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에 학교를 갔다. 친구가 책을 빌린다 그래서 따라 간 거였다. 헌데 도서관에 들어갈 수 없었다. 졸업생이라 그렇단다. 졸업생은 따로 서식을 작성해서 허가를 받아야 한단다. 그러고 나서 6개월간 출입이 가능하단다. 순간 짜증이 났다. 여태껏 등록금 낸 게 얼만데 이런 푸대접을 받냐며 학교를 욕했다. 기분이 상해 도서관에 들어가지 않고 나왔다.

 솔직히 서식을 기입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다만 그러므로 해서 졸업생들은 크나큰 진입장벽을 느끼게 된다는 게 문제다. 경제학적으로 보자. 서식 기입은 비용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글 몇 개 적는 것이기에 비용이 크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서식 기입에는 심리적 비용이 개입돼 있다. 여태껏 자유로이 사용했던 시설물을 이제는 허락을 맡아야 사용할 수 있다는 비용 말이다. 이게 학생 모두가 마주치는 진입장벽이면 괜찮다. 하지만 졸업생들만 맞닥트린다는 게 문제다. 즉 학교로부터 외부인 취급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서식을 기입하면서 발생하는 심리적 스트레스도 고려해야 한다. 학교에서 보이는 선배들 대부분은 취업을 못해서다. 헌데 그 서식을 작성하다보면 학교에도 폐를 끼친다는 열패감이 들 수밖에 없다. 자연히 학교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진다. 그 굴욕감 때문에라도 도서관 출입을 꺼려하게 된다.

 학교 측에선 별 문제가 없다고 할 테다. 시설 활용을 원하는 졸업생은 간단한 서식만 기입하면 되기 때문에 문제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건 학교 시설을 활용하는 대다수인 재학생들이 보기에도 그럴싸해 보인다. 물론 이러한 진입장벽을 설치한 사람은 서식 작성의 심리적 비용이 크다는 것을 알았을 테다. ‘넛지’라는 책을 읽어봤을 지도 모른다.

 다만 이 넛지의 비용이 편익보다 크다는 생각을 학교 측은 해야 한다. 우선 이런 취급을 당하게 된 졸업생은 학교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된다. 후에 모교에 대한 기부금 같은 물리적 지원이나 동창회 활동 등에 소극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다. 재학생들도 졸업 학기가 되면 졸업생들의 이런 고충에 십분 동감할 테다. 결국 학교는 학생을 등록금을 내는 고객으로만 보고 돈을 내지 않으면 방기한다는 이미지가 축적된다. 이러한 부정적 이미지는 차후 우리 학교를 지원하려는 인재들에게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대학이란 집단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대학은 기업인가? 아니면 국가와 같은 기관인가? 우선 대학을 기업이라 하기엔 다른 점이 너무 많다. 기업은 이윤 창출이 목표다. 하지만 대학은 등록금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려는 기업으로 보긴 힘들다. 물론 대학을 기업처럼 운용하는 몇몇 모리배들이 있지만 그들은 사회적 비판을 받는다. 삼성이나 현대와 같이 대기업이 재단인 경우 해당 대학의 이미지 제고가 기업 이미지 제고와 연계된다는 이점은 있다. 그래도 정부의 보조와 감시를 받는 대학의 운영과 교육이란 영역의 특성을 살펴볼 때 대학은 기업과 분명 다르다.

 오히려 입헌 군주제 국가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대학생들은 자신의 대표를 투표로 선출한다. 이 대표는 군주와 비슷한 총장이나 이사장과 독대하고 학생들의 의견을 관철시키려 노력한다. 대학생들은 등록금이란 세금을 내고 신분의 안정과 수업이라는 혜택을 받는다. 관료에 대한 불만이 있으면 국민의 소요가 발생하듯 교수에 대한 불만이 있으면 학생들의 소요가 생긴다. 교내 학보사와 같은 언론 기관은 학생의 소리를 모으고 학교 측의 전횡을 고발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다 대학은 하나의 왕국이다.

 헌데 이 왕국은 이중 권력 체제다. 총장이 대표인 듯 하지만 실질 권력자는 이사장이다. 이사장이 학교의 이념을 결정지으면 총장은 이것을 시행한다. 다만 학생회와 총장의 관계가 약간의 변수로 작용한다. 학생회는 총장의 전횡을 막는 역할을 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의 학생회는 총장의 말을 잘 따르는 경향이 강하다. 운동권에 대한 대다수 학생의 혐오와 친 총장 성향의 학생회 선본의 물량 공세가 어용 학생회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한 때 각 학교에선 학과 통폐합 논란이 있었다. 이에 해당하는 학과생들은 격렬히 저항했다. 하지만 이사장의 방침은 효율적 대학 운영이다. 이런 비효율은 용납할 수 없다. 학과생들의 저항은 학생의 본분을 망각한 처신이고 타 학생의 수업권을 침해한 불법행위다. 어르고 달래다 안 되면 학교법에 의거해 처분한다고 밝힌다. 학생이 어찌할 수 없는 법을 만들고 따르라 하니 소요는 심해진다. 결국 이들 중 몇 명은 제적당하고 다수는 다른 학과로 편입된다. 이 때 학보사 기자들은 어용 기자가 되어 시위 학생들의 부당함을 논박하고 과 이기주의로 매도한다. 왜냐하면 학보사를 꾸리는 돈은 학생회와 학교 측이 제공하기에 그렇다.

 결국 대학은 입헌 군주제와 비슷하지만 이중권력 체제가 형성돼 있고 체제의 운용은 독재 국가와 비슷한 양태를 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시스템을 겪은 대학생이 우경화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또한 효율과 경쟁을 최고 목표로 삼는 대학에서 낙오자에 대한 배려를 기대하는 건 사치다. 수능 점수 높은 학생을 받고 고시 합격률을 높이는 게 최대 목표다. 재단 이사장이 원하는 바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그러고 보면 대학은 파시스트 집단과도 유사하다. 내부 모순을 해결하기 보단 경쟁 대학에게 이겨야 된다. 새로운 건물이 올라가면 그로 인해 피해를 본 집단에 대한 죄책감은 가뭇없이 사라진다. 다수가 지도자의 통치 이념에 동조하고 불만을 표하는 소수는 낙오자가 되는 현실은 파시스트 국가들의 과거와 유사하다.

 위의 도서관 문제만 해도 그렇다. 대학이 일반적인 국가라면 도서관 증축을 하라는 학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입헌 군주국을 가장한 이사장 독재의 파시스트 집단인 대학은 ‘넛지’를 통해 부족한 학습 공간을 늘렸고 사회적 낙오자들을 몰아냈다. 이런 부당함을 탓하는 이야기는 인터넷 게시판에나 나오고 공론화 되지 않는다. 윌터 리프만이 이야기 한 것을 조금 틀어 이야기 하자면 ‘요즘 학생들은 바쁘고 세상은 빠르게 변해 학생들은 이런 일에 무관심하다. 결국 저널리즘을 강화하는 게 학내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이다.’고 할 수 있다. 저널리스트가 돼서 이런 부당함을 논박하고 싶다는 생각이 아로새겨진다.

 난 결국 내일 도서관에 가서 서식을 기입하고 출입을 윤허해 달라는 신청을 할 것이다. 도서관에는 내가 보고 싶은 자료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진입 장벽의 부당함에 화나고 자본에 종속된 학사행정에 분노해도 나는 하찮은 1인일뿐이다. 밀란 쿤델라가 말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이런 상황에 가장 적절한 표현인 듯하다. 좀 덜 구접스러울 때 학교를 떠나야겠다. 카프카의 소설에서 마냥 미물로 변해 모두의 버림을 받기 전에 말이다.

 첨언: 대학 시절 추억이 점점 메말라가는 추세는 이러한 파시즘에 대한 염증을 다들 가지고 있어서일 테다. 사회의 거대구조를 논하기 전에 대학이란 시스템의 모순도 직시하지 못하는 20대는 가련하다. 이게 윗세대들의 치밀한 직조에 의한 결과라면 무섭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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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09-09-16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 졸업한 대학생이라면 한번쯤 해봤음직한 생각이지요.
하지만 딱히 불만을 터뜨린다거나 행동은 하지 않고 서식을 기입하는 가련한 20대입니다.

우리학교는 서식 기입하고, 1만원 내고(!!) 1년 출입 가능했었어요. 전 다행히(?) 여분으로 학교다니는 동안 10만원 내고 졸업연장신청해놨기 때문에 이런 걱정 안했지만, 친구들의 불만은 대단했지요. 정말 대학은 기업이었고, 우린 그 체제에 속절없이 적응할 수밖에 없었구나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바밤바 2009-09-17 19:27   좋아요 0 | URL
ㅎ 사회적 약자니 어쩔 수 없지요~ 근데 졸업 연장신청이란 제도도 있나요? 신기한데요~ㅋ

비로그인 2009-09-17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신 글을 읽으니, 대학을 다니던 시절 이석우라는 분이 쓰신 "대학의 역사" 를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서양에서 대학이라는 형태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변했는지를 정리한 책이죠?

조금 중간 설명을 제거하고 말씀드리면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체제를 성립하는 과정 속에서 교육체제에 있어 유럽보다는 미국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프래그머티즘, 간단히 말해 실용주의의 과도한 수용으로 인한 과성찰의 부재가 지금의 기업형 대학의 형태를 만든 한 원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가끔 서울의 몇몇 캠퍼스를 가보곤 하는데, 점점 좋은 의미에서 대학의 굳건한 울타리가 없어지는 것 같아 아쉽더군요.

바밤바 2009-09-17 19:30   좋아요 0 | URL
대학도 사회적 흐름에 따라가기 위해 그러는 거 같아요. 우리나라는 이러한 흐름에 대한 성찰 대신 순응하고 그 흐름의 선두자가 되려는 성향이 강한거 같아요. 모두가 모두를 믿지 못해서인지.. 각개약진 공화국이란 강준만 교수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ㅎ
 

 

 어제 SBS시사토론을 봤다. 보려고 본 건 아니고 그냥 티비를 돌리다 봤다. 재범에 관한 이야기였다. 패널로 개성 있는 4명이 나왔다. 평소 비호감이던 변희재씨가 말을 잘 해서 조금 놀랐다. 황상민 교수는 마인부우를 연상시키는 외모와 귀여운 웃음으로 분위기를 잘 리드했다. 탁현민씨는 대중을 고려하지 않은 듯한 발언으로 다소 겉도는 느낌이었다. 전여옥씨는 여전히 남에 말 안 듣던데 그래도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황상민 교수의 발언 중 인터넷 상의 대중과 오프라인 상의 대중이 다르다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평소 인터넷에서 보이는 일방적 여론에 놀아나는 지인이 많았다. 네이트에 보면 찬성 글이 몇 개니, 다음 베스트 댓글이니 하며 말이다. 기실 인터넷에서 형성된 여론은 다소 즉자적이고 무책임한 구석이 많다. 황 교수가 어제 언급한 짝퉁 국가주의처럼 위선을 떨거나 위악을 떠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황 교수와 개인적으로 친하다는 모 기자는 농담 삼아 황 교수가 사이비라고 했는데 그의 넉넉한 외모와 말투를 보니 학자보다는 옆집 아저씨 같았다. 그래서 그의 의견이 더 와 닿았다. 사회학과 교수라 그런지 대인 지능이 높아 보였다.

 더욱 놀라운 건 몇 시간 까지 나랑 영어 스터디를 하던 넘이 티비에 나왔다는 거다. 오늘 아침에 같이 어딜 가기로 했는데 새벽 1시에 거기 패널로 앉아 있었다. 의견 표명도 했다. 인터넷 여론을 전체 여론으로 파악하는 대중이 문제라는 요지의.. 그 뒤에 바로 다른 여자 아이가 말을 했는데 별 신경 쓰지 않았더랬다. 근데 그 넘이 아침에 내게 말하길 그 여자는 바로 그 넘의 여자친구였단다. 수고비로 5만원 받았는데 목동에서 명륜동까지 야간 할증 붙은 택시 타고 와서 만 오천원 남았다더라. 걔가 4기 토론단으로 뽑혀서 매주 금욜마다 목동 갈건데 그 택시비는 어이할건지. ‘결혼은 미친짓이다’에 나온 엄정화 말 마따나 택시비보다 여관비가 싸게 치겠다. 음.. 여튼 그 넘은 방송 출연 탓인지 아침 약속에 늦었다. 그리고선 내가 좋아하는 체리 코크를 내밀었다. 아.. 재범이가 다시 돌아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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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산도스 30주년 기념 음반 : 마일스톤즈 [한정판 30 FOR 4]
백스 (Arnold Bax) 외 작곡, 톰슨 (Bryden Thomson) 지휘, Anth / Chandos / 2009년 6월
평점 :
절판


낯설어서 좋다. 익숙하지 않은 음악은 이렇 듯 설렘을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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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만에 음반을 샀다. 산도스 30주년 기념 음반과 8월의 크리스마스 OST다. 산도스 음반은 처음 듣는 곡이 많아 좋았다. 아직 다 듣진 못했지만 낯선 곡들의 아름다운 향연은 귀를 흥겹게 했다. 루이 로르띠의 쇼팽 에뛰드 음반이 중복된 것 말고는 겹치는 CD가 없는 것도 맘에 든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내가 좋아하는 허진호 감독의 영화다. 내가 신입생 때 이 영화를 봤는데 심은하가 사진관 유리창을 깨는 장면에서 난 울고 말았다. 그 간절한 그리움이 슬펐기 때문이었다. 둘이 오토바이를 타는 장면, 부끄러운 듯 팔짱을 끼는 장면 들이 기억에 남는다. 특히 그 잔잔한 음악이 영화의 깊이를 배가시킨 듯하다. 가벼운 깊이가 느껴진 이 형용모순의 영화는 내게 그렇게 특별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허진호의 봄날은 간다이다. 다들 내가 이 영화를 내 인생의 영화로 꼽으면 다소 의외라는 반응이다. 그렇게 감성적인지 몰랐다는 말도 덧붙인다. 내가 기실 사람 앞에 가벼이 처신하고 잘 웃는 건 그냥 그게 편해서다. 고고하고 깊이 있는 척하는 모양새도 싫어서다. 봄날은 간다는 그런 내 색깔에도 잘 맞는 영화인 듯하다. 조용히 귀를 갖다 대면 어디선가 대나무 숲의 노래가 들릴 것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 만든 영화가 봄날은 간다가 아닐까 한다.

 그이가 너무 보고 싶어 서울에서 강릉까지 한달음에 달려가는 그 설렘이란 잔잔하면서 여전히 가슴 뛰는 울림을 준다. 남 몰래 옛 연인의 차를 긁어놓는 유치한 질투의 표정은 사뭇 안타까워 손발이 오그라들게 한다. 둘이 있었던 산사의 대 숲 소리는 푸름의 시각으로 더 선명하고 할머니가 차려 준 고봉밥의 까슬까슬한 밥알은 그 푼푼함이 배보다 마음을 먼저 채운다. 자고 가라는 추파는 나도 모르게 볼을 붉게 하고 내가 라면으로 보이냐는 투정은 이별의 전조인 듯하여 아프다. 헤어지잔 그이의 말에 힘없이 내가 잘할께라 답한 상우의 먹먹함은 무릎이 시리고 발을 저리게 한다. 할미 가슴에 안겨 그이 못 잊었다 우는 아이 같던 모습에 그리도 봄날은 갔더랬다. 

 다시 산도스 음반을 듣는다. 존 윌리엄스의 영화 곡 모음. 가볍다 할 수 없는 선율의 흐름이 창 밖 빗소리마냥 제 존재를 알린다. 나도 그이 보고파 한달음에 택시타고 먼 길 떠나는 상우가 되고 싶다. 어둑새벽을 가르고 그이를 보듬고 싶다. 상글상글 웃으며 그이 볼 부비고 싶다. 그러고 보면 아직 내 봄날은 오지 않았다. 가을이 한창인 지금의 풍경에도 나는 오지 않은 봄을 기다린다. 바드름히 모자 쓴 쇠라의 그림처럼 점점이 빛 날 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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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시(市) 간 통합 바람이 거세다. 우선 정부에서 이러한 통합을 반기기 때문일 테다. 관청 수를 줄여 예산을 절감하고 행정 효율성이 향상된다는 이유에서다. 도지사나 시장도 이러한 통합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후에 중앙 정부에 진출하기 위해 미리 호감을 사기 위해서일 테다. 보수언론에서도 이러한 흐름을 찬성하고 있다. 마치 공기업 통폐합 바람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모양새다.

 하지만 시는 기업이 아니다. 규모의 경제가 주는 이익 뒤에 숨겨진 폐해를 살펴야 한다. 우선 시가 통합되어 시청이 하나가 되면 시민의 접근성이 떨어진다. 이렇게 되면 시민의 시정참여가 자연적으로 어려워진다. 결과적으로 지방자치의 효율이 떨어져 중앙집권 성향이 강화될 우려가 크다. 무엇보다 지방자치의 역사가 얼마 되지 않아 중앙권력 견제가 어려운 게 우리 현실이다. 효율을 목적으로 이전의 중앙집권으로 돌아가는 것은 역사적 퇴행으로 볼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지방행정기관은 정부의 명을 받아 그대로 집행하는 기관이었다. 자체적으로 정책을 입안하는 권한과 능력이 거의 없었다. 지금도 도 자치단체장의 명칭으로 사용하는 도지사의 ‘知’란 원래 중앙정부가 할당한 임무를 대행한다는 뜻이다. 고려와 조선에서는 왕이 즉위한 뒤에도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기 전까지 자신의 직함을 왕이 아닌 권지국사(權知國事)라 불렀다. 여기서 ‘지’도 도지사와 같이 국사를 잠시 맡아서 처리하는 직책이란 의미다. 동양은 고대 도시국가를 제외하곤 자치적 성격을 가져본 적이 없고 늘 중앙정부의 수직적 지휘와 감독을 받는 행정 도시였다.

 결국 지금의 시 간 통합은 이러한 중앙정부의 권력이 강했던 수백 년 전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무엇보다 중앙에 대한 집착이 강한 우리나라다. 실례로, KTX가 처음 생겼을 때 수도권 과밀화 현상이 완화 될 거란 전문가 예상이 많았다. 하지만 실제론 빨대효과로 인해 지방의 빈곤이 더 심해졌을 뿐이다. 강준만 교수가 ‘지방은 식민지다’에서 이야기 했듯 시 간 통합은 중앙이 지방을 수탈하는 체제를 더 간소화 할 뿐이다. 결국 서울 집중현상이 심화되고 지방의 공동화 현상은 가속화 될 테다.

 광역시와 맞먹는 규모의 시가 생기면서 서울로 진출하려는 지역민을 잡아두는 효과가 있다는 반론도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된다면 지방 내에서 또 다른 수탈자와 피수탈자를 나누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서울이 한국에서 행하는 패권주의를 잗다란 도시의 모둠체가 그들이 속한 지역에서 행하게 된다는 말이다. 결국 지역 자치제는 와해되고 또 다른 기득권만 탄생 시킬 테다.

 서양의 중세를 살펴보면 국가 보다는 도시를 중심으로 성장한 경우가 많았다. 킨들버거가 지은 ‘서양 강대국 흥망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피렌체나 베네치아는 이러한 도시 국가의 강성함을 잘 드러낸다. 물론 이러한 도시 국가의 발달이 중앙 집권을 기반으로 한 국가를 만드는데 애로사항으로 작용한 점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도시국가들은 유럽의 부활을 알리는 르네상스의 주역이 되었다. 또한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할 만큼 적은 인구 덕분에 시민의 자발적 정치적 참여를 낳았다. 이 뿐만 아니라 시민은 세금의 혜택을 직접적으로 누림으로써 납세자의 권리 행사를 가능하게 했고 권력자에 대한 견제가 가능케 했다.

 이러한 지방자치의 역사가 부재한 우리나라였기에 문민정부 들어서 지방자치를 통한 민주주의 발전을 추진한 것이다. 시 통합 열풍은 여전히 중앙정부에 예속돼 있는 지방의 서울 종속화 현상을 심화 시킬 테다. 효율이 최우선의 목표가 되는 시대는 포디즘이 저물며 예전에 끝났다. 현재는 포스트 포디즘 시대이고 삶의 질이 어느 때 보다 중요하다. 시대착오적 시 간 시 통합은 지양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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