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FM 93.1을 듣는다. 묘하게도 내가 즐겨 듣는 연주자의 곡이 자주 들린다. 랜덤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라디오의 장점이 익숙한 음악으로 빛이 바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진행자는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 소나타 연주를 들려준다 한다. 아르페지오란 악기가 실제 사용된 연주는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다니엘 샤프란의 연주만 아니길 바란다. 하지만 진행자의 입에서 나온 연주는 ‘제발 그것만은..’이다.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의 첼로와 벤자민 브리튼의 피아노 연주입니다.‘ 워낙 자주 들었던 연주이기에 클리셰하다 못해 지겹기까지 하다. 다만 시디와 달리 지직거리는 잔향이 더해져 나름의 아취를 풍긴다. 그런대로 좋다.
하지만 브람스 교향곡 4번 1악장이 나오자 자위하던 마음이 다시금 요동친다. 그 유명한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빈필. 브람스 4번의 가장 유명한 연주를 라디오에서 들려주는 건 피디의 무감해진 감성의 방증이 아닐까. 좀 덜 유명한 지휘자의 연주가 좋지 아니한가. 반면 앞서 나왔던 게자 안다의 쇼팽 왈츠는 여태껏 들어 왔던 빠른 왈츠와 달리 기품이 있어 좋았다. 모리스 라벨이 직접 지휘한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은 역사적 연주라 남다른 느낌이었다.
유명 연주자의 곡을 자주 틀어주는 것. 이런 것도 경로 의존성이라 해야 되나. 클래식 음악계에서 종종 말하는 절대 명반의 레퍼토리가 정해져 있다 보니 피디도 별 생각 없이 어느 곡엔 어느 연주 하고 내놓는 건 아닐까. 난 돈이 없어서 구하지 못한 존 엘리엇 가드너의 베토벤 교향곡이 듣고 싶다. 전곡으로. 특히 9번으로. 만날 말하는 빌헤름 푸르트뱅글러나 헤르버트 폰 카라얀 말고.
시디가 튀어 별 생각 없이 틀었던 라디오다. 카라얀 에디션에 있던 합창 교향곡을 다 듣고선 그의 운명이 그리워 시디를 옮기다 일어난 일이다. 괜히 까칠해질 필요 없다. 피디의 선곡에 이리저리 토를 다는 건 익숙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새것에 대한 강박 때문이다. 지금은 홀스트의 행성이 나온다. MBC 뉴스 데스크 메인 테마곡으로 사용됐던 곡인데 아마도 4번째 곡인 목성인 듯하다. 홀스트의 연주는 제임스 레바인과 시카고 심포니 곡으로 자주 들었지만 어느 곡이 어떤 명칭으로 불리는지 몰라 누군가에게 쉬이 말할 입장은 안 된다.
엘가의 사랑의 인사가 들린다. 언제 들어도 좋은 곡이다. 붓이 가는 대로 쓰여서 수필이라 했던가. 난 음악이 가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아침의 공기는 맑다. 오늘은 소홀했던 인연들에 전화 한 통씩 해야겠다. 라디오가 끝나니 글이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