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재미없는 이야기도 웃으면서 들어주곤 했다. 상글상글 웃으며 능동적인 피드백을 하면 상대는 기분이 좋아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곤 했다. 헌데 상황이 바뀌었다. 이젠 재미없는 이야기엔 시큰둥하거나 재미없다는 표시를 낸다. 그러고선 또박또박 내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 재미없는 이야기의 허술한 연결고리나 얕은 생각을 지적하며 말을 맺으려 한다. 그러다 보면 종종 버성긴 사이가 되곤 한다. 그래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예전에 띄었던 미소가 약자의 굴종 같은 느낌이었다는 걸 얼마 전에 느꼈기 때문이다.
사람 사이에 뭔가 불편하단 이야기를 하긴 참 어렵다. 말은 최대한 완곡하게 하는 게 세련되고 어른스런 방법이다. 말에 당의정을 씌우지 않으면 쓰디 쓴 말은 상대를 해하고 내 평판을 침식한다. 이런 숨김이 일상화되다 보니 사람들은 완곡어법이 직설법보다 익숙해졌나 보다. 그런 레토릭의 향연을 깨트려 대중에게 쾌감을 주는 사람이 김구라다. 그는 욕을 많이 먹기도 하지만 대리배설의 카타르시스도 준다. 싫은 걸 싫다고 얘기하기 힘든 세상에서 입바른 소리를 한다. 안다. 그것이 하나의 생존 방식이라는 걸. 그 방식을 상품화 하여 자신의 배를 채운다는 걸. 헌데 우리처럼 남의 눈치 잘보고 집단 관계에 민감한 이들이 이러한 생존 방식을 택하기란 쉽지 않다. 또한 언어의 표층에 가려진 심층부를 파헤치는 일도 녹록지 않은 일이다. 그런 면에서 김구라는 타인의 눈치를 덜 보는 두꺼운 낯짝과 말에 숨겨진 의뭉스러움을 잘 포착해내는 영걸이다. 대중이 그를 욕하지만 그의 존재를 브라운관에서 계속 보고 싶어 하는 이유다.
한 달 전 국감에선 김구라의 막말에 대한 지적이 제기 되었다. 그의 막말이란 일상의 거칢과 교양 있는 자들이 두루 쓰는 언어의 사이에 위치한다. 막말이라기엔 언중이 입말에서 두루 쓰는 사소한 말들이다. 어려운 법률용어가 난립하지만 실상과 괴리 된 그들의 궁전과 다른 친근함이 있다. 국회의 사소한 지적이 근천스럽다.
그는 누구도 건드리지 않는 부분을 즈려밟고선 너스레를 떤다. 뒷담화에서나 나올 말한 저렴한 언어들이 시간을 메운다. 공인의 감추고 싶은 욕망을 해체하고선 대중의 관음증을 채운다. 실로 무례한 딴따라라 하겠다. 헌데 이 딴따라를 추종하고 욕하는 대중의 양면성은 사회의 부정교합을 여실히 드러내는 하나의 지표다. 서로 닿지 않을 듯 드잡이를 하다가도 손에 땀이 찰 듯 악수를 하는 이들이 세상엔 득실거린다. 이러한 양면성을 추악하다 비판하지만 그들의 권력엔 굴종하고 그 처세를 쉬이 따라하는 대중의 되바라진 욕망이 김구라라는 캐릭터에 응집돼 있다. 국회는 그의 막말이 진실보다 더 흡입력 있는 세상의 환부를 살펴야 한다. 그게 세금 쥐어주며 국민이 시킨 일이다. 혹 국민이 어리석어 언질을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라 생각하는 일에만 열중하는 그들이 해야 할 일이다.
예의 없음과 가식은 참으로 용납 못할 역겨운 일이지만 자신의 논리를 가지고 둘 중 하나의 가치에 충실한 자는 아름다워 보일 때가 있다. 내겐 김구라가 그러하다. 어느 가치에 충실하지 못하고 섭슬리는 무리들 밥그릇 챙겨주기 바쁜 이는 참으로 비루하다. 말은 많으나 세상에 닿지 않고 뜻은 좋으나 그 방법이 옳지 않은 이들은 김구라에게 손가락질해선 아니 되겠다. 도덕에도 층위가 있고 사람에게도 위계가 있다면 당히 그러해야 한다. 그들의 던적스런 삶은 스스로를 삿대질하고 제 불민함을 탓하는 데 쏟아야 한다. 편치 않은 자들을 몇몇 대하고 나니 마음이 어지럽다. 말이 두서없다. 내게도 김구라 같은 이가 곁에 있었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