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이운경 옮김 / 한문화 / 200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슬라보예 지젝의 책을 찾다가 읽게 된 책이다. 책을 대출할 때 까지만 해도 지젝의 단독저서인 줄 알았는데 집에 돌아와 책상위에서 스탠드를 켜고 보니 저자소개에 ‘슬라보예 지젝 외’라는 문구가 있지 않은가. 책 정보를 잘 못 읽은 것이다. 원래는 이 책으로 시작해서 지젝을 읽어볼  생각이었는데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여러 서구권 철학자들이 매트릭스라는 영화 한편으로 다양한 철학적 분석을 시도한 글들을 읽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흥미롭고 재미있는 글들을 여러 편 읽은 것이 적지 않은 소득이었다. 이 책에서 여러 철학자들은 실존주의, 마르크시즘, 여성주의, 불교, 허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각자의 관심 분야의 틀을 가지고 영화 매트릭스를 읽는다. 매트릭스라는 블랙홀에는 우리 인간이 상상하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있다. 이를 두고 저자 중 한 명인 슬라보예 지젝은 다음과 같이 평한다.


“당신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이 영화를 본다 해도, 그 안에서 자신의 관점에 부합되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지젝의 글 이외에(사실 지젝의 글은 무척 어렵다. 두 번을 읽었는데도 글의 주제를 파악하기 어렵다)우리를 생각해보게 하는 흥미로운 글 중에 하나는 제럴드 J 에리온 교수와 배리 스미스 교수가 쓴 ‘<매트릭스>는 데카르트를 반복한다: 삶은 악령의 기만’이라는 글이 아닐까 한다.

 

  이 글을 나는 아주 재미나게 읽었는데 그 이유는, 근대 유럽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아무도 반박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진리를 정말 쉽게 통쾌하게 반박해 버렸다는 점 때문이었다.

 

 물론 데카르트는 우리 존재의 근거를 인간 자신이 아니라 절대적 존재인 신에서 찾고 있는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까지도 데카르트를 근대 합리적 이성의 시초로 대부분 인정해 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제럴드 J 에리온 교수와 배리 스미스 교수는 이러한 데카르트의 근대적 이성을 대표하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조차 손쉽게 반박하고 우리는 결국 지식이란 언제나(철학적)확실성을 필요로 한다는 데카르트의 주장을 거부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또,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지식만이 참된 지식이라는 데카르트의 기본적인 인식론적 원칙은 그 자체로도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한다. 바로, ’그렇다면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원칙이 진리라는 것은 어떻게 확신 할 수 있는냐‘하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의 자가당착인 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내가 생각해서 존재하는 것일까?  생각하는 "나" 는 정말로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하지 않고 홀로 존재할 수 있을까?  그 반대인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일 수 있지 않을까?" 감각과 현실, 시공에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생각만 하는 존재를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런 존재는 없을 것이다. 데카르트의 실체이원론이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생각하는 나"의 존재도 오류다.

 

 매트릭스라는 영화를 보고 나면, 문득 우리의 삶이나 세계가 스미스 요원이 출몰하는 컴퓨터의 프로그램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형이상학적 불확실성이 생긴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불확실성을 철저하게 방법론적 회의로 탐구해 간 사람이 바로 데카르트이다. 우리가 우리의 존재와 믿음, 감각에 대해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결국 데카르트처럼 의심할 수 있는 것을 모두 의심해 본 뒤에 정말로 내가 의심할 수 없었던 것은 ”생각하는 내 자신, 내가 지금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는 내 자신“만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지 않은가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근대 합리적 이성의 기초이고 이러한 명제로부터 온갖 복잡한 인식론적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서 근대철학을 데카르트에 대한 후주(後註)라고 하지 않는가? 제럴드 J 레이온&배리 스미스(스미스 교수는 영화 매트릭스를 보고 난후, 난생 처음 자신의 이름을 바꾸고 싶었다는 재밌는 고백도 한다) 교수의 글을 읽어보면 현대 서양 철학은 세계에 대한 철학적 확실성을 찾으려 했던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근대철학에 상당히 비판적임을 알 수 있다. 하버드대학의 샌델교수도 근대적개인관을 철저히 반성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대 서양학계에서는 근대적 철학과 세계관에 대한 철저한 연구와 비판, 그리고 그 대안적 담론을 모색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 책에서는 ‘<매트릭스>,가해자의 히스테리 또는 새도매저키즘의 징후‘라는 슬라보예 지젝의 글은 다른 필자들의 글에 비해 상대적으로 길다.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에 근거해 매트릭스를 보는 사람들이 갖는 세계 너머에 ’진정한 현실‘이 존재한다는 편집증적 환상의 이유는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다. 지젝은 매트릭스와 비슷한 영화 ’트루먼 쇼‘를 들며 할리우드만이 매트릭스 같은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제 세계에서도 영혼이 박탈된 자본주의적 공리주의 세계의 궁극적인 진실은, 실제적인 삶이 그것의 구체성을 잃고 공허한 쇼로 역전됨을 강조한다.

 

 지젝의 이러한 지적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진정한 실재를 은폐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의식과 행동을 지배하는 시장과 자본이라는 실물화된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지젝은 이어

 

“그리고 이렇게 모든 것의 배후에 진정한 실재를 은폐하는 ’대타자‘가 있다, 그것이 매트릭스다.”

 

라고 이어간다. ’대타자‘는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에 나오는 개념인데 그냥 언어체계, 컴퓨터 네트워크, 혹은 특정 이데올로기 같은 실체가 없지만 우리 삶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그런 상징적 존재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대타자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붕괴되고 있다고 한다. 지젝은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대타자의 붕괴를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은 사이버 공간이 우리 모두를 지구촌으로 불러 모으리라고 기대했지만, 우리는 오히려 모순 되고 양립할 수 없는 다양한 세계들과 수많은 메시지들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되었다. 지구촌 대신, 즉 대타자 대신 우리는 수많은 ’소타자들‘, 다시 말해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는 수많은 부족들을 얻게 된 것이다.”

 

 대타자가 붕괴되고 우리는 더 이상 제정신을 가지고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없게 되는데 여기서 나타나는 현상 중에 하나가 바로 음모이론이라는 것이다. 지젝의 설명을 듣고 나니 수많은 음모이론들(예를 들어 UFO이론, 지구 종말론, 유태인지배론 같은 것들)이 왜 생기는지, 그것들이 어떻게 우리의 삶 속에서 작동하는지 어렴풋이 이해가 된다.


 그리고 대타자라는 것이 결코 ‘실재에 대한 과학적인 지식’ 이 제공하는 ‘사실들’에 직접적으로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젝은 주장한다. 근대과학이 지배적인 담론으로 부상하지 않았던 전통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근대과학의 주장들을 옹호한다면 그는 ‘광인’으로 치부된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다윈 같은 사람들이 실제로 광인 취급을 받지 않았는가? 그런데 광인 취급을 받는 것, 즉 사회적인 대타자로부터 배제되는 것은 어떤 식으로는 사실상 미친 것과 마찬가지인데 ‘광기’는 직접적인 사실들에 근거할 수 있는 호칭이 아니라, 단지 한 개인이 대타자에 관계하는 방식에 근거하는 호칭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컬 하면서도 재미있는 분석이다. 이런 재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라캉과 지젝을 읽는 모양이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의 정신과 의식이 어떤 방식으로 이 실제 세계와 연결되고 교류하는지를 알기 위해 만든 정신분석적 이론, 틀, 개념, 용어 들을 접하다 보면 도대체 인간의 정신은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 것인지 경이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위에서 이야기한 ‘광인’이야기는 어렵게 느껴지지만, 사실 자신의 담론과 생각을 대타자의 영역에 통합시킬 수 없다면 우리 모두는 정신병자라고 단언한 지젝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여기까지가 내가 이 책에서 이해한 지젝의 전부이다. 지젝의 글은 두 번을 정독했지만 사실 제대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난해한 정신분석학적 개념들 때문이었지만 지젝의 글은 나름대로 매력적이다. 지젝의 글들은 앞으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어갈 생각이다.
 
 이 책에는 위에서 이야기한 정신분석학뿐만 아니라 인식론, 형이상학, 실존주의, 종교철학, 윤리학, 마르크시즘, 포스트모더니즘 등 현대 철학의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이 <매트릭스>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모두 짤막짤막한 글들로 이루어져 있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의 편저자 윌리엄 어윈이 희망한 대로 이 책은 철학 공부의 입문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철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