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시(市) 간 통합 바람이 거세다. 우선 정부에서 이러한 통합을 반기기 때문일 테다. 관청 수를 줄여 예산을 절감하고 행정 효율성이 향상된다는 이유에서다. 도지사나 시장도 이러한 통합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후에 중앙 정부에 진출하기 위해 미리 호감을 사기 위해서일 테다. 보수언론에서도 이러한 흐름을 찬성하고 있다. 마치 공기업 통폐합 바람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모양새다.
하지만 시는 기업이 아니다. 규모의 경제가 주는 이익 뒤에 숨겨진 폐해를 살펴야 한다. 우선 시가 통합되어 시청이 하나가 되면 시민의 접근성이 떨어진다. 이렇게 되면 시민의 시정참여가 자연적으로 어려워진다. 결과적으로 지방자치의 효율이 떨어져 중앙집권 성향이 강화될 우려가 크다. 무엇보다 지방자치의 역사가 얼마 되지 않아 중앙권력 견제가 어려운 게 우리 현실이다. 효율을 목적으로 이전의 중앙집권으로 돌아가는 것은 역사적 퇴행으로 볼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지방행정기관은 정부의 명을 받아 그대로 집행하는 기관이었다. 자체적으로 정책을 입안하는 권한과 능력이 거의 없었다. 지금도 도 자치단체장의 명칭으로 사용하는 도지사의 ‘知’란 원래 중앙정부가 할당한 임무를 대행한다는 뜻이다. 고려와 조선에서는 왕이 즉위한 뒤에도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기 전까지 자신의 직함을 왕이 아닌 권지국사(權知國事)라 불렀다. 여기서 ‘지’도 도지사와 같이 국사를 잠시 맡아서 처리하는 직책이란 의미다. 동양은 고대 도시국가를 제외하곤 자치적 성격을 가져본 적이 없고 늘 중앙정부의 수직적 지휘와 감독을 받는 행정 도시였다.
결국 지금의 시 간 통합은 이러한 중앙정부의 권력이 강했던 수백 년 전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무엇보다 중앙에 대한 집착이 강한 우리나라다. 실례로, KTX가 처음 생겼을 때 수도권 과밀화 현상이 완화 될 거란 전문가 예상이 많았다. 하지만 실제론 빨대효과로 인해 지방의 빈곤이 더 심해졌을 뿐이다. 강준만 교수가 ‘지방은 식민지다’에서 이야기 했듯 시 간 통합은 중앙이 지방을 수탈하는 체제를 더 간소화 할 뿐이다. 결국 서울 집중현상이 심화되고 지방의 공동화 현상은 가속화 될 테다.
광역시와 맞먹는 규모의 시가 생기면서 서울로 진출하려는 지역민을 잡아두는 효과가 있다는 반론도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된다면 지방 내에서 또 다른 수탈자와 피수탈자를 나누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서울이 한국에서 행하는 패권주의를 잗다란 도시의 모둠체가 그들이 속한 지역에서 행하게 된다는 말이다. 결국 지역 자치제는 와해되고 또 다른 기득권만 탄생 시킬 테다.
서양의 중세를 살펴보면 국가 보다는 도시를 중심으로 성장한 경우가 많았다. 킨들버거가 지은 ‘서양 강대국 흥망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피렌체나 베네치아는 이러한 도시 국가의 강성함을 잘 드러낸다. 물론 이러한 도시 국가의 발달이 중앙 집권을 기반으로 한 국가를 만드는데 애로사항으로 작용한 점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도시국가들은 유럽의 부활을 알리는 르네상스의 주역이 되었다. 또한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할 만큼 적은 인구 덕분에 시민의 자발적 정치적 참여를 낳았다. 이 뿐만 아니라 시민은 세금의 혜택을 직접적으로 누림으로써 납세자의 권리 행사를 가능하게 했고 권력자에 대한 견제가 가능케 했다.
이러한 지방자치의 역사가 부재한 우리나라였기에 문민정부 들어서 지방자치를 통한 민주주의 발전을 추진한 것이다. 시 통합 열풍은 여전히 중앙정부에 예속돼 있는 지방의 서울 종속화 현상을 심화 시킬 테다. 효율이 최우선의 목표가 되는 시대는 포디즘이 저물며 예전에 끝났다. 현재는 포스트 포디즘 시대이고 삶의 질이 어느 때 보다 중요하다. 시대착오적 시 간 시 통합은 지양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