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세상이 보였다. 속살이 보이고 가려진 살갗이 보였다. 신기했다. 재미도 있었다. 더 공부하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의 구조를 보는 눈이 한결 밝아졌다. 일종의 ‘난 니들이 모르는 것도 알아’라는 오만도 생겼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이런 허랑방탕한 공부는 이제 그만하라 한다. 정신을 차리라며 타박도 가한다. 좀 더 밥벌이와 바투 이어져 있는 일에 매진하라 한다.
허나 그들의 불민함을 탓하며 종종 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들의 세속성은 비루해보였고 나의 형이상학은 정당해 보였다. 밥벌이는 덜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이번 겨울을 나는 일이 쉽지 않다. 남들보다 더 많은 걸 알고 더 많이 연구했다. 이런 결과는 부당하다. 하지만 그런 푸념은 덧없는 옹알이다. 그랬다. 인문학을 공부할수록 내가 알게 된 세상은 매트릭스와 같은 것이었다. 매트릭스를 알게 된 누군가처럼 나는 홀로 긍정하고 홀로 위선을 떨고 있었다.
영화 매트릭스에선 불만을 품은 인물이 나온다. 극 중 이름은 사이퍼다. 예수의 제자 중 유다를 상징한다고도 한다. 한마디로 배신자다. 사이퍼는 매트릭스의 실체를 알게 되었지만 삶은 비루해졌고 마음은 심란하다. 매트릭스의 실체를 알게 된 덕택에 죽밖에 먹을 수 없는 현실 때문이다. 그는 스미스 요원을 만나 매트릭스에서의 부귀영화를 꿈꾼다. 어차피 삶이란 내가 보는 것이 실체고 진실이기 때문이다. 매트릭스 속 삶은 실제보다 또렷하고 부유하다. 무엇이 진실인지 명확하지 않을 정도다. 사이퍼가 네오를 팔아넘기고 기계의 부속물로 돌아가려는 이유다.
이런 사이퍼를 비난하는 건 정당하다. 헌데 김규항은 그의 저서 ‘예수전’에서 사이퍼의 모태인 유다를 긍정하려 애쓴다. 추구하는 목적이 달랐기에 예수를 배신했다는 거다. 물론 개인적 번뇌도 작용한다. 영화 속 사이퍼는 이런 해석을 덧붙이기 어려울 만큼 비열해 보인다. 그래도 그의 선택은 어느 정도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 네오라는 메시아의 존재를 오롯이 믿기 어렵고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려는 모피어스가 무모해보였을 테다. 결국 끝을 알 수 없는 고난의 행군보단 현실적 행복을 택하려 한 거다.
기실 많은 사람이 사이퍼와 같은 선택을 할 것 같다. 예수를 따랐던 유다나 모피어스를 따랐던 사이퍼처럼 몇 년을 고생하다 보면 자신의 신념에 회의가 들 테다. 그렇기에 이들은 자신의 배신을 배신이라 하지 않고 닿지 않을 말로 정당화 할 테다. 방어기제의 소산이다. 우리도 유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거창한 일이 아니라도 우리는 일상에서 모순된 모습 종종 보이고 사소한 배신을 부지불식간에 범한다.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으며 선지자처럼 행동하는 사람은 자신이 행하는 미시파시즘에 둔감하다. 다음이나 각종 블로그에 글을 쏟아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글은 피를 토하고 세상의 곧지 않음에 호흡마저 거칠어 지지만 상사의 부당한 명령엔 쉬이 허리를 굽힌다. 세상이 잘못 돌아가는 것 같지만 일단 자기가 살고 볼일이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하지만 좀 더 부자가 되고 나서의 문제다. 큰 정의를 위해선 사소한 비도덕은 용납된다. 비겁한 사이퍼의 선택에 돌을 던질 수 없는 이유다.
그 외 사람은 세상을 알고 싶지도 거대 구조를 파악하는데 시간을 쏟고 싶지도 않다. 결국 매트릭스에서 각개약진하며 제 몸을 살찌우고 종족 번식에 힘쓰며 타인을 짓밟는 게 최선의 전략이다.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매트릭스의 실체를 모르고 사는 게 그들의 행복에 더 도움이 된다. 인문학을 안다고 해서 네오와 같은 힘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단지 매트릭스의 부당한 구조만 알게 될 뿐이다. 자신이 먹는 스테이크가 제3세계 산림을 파괴하는 주범이란 사실을 알고 죄책감을 느낄 뿐이고 나이키 운동화도 제3세계 어린이의 노동 착취의 결과라 마음이 무거워질 뿐이다. 결국 인문학을 통해 세상을 알게 되었지만 마음만 더 아프고 세상에 대한 역겨움만 심해진다. 차라리 매트릭스의 실체를 모르던 예전의 삶이 아름다울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몇몇은 이런 매트릭스의 실체를 알면서도 안정된 밥벌이를 하고 푼푼한 인생을 즐길 테다. 그런 사람일수록 매트릭스의 실체를 알리는 데 힘쓰고 또 그로 인해 생계를 꾸려나간다. 지식인의 제 살 파먹기다. 최상위에 자리 잡은 자본가들의 행태는 더 심하다. 자신이 매트릭스의 노예인지도 모른 채 스스로가 ‘아키텍처’라 생각하며 서민 위에 군림한다. 매트릭스에 저항하는 반군세력은 또 다른 유다가 되거나 최저 임금 노동자로 전락해 버린다. 가끔은 불에 타죽거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요원에 의해서 제거된다. 매트릭스는 갈수록 두터워지고 그 실체는 끊임없이 변형되기에 알 수도 없다. 수천 명의 네오가 튀어나와도 현재의 매트릭스를 부수긴 어려울 듯하다.
가끔은 이런 현실이 꿈이었으면 하는 때가 있다. 노동자로 편입하자니 하나의 부속품이 되는 것 같고 독야청청 하려니 사회의 낙오자가 될 것 같다. 이렇듯 매트릭스는 불안을 자양분 삼아 더 단단해지고 자발적으로 매트릭스의 노예가 되는 개인 덕분에 더 공고해진다. 나 또한 매트릭스의 실체를 알려고 노력했던 시간을 매트릭스 속 승리자가 되기 위해 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런 번뇌는 마음을 병들게 하고 유다의 선택을 동경하는 결과마저 낳는다.
조용미 시인이 이야기 했듯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번뇌가 깊을수록 매트릭스는 더 실팍해진다. 공부를 할수록 그 두터움을 살갗을 파고든다. 매트릭스를 그나마 좀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선 다양한 방안이 나와야 한다. 헌데 연대하기엔 집단의 전체주의가 거북하고 각개약진 하기엔 심약한 마음을 가눌 길 없다. 글귀로 마음을 눅이고 핍진한 영혼을 달랜다.
헌데 매트릭스가 붕괴된 후 네오는 행복했을까? 권력 투쟁이 더 치밀해진 인간 사회의 속살을 보고선 절망하진 않았을까? 그저 매트릭스 속의 미스터 앤더슨으로 살던 시절이 좋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까.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