
고층빌딩의 유리창처럼,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하고 타인을 훔쳐보려는 관음증 같은 심리도 일상적이다. 이 모든 것이 도시인들의 편안한 태도이고 이런 습속에 길들여져도 누구하나 불편한지 모른다.

 

~중략~
환율과 주가와 부동산 중 뭐가 폭등하는지 폭락하는지
누가 더 가난해지고 누가 더 부자가 되는지
우리가 죽을 때까지 모르는 것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만 잘 남겨두고 잘 죽는다는 건가
                                -<모르는 것>부분


  편안한 의태를 서로 따라하면서 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죽어가는 삶이 도시적 삶의 미덕일지도 모른다. 이런 미덕이 찬양되는 도시를 떠나 시인은 시골 고향에 이른다. 그러나 귀농한 시인 앞에 예전의 그 풍족했던 농촌정서는 찾아 볼 길이 없다.

 

 민둥산을 사들인 도시인들
 측량하여 경계마다 말뚝을 박는다
 두세 마지기씩 나누어가진 뒤
 산등성까지 포크레인으로 밀어 붙인다
 걸어 다닐 밭둑 만들지 않고
 양식 거둘 두둑과 고랑 일구지 않고
 먼저 널찍하게 찻길부터 닦는다
 ~중략~
 승용차 타고 올라가서 눈 내리깔고 본다
 두 마지기 부재지주 세 마지기 부재지주
 도시인들 킬킬대다가 돌아간다
 민둥산에 비 와서 흙탕물이 말뚝을 쓸어버리면
 잡풀들이 지주가 되고 벌레들이 지주가 되어
 ~후략~
                              -<지주>부분
 
귀향한 시인의 눈앞에서는 부재지주들의 땅 잔치가 벌어지고, 
 
~중략~
 들판을 얻어 살아간 이는 아버지였지만
 들판을 버려 살아가는 이는 자식이었다
 ~중략~
 날마다 저녁이 오면 들녘에 안개 내래는 소리를 들으며
 농업 박물관 문을 잠그고 집에 돌아가
 먼 나라서 가져온 쌀밥과
 먼 나라서 가져온 소고기를 구워먹었다
                                  -<농업박물관>부분

 

 한평생 들판을 일구었던 아버지는 늙어 사라져 가고 자식은 그 아버지가 일구었던 들판을 버려야 산다. 도시를 떠도느라 농사짓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농사는 농업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유물로 변하고 아들은 수입쌀과 수입고기로 배를 채워야 한다.

 

 ~중략~
 끝까지 물려주지 않아야 똥오줌이나 받아준다고
 논밭에 일찍 나갔다가 늦게 들어오곤 하더니
 끝까지 왔는데도 안 물려주고 똥오줌이나 먼저 받으라는가,
 잠시 아버지를 뵈러 온 자식은 투덜거리는 것이었다
 자식은 떠날 것이다
 아버지가 해마다 심어먹었던 잡곡과 채소
 아버지가 날마다 길어먹었던 뒤란 찬 우물물마저
 몸에서 다 비워내고 나면 아버지를 묻어버리고
 자식은 논밭을 팔아먹을 것이다
 그래도 거름 만들려고 정랑 파내듯 아버지는
 온몸에 남은 기운이란 기운 모두 끌어서
 논두렁 다지던 발걸음과 새 쫓던 팔매질도
 씨앗 꾸러 온 이웃에게 해대던 손사래마저 모아
 자식에게 조용히 내주고 맥놓는 것이었다
                               -<슬픈 유산>부분

 

  슬픈 자화상과 같은 이런 시들을 마음 편히 읽을 수 없다면 우리는 도시와 시골 그 어디에서도 쉬지 못하고 영원히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해매야 하는 이방인이 틀림없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까? 
 

 농촌엔 농사짓지 않는 부재지주들이 땅값 오르기를 기다리며 킬킬거리고 농사지을 줄 모르는 도시인도 아닌 농부도 아닌 어중간한 시인들이 남은 슬픈 유산을 갖고 어찌해야 할 줄 모른다. 이렇게 하종오의 시들은 수월한 이미지와 시적 재미를 가지고 독자들을 시 읽기의 즐거움에 이르게 하지만 그의 시들을 읽다가 지키지 못하는 땅과 늙어가는 부모님 생각에 다다르면 이렇게 앉아 있기만 해서야 될 것인가 하는 반성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하종오의 시에 귀를 기울이면 더 이상 여기 앉아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2010년 8월 14일

                                                                                                                  patra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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