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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란 무엇인가.정신과 물질 ㅣ 궁리하는 과학 4
에르빈 슈뢰딩거 지음, 전대호 옮김 / 궁리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최근 ‘소스 코드’라는 영화를 재밌게 보았다. 이 영화의 주제인 평행우주론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양자역학 사고실험을 고안한 사람이 바로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양자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이다. 슈뢰딩거는 볼츠만, 맥스웰과 더불어 양자역학의 창시자중에 한사람으로 꼽히는데 원자핵 주변에 존재하는 전자의 발견확률을 구하는 파동함수의 창시자로서 더 유명하다.
엄격하고 냉철한 과학적 이성과 수학으로 무장한 이론물리학자인 슈뢰딩거. 양자물리학자가 바라본 생명현상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이 책은 살아있는 유기체의 공간적 경계 안에서 일어나는 시간과 공간 속의 사건들을 물리학과 화학으로 설명하려 한다. 즉, 생물학의 제반 지식과 이론을 설명하기보다는 한 이론물리학자가 자신의 주특기인 물리와 화학을 기반으로 한 생명현상 그 자체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탐구가 주요내용인 셈이다. 이 책은 프랜시스 크릭과 제임스 왓슨이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하기 전에 씌어진 탓에 슈뢰딩거는 염색체 숫자를 48개로 추정하고 있는데 인간 염색체의 숫자는 모두46개로서 이는 오늘날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또 슈뢰딩거는 인간 유전자를 단백질로 예상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류임이 오래전에 밝혀졌다.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이점에 대해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오류가 이 책의 장점을 상쇄하지는 못한다.
옮긴이 전대호씨의 서평처럼, 이 책은 제대로 사변적인 책이다. “가장 좋은 책은 독자로 하여금 가장 많이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라는 마크 트웨인의 명언처럼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겨우150페이지 정도의 얇은 책이지만 독자로 하여금 제대로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얼마 전에 읽은 자크모노의 <우연과 필연>에 필적하는, 아니 그 이상의 영감과 감동을 받았다. 자크모노는 모든 생명현상과 진화의 본질을 필연이 아닌 우연적 산물로 본다는 점에서 환원주의적 입장을 고수한다. 마치 미국의 분자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가 모든 생명활동의 본질을 이기적인 유전자의 생존으로 설명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슈뢰딩거는 ‘원자들은 왜 그토록 작은가?’ 라는 의문으로 시작하여 생명에 대한 물리학적 탐구를 시작한다. 왜 우리는 개별 원자들을 느낄 수 없는 것일까? 개별 원자들의 무질서한 열운동을 극복하고 체계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존재가 되려면 다량의 천문학적인 수량의 원자들의 집합체, 즉 인간 신경계인 뇌가 될 수밖에 없음을 슈뢰딩거는 몇 몇 사례를 들어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또, 슈뢰딩거는 유전물질의 기적적인 영속성과 안정성을 물리법칙과 양자역학 법칙으로도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 유전물질은 분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분자는 분자 그 자체의 고체적 안정성에 의해 원자들의 불규칙적이고 무질서한 분자적 열운동에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가 됨으로써 영속성과 영구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슈뢰딩거는 유전물질인 DNA가 기체나 액체가 아닌 고체임을 분명하게 밝히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의 생명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이나 직관과 많은 차이가 난다. 한마디로 말해 DNA는 고도의 유전적 암호 정보로 짜여진 비주기적 고체 덩어리, 즉 금속이나 돌과 같은 단단한 물질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DNA가 단단한 고체가 아니라면 수 십 억년을 거치면서도 그 원형을 그대로 기적적으로 유지한 점을 설명하기 어려운데 이러한 슈뢰딩거의 해석에 실망할 독자들도 적지 않을 것 같다.
아니, 생명의 본질이 겨우 고체덩어리에 불과하단 말인가? 살아있는 세포 속에 존재하는 DNA가 그냥 단단한 분자결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당장 나 자신조차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슈뢰딩거는 생명과 유기체의 본질을 단순하고 명확한 물리적 법칙만으로 움직이는 고체분자덩어리로만 환원하지는 않는다. 이점에서 슈뢰딩거는 물리학자이면서도 생물에 대해서는 적어도 환원주의자로 치부할 수 없다. 슈뢰딩거는 생명현상을 음의 엔트로피를 먹고 사는 존재로 정의한다. 생명현상은 엔트로피 법칙을 거스르는 존재, 즉 끊임없이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존재로 보고 있는데 이 또한 생명에 대한 우리의 직관을 크게 벗어난다. 즉, 우주의 본성은 끊임없이 무질서한 상태로 움직이는 경향을 가지는데 반하여 생명은 끊임없이 질서를 추구하는 존재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한마디로 생명은 우주의 물리적 질서에 반하는 현상인 셈이다. 생명체의 노화는 우주물리법칙으로 돌아가려는 자연스런 현상임을 알 수 있다.
그토록 작은 원자 집단인 유전자들의 놀라운 영속성을 양자역학의 법칙으로 설명한 슈뢰딩거.
그는 물질과 생명의 간극을 초월적 법칙이나 진리가 아닌 일상적 물리법칙으로 이었다. 물질과 생명의 이음새는 결코 우리가 모르는 초월적 법칙으로 메워져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슈뢰딩거가 말하는 그 물질과 생명의 이음새는 여전히 우리의 직관과 이성으로 받아들이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힘들다.
이 책에서 슈뢰딩거는 생명현상에 대한 인간의 지식에는 한계가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인간정신에 대한 지식은 일정한 한계가 있음을 슈뢰딩거는 솔직하게 시인하고 있다.
그래서 슈뢰딩거는 이 책에서는 생명을 논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정신활동을 다루고 있다. 인간 정신과 의식에 대해 슈뢰딩거는 신비주의적 관점을 이 책의 후기에서 슬쩍 내비친다. 그리고 이러한 신비주의적 관점은 그의 또 다른 책<정신과 물질>에서 제대로 다뤄지고 있다. <정신과 물질>이라는 책 또한 이 책 <생명이란 무엇인가>처럼 제대로 사변적이고 재미있는 책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생명 현상에 대한 지적 호기심과 상상력을 충분히 자극한다. 비록 생명을 전공한 전문학자의 저술은 아니지만, 이 책이 후대 생물학자들에게 제공한 영감과 감동은 지대하다. 특히 DNA이중나선을 발견한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슈뢰딩거의 이 책<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나서 생명의 비밀을 풀고 싶은 강한 욕구와 동기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이 후대 분자생물학의 폭발적 발전의 기폭제와 자극제가 된 것은 분명하다.
이 책에서 슈뢰딩거는 생명현상에 대해 명쾌하고 확실한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다만, 그는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생명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슈뢰딩거가 말하는 생명현상에 대한 서술만으로는 생명현상에 대한 제대로 된 그림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슈뢰딩거는 그토록 작고 약해 보이는 유전물질(DNA)도 물리와 화학의 법칙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래서 슈뢰딩거가 바라보는 생명에서 생기론적 환상은
찾아 볼 수 없다. 슈뢰딩거는 생명현상을 궁극적으로 질서로부터의 질서로 생각했다. 유전물질이라는 질서에서 또 다른 유전물질로의 질서 말이다.
이 책은 워낙 분량이 적고 여러 가지 비유를 많이 써서 저자의 원래 의도를 정확하게 읽어내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책에서 생명의 비밀을 조금씩 엿본 것 같은 쾌감과 생명현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이 책은 지금까지도 생물학자들 사이에서 그 해석과 의견이 분분한 만큼 확고한 고전의 반열에 올라섰다고 볼 수 있다. 쉬운 책은 아니지만,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생각해보게 하고 의문을 던지게 만드는 진정한 고전이다. 생명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을 필독서 중에 하나로 꼽아도 무방할 것이다
2011.08.02 patrache
ps: 슈뢰딩거의 또 다른 책 <자연과 그리스인>,<나의 세계관>은 영어 원서를 구입해 놓고 아직 손도 대지 못하고 있다. 궁리 출판사에서 나온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물질과 정신>과 합본으로 되어 있는데 <물질과 정신>을 읽고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과연 슈뢰딩거의 <물질과 정신>을 신비주의로만 치부할 것인가? 아니라고 본다. 슈뢰딩거의 저작들은 내 독서의 중요한 주제들 중 하나다.
올 여름엔 책 구입 좀 줄이고 책장에 쟁여놓은 책 좀 해치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