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만 해도 세상은 붉었다. 빨간 낙엽은 흐드러지게 길을 메웠다. 산을 찾는 이도 길에 놓인 이도 지천인 붉음에 감탄하며 발을 떼곤 했다. 헌데 붉음이 시나브로 사위어 간다. 겨울바람 때문이다. 불이 소화기에 이지러지듯 낙엽은 바람에 푸슬푸슬해 간다. 바람은 한결 매섭다. 옷깃을 여미는 사람들도 이제 바스락 거리는 낙엽이 마뜩찮다. 발길에 지분거리는 이 죽은 잎들이 겨울을 준비하라며 마음을 몰아세운다.

쇼팽의 겨울바람도 마찬가지다. 쉬이 몰아치는 선율이 마음을 서늘하게 한다. 시원하게 몰아치는 경향도 있으니 기저엔 서늘함이 깔려 있다. 그의 연습곡 작품 25의 11번이 그 주인공이다. 아쉬케나지의 연주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데카 특유의 울림이 강조된 녹음이지만 아쉬케나지답지 않게 스산함을 준다. 텅 빈 허공에 미만한 피아노 소리가 겨울을 쉬이 연상케 한다. 폴리니의 단단한 연주도 좋다. 기계적이란 소리를 자주 듣지만 너무나 명쾌한 기교에 대한 반어적 찬양으로 봐도 되겠다. 무뚝뚝하고 강한 타건이 겨울마냥 가슴을 움츠리게 한다. 세밀하지만 강한 쇼팽이다. 그래도 가장 좋아하는 건 루이 로르띠의 화사한 연주다. 보티첼리의 그림이 연상되는 봄바람이 넘실댄다. 겨울바람도 봄의 들머리엔 조금은 따스한 속살을 내포할지 모른다. 그런 따스함이 묻어난다. 마냥 볼에 닿아도 시리지 않을 바람이다. 로르띠만의 개성이다. 



 

 

 

 

 헌데 로르띠의 곡을 듣고도 가슴이 시릴 이가 있을 테다. 제 밥벌이를 못해 겨울을 서러워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일거리를 찾아 제 가슴에 불을 지피며 열정을 북돋웠던 이들이다. 헌데 경제 한파는 열망을 눅이고 절망을 추어올린다. 속은 타들어 간다. 밤을 지새우기 일쑤다. 열정은 삭히고 끌탕은 심해진다. 한파가 못내 원망스럽다. 손톱을 깨문다.

러시아 철학자 라로슈푸코는 이런 말을 했다. ‘촛불은 작은 바람에 꺼지고 횃불은 더 활활 일 듯, 이별은 작은 열정을 꺼트리고 큰 열정을 키운다.’ 속이 웅숭깊은 자는 스스로를 다독여 이 한파에도 제 열정을 더 뜨겁게 키울 테다. 촛불처럼 잔약한 이가 있다면 잠시 마음을 녹여줄 그리운 이에게 마음을 의탁할 일이다. 혹은 자늑자늑 세상을 둘러보다 보면, 제 마음을 누르던 돌덩이가 가뭇없이 사라질 테다. 물론 다시 골방에 들어서면 마음을 누르는 근천스런 현실이 또 보인다. 그럴 땐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을 듣고선 잔약한 신경에 힘을 불어 넣어 주자. 새의 지저귐도 나뭇잎의 서걱거림도 듣지 못했을 귀 먹은 악성(樂聖)이 들려주는 음악의 향연. 한 때의 귓병으로 스스로를 저버리려 했던 자의 음악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건 역경이 가져다 줄 축복을 보여주는 사례일 듯하다. 쇼팽의 겨울바람은 마음에 시린 재촉을 가하고 베토벤의 전원은 조금은 쉬어가라며 가슴을 눅여준다. 오늘 바람은 어제보다 더 차다. 바람이 너울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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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11-11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 피아노 연습실에서 이 "겨울바람" 을 끊임없이 연습하던 한 여학생이 생각나네요. 그때는 고등학생이었는데 지금은 뭐하고 있으려나.. 궁금해지네요.

겨울바람은..저는 치프라의 연주를 잊을 수 없구요~

바밤바 2009-11-12 14:23   좋아요 0 | URL
치프라의 연주는 리스트의 초절정기교 연습곡 외엔 들어본 적이 없네요. ㅎ
엊그제 소골로프의 겨울바람을 들었는데.. 소골로프가 본좌인듯 합니다. ㅎ
 


세상엔 불필요한 말이 많다. 말의 불필요함은 필연적으로 군더더기를 낳고 이해를 어렵게 한다. 엊그제 친구 이름으로 빌린 책을 반납할 때의 이야기다. 밤 10시가 넘었기 때문에 무인 반납기로 책을 넣었다. 무인 반납기 위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반납하신 책은 익일(다음 날) 처리됩니다.’

다음 날이란 말만 쓰면 가로 표시를 할 필요가 없거늘 굳이 익일이란 한자말을 써서 부가 설명을 낳게 했다. 게다가 익일(翌日)이란 말 자체는 요즘 사어(死語)에 가깝다. 그야말로 말의 낭비다. 입말에서의 군더더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글말에서의 이러한 군더더기는 이해하기 힘들다. 혹 내 글에도 이런 군더더기가 있는지 헤아릴 일이다. 밤에 두서없이 생각이 많아져 짧은 생각을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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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트릭트 9 - District 9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디스트릭트 9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아파르트헤이트가 고갱이를 이루고 관계의 비루함을 역설한다. 이 영화가 주목을 끈 데는 다양한 정치적 해석이 가능한 텍스트가 큰 역할을 했다. 헌데 정치보다 개인의 무력함이 슬프다. 씨네 21에서 이야기한 다양한 담론에도 불구하고 사위어가는 실체는 꾸준히 마음을 불편케 한다. 사람이 얼마나 구접스러울 수 있는지 영화는 이야기 한다. 아니, 그렇게 읽었다. 디스트릭트 9은 슬픈 영화다. 외계인과 섹스를 했다는 누명보다 그 말을 믿는 아내 덕에 아픈 남자의 이야기다. 카프카의 소설이 생각나지만 생각보다 역겨운 외계인의 형체에 오히려 쉬이 잊혀질 영화다.

이 영화가 재미없다는 사람은 다소 말을 잘못한 거다. 이 영화는 불편하다. 사람들은 불편한 것도, 힘든 것도, 피곤한 것도 다 재미없다는 말로 압축시킨다. 디스트릭트 9이 보여주듯 세상은 짧은 말로 명쾌해질 공간이 아니다. 얇게 저민 오징어 회가 입맛을 돋우 듯 조심스런 언어만이 남루한 세상을 명료하게 한다. 이 영화는 많은 이야기가 겹겹이 엉켜있다. 굳이 알렉산더의 용기를 빌려 이 엉킨 실타래를 풀자면 결론은 이런 거다.

‘나는 나를 증명치 못하면 나로서 살 수 없기에 나는 주변과의 관계에서만 규정지어지는 미약한 영장류일 뿐이다. 그게 나를 슬프게 한다. 삶이 허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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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재미없는 이야기도 웃으면서 들어주곤 했다. 상글상글 웃으며 능동적인 피드백을 하면 상대는 기분이 좋아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곤 했다. 헌데 상황이 바뀌었다. 이젠 재미없는 이야기엔 시큰둥하거나 재미없다는 표시를 낸다. 그러고선 또박또박 내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 재미없는 이야기의 허술한 연결고리나 얕은 생각을 지적하며 말을 맺으려 한다. 그러다 보면 종종 버성긴 사이가 되곤 한다. 그래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예전에 띄었던 미소가 약자의 굴종 같은 느낌이었다는 걸 얼마 전에 느꼈기 때문이다.

사람 사이에 뭔가 불편하단 이야기를 하긴 참 어렵다. 말은 최대한 완곡하게 하는 게 세련되고 어른스런 방법이다. 말에 당의정을 씌우지 않으면 쓰디 쓴 말은 상대를 해하고 내 평판을 침식한다. 이런 숨김이 일상화되다 보니 사람들은 완곡어법이 직설법보다 익숙해졌나 보다. 그런 레토릭의 향연을 깨트려 대중에게 쾌감을 주는 사람이 김구라다. 그는 욕을 많이 먹기도 하지만 대리배설의 카타르시스도 준다. 싫은 걸 싫다고 얘기하기 힘든 세상에서 입바른 소리를 한다. 안다. 그것이 하나의 생존 방식이라는 걸. 그 방식을 상품화 하여 자신의 배를 채운다는 걸. 헌데 우리처럼 남의 눈치 잘보고 집단 관계에 민감한 이들이 이러한 생존 방식을 택하기란 쉽지 않다. 또한 언어의 표층에 가려진 심층부를 파헤치는 일도 녹록지 않은 일이다. 그런 면에서 김구라는 타인의 눈치를 덜 보는 두꺼운 낯짝과 말에 숨겨진 의뭉스러움을 잘 포착해내는 영걸이다. 대중이 그를 욕하지만 그의 존재를 브라운관에서 계속 보고 싶어 하는 이유다.

한 달 전 국감에선 김구라의 막말에 대한 지적이 제기 되었다. 그의 막말이란 일상의 거칢과 교양 있는 자들이 두루 쓰는 언어의 사이에 위치한다. 막말이라기엔 언중이 입말에서 두루 쓰는 사소한 말들이다. 어려운 법률용어가 난립하지만 실상과 괴리 된 그들의 궁전과 다른 친근함이 있다. 국회의 사소한 지적이 근천스럽다.

그는 누구도 건드리지 않는 부분을 즈려밟고선 너스레를 떤다. 뒷담화에서나 나올 말한 저렴한 언어들이 시간을 메운다. 공인의 감추고 싶은 욕망을 해체하고선 대중의 관음증을 채운다. 실로 무례한 딴따라라 하겠다. 헌데 이 딴따라를 추종하고 욕하는 대중의 양면성은 사회의 부정교합을 여실히 드러내는 하나의 지표다. 서로 닿지 않을 듯 드잡이를 하다가도 손에 땀이 찰 듯 악수를 하는 이들이 세상엔 득실거린다. 이러한 양면성을 추악하다 비판하지만 그들의 권력엔 굴종하고 그 처세를 쉬이 따라하는 대중의 되바라진 욕망이 김구라라는 캐릭터에 응집돼 있다. 국회는 그의 막말이 진실보다 더 흡입력 있는 세상의 환부를 살펴야 한다. 그게 세금 쥐어주며 국민이 시킨 일이다. 혹 국민이 어리석어 언질을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라 생각하는 일에만 열중하는 그들이 해야 할 일이다.

예의 없음과 가식은 참으로 용납 못할 역겨운 일이지만 자신의 논리를 가지고 둘 중 하나의 가치에 충실한 자는 아름다워 보일 때가 있다. 내겐 김구라가 그러하다. 어느 가치에 충실하지 못하고 섭슬리는 무리들 밥그릇 챙겨주기 바쁜 이는 참으로 비루하다. 말은 많으나 세상에 닿지 않고 뜻은 좋으나 그 방법이 옳지 않은 이들은 김구라에게 손가락질해선 아니 되겠다. 도덕에도 층위가 있고 사람에게도 위계가 있다면 당히 그러해야 한다. 그들의 던적스런 삶은 스스로를 삿대질하고 제 불민함을 탓하는 데 쏟아야 한다. 편치 않은 자들을 몇몇 대하고 나니 마음이 어지럽다. 말이 두서없다. 내게도 김구라 같은 이가 곁에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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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시험이 있다. 가벼운 시험이지만 마음은 무겁다. 시험 전날은 이 무게감을 이기지 못해 방황하곤 한다. 여기서 방황이란 늦잠을 자거나 우두커니 티비만 보는 현상을 말한다. 놀자는 친구의 재촉도 한번 보자는 지인의 연락도 시험이란 이유로 거절한다. 그리고선 밀실에서 침강한다. 굳이 번잡하지도 않은 하루인데 마음은 애먼 데만 두드리곤 혼자 쉴 곳을 찾는다. 공부도 놀이도 다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니 오늘 하루도 다 지난 거다. 왠지 아쉽다.

덕분에 몇 곡의 음악을 들었다. 생각은 단정한데 마음이 번잡하니 브루크너가 좋을 듯했다. 평소 한 번도 집중해서 듣지 않았던 3번과 6번 또 9번을 듣는다. 명상에 적합한 선율이 흐른다. 듣다보니 유장한 흐름은 졸음을 유발하고 성긴 멜로디는 집중력을 저해한다. 애써 마음을 다잡으려 하지만 낼 셤을 두고도 허랑히 보내는 마음이 여투어 둔 씀씀이가 있을 리 만무하다. 또 다시 다 듣지 못하고 설핏 잠이 들었다.

선잠은 깨었지만 음악은 계속된다. 보통 풋잠이 깨고 나면 정신이 명료해지기 마련이다. 헌데 브루크너는 사람을 대중없이 수마(睡魔)에 빠트린다. 잠을 이기려 딴 생각을 한다. 얼핏 든 생각은 브루크너가 바그너보다 더 독일스럽지 않냐는 잡념이었다. 독일스럽다는 느낌은 히틀러가 이야기한 아리안적이면서도 헤겔의 절대정신이 응축돼 있는 사상이라고 본다. 헤아림이 모자라니 이런 편파적인 생각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리고선 과한 관현악과 두터운 오케스트라가 공간을 메운다. 그러다 또 졸았다.

친구가 전화가 왔다. 잠이 깼다. 친구 이름으로 예약한 책이 학교 도서관에 도착했단다. 알바비로 산 패딩 점퍼를 거치고 밖에 나선다. 10만원이 넘게 들었다. 뿌듯하다. 브루크너는 계속 울리고 있다. 물론 중간에 음반을 몇 번 갈아 끼우긴 했다. 브루크너 음악은 오르간 연주를 연상시키고 슈만은 피아노 소나타를 연상시킨다는 데 브루크너의 특정 교향곡은 유독 지겹다. 4번과 7번외에 전곡을 다 들어 본 기억이 없다. 물론 4번과 7번은 매우 좋아하는 교향곡들이다. 카라얀의 말년 연주가 특히 마음에 든다.

오늘 하루는 첼리비다케의 브루크너 교향곡 같이 느적느적한 하루가 될 듯하다. 그래도 어제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마음은 슬겁다. 그 따스함을 안고 발을 뗀다. 김연수의 글을 빨리 읽어야겠다.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할 계절이 사위어 간다. 조금 더 마음을 재촉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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