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Fithele > 영국 여행후기 #10. 추리소설의 천국

"... 제 임무는 1930년대였어요. 정말 끔찍한 시대였죠. 히틀러가 득세하고 대공황이 일어나고, 비디오 테이프나 가상 현실은 물론이고 영화 보러 갈 돈도 없었다고요. 추리소설 읽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게 없었어요. 도로시 세이어즈, E.C. 벤슨, 애거서 크리스티, 그리고 십자말풀이랑요." 그녀는 마치 모든 게 다 설명되었다는 표정이었다.

                                                                - 코니 윌리스, [개는 말할 것도 없고]

*베낌주 : 여기서 EC 벤슨은 EC 벤틀리 의 오타인 것 같습니다.

옥스포드의 파퓰러하고도 중점적으로 선전하는 문학 아이콘을 꼽으라면 다음 3가지를 꼽을 수 있다.

  • 콜린 덱스터의 Inspector Morse
  • J.R.R. Tolkien & C.S.Lewis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루이스 캐롤

walking tour의 가이드가 톨킨이랑 캐롤을 언급하는 것은 이해가 갔는데, 모스 경감 시리즈까지 언급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Bragnose College 근처에서 "여기가 범인 쫓아갈 때 주로 쓰던 촬영지입니다" 푸하! 인기 좋은가 보다.


관광 안내소 쇼윈도우에도 버젓이 전시된 모스 경감 시리즈 (맨오른쪽)

비단 모스 경감뿐만 아니었다. 반경 1킬로 남짓 될 코딱지만한 시내에 중/대형 서점이 옥스포드 출판부까지 해서 5개쯤 있는데, 모든 서점에 ABC순으로 정렬된 추리소설(crime novel) 코너가 아주 잘 차려져 있었다. (물론 런던 피카딜리의 서점들은 훨씬 더 좋았다. 마지막 날에야 그걸 알았다. 쩝.) 정말로 무엇을 사야 할 지 몰라서, 충분한 자금이 없어 당황하게 되는 분위기. 자금이 넉넉했다 해도 생각나는 대로 사들이다 보면 돌아갈 때 짐에 깔려 죽거나 (-_-) 파산하기 딱 좋겠다 싶어 얼마나 조심을 했는지 모른다.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한 서너번을 서점에 가서 눈요기 (-_-) 를 열심히 하면서 분위기를 살펴보니 그 코너의 고객들은 대부분 여자들이었다. 

다만 좀 황당한 건 SF랑 판타지는 굳이 분리하지 않는 분위기였다는 것. 가서 알게 된 영국 아가씨랑 책 얘기를 잠깐 했는데, SF를 좋아한다고 해서 뭘 재미있게 봤냐, 물어봤더니 우리 나라에서는 판타지로 분류하는 물건들이었다. -_-a

여기서 톨킨은 거의 숭배를 받는가 보다. 어딜 가나 JRRT 코너가 책장 하나로 아예 따로 있는 분위기.


Blackwell, Waterstone 서점의 SF 코너에 있던 JRRT 전용 코너

심지어 톨킨과 CS 루이스가 멤버였던 부정기적인 모임 The Inkling을 서점에서 주관하여 구경시켜 주는 투어도 있다. (여행중 평일 일정은 매우 빡빡하였으므로 가보지 못함)


블랙웰 본점에서 받아올 수 있는 투어 안내문. Eagle & Child 술집은 지나가다 보긴 했다.

암튼, 옥스포드 도착해서 가장 조바심냈던 포스터 발표까지 버벅이며 마친 화요일 오후, 스트레스를 풀러 시내로 나갔는데 제일 먼저 눈에 띄어 찾아간 곳이 코니 윌리스가 22세기에도 여전히 건재하리라고 예상했던 블랙웰 서점이었다. 마침 여름의 빅 세일 기간이라 19세기 - 2차대전 이전 문학을 사는 경우 3권당 1권을 할인해 주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제롬K제롬의 [보트위의 세 남자]랑 우드하우스의 한 장편을 구매. 그래서 Gaudy Night 페이퍼백을 공짜로 사려고 보니 서점은 너무 넓고, 동행들은 가자고 재촉하는 것이었다.

점원에게 책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물어보며 이름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지 무척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아니나다를까 You mean Dorothy L Sayers?하고 다시 물어본다. 쪽팔렸다. ㅠ.ㅠ (체류중 계속 이런 식으로 지냈다. 다른 건 몰라도 R/L과 TH발음은 저얼때 안 교정되더라.) 어쨌든 책을 무사히 구했으므로 그날밤부터는 밤에 할 일이 하나 생기게 되었고, 아주 유용했다. 내 방은 맨 꼭대기층 - 아래 사진 참조. 약 6층 높이인데 빅터 딘이 떨어져 죽은 것만 같은 나선 계단만 있고 엘리베이터가 없다. 악몽이다. - 에 있었고, 또한 TV가 있는 교내술집 buttery 이나 학생 휴게실 JCR Room은 항상 붐볐으므로 저녁 먹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찌감치 올라가 책을 읽다 졸음을 참을 수 없게 되면 을씨년스럽게 불을 밝혀 놓은 퀸스(Queen's) 콜리지의 둥근 탑을 마주하며 소등을 했던 기억이 있다. 책 내용 자체가 여자 기숙사에서 흉흉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는 내용이므로 좀 무서웠던 기억도. -_-

숙소로 사용한 St. Edmund Hall. 여기도 대학(college)이라 수업을 어디선가에서 하고 있음. 중앙에 굴뚝같은 높은 건물 옆에 뾰족한 삼각지붕이 보이죠? 그게 제가 자던 방이었습니다. 앞의 누르끼리한 2층 건물은 교회.


숙소에서 바라본 St. Edmund Hall과 옥스포드. 앞에 촌스런 푸른색칠이 된 탑이 Queen's College. 밤에도 불을 켜 놓아서 환하답니다.


그래도 역시 사먹을 거 안 사먹고 아껴 산 것들을 나중에 떠날 때 쌓아놓고 보니 한 높이 되었다. 절대 이런 곳에서 살면 안 될 것 같다. -_-;;; 세이어즈 콜렉션을 완성했고, 딕 프랜시스의 시드 해리 3부작 합본(Odds Against, Whip Hand, Come to Grief) 을 구한 것이 기쁘다.

그 밖에, 재스퍼 포드의 후속 작품을 어느것이 [제인에어 납치사건]에 이어지는지 몰라서 못 사온 거, 한 디스카운트 서점서 팔던 최근에 완결된 모스경감 시리즈 페이퍼백 전질 12권을 묶어 무려 14.99파운드 (약 3만원. 원가는 90파운드가 넘는다) 짐의 무게 때문에 못 사온 게 10년의 한 (사실은 10년내에 다 읽을 수 있을지 몰라서 못샀다고 하는 편이 맞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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