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 쇼팽을 들었다. 나를 클래식으로 이끌었던 야상곡이다. 일명 녹턴이다. 바렌보임의 연주가 처음 구입한 앨범이었으나 후엔 피레스의 연주를 자주 들었다. 피레스의 연주는 화사했다. 잔향이 가득했고 울림은 청아했다. 지나치게 울리는 경향이 있었으나 낭만적 릴리시즘은 그런 지나침을 가려줬다.

 어제도 피레스의 연주를 들었다. 어제의 연주는 너무 야했고 화장이 짙었다. 예쁘지만 너무 화사했기에 마음을 눅이기 보단 가슴이 뛰었다. 스치기만 해도 붉음이 손에 묻어날 것처럼 지분거리는 꽃 같았다. 꽃의 향은 짙었기에 본능을 동하게 하였지만 마음을 끌진 못했다. 어릴 때 좋아했던 연주였지만 지금은 너무 짙은 치장 때문에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그제 밤에 들은 프랑소와의 연주는 달랐다. 그는 페달을 자주 밟는 듯 잔음이 울리지 않았고 한곡 한곡이 개성이 있었다. 한명의 연주자가 제 마음에 충실하여 작품을 연주하 듯 빛깔이 달랐고 색은 건조했다. 트릴을 이용한 자잘한 반주는 물리지 않는 소리를 냈고 손은 가벼이 움직이는 듯했다. 콧대 높은 여인네의 싸늘한 매력이 물씬 풍기는 연주였다.

 프랑소와를 듣는 동안 핍진한 마음은 기댈 곳을 찾았고 가리워진 길은 제 속살을 비쳤다. 잔약한 신경은 한올한올 제 쉴 곳을 찾았으며 뒤엉킨 생각은 무뎌진 채로 침강했다. 피레스를 들었을 땐 조금 우울했고 달빛은 보지 않아도 눈에 아른거렸으며 설레고 또 흥분됐다. 마음을 가눌 길 없어 새벽을 달리는 저 나이 드신 어르신들 마냥 발품을 팔고 싶기도 했다. 같은 곡에서 이리도 다른 느낌을 받은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더디고 사위어가는 시간은 눅눅함과 화사함으로 제 갈 길을 잃은 채 나와 밤을 함께했다.

 쇼팽은 가시 돋친 장미처럼 조심스런 아름다움이다. 짙은 향과 지나친 붉음은 나를 오라 유혹하지만 쉬이 몸을 내주지 않는다. 10대 때 만든 곡과 만년에 만든 곡이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이 가녀린 천재는 여자였을지도 모른다. 신윤복이 그러하듯 쇼팽 또한 후세의 상상을 자극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남장을 즐겨했다는 조르쥬 상드와의 연애는 이런 가설이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추게 한다. 녹턴의 향에 취하고 야상곡의 선율이 마음을 할퀴어서인지 말이 과했다. 폴리니의 야상곡 연주를 제외하곤 다들 매혹적인 가시가 있다. 오늘 밤 달빛은 지난밤보다 더 고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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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10-28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샹송 프랑소와.. 앞으로 그런 개성넘치는 연주자를 만나기란 참 힘들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끔 과도한 루바토에 제멋대로 프레이징을 늘려 해석하는 듯 하지만 한 발 멀리 떨어져 들으면 작품과 해석에 대한 일종의 주관 같은거라는,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 않나 합니다.
DG 111주년 박스에 피레스의 쇼팽을 넣은 건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 요즘 아르바이트는 잘 하고 있으시죠?

바밤바 2009-10-28 12:42   좋아요 0 | URL
알바는 내일 끝날 것 같습니다 ^^;; 프랑소와는 얼굴도 멋지게 생긴거 같아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