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공감 - 김형경 심리 치유 에세이
김형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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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글 쓰신 분도 많이 힘드셨을 테다. 많이 아팠으니까 남이 아픈 걸 알고 많이 울었으니까 남의 눈물 닦아 줄 수도 있었을 테다. 나도 한 때 신경증에 걸려 아팠다. 하지만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 덜 아픈 방법을 알았고 아직도 계속 좋아지는 중이다. 무엇이 날 그렇게 아프게 했는 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더 아팠고 또 많이 한숨 지었다.    

 엊그젠 노트북이 아팠다. 컴맹인 나는 어찌할 줄 몰라 당장 컴퓨터를 잘하는 친구에게 전화했다. 일을 직시하지 못하고 타인에게 다시금 의존하는 일이었다. 친구는 자기가 근처에 없으니 간략한 처방만 알려주고 끊었다. 괜찮을거란 말과 함께. 하지만 컴퓨터는 부팅도 되지 않고 계속해서 껌벅 거렸다. 난 누가 내 노트북에 해꼬지를 하지 않았나 하며 용의자를 물색했다. 공동 공간에 놔둔 컴퓨터인데다 최근 미운소리를 한 지인이 있었으니 왠지 누군가 일부러 그리한게 아닌가 여겼다.  

 네이버에 이것저것 물어보며 여차저차해서 노트북에 응급조치를 했다.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냐며 복없는 인생을 탓했다. 그리고선 왜 그리 남을 의심하며 좁은 속내로 세상을 재단했는가 하며 스스로를 원망했다. 그야말로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결국 노트북을 포맷할 지경에 이르렀다. 왜 나는 주요 자료를 따로 보관하지 않았나 하며 다시금 내 마음에 마음으로 생채기를 냈다. 박약한 자아는 눈물을 보일만큼 아픈 노트북을 못견뎌 했다. 하지만 해야 할 과제가 많았기에 하나하나 인터넷에 물어봐가며 그나마 인터넷은 되게끔 했다. 왠지 모르게 화가 났다. 스스로를 통제하고 억압하면서 '그들'이 원하는 선량하고 이타적인 모습만을 겉으로 드러내며 내면에서 감지되는 부정적 모습은 외면해 온 것이 화병이 된 듯하다. '화를 내고 이기적이고 부끄러운' 내 모습을 사랑했어야 했다. '내가 나인 것이 좋다'고 외치며 살았어야 했다. 부당한 요구를 정당하게 거절하고 타인의 무례한 태도로 부터 나를 지키고 고통스런 관계 속에 나를 방치하지 말았어야 했다. 내면의 부정적인 영역을 억압했던 에너지를 창조적인 쪽으로 전환 해 몸과 마음이 더욱 활기차게 했어야 했다. 고든 올포트가 이야기한 "확고한 자기 개념과 자기 정체감을 갖고 자존감을 느끼고 개방적이고 무조건적이 사랑을 주며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고 삶의 의미와 방향감을 주는 목표를 가졌어야 했다. 그리고선 분노해도 괜찮다는 단계에 도달해야 한다. 화를 내도 사랑이 거두어지지 않고, 분노해도 생존을 위협받지 않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한 개인으로서 존엄하다는 내면의 자신감을 회복해야 했다. '좋은 사람'이란 내 이미지를 포기해야 했다.  

 몇 달 동안 공부해 놨던 자료들이나 좋아하던 음악들이 다 이름 모를 공간 속에 잠들어 버렸단 사실에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컴터가 되는게 어디냐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내가 가진 포도의 장점을 발견하고 비롯 그것이 시다고 해도 긍정적으로 대하기로 했다. 하지만 중간중간 컴퓨터 관련 모르는 일이 있었을 때 주위에 있던 후배에게 물어보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었다. 친분이 두텁지 않으면 모르는 걸 물어보는 걸 부끄러워 하는 작은 자아가 마뜩찮았다. 김형경 씨의 해석에 따르면 후배에게 부탁하는 일에서 조차 내면에서 복종의 감정과 거세 불안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가 탈권위주의 적이었고 자유로운 유년을 보내도록 하셨기 때문에 정상적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겪지 않았기 때문이라 해석된다. 또한 공익을 다녀와 정상적인 군 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리적 성장을 이루지 못하고 깨지지 않은 나르시시즘이 이 문제와 연관이 돼 있는 것 같다. 김형경 씨에 따르면 고대 사회에 존재했던 혹독한 성인 식은 유아적 세계관을 총체적으로 넘어서게 하는 관문이었다. 여성들 또한 결혼 생활과 시집살이를 통해 극기를 경험하며 내가 극복한 또 다른 나를 맞이하게 된다.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은 반복적으로 자신을 세상에 맞추어나가는 일이란 말이 있듯 나 또한 병리적 나르시시즘에 조금은 길들여져 있던 것 같다. 오이디푸스 단계를 넘어 선다는 것은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상징되는 사회적 법과 질서에 복종한다는 뜻이다. 공동체의 언어를 습득하고 그 사회에 수용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간다는 의미이며 자신의 욕망을 사회적으로 안전하게 성취할 수 있는 은유와 상징의 역량을 획듯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내게 필요한 건 자신의 경험을 의식화하고, 문제점과 해결책을 내부에서 찾아내고 그것을 현실에서 반복해서 실천함으로써 체화하는 과정인 것이다. 나만이 '옳고 선하고 정당하다'는 관념에 갇혀 있으면 외부의 지혜나 새로운 가치를 받아 들이지 못한다.   

 후배에게 물어보는 일을 주저한 이유 중 하나는 후배를 불편하게 하면 어쩌지라는 불안도 있었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약간 히스테리적이었던 어머니와의 기억으로 해석 가능하다. 엄마의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하던 유아적 태도를 그대로 간직한 채 주변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 지 신경을 썼던 듯하다. 또한 거절을 잘 못하는 이유도 찾을 수 있었다. 어른의 세상은 착하고 말 잘 들으면 절로 사랑과 보호가 주어지던 가족 공동체가 아니다. 결국 공격적인 상대방과는 불편한 감정을 갖기에 앞서 그들과 어떻게 적절한 관계를 맺으면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지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공격적 상대와 승-승 형태로 관계개선이 되지 않는다면 소극적이고 자기 보호적인 형태로 관계를 전환하거나 무거래의 법칙을 선택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무거래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가장 높은 수준의 노력, 용기, 주의가 필요하다. 물론 가족과 같은 관계에서는 사랑이 분노보다 강하다는 믿음으로 승-승 상태로 관계 개선을 해야 한다. 인간의 욕망과 관계 맺기의 본질을 분명하게 인식하여 부당한 요청을 받았을 때 사랑받지 못할까봐, 혹은 상대를 배려해서 우물쭈물 회피하지 않고 정중하게 거절할 수 있다. 물론 그 자리에서 거절하는게 낫다. 거절할 때는 상대의 자기애를 배려하며 중립적이고 완곡한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 타인이 아닌 자신의 이익과 생의 성취감을 맛보기 위해 일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결국 우리 삶이란 다른 욕구들이 충돌하는 현장, 이익들이 대립하는 마당으로 이런 갈등과 대립을 해결하는 과정이다.  

-남성은 거세 위협 때문에 권위적인 대상에 복종하는 일이 힘들고, 여성은 거세되어 있다는 느낌 때문에 남근 선망을 비롯한 시기심에 취약하다. 그리하여 남성은 종교를 갖는 일조차 어려워하고, 여성은 쉽게 쇼핑 중독에 노출된다.- 

 노트북에 한글과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를 까는 도중 기존의 하드가 다른 하드에 복구돼 있음을 알았다. 다시금 마음에 햇살이 비쳤다. 컴퓨터 관련 일엔 항상 두려움을 가지고 타인에게 의지하는 편이었지만 내 손으로 일이 잘 마무리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노트북 수리와 관련해서 이 책에서 느꼈던 소소하면서 큰 깨달음을 연계시켜 보았다. 결국 이 책은 내게 보석 같은 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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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붙잡는 사람들의 1% 비밀
신현만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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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서두는 신선하다. 젠체하기 좋아하는 '평론가'형을 회사가 싫어한다는 말은 자뭇 관심이 간다. CEO나 임원의 눈에 자주 띄도록 하라든지 영업을 중시하라는 말은 매우 그럴싸 하게 들린다. 특히 속한 조직의 브랜드를 잘 활용하라는 말이 가장 눈에 띈다.

다만 조직에 충성하라며 과장 때부터 새출발을 준비하라든지 학벌을 벗어나라는 말을 하면서도 학벌과 관련된 브랜드나 인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서는 말이 명쾌하지 않고 의미 상 충돌이 일어나는 듯하다. 이뿐만 아니라 뒤로 갈수록 다소간 뻔한 이야기가 나와 흥미가 떨어졌다.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도 눈에 거슬렸다. 의존 명사 '뿐'은 앞에 수식 어구가 오지 않으면 쓸 수 없고 조사 '뿐'도 체언이나 부사어 뒤에 붙기 때문에 문두에서 '뿐만 아니라' 형태로 쓰일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뿐만 아니라'로 시작되는 문구가 많아 눈에 거슬렸다. 저자가 전직 기자 출신이란 것을 감안하면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다. 이외에도 '방증(傍證)'이라고 써야 할 부분에 '반증'이란 단어를 쓰거나 일본어 표기로 알려져 있는 '다름 아니다'라는 표현도 눈에 띄였다. 좀 더 세밀한 글쓰기가 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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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만에 FM 93.1을 듣는다. 묘하게도 내가 즐겨 듣는 연주자의 곡이 자주 들린다. 랜덤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라디오의 장점이 익숙한 음악으로 빛이 바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진행자는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 소나타 연주를 들려준다 한다. 아르페지오란 악기가 실제 사용된 연주는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다니엘 샤프란의 연주만 아니길 바란다. 하지만 진행자의 입에서 나온 연주는 ‘제발 그것만은..’이다.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의 첼로와 벤자민 브리튼의 피아노 연주입니다.‘ 워낙 자주 들었던 연주이기에 클리셰하다 못해 지겹기까지 하다. 다만 시디와 달리 지직거리는 잔향이 더해져 나름의 아취를 풍긴다. 그런대로 좋다.

 하지만 브람스 교향곡 4번 1악장이 나오자 자위하던 마음이 다시금 요동친다. 그 유명한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빈필. 브람스 4번의 가장 유명한 연주를 라디오에서 들려주는 건 피디의 무감해진 감성의 방증이 아닐까. 좀 덜 유명한 지휘자의 연주가 좋지 아니한가. 반면 앞서 나왔던 게자 안다의 쇼팽 왈츠는 여태껏 들어 왔던 빠른 왈츠와 달리 기품이 있어 좋았다. 모리스 라벨이 직접 지휘한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은 역사적 연주라 남다른 느낌이었다.

 유명 연주자의 곡을 자주 틀어주는 것. 이런 것도 경로 의존성이라 해야 되나. 클래식 음악계에서 종종 말하는 절대 명반의 레퍼토리가 정해져 있다 보니 피디도 별 생각 없이 어느 곡엔 어느 연주 하고 내놓는 건 아닐까. 난 돈이 없어서 구하지 못한 존 엘리엇 가드너의 베토벤 교향곡이 듣고 싶다. 전곡으로. 특히 9번으로. 만날 말하는 빌헤름 푸르트뱅글러나 헤르버트 폰 카라얀 말고.

 시디가 튀어 별 생각 없이 틀었던 라디오다. 카라얀 에디션에 있던 합창 교향곡을 다 듣고선 그의 운명이 그리워 시디를 옮기다 일어난 일이다. 괜히 까칠해질 필요 없다. 피디의 선곡에 이리저리 토를 다는 건 익숙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새것에 대한 강박 때문이다. 지금은 홀스트의 행성이 나온다. MBC 뉴스 데스크 메인 테마곡으로 사용됐던 곡인데 아마도 4번째 곡인 목성인 듯하다. 홀스트의 연주는 제임스 레바인과 시카고 심포니 곡으로 자주 들었지만 어느 곡이 어떤 명칭으로 불리는지 몰라 누군가에게 쉬이 말할 입장은 안 된다.

 엘가의 사랑의 인사가 들린다. 언제 들어도 좋은 곡이다. 붓이 가는 대로 쓰여서 수필이라 했던가. 난 음악이 가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아침의 공기는 맑다. 오늘은 소홀했던 인연들에 전화 한 통씩 해야겠다. 라디오가 끝나니 글이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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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5-06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이니..명연주 명음반은 아니겠죠? 최근 늦은 밤 라디오를 켰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뭔가 잘못 한 줄 알았는데요. 봄 개편으로 많이 바뀌었더라구요.

바뀐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청취자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는 의도는 좋지만, 뭔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묻고 싶더군요.
이런. 다른 분의 블로그에 와서 푸념만 늘어놓네요~ ㅎ

베토벤의 디아벨리 변주곡, 후기 현악사중주를 들으며 글 남깁니다. 그래서인지 말줄임표를 마구 쓰고 싶은.. 욕구가 일어납니다..^^

좋은 밤 되세요~

바밤바 2009-05-06 01:40   좋아요 0 | URL
좋은 곡 들으시네요. 전 지금 엠피 스리에 있는 가요 듣고 있어요. 명연주 명음반 자주 들었던 거 같은데.. 진행자가 바꼈군요. ㅠ
 
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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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훈은 소설로 스스로를 말한다. 남의 이야기도 온전히 남이 되지 못하고 자신이 되어 속내를 말한다. 부끄러울 만도 한 늙음의 추잡함과 주책스런 이야기도 남의 몸을 빌려 읊어준다. 그의 단편 '화장'을 읽고선 마음이 무겁게 가라 앉았으며 '배웅'을 읽고 삶의 애틋함에 몸서리를 쳤다. 어느 글 하나 사사롭지 않은 것이 없고 어느 말 하나 웅숭깊지 않은 것이 없다. 그의 글을 읽는 것 만으로도 실로 복되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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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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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사소한 인연의 누적분이다. 인생이란 자잘한 선택의 누적분이란 김어준의 말을 흉내내 봤다. 김연수는 앞서 이야기한 아포리즘을 한 편의 책으로 이야기 한다. 내가 너와 닮지는 않았지만 내가 너를 이해할 수 있다는 건 우연이 아니다. 다만 자잘한 인연 속에 너와 교집합이 될 만한 추억이 있어서다.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더라도 크고 작던 간 언제나 존재하는 교집합을 우리는 '공감'이라 한다. 그런 공감할 수 있는 부분, 그럼 공감을 이끌어 내는 힘, 이러한 것들이 김연수 글의 매력이다.   

 성실함 또한 모두가 칭찬해 마지 않는 김연수의 매력이다. 인도의 수상이었던 네루가 자신의 딸에게 했던 말, 마르코니가 친 최초의 무선을 이야기한 뉴욕 타임스에 대한 부분은 김연수의 성실함을 이야기 한다. 그의 단편 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에도 나오는 성실함이 이 책에서도 빛을 발한다. 이야기는 언뜻 산만해 보이고 구성은 정교하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완결된 소설이 됐다는 건 해픈 구성 뒤에 숨겨진 치밀한 계산을 이야기 해준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내가 누구든 얼마나 아프든 간에 우리는 다 자잘한 고독과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김연수가 이야기 하는 조금 더 특별한 사람의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공감할 거리를 찾는다. 네 아픔은 아픔이 아니란 말을 쉬이 내던지는 메마른 감성의 소유자는 필히 읽어야 할 책이다. 타인의 사소한 아픔도 공감하게 하는 김연수의 글은 메마른 감성에 촉촉한 수분보습을 해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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