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값 창비시선 322
정호승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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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정호승의 시작(詩作)과 문학적 성취는 화려하다. 그는 1972년, 1973 두해에 걸쳐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고 1982년, 단편소설로도 신춘문예에 이름을 알렸다. 각종 문학상을 여러 번 수상한 이력도 눈에 띈다. 유명 일간 신문사가 주최하는 신춘문예에 작품이 당선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인데, 3번이나 그것도 시와 소설 양대 부문으로 신춘문예상을 움켜진 그의 문학적 재능은 정말 타고난 것이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을 것 같다. 

 

 70~80년대, 대학가를 중심으로 그의 시는 주로 젊은층에게 많은 인기를 얻은 모양이다.  나는 70, 80년대에 어린아이에 불과했으므로 그의 시를 단 한편도 접한 적이 없지만 정호승이라는 시인의 이름만은 내게도 꽤 친숙한 이름이었다. 지난 2010년에 펴낸 그의 열 번째 시집 <밥 값>을 읽으면서 그가 가진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앞으로 이 시인의 예전 시와 앞으로 나올 시는 꾸준히 찾아 읽을 생각이다.

 

 정호승의 시집 <밥 값>에서 평범한 사물인 벽보를 바라보면서 자기 성찰과 시인 자신이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을 반추해보는 <어느 벽보 앞에서>라는 시가 가슴에 와 닿는다.

 

 어느 벽보판 앞 / 현상수배범 전단지 사진 속에
 내 얼굴이 있었다
 안경을 끼고 입꼬리가 축 처진 게
 영락없이 내 얼굴이었다
 내가 무슨 대죄를 지어 / 나도 모르게 수배되고 있는지 몰라
 벽보판 앞을 평생을 서성이다가
 마침내 알았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죄 /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늙어버린 죄

 

                                                        -<어느 벽보 앞에서>-

 

 이 시에서 시인은 벽에 붙은 흔한 현상수배범 전단지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한다. 그 전
단지에 현실적으로 자신의 얼굴이 있을 수 없지만 분명 전단지에서 안경을 끼고 입 꼬리가 처진 자신의 얼굴을 발견함으로써 이 시의 시적 긴장은 시작된다.

 

 이 긴장감은 자신이 왜 그 전단지에 있어야 하는지 반추해보는 성찰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성찰은 쉽지 않다. 벽보판 앞에서 평생을 서성여야 할 정도로 많은 세월과 인내력이 필요한 고통의 성찰이다. 그리고 마침내 성찰의 결과는 시인 자신과 독자에게 통렬한 아픔을 선사한다.

 

“마침내 알았다“ 이후에 펼쳐지는 반성의 결과는 독자에게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반전을 제공한다. 그 반전 앞에 독자는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독자 자신이 시적 화자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죄,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늙어버린 죄“를 지은 공범처럼 느껴진다. ”사랑하지 않고 늙어버려 시간을 허비한 죄”를 지은 시적화자의 통렬하고 뼈아픈 반성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게 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이 시의 효용은 충분하다. 과연 누가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을 쉽게 잊어버릴 수 있을까?


나는 지금 무슨 죄를 짓고 있는가?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거울이라도 들여다 볼 일이다. 그리고 주변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정호승의 시는 이렇게 우리가 평소에 무심히 지나치는 일상적 사물과 언어들의 일상성을 부정하거나 파괴, 혹은 깊이 성찰해서 사람들의 관습에 충격을 가한다. 일상성의 관습에 충격을 당한 사람들에게 시인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서정적으로 증명한다.

 그가 증명하려는 것들은 <밥값>이라는 시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지금이라도 밥값을 하러 지옥에 가면
비로소 제가 인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밥 값>부분

 

 시인이 말하는 밥값은 지옥에 가서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시인이 보여주고 증명하려는 인간의 길일지도 모른다. 시인이 말하는 밥값이 어떤 것이지는 이 시집의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밥값을 보여주는 시들은 한결같이 반짝반짝 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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