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 여행 - 놀멍 쉬멍 걸으멍
서명숙 지음 / 북하우스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제주의 바람은 드셌다. 비는 온몸을 훑고선 내 옷을 적셨다. 발은 눅눅하고 몸은 무거웠다. 뒤 따르는 친구 둘은 비에 젖은 안경 때문인지 흐릿했고 앞길은 빗물로 자욱했다. 그 길을 걷는 다른 이들도 있었지만 난 고독했고 외로웠기에 황홀했다. 파도는 바위를 삼킬 듯 넘실대고 가끔 멀리 떠 있는 섬조차 잡아먹을 듯 보였다. 바닷길 따라 하염없이 걷다보면 닿지 못할 그곳에 닿을 것 같았다. 제주 올레 둘째 날은 그리도 험했다.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 무작정 걷는 걸음에 어깨는 무거웠지만 머리는 상쾌했다. 바다 냄새가 코끝에 아른거릴 때엔 기운을 돋우는 살가움도 있었다. 그랬다. 나는 제주를 다녀오고선 더 단단해지고 여물어졌다. 파란 페인트로 화살표가 돼 있는 돌담을 이정표 삼아 나는 제주 올레를 걸었더랬다. 내 마음을 걷고 제주를 품었더랬다.

 제주 올레를 만든 이가 쓴 글이다. 물론 그 혼자 만들진 않았다. 세종대왕 혼자 한글을 창제하지 않았듯 말이다. 하지만 세종의 리더십과 의지를 한글 창제 논공행상의 으뜸으로 쳐야 할 테다. 그만큼 한 명의 투철한 노력과 선견지명이 중요하다. 서명숙씨도 마찬가지다. 제 몸을 유쾌히 던져 맺힌 길을 풀어냈다. 그녀는 제주에서 나고 제주에서 컸지만 서울에서 삶을 꾸렸다. 사람 냄새가 너무 짙은 서울에서 그녀는 아파했다. 시사저널 편집장으로 일했던 그녀지만 고향이 그리웠나 보다. 고향에서 핍진한 몸을 달래며 마음을 추스렸다. 덕분에 그녀의 몸은 한결 나아졌다고 한다. 제주의 보살핌을 받은 덕에 베풂의 미덕을 알았고 세상에 돌려주기로 했다. 그 결과가 제주 올레다. 그녀의 결심이 서지 않았던들 제주 올레는 차후에도 생기지 않았을 테다.

 책은 고백의 언어로 그득하다. 그녀는 올레를 만드는 일에 온전히 제 글품을 쏟아내진 않는다. 그녀의 과거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씨줄과 날줄을 이루며 예쁜 옷을 자아낸다. 이 예쁨은 여성적 아름다움이라기 보단 누이의 따스함이나 이모의 정겨움 같은 거다. 글을 따라가다 보면 올레의 탄생 비화를 알기 전에 그녀를 알게 되고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 그녀의 글은 마음을 사뿐히 즈려밟는 향을 내고 마음을 눅인다. 향수보단 자연에서 나는 그런 향취다. 켜켜이 쌓이는 그녀에 대한 공감과 애정은 글을 푼푼하게 만드는 힘이다. 미소가 절로 난다.

 올레를 만들기 위해 애썼던 크고 작은 시간에 대한 묘사는 큰 울림을 주진 못한다. 다만 그 길을 다시 걷고 싶게 마음을 동하게 한다. 내가 걸었던 그 길에 이런 속사정이 숨어있었냐며 반갑고 유쾌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문화유산이 아닌 자연에게도 적용될지는 몰랐다. 다시 그 길을 걸으면 또 새로운 감정이 마음을 간질일 듯하다.

 중국의 대문호 루쉰은 ‘고향’이란 단편에서 이런 말을 했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누군가 먼저 땅위를 가고 그 뒤를 쫓는 이들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라고 불리어진다. 누군가 희망이라는 길을 가면 모두가 그 길을 따라 가게 된다.-

 적당히 클리셰 하지만 언제나 일정한 아취를 풍기는 말이다. 서명숙의 올레는 루쉰의 아포리즘이 가장 아름답게 현실화된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녀가 밟았던 길을 오늘도 수많은 사람이 걸었을 테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올레가 다시 그리웠고 보고팠다. 대부분의 올레꾼들이 그럴 테다. 나을 수 없는 상사병을 안겨 준 올레를 만들어 준 서명숙에게 고맙단 말을 하고 싶다. 걸음이 주는 유쾌한 다독임이 아직도 생생하다. 다만 이 책은 올레를 갈 때마다 새롭게 읽힐 듯하다. 고전이 아닌 책이 입체적 감정을 자아낸다는 건 이 책만의 매력일 테다. 걸으멍 쉬멍 간세다리로 나는 오늘도 앞에 놓인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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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동안 쇼팽을 들었다. 나를 클래식으로 이끌었던 야상곡이다. 일명 녹턴이다. 바렌보임의 연주가 처음 구입한 앨범이었으나 후엔 피레스의 연주를 자주 들었다. 피레스의 연주는 화사했다. 잔향이 가득했고 울림은 청아했다. 지나치게 울리는 경향이 있었으나 낭만적 릴리시즘은 그런 지나침을 가려줬다.

 어제도 피레스의 연주를 들었다. 어제의 연주는 너무 야했고 화장이 짙었다. 예쁘지만 너무 화사했기에 마음을 눅이기 보단 가슴이 뛰었다. 스치기만 해도 붉음이 손에 묻어날 것처럼 지분거리는 꽃 같았다. 꽃의 향은 짙었기에 본능을 동하게 하였지만 마음을 끌진 못했다. 어릴 때 좋아했던 연주였지만 지금은 너무 짙은 치장 때문에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그제 밤에 들은 프랑소와의 연주는 달랐다. 그는 페달을 자주 밟는 듯 잔음이 울리지 않았고 한곡 한곡이 개성이 있었다. 한명의 연주자가 제 마음에 충실하여 작품을 연주하 듯 빛깔이 달랐고 색은 건조했다. 트릴을 이용한 자잘한 반주는 물리지 않는 소리를 냈고 손은 가벼이 움직이는 듯했다. 콧대 높은 여인네의 싸늘한 매력이 물씬 풍기는 연주였다.

 프랑소와를 듣는 동안 핍진한 마음은 기댈 곳을 찾았고 가리워진 길은 제 속살을 비쳤다. 잔약한 신경은 한올한올 제 쉴 곳을 찾았으며 뒤엉킨 생각은 무뎌진 채로 침강했다. 피레스를 들었을 땐 조금 우울했고 달빛은 보지 않아도 눈에 아른거렸으며 설레고 또 흥분됐다. 마음을 가눌 길 없어 새벽을 달리는 저 나이 드신 어르신들 마냥 발품을 팔고 싶기도 했다. 같은 곡에서 이리도 다른 느낌을 받은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더디고 사위어가는 시간은 눅눅함과 화사함으로 제 갈 길을 잃은 채 나와 밤을 함께했다.

 쇼팽은 가시 돋친 장미처럼 조심스런 아름다움이다. 짙은 향과 지나친 붉음은 나를 오라 유혹하지만 쉬이 몸을 내주지 않는다. 10대 때 만든 곡과 만년에 만든 곡이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이 가녀린 천재는 여자였을지도 모른다. 신윤복이 그러하듯 쇼팽 또한 후세의 상상을 자극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남장을 즐겨했다는 조르쥬 상드와의 연애는 이런 가설이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추게 한다. 녹턴의 향에 취하고 야상곡의 선율이 마음을 할퀴어서인지 말이 과했다. 폴리니의 야상곡 연주를 제외하곤 다들 매혹적인 가시가 있다. 오늘 밤 달빛은 지난밤보다 더 고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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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10-28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샹송 프랑소와.. 앞으로 그런 개성넘치는 연주자를 만나기란 참 힘들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끔 과도한 루바토에 제멋대로 프레이징을 늘려 해석하는 듯 하지만 한 발 멀리 떨어져 들으면 작품과 해석에 대한 일종의 주관 같은거라는,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 않나 합니다.
DG 111주년 박스에 피레스의 쇼팽을 넣은 건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 요즘 아르바이트는 잘 하고 있으시죠?

바밤바 2009-10-28 12:42   좋아요 0 | URL
알바는 내일 끝날 것 같습니다 ^^;; 프랑소와는 얼굴도 멋지게 생긴거 같아요~ㅎ
 

 

 알바가 끝나간다. 여러 사람을 만나며 많은 생각을 했다. 생각의 끝은 다 부질없더라도 생각한 시간만은 값졌다. 여물어진 자신을 만날 수 있었다. 말을 꾸미려 하지 말고 실팍한 사람이 돼야겠단 생각도 했다. 뒤늦은 깨우침이다.

 오늘은 친구를 만났다. 기자다. 프레시안이란 인터넷 언론사다. 기자협회에 가입이 안 돼 있는 회사라고 한다. 기실 친구가 나를 만난 건 취재를 위해서였다. 다른 친구 몇 명과 함께 이 20대 백수 생활에 대한 썰을 풀었다. 최근 유행하는 ‘롤러코스터’라는 CJ넷의 프로그램에서 착안한 기사라 했다. 헌데 여인네들이 인터뷰를 거부하여 내 주위 친구들만 인터뷰를 했다. 다 남자였다.

 이야기의 내용은 각각이었다. PD를 준비하는 친구는 10시에 일어나 야구를 보고 인터넷을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고 했다. 다른 친구는 아침에 일어나 과일을 먹고선 고향에서 어머니가 부쳐 주신 반찬과 함께 점심을 먹는다 하였다. 다른 후배는 40분 만에 기업 원서를 하나 쓰는 데 거의 매일 원서를 쓴다고 했다. 서류 통과 율은 20프로를 약간 넘는다고 했다.

 내 일상은 그 친구도 잘 알아서인지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싸이월드에 일기를 자주 쓰는 걸 하나의 ‘야마’로 잡고 기사를 쓴다고 했다. 싸이에 일기를 안 쓴지 좀 되었지만 그냥 그러라고 했다. 물론 내 실명은 기사에 나가지 않는다 하였다. 취재원 보호 차원이란다.

 연봉이 2000도 안 되는 그 친구에게 치킨 두 마리를 뜯어 먹고선 각자 흩어졌다. 나와 내 친군 좀 더 남아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는 우석훈과 진중권의 이야기를 하며 나와 생각을 나눴다. 우석훈은 질문에 대한 엉뚱한 대답을 자주하며 진중권은 글로 낚시질을 잘한다는 등의 이야기였다. 친구가 기자다 보니 내 질문이 더 많았다. 친구는 프레시안 기자가 20명 정도라 분위기가 화목하다고 했다. 자신은 마음 편하게 글만 쓸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했다. 또한 회사의 수익구조는 독지가들의 지원과 네이버 뉴스캐스트 수익이 대부분이라 했다. 올해 기자가 되었기에 더 자세한건 모른다 말했다. 그리고선 자기 회사 사장이 중앙일보 출신이란 얘기와 기형도에 관한 이야기, 또한 강준만과 변희재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피디를 지망하는 친구가 대화에 끼였다. 그는 올해 MBC 서류가 되지 않아 꽤나 상심이 큰 상태였다. 기업원서를 쓰는 자신에게서 왠지 모를 서글픔을 느꼈으며 대안학교 교사로 일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좌파이자 아나키스트인 그 친구의 결정에 나는 ‘지행합일’의 본보기라며 추어올렸고 친구는 상긋 웃으며 말을 아꼈다.

 우리는 말을 하다 왜 방송국 시사프로그램은 사람을 불편하게 하느냐는 주제에 닿았다. 기자인 친구는 그런 불편함이 그 방송의 특징이고 그것 정도는 감내해야 사람의 의식에 영향을 준다는 말을 했다. 나는 좀 더 상큼한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며 소기의 목적을 위해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방송이 되기 위한 고민이 필요하다 하였다. 피디를 지망하는 친구는 자신이 항상 해왔던 고민이라며 소설이나 영화가 위대한 점 중 하나는 거대담론을 자연스레 사람에게 전달한다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다 ‘지붕 뚫고 하이킥’에 대한 찬사를 서로 나눴다.

 대화 도중 진보신당 진성당원인 ‘빨갱이’형이 대화에 참여했다. 그는 빨갱이지만 순둥이이고 여리며 귀엽다. 모두가 그를 좋아한다. 여튼 그는 대안 학교 이야기가 나오자 강화도에 자신이 아는 지인들이 대안학교를 꾸리고 있다며 친구에게 추천해 주었다. 우리는 ‘월미도’ 북파 공작원마냥 작업 기술 가르쳐주는 데 아니냐며 농을 던졌고 그 형은 푼푼히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기자를 준비하는 그 형은 사회부 기자가 되고 싶다며 ‘쌍용차 사태’와 같은 사안을 취재하고 싶다고 말을 하다 전화가 와서 대화가 끊겼다. 그리고서 우리는 헤어졌다.

  삶은 구접스러운 데 우리의 이야기는 밝았으며 가슴은 허한데 대화는 알찼다. 말은 내가 제일 많이 한 듯한 데 이야기를 정리하다 보니 내 얘긴 별로 없다. 말이 가벼워 대화가 넘치다 보니 남은 말이 없나 보다. 다만 찬바람을 많이 쐬었더니 몸이 으슬으슬 하다. 몸을 보살펴야겠다. 신종 플루가 내 또래의 사람도 죽였다 하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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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세어보니 올해 읽은 책이 100권이 넘었다. 매 해 백 권이 넘는 책을 읽어왔으나 올해는 그 깊이와 두께가 다르다. 우선 읽은 책 중 삼분지 일 정도는 서평을 썼다. 무엇보다 읽은 책이 그리 만만한 책이 아니었다. 작년과 재작년엔 영화나 음악에 편식된 독서를 했다. 특히 작년엔 오쿠다 히데오를 좋아라하여 그의 이름으로 국내에 출판된 책을 전부 다 읽었다.

 올해도 비슷한 양상을 띤 작가가 있긴 하다. 김영하가 그 주인공인데 그의 소설을 거짓 다 읽었다. 김훈의 소설은 모두 다 읽었고 출판한 소설이 많지 않은 김애란의 책도 다 읽었다. 김연수의 책은 그 겉과 속의 알 수 없음이 독서를 지난하게 한 바, 몇 권만 읽고 말았다. 강준만이 올 해 낸 책은 다 읽어 보았다. 9월에 나온 책은 지인에게 부탁하여 빌리려 했으나 그 자식이 사보타주를 일삼는 바람에 아직 보지 못했다. 조만간 볼 참이다.

 로쟈님이 쓰신 책은 며칠 간 학교 도서관을 방문했으나 오프라인에는 없고 온라인에는 있다고 표시가 돼 있다. 친구 학생증으로 책을 빌리는 입장이라 당당하게 책의 부재를 탓할 수 없기에 내일도 발품을 팔아야겠다. 그 외에 남경태 씨가 쓴 책들은 올 해 베스트 독서 목록에 꼽을 만하다. 물론 정치하지 못한 문장과 조금 지나친 주관은 경계해야겠으나 그의 저술이 지닌 장점을 가리진 못한다.

 특이 사항은 ‘인물과 사상’이란 월간지가 올해 내 맘에 쏙 들었다는 거다. 특히 전성원(바람구두)님이 쓰신 일련의 글들은 공을 들인 티가 팍팍 나는 바, 매우 흡족하였다. 강준만이 꾸준히 연재하는 하나의 키워드로 한국사 바라보기 부문은 미시사로 거시사를 쉽게 풀어낸 바, 이 또한 매우 좋았다. 중간 중간 나오는 예술과 철학 부문에 관한 글도 좋았고 수유 너머의 연구원이 쓴 글은 어느 정도 편차가 있었다. ‘19금 경제학’의 저자 조준현이 쓴 부문은 쉬이 동의하기 어려운 프레임들로 인해 이 책의 옥의 티라 명명할 수 있겠고 지강유철씨가 하는 인터뷰 부문도 다소 편파적이라 맘에 차지 않았다.

 작년에 비해 경제학 관련 서적을 덜 읽었는데, 이것은 신문을 매일 2시간 정도 열독하고 주간지 몇 개를 꾸준히 보아온 봐, 말로 풀어내는 경제가 다 거기서 거기란 나름의 결론 때문인 듯하다. 몇 개의 철학 책은 정신을 살찌워 심히 까칠한 본인을 만드는 데 기여했으며 가벼이 읽었던 예술 관련 서적은 이전에 읽었던 책과 별 다를 바 없어, 하늘 아래 새로운 게 없다는 진리를 재확인 시켰다. 아래에 내가 꼽은 올해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을 놓아둔다. 아직 두 달이 넘게 남은 올해이기에 무엇인가를 으뜸과 버금으로 꼽는 일이 시의부적절할 수 있으나 별다른 책이 나올 것 같진 않다. 오늘 자소서 하나를 공들여 썼더니 머리가 아프다. 낼 알바 때문에 자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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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세상이 보였다. 속살이 보이고 가려진 살갗이 보였다. 신기했다. 재미도 있었다. 더 공부하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의 구조를 보는 눈이 한결 밝아졌다. 일종의 ‘난 니들이 모르는 것도 알아’라는 오만도 생겼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이런 허랑방탕한 공부는 이제 그만하라 한다. 정신을 차리라며 타박도 가한다. 좀 더 밥벌이와 바투 이어져 있는 일에 매진하라 한다.

허나 그들의 불민함을 탓하며 종종 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들의 세속성은 비루해보였고 나의 형이상학은 정당해 보였다. 밥벌이는 덜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이번 겨울을 나는 일이 쉽지 않다. 남들보다 더 많은 걸 알고 더 많이 연구했다. 이런 결과는 부당하다. 하지만 그런 푸념은 덧없는 옹알이다. 그랬다. 인문학을 공부할수록 내가 알게 된 세상은 매트릭스와 같은 것이었다. 매트릭스를 알게 된 누군가처럼 나는 홀로 긍정하고 홀로 위선을 떨고 있었다.

영화 매트릭스에선 불만을 품은 인물이 나온다. 극 중 이름은 사이퍼다. 예수의 제자 중 유다를 상징한다고도 한다. 한마디로 배신자다. 사이퍼는 매트릭스의 실체를 알게 되었지만 삶은 비루해졌고 마음은 심란하다. 매트릭스의 실체를 알게 된 덕택에 죽밖에 먹을 수 없는 현실 때문이다. 그는 스미스 요원을 만나 매트릭스에서의 부귀영화를 꿈꾼다. 어차피 삶이란 내가 보는 것이 실체고 진실이기 때문이다. 매트릭스 속 삶은 실제보다 또렷하고 부유하다. 무엇이 진실인지 명확하지 않을 정도다. 사이퍼가 네오를 팔아넘기고 기계의 부속물로 돌아가려는 이유다.

이런 사이퍼를 비난하는 건 정당하다. 헌데 김규항은 그의 저서 ‘예수전’에서 사이퍼의 모태인 유다를 긍정하려 애쓴다. 추구하는 목적이 달랐기에 예수를 배신했다는 거다. 물론 개인적 번뇌도 작용한다. 영화 속 사이퍼는 이런 해석을 덧붙이기 어려울 만큼 비열해 보인다. 그래도 그의 선택은 어느 정도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 네오라는 메시아의 존재를 오롯이 믿기 어렵고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려는 모피어스가 무모해보였을 테다. 결국 끝을 알 수 없는 고난의 행군보단 현실적 행복을 택하려 한 거다. 



 

 

 

 

 

  

기실 많은 사람이 사이퍼와 같은 선택을 할 것 같다. 예수를 따랐던 유다나 모피어스를 따랐던 사이퍼처럼 몇 년을 고생하다 보면 자신의 신념에 회의가 들 테다. 그렇기에 이들은 자신의 배신을 배신이라 하지 않고 닿지 않을 말로 정당화 할 테다. 방어기제의 소산이다. 우리도 유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거창한 일이 아니라도 우리는 일상에서 모순된 모습 종종 보이고 사소한 배신을 부지불식간에 범한다.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으며 선지자처럼 행동하는 사람은 자신이 행하는 미시파시즘에 둔감하다. 다음이나 각종 블로그에 글을 쏟아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글은 피를 토하고 세상의 곧지 않음에 호흡마저 거칠어 지지만 상사의 부당한 명령엔 쉬이 허리를 굽힌다. 세상이 잘못 돌아가는 것 같지만 일단 자기가 살고 볼일이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하지만 좀 더 부자가 되고 나서의 문제다. 큰 정의를 위해선 사소한 비도덕은 용납된다. 비겁한 사이퍼의 선택에 돌을 던질 수 없는 이유다.

그 외 사람은 세상을 알고 싶지도 거대 구조를 파악하는데 시간을 쏟고 싶지도 않다. 결국 매트릭스에서 각개약진하며 제 몸을 살찌우고 종족 번식에 힘쓰며 타인을 짓밟는 게 최선의 전략이다.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매트릭스의 실체를 모르고 사는 게 그들의 행복에 더 도움이 된다. 인문학을 안다고 해서 네오와 같은 힘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단지 매트릭스의 부당한 구조만 알게 될 뿐이다. 자신이 먹는 스테이크가 제3세계 산림을 파괴하는 주범이란 사실을 알고 죄책감을 느낄 뿐이고 나이키 운동화도 제3세계 어린이의 노동 착취의 결과라 마음이 무거워질 뿐이다. 결국 인문학을 통해 세상을 알게 되었지만 마음만 더 아프고 세상에 대한 역겨움만 심해진다. 차라리 매트릭스의 실체를 모르던 예전의 삶이 아름다울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몇몇은 이런 매트릭스의 실체를 알면서도 안정된 밥벌이를 하고 푼푼한 인생을 즐길 테다. 그런 사람일수록 매트릭스의 실체를 알리는 데 힘쓰고 또 그로 인해 생계를 꾸려나간다. 지식인의 제 살 파먹기다. 최상위에 자리 잡은 자본가들의 행태는 더 심하다. 자신이 매트릭스의 노예인지도 모른 채 스스로가 ‘아키텍처’라 생각하며 서민 위에 군림한다. 매트릭스에 저항하는 반군세력은 또 다른 유다가 되거나 최저 임금 노동자로 전락해 버린다. 가끔은 불에 타죽거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요원에 의해서 제거된다. 매트릭스는 갈수록 두터워지고 그 실체는 끊임없이 변형되기에 알 수도 없다. 수천 명의 네오가 튀어나와도 현재의 매트릭스를 부수긴 어려울 듯하다.

가끔은 이런 현실이 꿈이었으면 하는 때가 있다. 노동자로 편입하자니 하나의 부속품이 되는 것 같고 독야청청 하려니 사회의 낙오자가 될 것 같다. 이렇듯 매트릭스는 불안을 자양분 삼아 더 단단해지고 자발적으로 매트릭스의 노예가 되는 개인 덕분에 더 공고해진다. 나 또한 매트릭스의 실체를 알려고 노력했던 시간을 매트릭스 속 승리자가 되기 위해 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런 번뇌는 마음을 병들게 하고 유다의 선택을 동경하는 결과마저 낳는다.

조용미 시인이 이야기 했듯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번뇌가 깊을수록 매트릭스는 더 실팍해진다. 공부를 할수록 그 두터움을 살갗을 파고든다. 매트릭스를 그나마 좀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선 다양한 방안이 나와야 한다. 헌데 연대하기엔 집단의 전체주의가 거북하고 각개약진 하기엔 심약한 마음을 가눌 길 없다. 글귀로 마음을 눅이고 핍진한 영혼을 달랜다.

헌데 매트릭스가 붕괴된 후 네오는 행복했을까? 권력 투쟁이 더 치밀해진 인간 사회의 속살을 보고선 절망하진 않았을까? 그저 매트릭스 속의 미스터 앤더슨으로 살던 시절이 좋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까.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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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3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25 1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24 0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25 11: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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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9-10-24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트릭스가 붕괴됐었나요? 스미스와 빙빙돌며 올라갔다 떨어졌다하다가 네오가 이긴 것 같긴 하던데.
오래전에 봐서..??

현실에는 은폐되어 있는 것들이 많지만 현상계 자체를 일종의 허구, 또는 가상의 매트릭스라는 플라톤적 관점으로는 보지 않는 편이라서...^^ 영화는 후반부로 갈 수록 노골적으로 기독교와 플라톤의 결합을 보여주데요...

근데 매트릭스가 붕괴되었어요?

바밤바 2009-10-25 11:03   좋아요 0 | URL
매트릭스 붕괴되었던거 같은데.. 오라클이랑 아키텍쳐가 뒤에 하는 말을 보면.. 확실히는 잘 모르겠네요 ㅋ 공부를 안하고 생각나는 대로 쓴 글이라 명쾌하지 않네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