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속살을 드러내며 살고 싶었기에 마음을 다 풀어헤치며 못가진자(프롤레타리아) 마냥 살아 왔건만 이젠 정녕 못가진자가 되려 한다. 참 많이 참았던 시절, 이젠 겨울비 내리는 광장 한복판에 마음에 여울진 상처 다 내놓고 울음 짓고 싶다. 왜 떠났냐고, 왜 물어 뜯었냐며 가슴을 할퀸자들에게 모욕스런 언사나마 몇개 던져주고선 겨울 바람을 맞이 하고 싶다. 다 비워내면 덜 아플 줄 알았는데 아직도 가슴은 심장보다 더 딱딱하다는 걸 겨울비 내리는 저 공간이 가르쳐 주려나. 마음에 빚이 있는 자들은 빚을 청구하지 않고 오히려 내게 부채가 있는 자들만 상형문자로 가득한 사금파리 하나 들고선 다 네 탓이라며 면박을 가한다. 아찔하게 다 핥아 주었건만 덜 시원했던 모냥인지, 마음껏 나를 유린하고선 군림의 쾌락을 느끼려 한다. 마음이 시리면 다 겨울 때문이라 여겼던 지난 날의 안일한 인식이 다 죽은 애비의 눈자위처럼 걱정스레 나를 누른다. 살리고 살리고 살리면 다 잊어질까 했지만 견딜 수 없는 가벼운 언어들이 끝없이 마음의 고름을 진하게 한다. 이런 무의식의 흐름 같은거.. 안좋지만 도움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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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3 0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밤바 2009-02-04 05:51   좋아요 0 | URL
아이디가 인상 깊네요. 휘모리 자진모리~~ㅎ
 

 

 

 적벽대전2는 영화 트로이에 대한 오마쥬로도 보인다. 서구인의 이해를 돕기 위해 '미녀에 의한 전쟁'이란 요소를 넣었다고 한다. 이러한 배려 덕분에 동양인은 익숙한 작품에서 낯설음을 느끼게 된다. 삼국지 애호가가 보기엔 심정적으로도 불편한 설정이다. 전쟁의 실제 이유가 한 여인 때문이라면 전장에서 죽어나갈 병사들의 시퍼런 각오가 가여워 보인다. 소교와 차를 마시느라 출병을 늦춘 조조는 그래서 공감을 사기 힘들다. 시인으로도 유명할 만큼 감성적인 조조라 하나 100만 대군의 수장으로서의 자질은 누구보다 충만하다. 하지만 미인계에 빠져 대사를 그르친 조조라면 격이 떨어진다. 여자를 탐하다 전위라는 용장을 잃은 조조다. 같은 실수를 두번 반복하는 인물이 천하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건 역사를 너무 우습게 보는거다.   

 영화 트로이에도 나왔던 거북이 등껍질 전법은 또 어떠한가. 트로이의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별동대를 가지고 이 전법을 운용했다.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최정예가 아니면 이 전법은 성공하기 힘들다. 세계 1차 대전에 처음 등장한 탱크와 같은 역할을 이 영화 속 거북이 진형은 소화해 낸다. 즉 우수한 방어력을 바탕으로 적진까지 다가가거나 적의 참호를 무력화 시킨다. 하지만 이 진법으로는 공격이 거의 불가능하다. 갖고 있는 장점이래 봤자 엄청난 방어력 뿐이다. 또한 움직일 때 마다 발맞춰 나가야 되기 때문에 기동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무거운 방패를 지고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체력적 소모가 심하고 공격으로 전환할 때 적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기도 한다. 일당백의 용사로 이뤄진 아킬레우스의 군사들이나 쓸만한 전법이다. 삼국지에서 진법의 실제 활용은 조인의 신야성 침공전에서 나타난다. 오나라는 해상전을 주축으로 주태나 손책과 같은 개인의 무용에 의지하는 전투 양상을 보여왔기에 이러한 진법은 영화를 위한 보여주기식 전법이다. 진가신 감독은 명장이란 영화에서 이러한 '장난질' 없이도 전쟁을 잘 표현했다. 지나친 상상력은 재미를 반감시키는 법이다.

 군더더기 장면 또한 너무 많다. 역병에 걸린 병사를 이용한 심리전이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떡을 나눠주는 장면, 폭약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감녕 등은 영화의 전개상 불필요하다. 이런 군더더기 씬을 줄여 1부와 2부를 한편으로 만들었다면 영화는 좀더 괜찮은 매무새를 자랑 했을테다. 박찬욱 감독의 경우 올드보이 촬영 당시 유지태의 연기에 대하여 한가지 지적을 하였다. 대사의 호흡이 느린 유지태 때문에 관객이 지루해할 수 있으므로 호흡을 빨리 가지라 하였다. 대사의 호흡에서도 관객을 배려한 박찬욱에게서 오우삼은 배워야 한다.  

 적벽대전은 기승전결에 있어서도 명쾌한 클라이막스를 내놓지 못한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데쓰 프루프라는 영화를 보자. 이 영화는 참 지루하게 흘러간다. 초반 40분이 특히 그렇다. 하지만 그러한 지루함은 영화 중간의 짧은 충돌신과 마지막 장면의 엄청난 카타르시스로 해소된다. 반전 영화와는 다르지만 좀 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묘미가 있다. 소위 '한방'이 있다는 거다. 사람들은 적벽대전을 보면서 이 한방을 기다렸을 테다. 나 또한 그 한방이 언제 터지나 궁금해 하며 계속 영화를 봤다. 올리버 스톤 감독의 알렉산더처럼 매의 눈으로 바라본 전장의 그림과 같은 참신한 영상이 터지길 기대했다. 물론 오우삼도 한방 터뜨리긴 했다. 불발탄이지만서도. 인물 중심의 전쟁신 전개는 전쟁의 전체 맥락을 파악하기 힘들게 했다. 전쟁의 비장함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도 눈에 거슬렸다. 또한 적벽대전은 해전을 중심으로한 전투가 주를 이룰거라 생각했는데 지상전이 중심이 되면서 클리셰한 느낌도 주었다. 지상에서 일어나는 회전은 영화에서 많이 다루지 않았는가. 

 또 한가지 이해가 안되는 장면은 손사향과 조조군 병사의 우정이다. 솔직히 그건 우정이 아니고 사랑으로 보아도 무방해 보였다. 결국 그 병사는 호모섹슈얼이란 느낌을 주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갓 알게된 사내를 무등태워주며 속없이 챙겨주기만 할 리 없다. 그 병사가 마음 좋은 사람이라 치부하며 애써 넘겨보려 했으나 남자가 남자를 무등태워준다는 건 내 편협한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본다면 숫제 이해하기 힘들다. 무엇보다 그러한 관계에 대한 묘사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 이건 전쟁의 유해함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손사향의 안타까운 사랑에 대한 묘사도 아니다. 다만 관객에게 잔재미를 주기위한 설정인 듯 한데, 전혀 재미 없었다. 

 물론 소설이나 만화를 영화로 만든다는 건 어렵다. 그러한 점을 십분 이해한다 하더라도 오우삼의 적벽대전은 지나쳤다. 원작을 영화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원작 마니아들의 불만은 종종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우삼의 영화는 꽤나 중요한 에피소드를 제 맘대로 윤색하거나 무난히 넘겼기에 더 많은 질타를 받은 듯하다. 특히 계략을 쓰는 부분이 눈에 거슬렸다. 주유가 조조로 하여금 채모와 장윤의 목을 베게끔 책략을 구사하는 장면은 연의와 조금 다르다. 원전을 새롭게 해석하는 것으로 좋게 보아 넘길수도 있었으나 이 부분이 전혀 납득 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영화는 주유가 채모의 배신이 담긴 밀서를 적의 밀사로 보이는 장간에게 들키게 한다. 이 상황에서 주유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장간을 죽이는 것이다. 전시라는걸 감안하고 사안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것이다. 헌데 주유는 어쭙잖은 농담으로 넘어가려 한다. 군사기밀보다 친구가 중요해서 그랬다고 봐야 하나. 아니다. 이건 당연히 조조에게 계략을 거는 것이다. 조금만 생각을 하면 알 수 있다. 근데 조조가 넘어갔다. 연의에서는 이 부분에 꽤나 많은 공을 들인다. 반간계라는 것이 그만큼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근데 주유는 이러한 허술한 책략으로 채모와 장윤의 목숨을 앗아버린다. 희대의 두 영웅의 품격을 급격히 떨어뜨린 사례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제갈량이 화살을 얻어가는 장면 또한 안개가 끼였다곤 하나 낮장면이었기에 쉬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시계가 아무리 짧다 하나 제갈량이 무모하게 낮에 화살을 받으러 갈리는 없다고 본다. 연의는 이것을 밤이라 묘사한다. 짙은 안개가 있다 하나 제갈량에겐 낮보다 밤이 더 좋은 시간 때일 테다. 밤 촬영이 어려워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낮으로 설정한 이유가 궁금하다. 또 한가지 짚고 가야할 것이 채모와 장윤이 쏜 화살의 개수다. 둘은 10만개 정도의 화살을 쏜 것 같다고 영화에서 말한다. 여기서 오류가 발생한다. 조조군이 쏜 화살 중 제갈량이 온전히 실어갈 수 있는 양은 그 절반이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수의 화살이 배를 맞추지 못하고 바다에 빠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10만개의 화살을 얻었으니 조조군은 20만 개는 족히 넘는 화살을 쏘았을 테다. 하지만 영화에선 10만개를 쏜 것 같다고 한다. 좀 더 디테일한 부분에 신경쓸 수 없었는지 의문이다. 물론 번역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 번역자인 홍주희씨에 대해서 알아 봤더니 '엘리자베스'란 영화로 악명이 자자하더이다.  
 

  왕자웨이나 이안 감독이 적벽대전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이모우는 '영웅'이란 작품에서 특유의 유장함을 통해 지루한 면모를 보여줬기에 열외로 뒀다. 왕자웨이라면 감각적인 영상으로 영상시를 쓰지 않았을까. 서사 또한 짐작이 간다. 적벽의 불길을 더욱 인상깊게 보이기 위해 전반부의 상영시간은 인물의 고민을 시각적으로 설명하는데 썼을 테다. 왕자웨이가 그려내는 적벽의 불꽃은 전쟁영화 사상 가장 아름다운 불길로 표현될 것이다. 이안 감독이였다면 꾸준히 타오르는 적벽의 불길로만 세시간의 영화를 만들었을 것 같다. 회상씬을 위주로 하여 칼이 오가는 전장을 하나의 호흡으로 그려내지 않았을까. 주유와 제갈량의 어릴적 트라우마도 곁들여 졌을 테다. 전쟁 자체에만 집중하여 세시간을 그려낼 수 있는 내공. 이안이면 가능하다. 오우삼도 세시간 정도로 적벽대전을 그릴 수 있었을 터이다. 제작사의 농간인지 오우삼의 편집능력 부족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5시간에 가까운 적벽대전은 오우삼에겐 적벽처럼 불태우고 싶은 기억으로 남지 않을런지. 오우삼의 분발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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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 있는 나의 서재는 참 외롭다. 옆에는 푸우도 있고 피글렛도 있고 티거도 있지만 내 서재는 언제나 고적하다. 한때는 푸우와 같은 한없이 나른한 일상을 꿈꿨지만 막상 나른해지고 나니 조급증이 생긴다. 역시 푸우는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인물이었던 것이였던 것이다. 뭐 곰돌이라 인격을 부여하는게 좀 그렇긴 하지만 푸우는 인간을 넘어선 자연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푸우와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 푸우의 배를 퉁퉁 두들기며 푸우가 선사하는 그 어눌한 옛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푸우~ 곰돌이 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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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콤플렉스 - 노무현 현상의 축복과 저주
강준만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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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고조 유방이 천하를 얻었을 때 유학자인 육가는 유방에게 유학을 권한다. 유방은 자신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며 유학은 필요없다며 육가에게 면박을 준다. 이 때 육가 답한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한들,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후 유방은 유학을 존중하게 되고 후에 유교가 한나라의 기본 이데올로기가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노무현은 아웃사이더 콤플렉스로 천하를 얻었다. 다만 아웃사이더 콤플렉스로 천하를 다스리려 하다보니 민심의 이반을 낳았고 결국 실패한 지도자로 불리우게 된다. 뭐.. 이명박 대통령이 워낙 삽질을 하는 바람에 반사광을 얻고 있긴 하지만 노무현은 참 문제가 많았던 대통령이다. 오죽하면 우파에서 보낸 '트로이 목마'라는 소릴 들었을까. 덕분에 좌파진영만 멸망의 위기에 빠진게 아니라 한국 사회전체가 위기에 빠지게 생겼지만. 

 강준만의 글쓰기는 집요하다. 문사로서의 책임감과 자존심이 강한 이 시대의 저술가는 치밀하게 노무현을 비판한다. 반론에 대한 반론이 끝없이 이어지는 강준만식 끈기는 그의 엄청난 저술량의 밑바탕엔 노무현과는 다른 일종의 콤플렉스가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지방에서 글 잘 쓰고 계신 훌륭한 학자에게 하는 말 치곤 참 몹쓸 말인 듯하다.) 

 인터뷰 열심히 하기로 소문난 지승호는 존경하는 지식인으로 강준만 교수를 꼽은 적이 있다. 나 또한 강준만 교수의 책을 많이 읽었고 그의 생각에 많은 지지를 보낸다. 다만 이 책은 강준만 교수의 변명 내지는 자기주장복제가 좀 과한 듯하다. 왠지 장정일씨의 글씨기도 조금 연상케 한 듯. 그러나 강준만 교수가 지적한 '아웃사이더 콤플렉스'는 명쾌하다. 하나의 프레임으로 한권의 책을 써낸 강준만 교수의 필력은 진짜 놀랍다. 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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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바흐 :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
Decca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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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드롱의 연주는 미끈하다. 지나치게 엄숙하지도 않고 너무 많은 고민이 담겨있지도 않다. 춤곡의 형태로 이루어진 곡이기에 바흐가 들어도 흐뭇해할만큼 매력적인 가벼움도 보인다. 카잘스의 연주에 비해 깊이가 없다는 말도 있지만 이 음반 나름의 장점 또한 가득하다. 귀에 착 감기는 첼로 선율은 지루할 틈을 주지 않으며 나쁘지 않은 음질 또한 맘에 든다.  

 흔히들 푸르니에는 귀족스럽고 카잘스는 깊이가 있으며 로스트로포비치는 장중한 느낌을 준다 한다. 이에 반해 쌔끈함 음의 요요마나 부드러운 선율의 장드롱은 폄하당하는 느낌이 든다. 시대의 흐름과 함께 연주 실력도 진보하는 것이 일반적이거늘 정신의 깊이를 운운하며 요즘 연주자들을 폄하하는 건 클래식을 처음 듣는 신참자에게 높은 진입장벽을 쌓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모리스 장드롱은 오래된 첼리스트이긴 하지만 서도. 

 로스트로포비치 또한 60세가 넘어서야 이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 녹음에 도전하여 이러한 무거움의 신화에 일조를 하였다. 기실 음악이란건 형이상학적이다. 즉 불립문자(不立文字)와 같은 것이기에 곡의 이해를 위해선 인간의 이성을 넘어선 감성이나 직관에 의지해야 한다. 가슴을 울리는 무언가를 주지 못한다면 가요와 클래식의 내공 차이는 혹자에겐 거의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깊이를 이야기 하기 전에 청중의 귀에 얼마나 잘 다가가느냐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깊이에 대한 부질없는 논쟁만큼 클래식 마니아들의 단결심을 강화시킨 것은 없다고 본다. 클래식이 점점 배부른 사람들의 취미가 되어가는 데엔 음악적 깊이에 대한 과잉 신앙이 작용한 것이 아닐까. '모든 예술은 음악의 형태를 동경한다'고 김문경씨가 진회숙씨의 책에 추천사를 날리고, 공자 또한 지고지순한 음으로 예(禮)를 세운다 하였 듯 고귀한 음악은 고귀한 것이다. 다만 '구별짓기' 행위가 음악적 깊이 논쟁에 엿보이는 듯 하여 말을 길게 늘여 썼을 따름이다. 

 끝으로 한마디 하자면, 장드롱의 연주는 깊이는 모르겠으나 미끈한 울림으로 많은 아름다움을 안겨준다. 정신의 깊이를 운운하기엔 너무나 각박한 시절에 춤곡으로 이루어진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을 들으며 마음의 짐을 좀 가벼이 하는 건 어떨까. 기실 이 음반 보다 요요마의 음반이 춤곡에 더 가깝다고들 한다. 그래도 장드롱의 음반으로 스텝을 밟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불립문자'인 음악은 들려주는 사람의 의도도 중요하지만 듣는 사람의 해석이 더욱 중요하기에, 장드롱의 연주로도 흔쾌히 몸을 달아오르게 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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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1-30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첼로하시는 분께 문의하니 카잘스는 각활을 사용하는 것 같다고 말을 하시더라구요. 때문이지 그의 연주는 종종 거친 느낌이 듭니다. 물론 어설픈 거침이 아닌 쌓이고 쌓여, 마치 먼 곳에서 보았을 때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그런 거침이겠죠. 저는 로스트로포비치, 카잘스의 무게보다는 건강하게 느껴지는 하인리히 쉬프의 연주를 즐겨 듣는데요.

프랑스 연주자들의 느낌은 뭐랄까..활발하고 섬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각난김에 다시 한번 들어봐야겠네요~^^

바밤바 2009-01-31 06:57   좋아요 0 | URL
가슴에 무언가가 켜켜이 쌓이면 활로 말을 할 수도 눈물을 흘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카잘스가 쓴 에세이를 보면 참 좋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다만 카잘스의 첼로 조곡을 너무 신격화 하는 분위기는 사람 좋아보이던 카잘스가 조금은 부담스러워할 부분이라 봐요.
프랑스 연주자들 좋죠. 국가라는 하드웨어가 연주라는 소프트웨어에 미치는 영향이 작지 않다고 봤을 때 프랑스 연주자들의 개성은 언제나 좋아보입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